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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토론

중생론 토론

"세멘 피데이(semen fidei)라는 말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신앙의 씨, 신종 입니다. '믿음의 씨'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한두 사람이 한 시기에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랜 신학의 역사 가운데 몇 백 년 내려오면서 결국 이것이라고 찾아 낸 것인데 처음부터 세멘 피데이를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비투스 피데이(habitus fidei) 즉, 항상 신앙이라는 사실을 발휘하는 아주 정상적이고 관성적인 신앙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관성적인 신앙은 왜 생기느냐 하고 연구한 결과, 신앙의 씨라는 것이 중생할 때에 생긴다는 것을 성경 가운데에서 발견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씨'라는 표상 용어는 단순히 한 가지만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누가복음 8:11에는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비유해서 쓰기도 했고, 베드로전서 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섞어지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하셨는데,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희를 구원해서 중생했다는 그런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엄격하게 자꾸 해석해 보면 중생의 새 생명을 심어 주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차츰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왜 그것을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자꾸 나오는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면 큰 착오가 생기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신앙의씨'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씨입니다. 이 신앙이 씨가 있으면 씨에서부터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관성적 신앙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하비투스 피데이(habitus fidei)라고 하는 것인데 영어로 하면 habitual faith 혹은 habit of faith라고 해서 신앙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악투스 피데이(actus fidei)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이 두가지만으로 나눠서 생각하고 나가다가 나중에 개혁신학에서 깊이 생각한 결과, '이 두가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하비투스 피데이가 아니다. 그것이 나오는데는 기본적으로 '세멘 피데이'라는 것이 있다'하고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김홍전 박사
Tae Wha Yoo 신앙의 씨,,, 중생할 때,,, 생긴 것,,, 중생의 새 생명을 심어주신 것,,, 이런 표현들이 구원론을 강의하면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더군요,,, 혹 어떤 의견을 갖고 계세요,,,^^
금요일 오후 10:15 · 좋아요 취소 · 1.
정동건 좀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지금 버스 안이라... ㅎㅎㅎ 유익하고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금요일 오후 10:49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Tae Wha Yoo 교수님 새로운 기질... 전과 다른... 그 씨가 ... 심겨진(Infusa)... 에즈워즈가 말하는 affection의 잠재태 같은 거... 초기 중생시... 효과적인 부르심이 시작될 때, 심겨진... 기질...
금요일 오후 10:59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그렇게 설명하긴 하는데요,,, 일반적으로,,, 그런데도,,, 의문은 남아요,,, 성령의 은밀한 사역,,, 내적인 소명,,, 중생과 같은,,, 것의 결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겠지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거짓고,,, 견인하는 것은 내주하는 성령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칭의되고 성화되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주입된(infusa) 것인가 그런 질문이 생겨요,,, 그래서 의견을 물어보는 겁니다,,,
금요일 오후 11:04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믿음이라고 봐야겠죠... 믿음이 주입된 것으로...
금요일 오후 11:16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믿음은 중생(regeneratio)에서 시작한다. 중생의 작동 원인은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omi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드리며,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salus)으로 확신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 믿음으로 신학한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다.>서철원 박사
금요일 오후 11:19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아무튼<믿음의 주입>과 카톨릭의<의의 주입>교리는 묘한 대조를 이루는 거 같습니다. 이 둘 사이의 연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금요일 오후 11:23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믿음의 주입,,, 그런 게 가능한가요,,, 믿음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혹은 내용 사이에서 가능한 것인데,,, 그러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내가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인식하고,,, 물론 설명한 바와 같이,,,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과 함께,,, 말입니다,,, 그냥 드는 생각을 옮긴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11:36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노승수 목사님의 말씀과 제안이 개혁교회의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다루다보니,,, 몇 가지 질문이 생긴 것이랍니다,,,^^ 복된 성탄 맞으세요,,,^^
금요일 오후 11:52 · 좋아요 취소 · 1.
Jae Young Kim ㅎㅎㅎ
어제 오전 12:35 · 좋아요 취소 · 1.
Jinbu Jung 감동>.<어제 오전 4:37 · 좋아요 취소 · 1.
윤영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노목사님~!
어제 오전 8:22 · 좋아요 취소 · 1.
윤영상 이번 겨울방학때에 학생들과 지옥역정을 읽어나갈 것인데, 위의 글이 배드맨이 왜 그러한가에 대해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오전 8:23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배드맨,,,ㅎㅎㅎ
어제 오전 9:00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윤영상 목사님 배드맨이 ㅠ.ㅠ
어제 오전 10:39 · 좋아요 · 1.
노승수 ‎Tae Wha Yoo 교수님 감사합니다. 씨라는게 원래 성체와는 확연하게 다른게 일반 생물계에서도 자연스런 현상인거 같습니다. 세멘 피데이가 믿음의 씨이기 때문에<믿음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혹은 내용 사이에서 가능한 것>을 적용하긴 어렵지 않겠나 싶습니다. 예컨대, 모태 속의 수정란은 인간으로서 이성과 의지, 감성이 온전한 형태로 없음에도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자라 결국엔 사람의 전형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처럼<세멘 피데이>가 자라 결국<하비투스 피데이>로 그 성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낼 때, 그것을<회심>이라고 하고 그 때서야 비로서 믿음으로서 온전한 성질을 드러내지 않을까 합니다.
어제 오전 10:43 · 좋아요 취소 · 3.
노승수 위 글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 85쪽~86쪽에 나오는 강설입니다.
어제 오전 10:44 · 좋아요 취소 · 2.
윤영상 믿음의 씨를 받지 못한 배드맨의 삶을 이해하는데 위의 글이 좋은 단서가 되리라 봅니다
어제 오전 10:47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본래,,, 하비투스라는 개념은 말씀하신대로,,,어떤 구체적인 성질을 드러내기 이전의 배아상태라는 의미에 가깝지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중요한 개념인데,,, 이것이 어떤 원인이라는 개념과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 즉 인과율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면,,, 조금 곤란한 면이 있지 않나 싶은 겁니다,,,
어제 오전 10:48 · 좋아요.
Tae Wha Yoo 믿음의 씨가,,, 주입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윤 목사님~~~
어제 오전 10:53 · 좋아요.
Tae Wha Yoo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 할 때,,, 그리고 바울이 이 내용을 로마서 4장에서 언급할 때,,, 또 바울이 설명하는 믿음이 과연,,, 주입되는 것이냐,,, 그런 이야기,,,^^
어제 오전 10:55 · 좋아요.
Tae Wha Yoo 대개는 중생의 원리가 심겨진다고 설명하는데,,, 개혁주의 구원론을 쓴,,, 후크마의 경우도,,,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지금 손에 책이 없어서,,, 심겨진 중생의 원리 그게 뭔지는 설명하지 않지요,,, 일반적으로,,,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은 그것을 설명해보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과연 구원의 서정을 깊이,,, 언약적으로 사고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적어본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대화한다고 생각하시면 좋겠네요,,, 혹 결례가 되었으면,,, 삭제하셔도 됩니다,,,^^ 날씨가 참 좋으네요,,,
어제 오전 11:06 · 좋아요 취소 · 1.
윤영상 네 압니다. 제 덧글은 배드맨에 대한 두 목사님의 글에 덧글을 쓴건데 스마트폰이다 보니 제가 쓴 덧글이 느리게 올라가 처음쓴 덧글이 삭제된줄알고 또 썼더니.. 두개가 다 나중에 올라가있더군요
어제 오전 11:12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네,,, 평안하세요,,,^^ 복된 성탄 맞으시구요~~~
어제 오전 11:14 · 좋아요 · 1.
노승수 결례 아닙니다. 가르침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
어제 오전 11:31 · 좋아요.
노승수 habitus (심리적 기질, 또는 성향)
= a way of reckoning with the ability of the mind to know or do certain things and such dispositions are :
어제 오전 11:41 · 좋아요.
노승수 ‎Tae Wha Yoo 교수님 가지고 계신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어제 오전 11:47 · 좋아요.
노승수 배우겠습니다. ^^
어제 오전 11:48 · 좋아요 · 1.
Tae Wha Yoo ‎1.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비투스 개념과 개혁교회 정통파신학의 그것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시고,,,
2. 구원의 서정은 크게 보아,,, 주관적인 측면 객관적 측면,,,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성령의 사역,,,,이 중심을 이루고
3. 중생시 주입(?)되는 것은 성령의 인침을 통한 내주,,,겠지요,,,
4. 성령의 은밀한 사역의 외적인 표현이 회심과 믿음이고,,, 그 믿음의 핵은 칭의와 성화의 근간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겠지요,,,
5.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의 갱신의 과정인 견인은 내주하는 성령을 상실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6. 그 관계를 지속케 하는 것은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이겠지요,,,
7. 이것이 언약적 삶을 구성하지요,,,
이런 이해의 근간을 따라 생각해보심이 어떨지요,,,
어제 오후 12:02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감사합니다... 교수님...
어제 오후 12:26 · 좋아요 · 1.
Tae Wha Yoo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하는 성탄 맞으세요,,,^^
어제 오후 12:28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교수님 다른 부분은 그럭저럭 어떻게 이해해야 감이 잡히는데, 
3. 중생시 즉 효과적 부르심과 성령의 인침을 통한 내주에 관한 내용은 제가 잘 이해가 안되는데 좀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어제 오후 12:29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네 교수님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즐겁고 감사한 성탄 맞으시길... ^^
어제 오후 12:43 · 좋아요 취소 · 2.
윤영상 저도 그 부분 궁금합니다... ^ ^
어제 오후 1:03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인,,, 요한복음 3장,,, 고린도전서 1-2장,,, 에스겔 36장,,, 등등을 살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가 정말 누구인지를 인식함,,,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식함(고전 2:14---NIV성경으로 해당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 인식에 있어서 인간의 영이 새로워짐,,, 씻김,,, 물과 성령으로 씻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에스겔 36:23-27을 읽으면서,,, 아마도 니고데모를 책망하면서 예수님이 머리에 떠올리셨던 구약의 말씀은,,, 한 구약학자가 언급했듯이,,, 이곳과 렘 31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한번 깊이 헤아려보세요,,, 십자가의 도,,, 그것을 인식하게 되면,,, 성령으로 인쳐지고,,, 구원의 보증으로서 성령의 영원한 내주가 주어지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윤상영 목사님의 프로필 사진은 아드님의 사진인가요,,,^^
어제 오후 2:05 · 좋아요 취소 · 1.
신학적으로 엄격히 구분할 때 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확실해지는데 그 방향은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으로 흘러가던 것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지배적인 성향, 거버닝 디스퍼지션(governing 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까지를 신학적으로 중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룹니다.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 172쪽~175쪽
Jae Young Kim 이것은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생명 현상을 비춰보면서 유추하는 것일 뿐입니다. 꼭 맞는 것도 아니고 틀렸다는 것도 아니고 미루어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생명이니까 그럴 것이다 그리 생각합니다. 제 생각입니다.
2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이수환 ‎'미루어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자의 삶, 혹은 성령의 성화의 사역들이 너무 명백해서,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사역'이나 그 밖의 청교도들이 이해한 '성령'의 사역이 그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미루어 여겨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배적인 성향' 혹은 '주입된 믿음'의 habitus를 설명하는 듯 하는데요.... 
"유추"라고 하기에는 성경적 증언들이 너무 분명하고, "유추"라는 말이 가진 애매모호함과 유보적인 성격들이 오히려 성령의 중생케 하심과 거룩케 하심, 혹은 칭의의 적극적 측면들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신학적 연구에서 어떻게 서술하는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목회적 차원에서, 설교나 성도들을 향한 강설에서는 분명한 설명이 - 실제로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좋겠다라고 생각됩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2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성경에서 말하는" - 어디에? 이것이 저의 문제제기입니다.
22시간 전 · 좋아요.
Tae Wha Yoo 가능한,,, 그러나 지나친 설명들,,, 앞선 이들이 했다고 해서,,, 그냥 따라나서는 것은,,,
2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심고,,, 싹을 내고,,,ㅎㅎㅎ
2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여러 여성들 가운데 루디아라하는 여성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들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그 말씀에 청종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적용되게 하셔서,,, 전인적인 회심에 이른 것이 아닌지,,, 이 경우,,, 위에서 언급한 심고,,, 싹이 나고를 어떻게 분절하여 적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22시간 전 · 좋아요 · 1.
노승수 사도행전 본문 자체(행16:14)를 유심히 보면 "두아디라성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때 순간적으로 중생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루디아가 바울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다는 점이겠지요.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란 말은 사도행전의 독특한 표현으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경외심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들이 많이 되어진 자들을 나타낼 때 이런 표현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1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In strict harmony, however, with the literal meaning of the word "regeneration" the term is sometimes employed in an even more limited sense, to denote simply the implanting of the new life in the soul, apart from the first manifestations of this life.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되면서, “중생”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보다 더욱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곤 합니다. 곧,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이 발현되는 것과는 별도로 이 생명이 단순히 주입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 신학 중에서
1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respecting the present use of the word "regeneration", it follows that regeneration may be defined in two ways. In the strict sense of the word we may say: Regeneration is that a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ning disposition of the soul is made holy. But in order to include the idea of the new birth as well as that of the "begetting again", it will be necessary to complement the definition with the following words: ".....and the first holy exercise of this new disposition is secured." (중생이란 단어의 현재 사용에 대하여 앞서 논의된 바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중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어의 엄격한 뜻을 보자면 우리는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사람 속에 심겨져서 그 지배적인 기질이 거룩하게 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협의의 중생). 하지만, 여기에 새로운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그 정의에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여 보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첨가해야 할 말은, 곧 "이러한 새로운 기질이 첫번째로 거룩하게 행사되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란 말이다다(광의의 중생)
12시간 전 · 좋아요 · 1.
노승수 ‎(약 1:18, 개역)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We look next at James 1:18, "He (God) chose to give us birth(apekyesen) through the word of truth, that we might be a kind of firstfruits of all he created." The verb here used, apokyein, does not mean "to beget" but "to give birth to." It is used earlier in verse 15 of this chapter, where James says that sin, when it is full-grown, gives birth to death. God the Father, however, who is the source of every good and perfect gift(v.17), which is the evidence of our having received new spiritual life. The new birth as James here describes it is not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 the implanting of new life - but in the broader sense, namely,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new life in conversion. Regeneration in the broader sense, James is here saying, is produced in us through the word of fruit, through the Bible.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rough God by his Holy Spirit works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in us immdediately, directly, and invincibly, the first manifestations of that new spiritual life come into existence through the word - whether it be preached, taught, or read. New spiritual life, in other words, is bestowed immediately by God; but the new birth is produced mediately, through the word. 
후크마의 조직신학 중에서 
다음으로 야고보서 1:18을 보자 :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apekyesen) 우리로 거의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심이라" 여기에 사용된 "아포케인"이란 동사는 "출생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출생시키다"라는 뜻이다. 15절에도 사용된 바가 있는데 그곳에서 야고보는 죄가 성장하면 죽음을 낳게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17절)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을 주심으로써 그의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셨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신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새생명의 부여)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 다시 말해서 돌이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새생활의 첫번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진리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된다. 
(중략)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의 외적 표출은 말씀을 - 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 -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여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하여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후크마도 약 1:18절을 주해하면서, 새생명의 부여 곧 그 씨를 심으시는 주입과 그 주입된 씨가 발현되는 생명의 발현으로 중생을 말씀에 근거해서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1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후크마는 "to beget"과 "to give birth to"를 구분해서 본문을 주해했습니다. 단순히 추측이나 유추가 아니라 본문에 기반한 이해이지 않을까요?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따라서<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이라는 김홍전 박사님의 설명은 유추라기보다 본문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김홍전 박사의 전체 논리로 보면 바로 앞에 올린 글과 비교하여 볼 때, 출생시키는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 곧 세멘 피데이(semen fidei)가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하 발현된 생명 곧 하비투스 피데이(habitus fidei)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조나단 에즈워즈도<신앙감정론>에서<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affection) 안에 있다>고 할 때, 이 affection이 바로 주입되고 발현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중생이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넣어주시고 그것이 자라서 결실케 되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된대로 씨가 뿌려지고 그것이 자라고 종국에 결실케 된 믿음만 참된 믿음이라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바가 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7장>때로 심겨진 믿음과 발현한 믿음은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마 13장의 비유에 의하면 심지어<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도>하지만 재리와 일락과 기타 욕심으로 혹은 뿌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못함으로 마르고 결실치 못합니다. 
참된 믿음은 결국 심겨지고 발현된 믿음을 넘어 회심의 은혜에 까지 나아가야 비로서 참 믿음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1시간 전 · 좋아요 · 1.
노승수 habitus (심리적 기질, 또는 성향)
= a way of reckoning with the ability of the mind to know or do certain things and such dispositions are : 
어떤 것들을 알거나 행하기 위해서 사고 능력을 통해 판단하는 방법으로서, 그러한 기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nnata (inborn) :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타고난
insita (ingrafted) : 이식된, 접붙임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통해서 얻게 된
acquisita (acquired) : (자기 노력에 의해서) 획득된
infusa (infused) : 주입된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밖으로부터 주어져서 자기 것이 된)
11시간 전 · 좋아요 · 1.
Jae Young Kim 노목사님, 여러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에 의하면, 김홍전 목사님의 설명은 루이스 벌코프의 글에서 나온 것이네요.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을 설명하면서 일차적으로 생명의 출발/시작에 초점을 두면서 그것에 근거해서 그 함의를 governing disposition으로 설명하려고 하네요. 원리로서의 생명이 있으니 당연히 그 점을 유추할 수 있다고 봅니다.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그러나, 성경 주해에 있어서, 후크마의 설명을 잘 들여다 보시면, 그가 성경을 통해서 입증하려 했던 기존 신학상의 개념이 야고보서의 언급과 딱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폭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 점은 중생, 팔링게네시아라는 단어의 성경적 용법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루디아는 몰랐겠지요,,,^^ 구원은 여기서 시작되니까요,,,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Jae Young Kim 그리고, 칼빈이나 벌코프나 후크마가 infused라는 단어를 썼는가요? 그들이 implanted (심겨진) 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고 '주입된' 이라는 단어를 배척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보는데요.
11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그리고 인용해주신 후크마의 글의 핵심은 중생에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역할/성령의 역할을 바탕으로 하면서 어떻게 '말씀'의 역할을 그 안에 포함시키느냐에 있군요. 이 마지막 문장이 그 점을 명확히 드러내줍니다. New spiritual life, in other words, is bestowed immediately by God; but the new birth is produced mediately, through the word. 이것은 그 두 동인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후크마는 이 문장을 통해서 그 둘을 단단히 묶으려고 시도하고, 야고보서의 이 본문이 그 점을 뒷받침한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야고보서의 이 구절에서 'thrugh the word'의 의미는 후크마가 고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보다는 (그 점을 다 포함하면서도) 더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후크마가 "through the word - whether it be preached, taught, or read"라는 어구를 통해서 한정시키고 있는 것에 비해서, 그 말에 더 깊은 신학적 차원이 들어 있는 것 같군요. exegesis가 필요합니다. lexical meanings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구요.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중생은 유효적인 소명의 직접적인 결과이지요,,, 그러니까 중생은 유효적인 소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유효적인 소명이란,,, 복음이 죄인에게 제시될 때,,, 성령께서 그 죄인의 마음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십자가의 도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지요,,, 이해를 밝히는 일이고,,, 지식을 새롭게 하는 일이고,,, 자신과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임을 알도록 하는 사역이겠지요,,, 이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요,,, 신비적인,,, 서령 안에서의 연합이,,, 그리스도로 옷입는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이 상태가 중생의 상태이지요,,, 뭔가가 심겨진다기보다는,,, 성령이 없던 인간이(고전 2:14) 성령의 은밀한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성령의 내주와 함께 그리스도로 옷입은 상태,,, 그것이 중생이 아닐까요,,, 요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보니,,, 이스라엘의 선생이네요라는 평가를 가지고 나온,,, 네가 나를 알아,,,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물로 더러움을 씻듯이 네 마음이 성령으로 인하여 덕지덕지 눌러 앉은 마음의 때를 씻지 않으면,,, 전통적인 유대적 이해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들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들려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부활함으로 당신에게 의를 전가해주는 나를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소이다,,, 나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소이다,,, 이게 예수님이 의도하신 중생이 아닌가,,, 그 동일한 일이 루디아에게도,,, 고린도교인들에게도,,,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유태화선생님의 바로 위의 언급은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주안점을 두면서, 성경적인 의미의 컨텍스트를 짚고 있네요. 
위 언급 중, "... 뭔가가 심겨진다기보다는,,, 성령이 없던 인간이(고전 2:14) 성령의 은밀한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성령의 내주와 함께 그리스도로 옷입은 상태,,, 그것이 중생이 아닐까요?" 이 문장은 중생에서 성령을 중생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존재로 보게 하는 중요한 통찰이네요. 
그렇습니다. 저도 중생에서 성령의 동거와 내주, 함께 하심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사실이 새생명의 원인이며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이 중생한 사람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위의 김홍전 목사님의 뽀인또 중 하나인 것 같고요.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믿음은 이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고,,,, 그 안에서 죄인인 나를 칭의하시고 성화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인식의 드러냄,,, 고백이겠지요,,, 그래서 과거에 대하여는 죽는 고백,,, 그것이 회심(일회적인)과 회개(지속적인)로 나타나고,,, 또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사는 성화가 수반되는 것이겠지요,,,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지요,,, 이 구조 안에서 펼생 삽니다,,, 회개와 성화,,, 이 일을 돕는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이구요,,,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그러니니까,,, 믿음을 어떤 심겨진 원인으로 보지 말고,,, 습관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어떤 주입된 원리로 파악하지 말고,,, 오히려,,, 성령이 은혜의 수간을 사용하여,,,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살아 있는,,, 실존적인,,, 언약적인 갱신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은 것입니다,,,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물론, 그 믿음은 성령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해놓은,,, 나의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고백이 포함된,,,, 실재입니다,,,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믿음에 대한 설명의 틀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히브리적 언약 구조로 가져오자는 말이네요. ㅎㅎ 영적(신령적)이며 실존적 차원을 지닌 'bond'로 이해하자... 좋습니다.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신학적으로 반성하자면,,, 후크마,,, 벌코프의 신학 배후에 있는 헤르만 바핑크의 신학에서 하비투스의 개념을 살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아직 살펴보지는 않았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혹시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개념과 연결된 것을 유연하게 수용한 것은 아닌지,,,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Jae Young Kim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스콜라철학으로 이어지는 개념틀의 냄새가 좀 나지요? ㅎㅎ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Tae Wha Yoo 짐작에 그렇습니다,,,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Jae Young Kim 유교수님이 한 번 확인해 주시죠. ㅎㅎ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Jae Young Kim 저는 여기에서 거칠게 봐서, 생명현상 자체를 설명하는데 큰 장점이 있다고 보면서도, 이 개념 틀 안에서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에, 중생과 성화가 결국 개인에게 가고, 개인주의적 영성이 발현한다고 봐요. 이제는 그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관계적인 새로운 틀 즉 말씀하신 언약적이며 실존적(현상학적 생활세계의 의미에서)인 마당에서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둘 이상의 관계와 공동체적이면서 성 삼위일체와의 사귐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전망이 활용되어야 한다고 보구요.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그런 방향성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복된 성탄,,,^^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Jae Young Kim 아멘, 소중한 대자보를 붙여주신 노 목사님과 화평교회 부목사님, 그리고 유 교수님에게도 복된 성탄 되시기를....
10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노승수 여러 선배님 교수님 감사합니다. 고견... 그리고 여러 자료를 보시다 이와 관계된 것들이 있다면 부탁하나이다. ^^ 즐겁고 감사한 복된 성탄이시길...
8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3.
노승수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
참고 구절 하나 더 올려 두었는데 어디론가 도망을 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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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 Wha Yoo 썩지 않을 씨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이 두 표현은 헬라어상으로도 동격의 구이지요,,, 헬라어 아나겐나오는,,, 다시 나다,,, 혹은 위로부터 나다,,, 위로부터,,, 곧 성령으로부터 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거듭남은 두 번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즉 성령으로부터 나는 것임을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명확히 하셨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통하여,,, 혹은 무엇을 사용하여,,, 나는가,,, 베드로 사도가 말하듯이,,, 그것은 썩지 않을 씨,,,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겠지요,,, 종합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내적으로 부르시고,,, 그 결과 중생하게 된다는 내용이 되겠군요,,, 썩지 않을 씨,,, 곧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이 되겠구요,,,
3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김홍전 박사님의 말씀대로 저는 여전히 두 싯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첫 시점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믿음이 심어진 시점이고 그로 인해 출생하는 시점이 있다는 거지요. 전자는 무의식적이고 우리 편에 자각이 없는 반면 후자는 의식적이고 우리편에 자각이 있기에 마치 아이를 출생할 때, 모태에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영적 출생도 일련의 과정을 가지리라고 봅니다.
2시간 전 · 좋아요 · 1.
Tae Wha Yoo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를 성경에 근거하여 건넨 것 같습니다,,, 심층심리학의 언급은 아니었구요,,, 그럼에도 한 가지 드는 생각은,,, 무의식적인 믿음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목사님의 신학적인 판단을 따라 하시면 되겠습니다,,, 평안하세요~~~
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그리고 김재영 목사님 제가 알기로 성경에서 팔링게네시아의 용레는 단 두 차례로 알고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 우주를 새롭게하시는다는 용례로 하나는 디도서에서 중생의 씻음, 곧 세례시에-세례가 가지는 그리스도의 두 사역 곧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는(롬 6장)-에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용례는 새롭게된다는 점에서 new birth에 더 가까운 거 같고 약 1:18에 "to give birth to"는 적어도 시간적으론 구분할 수 없더라도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시간상에서도 같거나 우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중생이란게 벌코프나 후크마가 설명하듯이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성경에서 두 용례가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칼빈은 구원의 과정이란 넓은 의미로 중생이란 말을 사용한 거 같고 후대에 17세기 개혁신학이 정교화되면서 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서 하나님이 출생시키는 사역에 관하여 성경을 통해서 변증을 한 거 같습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성령으로 인치심들은 성경의 여러 용례들을 볼 때, 적어도 그 시점이 믿고 회개한 이후에 선물로 주시는 것이고(행 2장) 이는 넓은 의미의 중생이 실현되고 나서 우리 편에서 인지하는 의미의 중생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와 관게된 자료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까닭은 최근<결단주의적 기독교>나<신-산데만주의>의 출현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교회 전도 집회에 나와서 연예인 불러다가 이런 저런 오락을 즐기다가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말씀선포 그도 죄에 대한 지적은 다 빼버리고 쉽게 말해<꼬시는 전도>를 하고 그들이 결신카드를 내고 교회에 등록하면 몇가지 교육을 거쳐 그들을 신자로 간주한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들의 이런 신학적 행위들은 중생이<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란<전제>를 마치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가 결심하면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한 일이 목회 현장과 교회 속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선배들의 중생론과 성경의 주해들을 유심히 추적해 가다보면 성령에 의한 중생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이겠지요...
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2.
Tae Wha Yoo 출판된지 조금 오래된 책이긴 합니다만,,, 김지찬 교수의<언어의 직공이 되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책명이 정확한지는 확신이 없습니다,,, 기억이 오래되어서,,, 성경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노승수 네 고맙습니다. 교수님..
2시간 전 · 좋아요 취소 · 1.
윤영상 좋은 토론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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