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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영혼멸절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영혼멸절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장 두 만 (성서침신 교수/조직신학)
서 론
근자에 이르러 지옥 문제는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지옥은 참으로 존재하는가? 그 곳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나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저 주어지는 구원을 받지 않은 채 죽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구원받지 않고 죽은 사람이 가는 지옥은 불못으로서 영원한 형벌의 장소요, 분리의 장소요, 의식적 고통의 장소 (a place of conscious torment)요, 후회의 장소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이런 전통적인 지옥관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고, 견고하게 보이던 지옥문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John Stott
, Clark Pinnock, John Wenham, Michael Green, Stephen Travis, Philip Hughes, Edward Fudge 같은 학자들이 영혼멸절설(annihilationism)을 전통적인 지옥관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Clark Pinnock를 예로 들면, 그는 전통적인 지옥관에 대해서 정면 도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Let me say at the outset that I consider the concept of hell as endless torment in body and mind an outrageous doctrine, a theological and moral enormity, a bad doctrine of the tradition which needs to be changed. How can Christians possibly project a deity of such cruelty and vindictiveness whose ways include inflicting everlasting torture upon his creatures, however sinful they may have been? Surely a God who would do such a thing is more nearly like Satan than like God, at least by any ordinary moral standards, and by the gospel itself..... Surely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is no fiend; torturing people without end is not what our God does.
과연 전통적인 지옥관은 Clark Pinnock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나쁜 교리이고 야만적인 교리이며, 이 교리는 하나님을 악마나 사탄과 같은 사악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교리인가? 재미있는 것은, 철저한 무신론 철학자인 Bertrand Russell도 복음주의자로 자칭하는 Clark Pinnock와 마찬가지로 지옥 교리를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 복음주의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지옥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예수께서 이런 문자적인 지옥을 믿고 가르쳤다는 사실은 지존(至尊)의 성품을 가진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불신자가 예수 없이 죽어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는 교리는 결코 유쾌한 교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이면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 지옥에 관한 문제 전체를 다루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필자는 영혼멸절설을 중심으로 해서, 먼저 영혼멸절설에 대한 주요 논거를 살펴본 후에 이를 비판하고, 이어서 전통적인 지옥관이 여전히 가장 성경적인 지옥관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혼멸절설의 논거
영혼멸절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된 논거가 많지만 이를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적 논거, 신학적 논거, 보편론적 논거가 그것이다
언어적 논거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서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망한다" (απολλυμι; perish)는 단어나 "멸망"(απωλεια 또는 ολεθρος; destruction) 같은 단어들을 사용할 때 그 단어들을 문자적으로 망해서 소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cf. 빌1:28, 3:19; 살전 5:3; 살후 1:9; 히10:39; 벧후 3:7; 계17:8,11 등). 예를 들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는 구절에서, 하나님은 영혼을 문자적으로 멸해서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영혼은 불멸이 아니라고 말한다.
John Stott
는 이렇게 주장한다:
The vocabulary of 'destruction' is often used in relation to the final state of perdition. The commonest Greek words are the verb apollumi and the noun apoleia. When the verb is active and transitive, 'destroy' means 'kill,' as when Herod wanted to murder the baby Jesus and the Jewish leaders later plotted to have him executed (Mt 2:13; 12:14; 27:4)....If to kill is to deprive the body of life, hell would seem to be the deprivation of both physical and spiritual life, that is, extinction of being.
영혼멸절론자들이 주장하는 단어는 “멸망”이라는 단어 외에도 αιωνιος가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αιωνιος가 “생명”이라는 단어와 결합되어 사용될 때 그 생명은 항상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와 반대인 형벌도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영혼멸절론자들, 특히 Fudge는 이 부분에 대해서 강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αιωνιος의 의미와 연관된 Fudge의 주장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αιωνιος가 반드시 절대적인 영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Fudge는 Emmanuel Petavel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성경에서 적어도 70회 이상 αιωνιος이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영원이 아니라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시간임을 주장하고 있다. Fudge에 의하면, αιωνιος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수식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 한계 내에서의 무제한적인 시간”(unlimited time within the limits determined by the things it modifies)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Fudge는 αιωνιος의 개념 속에는 양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질적인 의미(qualitative sense)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αιωνιος를 종말론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αιωνιος는 때때로 영속적이라는 의미보다는 신적이라는 의미 (quality of being, almost meaning, 'divine' rather than enduring)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Fudge는 αιωνιος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와 함께 쓰이고 있는 경우에 주목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 (히 5:9), “영원한 구속” (히 9:12), “영원한 심판” (히 6:2), “영원한 죄” (막 3:29), ”영원한 형벌“ (마25:46), “영원한 멸망” (살후1:9) 등 여섯 가지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Fudge에 의하면, 이 모든 표현은 영원한 심판 및 그 결과와 연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을 예로 들면, 심판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 내지는 과정으로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곧 끝나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Fudge가 과정과 결과를 분리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영원한 형벌”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그는 그 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At the same time, the life and the punishment of this passage are never to end. They are "eternal" in the sense of everlasting. But we need to note, as in the five cases above, that "punishment" is an act or process. In each case so far, and indisputably in the first four, the act or process happens in a fixed period of time but is followed by a result that lasts forever. In keeping with that scriptural usage, we suggest that the "punishment" here includes whatever penal suffering God justly issues to each person but consists primarily of the abolition and extinction of the person forever. The punishing continues until the process is completed, and then it stops. But the punishment which results will remain forever.
Fudge가 행위와 그 결과를 분리하여 행위는 일시적이지만 결과는 영원하다는 주장을 계속 반복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영원한 결과가 결국 소멸로 귀착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영혼멸절론자들은 또한 지옥에 관한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지옥불의 이미지를 중요한 논거로 삼고 있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옥불” (마5:22; 18:9), “영원한 불” (마 18:8; 25:41), “불못” (계20:14-15) 등의 표현에서 불이라는 이미지는 영원한 고통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다 태워서 없애버리고 소멸시킨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고 죽어서 지옥에 들어간 영혼의 운명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태워져 없어지고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신학적 논거
영혼멸절론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해서 전통적 지옥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구원받지 않은 영혼의 궁극적 소멸을 주장한다.
John Stott
t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계20:12) 사람이 지은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주신다. 구약에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 21:23-25)라고 말함으로써 동등보복의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내에서 제한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 시간의 제한이 전혀 없는 영원한 고통을 준다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Pinnock는 무한자에 대해서 지은 죄는 무한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논박을 하면서 그런 논리는 중세시대에는 통했을는지 모르나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의사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 거지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큰 죄라는 논리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죄의 경중은 그 죄 때문에 피해당한 사람이 ㈀립커?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 자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자에 대한 범죄가 무한한 형벌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Pinnock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어서 영혼멸절설을 주장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이신데, 이런 아버지상이 어떻게 대적에게 영원한 복수를 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으며,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이 영원한 고통을 받을 만큼 크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 (bloodthirsty monster)로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Pinnock는 이렇게 반문한다: "Does the one who told us to love our enemies intend to wreck vengeance on his own enemies for all eternity?" 그에 의하면, 영원한 지옥 형벌은 아무런 목적도 성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Pinnock는 신정론 (theodicy)의 입장에서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반대하면서 영혼의 멸절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Antony Flew는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일부의 사람을 영원한 지옥 고통에 보낼 의도로 창조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변호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Pinnock는 이를 인용하면서 영원한 지옥형벌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변증을 절망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면에서는
John Stott
도 Pinnock와 견해를 같이 한다.
보편론적 논거
John Stott
를 비롯한 영혼멸절론자들은 자신들은 보편구원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특히
John Stott
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소망이며, 이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여러 차례의 경고와 상치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John Stott
를 비롯한 영혼멸절론자들은 보편구원론자들이 사용하는 ‘보편구원’에 관한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지옥은 궁극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현재의 인류의 역사는 끝이 나고 예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 그리고 만주의 주로 오심으로 우주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셔서 모든 무릎을 그 발 아래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하게 하실 것인데,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여전히 지옥에서 고통 중에 그를 거역하고 있다면, 이것은 영원한 우주론적 이원론으로서 예수께서 참된 승리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John Stott
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My point here, however, is that the eternal existence of the impenitent in hell would be hard to reconcile with the promises of God's final victory over evil, or with the apparently universalistic texts which speak of Christ drawing all men to himself (John 12:32), and of God uniting all things under Christ's headship (Ephesians 1:10), reconciling all things to himself through Christ (Colossians 1:20), and bringing every knee to bow to Christ and every tongue to confess his lordship (Philippians 2:10-11), so that in the end God will be 'all in all' or 'everything to everybody' (1 Corinthians 15:28).
영혼멸절설에 대한 비판
필자는 지금까지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을 간단히 고찰해 보았다. 이제 그들의 주장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그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언어적 논거에 대한 비판
1.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 가운데 “멸망”의 의미와 연관된 문제를 맨 먼저 다루도록 하겠다. 성경에 나오는 “망한다” “멸망”과 같은 단어가 그들의 주장과 같이 문자적인 소멸 내지는 멸절을 가리키는 단어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구약의 경우를 살펴보면, KJV에는 “멸망”“멸망하다”는 단어가 495회 나타나는데, 이는 50여개의 상이한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 50여개의 단어중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어느 단어도 소멸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구약 단어 중 “멸망하다”는 의미를 가진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아바드”(דבא)이다. 민수기 21:29에 보면,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고 했는데, 문맥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멸망”이라는 것은 나라가 망해서 외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무엘상 9:3,20에는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다니는 내용이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는 “아바드”가 소멸이 아니라 “잃어버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편 31:12에서는 “아바드”가 그릇 같은 것이 깨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απολλυμι나 απωλεια는 어떤가? 이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구절을 잘 분석해 보면 어떤 구절은 그 구절 자체만 떼어서 볼 때에 “멸절”이나 “소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혼멸절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같이 보이는 구절만 인용하고 있지 자신들의 주장과 강하게 반대되는 구절은 회피하고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오류이며, Donald A. Carson은 이런 식의 논증을 “selective and prejudicial use of evidence(편파적인 증거사용)”라 부르고 있다. 이런 논증의 오류를 증명하려면 명백한 반대구절 몇 개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απωλεια나 이의 파생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잃어버린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눅15:4,6,8,9,24,32). 마태복음 9:17에서는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어서 가죽부대가 “찢어져 못 쓰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가복음 14:4에서는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부은 향유를 “허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απωλεια나 이의 파생어는 아무리 강변한다고 하더라도 멸절이나 소멸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후서 1:9도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을 반증하는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 oi[tinej di,khn ti,sousin o;leqron aivw,nion avpo. prosw,pou tou/ kuri,ou kai. avpo. th/j do,xhj th/j ivscu,oj auvtou/(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기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단어는 전치사 απο이다. Fudge에 의하면. 이 단어는 issued from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the everlasting destruction issued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다시 말하면, 악한 자들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로부터 나오는 불에 의하여 태워져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헬라어 사전과 주석에서는 απο의 기본적인 의미가 “separation from someone or something”의 의미로서, "from" “away from”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멸망이란 주님의 면전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완전히 소멸된 자라면 “주님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απο에 대한 Fudge의 해석은 억지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타당성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재림하시는 주님의 얼굴에서부터 나오는 불에 태워져서 소멸된다는 주장은 성경 다른 구절의 가르침과도 상치된다. 요한계시록19:19-20에 의하면,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와 짐승의 군대가 싸워서 짐승의 군대가 패배한 후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 및 그의 추종자들이 잡혀 산 채로 유황 불못에 던지운다고 했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불에 의해서 직접 죽임을 당한다고는 말씀하고 있지 않다. 
요한계시록 17:8,11도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을 반증하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에서 “멸망”은 짐승, 즉 적 그리스도에게 예정된 운명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19:20에서 “산 채로 유황 불못에 던지우고”라고 했고, 20:7에서는 그들이 천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멸절되지 않고 불못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0에서는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몇 구절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짐승의 “멸망”은 소멸이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서의 영원한 고통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0:39도 영혼멸절론자들이 사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이 구절이 과연 영혼멸절설을 뒷받침하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 관해서 Fudg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Though the authors warns his reader repeatedly against apostasy or unbelief, he also reassures them time and time again with expression!!s of confidence that they will do what is right...."But we are not of those who shrink back and are destroyed," our author writes, "but of those who believe and are saved." As we have seen other places already, "destruction" here also is opposed to being "saved." This is the same word (apoleian) Paul so often used.
Fudge는 히브리서 10:39에서 구원과 멸망의 대조를 통해서 영혼의 소멸을 주장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본문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함으로써 참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은 뒤로 물러가 결국은 배도함으로 멸망 (avpw,leia)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리거나 멸망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멸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Fudge는 그것이 소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은 석의적으로 전혀 증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마태복음 7:13; 로마서 9:22; 빌립보서 1;28; 3;19; 디모데전서 6:19 등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의미, 즉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 심판받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2. 두 번째로 언어적 논거 가운데 αιωνιος와 연관된 문제를 검토하도록 하겠다. 먼저 알 것은, 영혼멸절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αιωνιος가 항상 “절대적 영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맥이 허용할 경우는 물론 Fudge의 주장대로 “그 단어가 수식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 한계 내에서의 무제한적인 시간”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면에서는 Fudge의 주장이 타당하다. 
αιωνιος의 개념 속에는 양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αιωνιος가 “divine”의 의미로 사용되는지는 심히 의문스럽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비록 질적인 개념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시간적인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αιωνιος의 질적인 개념을 증명한다 해도 그것이 곧 영혼멸절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Fudge는 αιωνιος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행동의 과정을 나타내기보다는 행동의 결과, 즉 소멸을 나타난다고 주장함으로 영혼멸절설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 그가 제시한 6개의 성경 구절을 검토하여 (마 25:46; 막 3:29; 히 5:9; 6:2; 9:12; 살후 1:9), αιωνιος가 항상 상대적인 영원이 아니라 절대적인 영원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임과 동시에 Fudge가 제시하는 여섯 구절은 행동의 결과, 즉 소멸을 말한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보이고자 한다.
먼저 마태복음 25:41,46절을 검토해보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1절에 의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불로 들어가야 되고, 46절에 의하면 영벌이 바로 41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불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46절에서는 영생과 영벌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kai. avpeleu,sontai ou-toi eivj ko,lasin aivw,nion( oi` de. di,kaioi eivj zwh.n aivw,nion). 이 구절에서 αιωνιος가 ζωη와 연결될 때에는 절대적인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데, 동일 구절에서 αιωνιος가 κολασις와 연결될 때에는 어떤 석의적 근거로 상대적 영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두 개의 αιωνιος가 모두 절대적인 영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Augustine의 지적은 너무나 적절하다고 하겠다:
If both are "eternal," it follows necessarily that either both are to be taken as long-lasting but finite, or both as endless and perpetual. The phrases "eternal punishment" and "eternal life" are parallel and it would be absurd to use them in one and the same sentence to mean: "Eternal life will be infinite, while eternal punishment will have an end." Hence, because the eternal life of the saints will be endless, the eternal punishment also, for those condemned to it, will have assuredly have no end.
따라서 만일 두 개의 αιωνιος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영혼멸절론자들은 석의적으로 그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증명의 부담 (burden of proof)은 전통주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멸절론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히 5:9), “영원한 구속”(히 9:12), “영원한 심판” (히 6:2), “영원한 죄” (막 3:29)의 경우에는 Fudge가 “영원한 멸망”이나 “영원한 형벌”을 해석할 때 적용하는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참으로 이상한 결과가 된다. 영원한 멸망이나 영원한 형벌이 멸망이나 심판의 결과, 즉 소멸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영원한 구원”이나 “영원한 구속”은 그 결과가 무엇인가? 구원 그 자체를 영원히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구원도 나중에는 소멸되고 만다는 의미인가? “영원한 심판”이라는 것도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원한 죄”라는 것은 죄의 결과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그 죄 자체가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의미인가? Fudge의 주장은 석의적으로 도저히 증명될 수 없는 강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αιωνιος가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 즉 소멸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석의적 근거없이 Fudge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억지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3. 언어적 논거에 대한 문제 가운데 마지막으로 다루고 싶은 문제는 지옥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은 언어적인 면은 물론 신학적인 면까지도 어느 정도 포괄하는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편의상 여기서 다루도록 하겠다.
영혼멸절론자들은 지옥에 관한 여러 이미지 가운데 “지옥불” “불못” 같은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지옥불이라는 것은 영원한 고통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태워서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의 이미지가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태워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고 하신 말씀이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19)고 말씀하신 것은 태워 없앤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불 이미지가 다 태워 없앤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앞에서 고찰한 마태복음 25:41-46도 불이 태워 없앤다는 의미보다는 영원한 고통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41절에는 분명히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그 불이 영원한 불이 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영한 불”이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허언(虛言)에 불과하단 말인가?
마가복음 9:47-48절에 의하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구더기라는 단어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그냥 구더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들의 구더기” (o` skw,lhx auvtw/n)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범죄하여 지옥에 들어간 자들의 몸에서 나오는 구더기조차도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구더기가 붙어 있는 사람은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불은 태워 없앤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부자는 분명히 불속에 소멸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16:24)라고 부르짖고 있다. 누가복음 16장이 비유냐 실화냐, 중간상태를 다루고 있느냐 영원 상태를 다루고 있느냐는 등 해석상의 논란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은 소멸의 의미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라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14:10에 의하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여 불이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의미하고 있고, 14:11에서는,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하여 그들이 불과 유황 가운데서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고통받을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
John Stott
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The fire itself is termed 'eternal' and 'unquenchable', but it would be very odd if what is thrown into it proves indestructible. Our expectation would be the opposite: it would be consumed for ever, not tormented for ever. Hence it is the smoke (evidence that the fire has done its work) which 'rises for ever and ever.' 
이 구절에 관한
John Stott
의 해석은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 없다. 그의 성경 해석은 일반적으로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지옥 문제에 관한 해석은 전반적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다. 그의 주장대로 불못 속에 있는 것이 이미 다 태워져서 소멸되고 없다면 어떻게 해서 연기가 계속 올라올 수 있는지 궁금하다.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불이 그 소멸 작업을 다 끝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뭔가가 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일반적인 불의 경우 연기만 영원토록 올라가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 면에서 Stott는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Stott의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고 영혼멸절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견강부회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요한계시록 20:10-15절도 영혼멸절론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말씀이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 있는 적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및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자들은 거기서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밤낮 고난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 논거에 대한 비판
1. 영혼멸절론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해서 영원한 지옥 형벌의 부당성을 주장한 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이 땅에 사는 유한한 기간 동안에 지은 유한한 죄에 대해서 영원한 형벌을 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견 이 주장은 타당성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고 각자의 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정확하게 가하실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면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은 심판에 차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모든 범죄에 대해서 동일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주어진 빛, 또는 계시의 정도에 따라 심판에는 차등이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20-24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회개치 않은 고라신과 벳새다가 말세에 두로와 시돈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며, 가버나움이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누가복음12:47-48도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둘째, Erickson에 의하면,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상정하고 제기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갑”과 “을”이 대등한 입장에 있는 두 사람이라면 쌍방간에 맺은 계약의 결과에 대해서 만족하게 느낄 수도 있고, 불만족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범죄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한쪽은 무한자이고, 다른 한쪽은 유한자이다. 유한자는 무한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 그자체도 무한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자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에게 불순종하고, 그를 거역하는 것은 무한한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Pinnock는 이 주장에 대해서 반박을 하면서, 죄의 경중은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 자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Erickson이 말하듯이, 대등한 관계에 있는 쌍방간의 범죄--예를 들면 한 인간에 대한 다른 인간의 범죄--라면 Pinnock의 말에 타당성이 있지만 유한자와 무한자 간에는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 성행했던 suzerainty-vassal treaty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조약은 쌍무적인 조약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황제가 지방의 분봉왕이나 제후에게 일방적으로 하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조약이 체결되면 제후는 다른 황제나 군주와 유사한 조약을 맺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황제에 대한 반역 행위이고, 그러한 반역 행위는 바로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무서운 범죄였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황제에 대한 지방 제후의 배신도 참으로 중대한 범죄 행위였는데, 하물며 전능자에 대한 인간의 범죄랴!
셋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다른 각도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주차 위반 같은 것은 경범죄에 속한다. 강도는 좀 더 중한 죄에 속한다. 살인은 강도보다 더 무거운 죄이다. 그러나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는 더 큰 범죄로 취급되고 있다. 그것은 국기(國基)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반역의 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분노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간음하고, 강도질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해 놓았는데 이것을 믿지 않는 불신죄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각 개인이 짓는 강도나 살인 같은 죄는 하나님의 법 테두리 안에서 짓는 죄이지만, 불순종은 하나님 나라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Fernando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Unbelief, then, is an open act of rebellion against the glory of God. The glory of God is the only means for the welfare of this universe. Whereas individual acts of sin, such as stealing and violence, violate the system of laws of the universe, unbelief is a rebellion against the system itself. This is why it is so serious. And this is why it merits a punishment of such enormity. For the preservation of the glory of God of creation and therefore for the benefit of its inhabitants God must respond to this affront to his glory with adequate severity.
넷째, 불신자가 죽자 마자 그 영혼이 소멸되고 만다면 그것은 사후에 아무런 심판이 없다는 의미가 되고, 그렇게 되면 Wayne Grudem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주에는 궁극적 공의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히틀러나 스탈린, 폴 포트, 이디 아민 같은 천인공로할 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 사후에 아무런 형벌이 없이 그 영혼이 소멸되고 만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잘 살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더 큰 죄도 짓겠다는 강한 인센티브를 갖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지옥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예수를 믿어야 할 궁극적인 이유도 없고,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 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물론 지옥 심판이 없어도 선하게 살 사람은 선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선하게 살아야 할 신학적-윤리적 기초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2. 영혼멸절론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해서 불신자가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하나님과 무한한 고통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고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8)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친히 표현하셨다 (롬5:8).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란의 여지도 없을 만큼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징계의 하님이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다 (롬 1:18-23).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셨지만 지옥에 가는 사람은 그것을 끝까지 거역하고 지옥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C. S. Lewis는 이렇게 말했다:
Everyone who wishes it does. Never fear. There are only two kinds of people in the end: those who say to God, "Thy will be done," and those to whom God says, in the end, "Thy will be done." All that are in Hell, choose it. Without that self-choice there could be no Hell.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따져 본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불신자를 지옥에 보낸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불신자가 자기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지옥을 선택해서 간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의인들만 모여 있는 천국보다도 동료 죄인들로 우글거리는 지옥이 더 편한 곳일 수 있는 것이다.
3. 영혼멸절론자들은 신정론(theodicy)의 입장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반대한다. Antony Flew는, 만일 하나님이 일부의 사람을 영원한 지옥 고통에 보낼 의도를 가지고 창조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변호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영혼멸절론자들은 이 주장에 동조를 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지옥과 기독교의 정당성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지옥과 기독교의 정당성은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감옥과 건전한 국가는 공존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과 대동소이하다. 사람이 감옥에 가는 이유는 감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기 때문인 것이다. 건강한 국가라면 정당한 재판절차를 통해 범법자에게 그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주어 감옥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부당한 형의 선고를 하고 사람을 마구 감옥으로 보낸다면 국가의 정당성은 비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법 절차를 통해서 감옥에 가면서 
국가의 정당성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었는데도 계속 범법하는 자에게 지옥 형벌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도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cf. 계20:12).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옥이 존재하며 그 곳에 가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이나 기독교의 정당성을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보편론적 논거에 대한 비판
영혼멸절론자들은 모두 보편구원론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구원론자들이 사용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지옥 형벌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있다.
19세기의 유명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Reimarus는 오직 전 인류의 1/10 정도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그런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캔터버리의 대주교였던 William Temple도, “How can there be a paradise for any while there is a hell for some?”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Nels Ferre도 비슷한 말을 했다: “If hell were eternal...heaven would be an eternal place of mourning. All those in truly agape fellowship would identify their lot with lost.” 그리고 이어서 “Heaven can be heaven only when it has emptied hell”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빌립보서 2:10,11; 고린도전서 15:24-28; 골로새서 1:19-20 등을 인용했는데, 이런 구절들은 영혼멸절론자들도 즐겨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영혼멸절론자들은 또한 영원한 지옥형벌은 결국 우주론적 이원론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첫째, 우주론적 이원론이란 문제를 먼저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원론이란 두 개의 대등한 세력이 적대관계를 가지며 영원히 공존할 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지 지옥 형벌에 관해서는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옥이나 마귀 같은 존재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원한 대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를 못한다.
둘째,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께서 어떻게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상 보편구원론자들과 영혼멸절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보편 구원도 영혼의 멸절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을 석의적으로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든지, 지옥에 들어간 영혼은 멸절되어 없어진다는 주장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24-28을 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고린도전서 15: 21-22절은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온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결국 다 부활할 것을 말하고 있고, 23절은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되 한꺼번에 전부 다 동시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몇 단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24절은 예수께서 지상의 통치를 다 끝낼 때 또 한번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고, 25절은 최종 부활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26-27절은 예수께서 결국은 사망의 문제도 다 처리하고 모든 것을 복종케 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석의적으로 연구해 볼 때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편구원이라든지 영혼의 멸절 같은 내용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난점을 알기 때문에 영혼멸절론자들은 이 구절 자체의 석의적 의미에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세우기보다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여전히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이겠느냐는 식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지옥에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결과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간 것이라면 왜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옥에 간 것이다. 
비근한 예를 한번 생각해보자. 정적으로부터 오랫동안 몹시 탄압을 받던 정치가가 칠전팔기 끝에 집권하여 부정부패와 인권 유린을 일삼던 구정치인들을 모두 감옥으로 보냈다면 그것은 승리가 아닌가? 정적을 모두 죽여서 감옥이 텅 비게 해야만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은 정적을 모두 암살하거나 사형에 처해서 감옥을 텅 비게 해야만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전통적인 지옥관
지금까지 필자는 전통적인 지옥관의 입장에서 영혼멸절설이 석의적으로, 신학적으로 오류임을 밝히려고 했다. 그러면 필자는 물론 과거와 현재의 대부분의 복음적인 학자들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원한 지옥 형벌을 성경적인 견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적 증거
전통적인 지옥관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믿어왔던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통적인 지옥관을 가르친 학자들은 많다. Tertullian, Origen, Arnobius, Augustine, Thomas Aquinas, Martin Luther, John Calvin, Jonathan Edwards, John Wesley, W. G. T. Shedd, Louis Berkhof, Lewis S. Chafer, John Gerstner, Billy Graham, Millard Erickson, Charles Ryrie, Wayne Grudem 을 비롯해 George Whitefield, D. L. Moody, Charles Finney, R. A. Torrey, Billy Sunday, Charles Spurgeon, Jerry Falwell 등 기라성 같은 설교자들이 모두 전통적인 지옥관을 가르쳐 왔다. 영혼멸절설이 맞다면 역사적으로 교회가 가르쳐온 중대한 교리에 관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결론이 되고 만다. 물론 교회가 오랫동안 믿고 가르친 교리가 반드시 다 진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분명한 반증이 없는 한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구약의 가르침
구약 성경에서 영원한 형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66:22-24과 다니엘서 12:1-2절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사야 66:22-24절을 보도록 하겠다:“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 질 때에 있을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주님은 지옥을 묘사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고 계신다 (막 9:48).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패역한 자들, 즉 불신자들은 그 몸에 붙어 있는 구더기도 영원히 죽지 않고 불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곳에서 고통당할 것을 말하고 있다. Fudge는 이 구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In the historical event of Isaiah's day (Isa 37:36) and in his prophetic picture of the future (Isa 66:24),the righteous contemplate with satisfaction "the dead bodies" of the wicked. They look at the corpse (Hebrew: pegerim), not living people. They view their destruction, not their misery....Because this fire is "not quenched" or extinguished, it completely consumes what is put in it....Both worms and fire speak of a total and final destruction. Both terms also make this a "loathsome" scene. The righteous view it with disgust but not pity. The final picture is one of shame, not pain.
이 구절에 대한 Fudge의 해석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시체들은 문자적인 의미의 시체로서 그 시체에 붙어 있는 구더기가 죽지 않고 그 시체를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소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으면 어떻게 그 불안에 들어 있는 물체를 다 태우고 끝을 낼 수 있으며, 그 시체에 붙어 있는 구더기도 죽지 않을 수가 있는가?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물체도 영원히 탄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문자적인 불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불이 불신자를 영원히 고통 속에서 태우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아마도 다니엘서 12:1-2일 것이다.“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이 구절에 대해서 Fudge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Fudge도 이 구절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다루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범위가 보편적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some to everlasting life”와 대응하는 “others to shame and everlasting contempt”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악인이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수의 악인만 부화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은 소멸로 인한 영원한 수치를 나타낸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Fudge의 해석은 몇 가지 이유로 용납하기 어렵다.
첫째, 문맥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7년 대환란 이후에 있을 두 종류의 부활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대환란 이후에 있을 부활에는 “영생의 부활”과 “영원한 수치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영원한”(םלוע)이란 단어는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생명을 얻는 부활이 영원한 것이면 수치를 당하는 부활도 똑 같이 영원한 것이다. 전자는 영원하고 후자는 소멸된다는 해석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둘째, Fudge는 다니엘서 12:2이 모든 악인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자는 자”중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는 사람들은 제한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영원한 수치의 부활”을 얻는 자라고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훨씬 더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설령 악인의 부활이 보편적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영원한”수욕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소멸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소멸되고 없는 사람이 무슨 수욕을 영원히 겪는다는 말인가? 
셋째,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영혼이 소멸되고 마는 것이라면 부활할 필요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공연히 아무런 이유나 목적도 없이 불신자를 부활시키시는 분이신가?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지옥에 관해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리얼하게 말씀을 하고 계신다. 사랑과 자비의 화신이신 예수께서 지옥을 그렇기 많이 언급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지옥은 참으로 존재하는 무서운 곳이고,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 곳이 가기를 진실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몇 가지만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마태복음 5:22에서 주님은 다른 형제를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게헨나로서, 히브리어로는 “힌놈의 골짜기” (Valley of Hinnom)라는 뜻이다. 이곳은 원래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과거에 시체를 소각하기도 했고, 예수님 당시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끊임없이 불과 연기가 타오르는 모습이 지옥불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에 주님은 지옥을 말씀하실 때 게헨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힌놈의 골짜기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의 실제 위치가 아니라 지옥은 그와 유사한 곳임을 형상화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기 말씀하신 것이다. 
Fudge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게헨나가 영원한 곳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게헨나가 영원한 불이라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게헨나는 현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가 올 시대(the age to come)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시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게헨나에 들어가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게헨나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When the unquenchable fire finally destroys the lost, they will be gone forever.”
Fudge의 지옥관은 참으로 기괴하기 그지 없다.
첫째, 게헨나가 현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헨나는 현시대에 속한 것인 동시에 다가올 시대에 속한 것이다. 만일 게헨나가 전적으로 다가올 시대에 속한 것이라면 지금 죽는 불신자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보다도 게헨나가 영원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것이 영원하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둘째, 게헨나에 들어가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게헨나가 영원하다는 Fudge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꺼지지 않는 불은 영원히 지속되는 불인데, 어떻게 그 불이 불신자를 궁극적으로 다 태워서 소멸시킨다는 말인가?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물체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Fudge는 말하기를,“꺼지지 않는 불이 구원받지 않은 자를 궁극적으로 멸망시킨다면, 그들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고 한다. Fudge는 “멸망”이라는 단어를 “소멸”로 해석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영원히 타는 불”과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물체의 소멸”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주장은 결국 주님의 가르침과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Gerstner는 Fudge의 주장이 주님의 가르침과 상반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1) Fudge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게헨나가 영원하다고 해석한다.
(2) 그러나 Fudge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게헨나는 형벌의 결과로서 뿐이다.
(3) 일시적인 형벌의 결과는 게헨나에서는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게헨나의 불은 결국 소멸되고 벌레도 결국은 죽는다.
(4) Fudge의 일시적인 게헨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게헨나와 다르다.
(5) 그러므로 Fudge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2. 마태복음 18:6-9도 주님께서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는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생”과 “영원한 불”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면 영원한 불은 영원히 지속되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Fudge는 다른 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게헨나는 그 속에 있는 물체를 다 태워버리기 때문에 결국은 소멸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태복음 18장과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9장, 특히 48절을 언급하면서 “구더기”는 시체를 먹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자는 이미 죽어 버린 자라는 것이다.
Fudge의 주장은 도무지 타당성이 없다. 
첫째,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라면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물체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째, 구더기가 시체를 먹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게 소멸되고 만다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면 구더기가 달라 붙어 있는 몸도 영원히 소멸되자 않는 것이라는 결론이 되고, 따라서 구더기는 시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산자의 몸에 붙어서 그 몸을 영원히 뜯어먹는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
1. 데살로니가후서 1:5-10에서 사조 바울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구원받지 받지 않은 자들은 주를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Fudge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표현은 꺼지지 않는 지옥불 가운데서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멸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It is aionios punishment in both senses we have discussed. It is "eternal" in quality since it belongs to the Age to Come. It is "everlasting" in quantity since it will never end. It is not only inescapable; having once occurred, it is also irreversible....we suggest that this "everlasting destruction" also is the unending result of an action or process of destroying, not the process or action itself. However short or long may be the time of the destroying, a point on which Scripture leaves us in awesome and mysterious silence, its result is made clear. The wicked, once destroyed, will never be seen again.
이 구절에 관한 Fudge의 해석은 몇 가지 이유에서 용납할 수 없다.
첫째, “영원한 멸망”이 “영원한 소멸”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이미 언어적 비판에서 취급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로 한다. 멸망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영원한”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일 때에는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멸과 영원이라는 개념은 양립할 수가 없는 개념이다.
둘째, Wanamaker가 바르게 언급했듯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있어서 불신자의 영원한 소멸이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이 받을 형벌의 중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라는 표현은 소멸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닌 것이다. 
2.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르치는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서 유다서 7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이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다. 유다 선생은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편지를 쓰려고 하다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으로 인해 계획을 바꾸어서 그들이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유다는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몇 가지 구약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언급하고(5절),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반역한 천사를 어떻게 처벌하셨는지를 말하고(6절),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7절). 
영혼멸절론자인 Fudge는 7절을 설명하면서 “There is no biblical hint that Sodom and Gomorrah's inhabitants presently endure conscious torment; several passages, in fact, make a point of their abiding extinction”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다가 말하는 “영원한 불”은 죄인들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멸망시키고 소멸시키는 불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Fudge의 해석은 본문에서 유다 선생이 가르치는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용납하기 어렵다.
첫째, 본문은 죄인들이 받는 형벌 그 자체가 “영원한 불”임을 말하고 있지, 소멸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죄인들이 불못에서 소멸되고 만다면 그 불을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불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물체가 영원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이 불 심판을 받은 것이 불신자들이 궁극적으로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이 지옥 심판의 예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후에도 지하에서 계속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살던 당시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계속 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Wars of the Jews, IV.8.4).
3. 요한계시록 20:10-15도 지옥 형벌의 영원성을 가르치고 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구절에 대한 Fudge의 해석은 그가 유사한 다른 구절을 해석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실제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도를 핍박하는 사악한 정부와 거짓 종교를 상징한다. 그들이 산채로 불과 유황에 던지운다는 것은 악의 화신인 두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대적하다가 모두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둘째, 짐승 및 거짓 선지자와 함께 불못에 던지우는 마귀는 어떻게 되는가? 마귀도 짐승이나 거짓 선지자같이 소멸되고 마는 것인가? 이 부분에 관한 Fudge의 해석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그는 이것이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못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경우에 궁극적인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귀도 결국 불못에서 소멸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같이 보인다.
셋째, 불신자가 불못에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한 소멸로 들어간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Fudge의 견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첫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모두 실제적인 사람이 아니고 악의 화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주석가들 중에는 상징적의 의미로 취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들이 세세토록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볼 때 분명히 인격적인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13장, 17장 등에 나타난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실제 인격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짐승”은 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거짓 선지자는 적 그리스도를 도울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둘째, 마귀와 짐승 및 거짓 선지자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소멸로 이해할 수 있는가? 소멸되어 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셋째, 본문에 의하면 백보좌 심판 때 모든 불신자가 다 부활되어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영혼멸절설이 맞다면 불신자의 부활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 지옥에 들어가자 마자 소멸되어 버리면 부활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불신자가 부활될 때까지는 소멸되지 않고 있다가 백보좌 심판때 부활된 후 심판을 받고 나서 다시 불못에 들어가 소멸된다는 의미인가? 그런 경우에도 역시 부활의 필요성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성경이 불신자의 부활을 가르치는 이유는 영혼과 부활한 육체가 결합되어 영원한 고통에 들어가기 위해서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의적으로 볼 때 Fudge의 해석은 모두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결 론
필자는 지금까지 구원받지 않고 죽은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다는 영혼멸절설에 관한 세 가지 논거와 그 논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부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조차도 잘못된 견해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음을 보았다. 필자는 본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D. A. Carson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언어 사용에 대한 자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오류라면--이미 본 논문에서 밝혔듯이--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옥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하고 계신 우리 주님에게 엄청난 욕을 돌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옥교리를 “야만 교리”니 “잔인한 교리”니, 하나님이 영원한 지옥을 가르친다면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정말 삼가야 할 표현이다.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형벌에 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영혼멸절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영원한 고통이라는 것이 없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지옥 교리를 분명히 믿는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서 그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영원을 보내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세가 가까울수록 미혹의 영은 기승을 부리고 있고, 그 동안 진리의 파수꾼으로 인정받은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미혹해서 비진리를 전파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깨어 경성하며 진리의 수호와 전파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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