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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존 스토트의 멸절설 비판

존 스토트의 멸절설 비판
신학지남 1996년 봄호(03월 발행 )
권호정보 Vol.246, No.1996 봄 
수록 페이지 1 - 34 
레코드번호 SHJN003782 
학술지코드 TH01SHJN01 
초록(글 구분) 
목차 존 스토트의 멸절설 비판
존 스토드의 멸절설 개요
Ⅰ. 멸망어휘에 근거한 논증
1) 스토트의 주장
2) 스토트의 주장에 대한 반론
Ⅱ. 지옥불 심상에 근거한 논증
1) 스토트의 주장
2) 스토트의 주장에 대한 반론
Ⅲ.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한 논증
1) 스토트의 주장
2) 스토트의 주장에 대한 반론
Ⅳ. 보편주의적 구절에 근거한 논증
1) 스토트의 주장
2) 스토트의 주장에 대한 반론
Ⅴ. 조건적 불멸에 근거한 논증
1) 논증
2) 반론
Ⅵ. 결론 
존 스토트의 멸절설 개관(개정판)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1.2.5.와 1.2.6.입니다.
목차
0. 서론을 대신하여
0.1. 스토트의 주장
0.2. 권성수의 논문
1. 내용
1.1. 배경
1.2. 해설
1.2.1. 출처(원전)
1.2.2. 스토트의 전제
1.2.3. 스토트의 감정
1.2.4. 스토트의 태도
1.2.4.1. 성서적 기반 추구
1.2.4.2. 잠정적 입장 견지
1.2.5. 스토트의 주장-소멸설(멸절설)
1.2.6. 스토트의 논거
1.2.6.1. 언어
1.2.6.2. 심상
1.2.6.3. 공의
1.2.6.4. 보편주의
2. 평가-하나의 해석 
2.1. 하나의 '해석'
2.1.1. 해석의 한계성
2.1.2. 비유(또는 상징)로 해석
2.2. '하나의' 해석-해석의 다양성
3. 결론

0. 서론을 대신하여

0.1. 스토트의 주장
전, 아직 이 문제가 부각되기 전에 이미 [자유주의자와의 대화]에서 그 진술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삼년 전인가에 스토트 아저씨가 직접 이에 대한 그의 우회적 진술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대전 모교회의 목회자 세미나에서). 한 목회자의 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미 이로 인해 심한 마음의 고생을 한 탓으로 짐작하는데-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더군요. "해석의 자유를 존중해주십시요." 

0.2. 권성수의 논문
전, -앤디 님이 추천하신- 권성수 교수의 논문 또한 몇 년 전에 읽었습니다. 한 마디로 허접합니다. 읽지 마십시오. 이런 글을 읽으면, 복음주의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를 하는데 방해받습니다(스토트의 진술 자체가 큰 활자로 10쪽 뿐이니까 그걸 직접 읽어보세요).

1. 내용

1.1. 배경
존 스토트의 멸절설은 실상 그의 발표 몇 년 전에 새로이 등장(아마도 재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토트가 이를 [자유주의자의 대화(ESSENTIALS: A liberalevangelical dialogue)], 6장 '세계를 위한 복음'에서 발표함으로써 영미 권의 주도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급속하게 보급되었습니다. 확산의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복음주의 권에서의 그의 영향력과 -실로 상대할 이가 없는- 그의 빼어난 요약 능력, 명쾌한 전달 능력에 기인한 것입니다. 

1.2. 해설

1.2.1. 원전(출처)
저는 영어 원서가 아니라, 단지 역서([자유주의자와의 대화], 황영철 역, 여수룬 간)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서 상으로는 제 3권 132-141쪽, (1) '지옥이란 무엇인가?'에 나와있습니다. 

1.2.2. 스토트의 전제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사용한 심상(불못과 바깥 어두운 데와 두 번째 죽음)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불과 어둠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132쪽)

1.2.3. 스토트의 감정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라는 견해가 견딜 수 없게 느껴[진다].(133쪽)

1.2.4. 스토트의 태도

1.2.4.1. 성서적 기반 추구
"헌신된 복음주의자로서 내가 질문하는 것은 그리고 질문하고 있는 것은---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134쪽)

1.2.4.2. 잠정적 입장 견지
소멸일지도 모른다(134쪽), 망설여진다(140쪽), 잠정적으로-견지, 적어도(141쪽)

1.2.5. 스토트의 주장-소멸설(멸절설)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134쪽)[은]---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1.2.6. 스토트의 논거

1.2.6.1. 언어
멸망이라는 어휘는 최종적인 파멸의 상태와 관련되어 자주 사용된다. 가장 일반적인 헬라어는 아폴루미(apollumi, 멸하다)와 아폴레이아(apoleia, 멸함)이다. 그 동사가 능동형 타동사일 때,'멸망시키다'는 '죽이다'를 의미한다. 죽이는 것이 몸에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면, 지옥은 신체적, 영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가 소멸되는 것으로 보인다. 중간태 타동사로 쓰일 때는 멸망하는 것과 그로 인한 '망함'을 의미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멸망의 과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이므로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으로 해결될 수 없다. 영혼의 불멸과 그에 따른 불멸성은 헬라적인 관념이지 성경적인 관념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불멸성을 가지신 분이며(딤전1:17;6:16), 그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불멸성을 나타내시고 주십니다(딤후1:10).

1.2.6.2. 심상
성경은 지옥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불의 심상을 사용한다. 불은 주된 기능은 고통의 유발보다는 멸망의 확보이다. 불 자체는 '영원한' 또는 '꺼지지 않는'이라는 수식을 받고 있지만 거기에 던져진 것이 영원히 멸망한다. 즉, 불못에 던져짐의 결과는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소멸이다.
-부가적으로, 스토트는 '불못'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네 가지 반론을 재 반박하는데, 그 중 두 번째가 위 양과 목자의 비유에 나오는 영생과 영벌의 대조이다. 그는 대조되는 것은 생명과 형벌의 영원성이지, 그 성격에 대한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즉, 영벌이 의식적인 영원한 고통이라고 읽어야 할 이유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영생은 의식적인 상태임을 요17:3에서 밝힌다).

1.2.6.3. 공의
일정 기간 동안에 의식적으로 범한 죄와 영원토록 의식적으로 겪는 고난 사이에는 심각한 불균형이 있다. 만일 잃어버린 자들의 회개하지 않음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의식적인 영원한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성경의 계시와 조화되는가?

1.2.6.4. 보편주의
회개하지 않는 자가 영원히 지옥에서 생존한다고 하는 것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 혹은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한, 보편구원론의 기초로 사용되어 왔던 본문들(요12:32, 엡1:10, 골 1:20, 빌2:10-11, 고전15:28)과 조화되기 힘들다. 물론, 이들 본문은 우리로 보편구원론으로 이끌 수 없는데, 이는 그 외의 많은 본문이 무시무시한 지옥의 실상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2. 평가-하나의 해석 

2.1. 하나의 '해석'

2.1.1. 해석의 한계성
멸절설이 하나의 '해석'이라 함은 이것이 잠정적인 견해이며, 신비 앞에 선 인간이 신비를 탐구해 가는 한 과정임을 의미한다. 어차피 우리로선 사후의 운명에 관한 논의를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모호한 상황에서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후 운명에 대한 해석의 한계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스토트가 취한 바처럼 성서에 대한 존중과 전통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른 동기로- 성서 위에 서고, 전통에 귀기울이면서 이 분야에 대해 언급한다면 우리는 이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 어차피 우리 또한 신비 앞에 마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이성과 경험을 확보한 인간이 구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다소 주변적인 측면에 속한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 모호함을 회피할 수는 없다.

2.1.2. 비유(또는 상징)로 해석
더욱이 성서 해석학을 포함한 신학(나아가서는 종교학과 종교철학)에서 종교 언어는 일반적으로 비유, 상징 등으로 이해된다. 궁극적, 불가시적인 대상을 다룰 때, 인간의 언어는 그 무력함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가, 궁극적인 대상과 연관된 자신의 지시 기능을 상징으로서 수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도 비유이다. 불못 비유도 상징임을 주목한다면, 이를 소멸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와 관련해서 로버트 스타인의 [예수님의 과장법 해석](새순 간)을 추천한다.

2.2. '하나의' 해석-해석의 다양성
멸절설이 '하나의' 해석이라 함은 이것이 가능성이 있는 여러 대안 중의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 또한 그의 해석이 잠정적임을 보여준다. 그는 불못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스토트 당사자는 분명 불못을 회개하지 않는 자의 소멸을 가리키는 그림 언어로 확신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여러 대안 중의 하나로 소멸설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할 뿐이지, 확정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다.
이는 비단 그가 고백한 바일 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어떤 난해한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은 필연적이며, 그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견해 가운데 설득력이 높은 것은 의당 높게 평가해주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3. 결론
스토트의 소멸설에 대한 논란은 1) 회개하지 않는 자의 자의 사후 운명이 영원한 형벌이라고 보는, 일반적인 전통이나, 2) 불못이나 둘째 죽음에 대한 심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보수적 입장에 기인한다. 1) 의 경우는 타당한 문제제기이나, 2)의 경우는 성서해석학상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토트가 이 견해의 발표를 주저한 것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1)의 탓이었으나, 실제로 그가 고초를 겪은 주요한 원인은 2)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토트의 소멸설 주장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과 비판적 사고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본인도 스토트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주장은 성서 해석상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는 하나의 주장임을 동의한다. 무엇보다 그의 주장은 그의 '잃어버린 영혼'(필자가 싫어하는 표현이지만...)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