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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고난이 아니라 순종이다.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모든 의는 결코 
#그리스도의_고난에_다_들어_있는_것이_아니다
오히려 엄밀하게 말하건대
#그리스도의_고난_안에는_어떤_의도_들어있지_않으며

#오직_그리스도께서_행하신_일_안에_모두_들어_있다.

단순히 형벌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형벌을 받는 것은 미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율법이 생명을 약속하고 있는 바 율법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율법의 상벌 조항을 만족시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_모든_고난은_그_자체로_의_라고_불릴_수_없다
만일 형벌 안에 '의'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형벌을 시행하는 분의 인격에 속하는 의일 뿐 형벌을 받는 사람에게 속하는 의는 아니다.

... 곧
#그리스도께서는_자신이_일생에_걸쳐_행하신_순종으로_우리를_위해_그와_같은_것들을_성취하셨다는_것이다.

프란시스 튜레틴, 개혁주의 속죄론(서울: 개혁된 신앙사, 2002), 제4장 속죄의 근거,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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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튜레틴은 칼빈과 베자의 뒤를 잇는 17세기 제네바 신학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신학자이다. 1648년에 제네바 교회의 목사가 되어 설교 사역을 시작하였고, 1650년에는 여러번의 거듭되는 요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레이든 대학의 철학부 교수로, 다시 제네바 교회의 목사로, 1653년에는 제네바 대학에서 신학부 교수직으로 섬겼다. 신학부 교수로서 그는 신실했고 담대했으며 부지런히 당대의 거짓된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당연히 교황주의와 소시니안주의, 알미니안주의가 그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존 오웬이 영국에서 하고 있던 일을 대륙에서는 튜레틴이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 알렉산더는 프란시스 튜레틴에 대하여 "개혁주의 교리의 가장 심오한 해설자"라고 하였고 레온 모리스는 "제네바 개혁의 최고봉"으로 불렀다.
그의 대표작이고 역작인 [변증신학 강요]는 17세기 제네바 신학을 대표하는 저작물 중의 하나로서 19세기 미국 장로교회 신학과 프린스턴 신학의 근간을 이루기도 하였다. 종교개혁 신학이 튜레틴에 와서 종합과 체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책, [개혁주의 속죄론]은 [변증신학강요]의 기독론을 따로 번역해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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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_차리고_청교도_타령_그만하길_바란다.
#능동적_순종이_칼뱅을_바로_뒤_이은_튜레틴에게서_나타난다
#칼뱅_튜레틴_바빙크_벌코프로_이어지는_대륙의_교희_전통에서_다뤄지는_교리다
#바빙크의_개혁교의학과_벌코프의_조직신학에_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의_전가가_다뤄지는_것은_칼뱅_전통이다
#칼뱅과_튜레틴도_회중주의냐
#스코틀랜드_장로교회_딕슨
#사무엘러더포드와_토마스카트라이트도_다_회중주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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