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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존 오웬의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존 오웬의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1권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관하여 
1. 오웬의 인간론 맥락에서 살펴본 성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 본래의 자리이지만 인간 스스로 그 자리로 돌아갈 능력은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즉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인간 존재의 신적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두 세상 곧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중, 지상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았다. 
둘째로, 창조 목적을 벗어난 인간의 타락이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인간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본래의 인간 존재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절망적이다. 인간의 영혼은 철저한 어두움에 갇혀 있으며, 지성은 눈멂에, 정서는 죄악 된 충동에, 그리고 의지는 완고함에 복종되어 있다.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이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로, 창조의 목적으로의 회귀와 성화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본래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1) 중생 : 존재와 인식의 변화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책에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 안에 심오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이다.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며, 인식론적으로는 중생하기 전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영적인 감각으로 사물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영광에 대한 감각이 일시에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경향성으로 내제하고 있기에 그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지기까지는 끊임없이 죄와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성령으로써 은혜를 통해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일,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쇄신하는 일을 위해 인간이 자신에게 지정된 의무를 다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이것으로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다. 
2) 성화의 주체 : 성령
이 일의 주인공은 성령님 자신이며 의무에 대한 인간의 순종은 이를 위한 도구이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성화의 과정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데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과 성화에의 진전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였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인간 본연의 존재의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창조 당시 인간의 목적에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이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쇄신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2. 죄의 형이상학
첫째로, 죄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다. 그리고 이 경향성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성향을 갖게 하며 이로써 마음 안에서 혹은 마음 밖, 행동으로 작용한다. 마음 안에 있는 죄와 행동으로 되는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후자는 악에 속하는 인간의 행위의 죄이며, 전자는 그것으로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둘째로 죄에 대한 형이상학은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 활동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은 오류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이성과 철학은 특별계시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존재론과 관련되고, 하나는 윤리론과 관련된다. 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후자는 플라톤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죄는 존재의 본질적인 요소인 경향성에 대한 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죄는 경향성으로써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을 함으로써 죄의 본질과 신자의 마음 그리고 외적인 삶과의 관련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또한 윤리론에 있어서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담론을 따르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악한 의지를 통해서인데 이것은 곧 선한 의지의 결핍이며 은혜의 결핍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적극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하지만, 악을 행함에 있어서는 선을 행하게 하는 그 요인이 결핍되어 악한 의지에 굴복하여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를 작용인(causa effectiva)그리고 후자를 결함인(causa clefectva)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차별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인 사유인 "선의 결핍"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셋째,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다. 죄의 작용의 본질은 마음의 성향이다. 이러한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의(enmity)이다. 이 적의는 다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반감(aversion)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opposition)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라는 두 가지 수단으로 역사한다. 이러한 죄는 다음 세 가지 특성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데, 첫째로 미친 기운, 곧 이성의 판단을 뿌리치고 역사하는 광기(madness)이다. 둘째로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있어 드러나는 맹렬함(rage)이다. 셋째로 죄의 성향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나타나는 담대함(boldness)혹은 무모함인데 이것들이 바로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특징이다. 
여기에서 오웬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죄의 역사하는 작용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않을 수 없게 됨을 인정함으로 모든 과정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신다.
3.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 개념 
첫째, 죄에 대한 적극적인 정의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인간의 반항과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이라고 정의한다. 이것들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다. 즉 인간의 외적인 모든 행동과 삶이 그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이나 성향과 도덕적으로 필연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 구분될 수 있지만 나누어지지 않는다. 
둘째로, 신자 안에 있는 죄는 "결핍"이다. 이것은 세 가지의 결핍으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외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선한 행위들의 결핍이고, 둘째 내적인 마음에 있어서는 영적인 선을 가진 행위들에 대한 힘의 결핍이며, 셋째 원인이면서 이 두 가지 결핍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적인 생명의 원리의 결핍이다. 이 결핍은 비중생자의 경우 절대적인 결핍이고, 중생자의 경우 상대적인 결핍이다. 
셋째로 죄는 실효적인 힘이다. 죄는 영적인 선의 결핍이지만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으로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구체적인 힘을 행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지성을 속이고 정서를 부추기며 의지의 동의를 받아 죄를 행동으로 산출하고자 한다. 
또한 죄의 실효적인 힘을 강조하는 만큼 은혜의 실재하는 힘을 강조하는데, 죄의 커다란 실효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여전히 은혜에 의한 승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낙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4.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중생한 신자는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다. 신자안에 있는 죄는 내재하는 법으로서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한다. 
'마음의 틀'의 개념 
영혼 안에 있는 이 죄의 경향성은 마음 안에 있는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가리켜 존 오웬은 마음의 틀(the frame of heart)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명백히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에 있어서 프로네시스(pronesis)의 개념이다. 로마서 8장 6절 "영의 생각은...."에서 "생각"을 정확이 표현하면 "생각되어짐"인데 히랍어로 프로네마(pronema)이다. 마음은 바로 이러한 프로네마를 가지고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이것이 마음의 성향이다. 이 '마음의 틀'의 개념은 인간의 지성과 감정, 의지에 관여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따라서 마음의 틀은 죄의 성향의 지배를 받으면 죄스러운 틀이 되고 은혜의 성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은혜로운 틀이 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자기 사랑과 정욕을 통한 육욕의 만족을 지향하고 후자는 하나님 사랑과 거룩한 열심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을 지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원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이런 마음의 틀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죄악 된 마음의 틀이 인간의 지성에 관여하게 되면 생각이 악한 것들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감정에 관여하게 되면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의지에 관여하게 되면 그 욕망에 굴복하기에 좋은 이점을 얻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틀은 결국 그 틀에 적합한 외적인 삶의 행동을 산출하게 한다. 
죄의 활동 : 반감과 대적 
이러한 마음의 틀은 죄가 적합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죄가 활동하기에 적함하한 마음의 틀이 형성되면 죄는 자신의 경향성을 발전시킬 좋은 환경을 갖게 된다. 
첫째 반감은 모든 마음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싫증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내면의 상태는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정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싫증을 품게 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생각과 정서의 존재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다. 존 오웬의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성을 주심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발견하기 위함이며, 정서를 주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죄는 지성과 정서 양면에 있어서 총체적인 반감을 깃들게 함으로 인간 본연의 임무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둘째로, 대적인데, 이는 인간 안에서 죄가 마음 안에 있을 때에든지 혹은 삶으로 발현될 때이든지 하나님을 향한 적의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에 있어서 하나님의 그것들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강한 힘으로 적의를 가진 채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작용하는 강력한 힘은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얼마나 뛰어난 속임과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는지를 보여 준다. 
죄의 강압 : 욕망론
신자 안에 있는 내제하는 죄의 강압은 곧, 신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신자의 욕망을 통해 발휘된다. 신자의 욕망은 신자 안에 죄가 내재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산출될 때 가장 큰 희열을 맛보게 되기 때문에, 죄가 산출되기 위해 욕망을 사용하여 죄는 지성에서 용납되고 정서의 강한 후원 아래 의지의 동의를 조르며 신자의 내면을 몰아 붙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험했던 내제하는 죄의 법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객관적인 규범으로써의 법인데, 이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율법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관적인 성향으로서의 힘이다. 이것은 원인(죄의 성향성)과 결과(행동의 나타남)에 있어서 필연성을 구성하는데 이것으 여러 갈래가 아닌 한 가지 방향으로 일관 되게 몰아붙이는 내적인 강제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죄의 작용은 본질적으로 자기만족을 지향하며 자기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는 반면, 은혜의 작용은 사랑의 성향을 산출하고 그 순전한 사랑의 성향은 자신과 이웃으로 하여금 모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서 기뻐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든다. 신자는 바로 이 상반된 두 가지 작용, 즉 죄와 은혜의 갈등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작용이 끊임없는 것은 사실이다. 언약 관계를 토대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작용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바로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은혜의 힘에 대한 무한 공급이다. 신자는 믿음과 성령 안에서 온전한 순종을 통해 은혜 언약 안에 약속된 유업들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