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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에서


노승수 목사


우리는 영적이다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비전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비전에 대한 생각들은 대단히 왜곡되어 있다. 잠언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에 묵시가 바로 비전인데,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전은 말 그대로 계시적 성격이 강한 것이다. 비전은 지금 우리 교회의 문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우리가 갖는 여러 가지 열망과 꿈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우리가 갖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가져지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우리의 가진 꿈들을 포기할 때, 비전은 우리를 찾아온다. 
월터 트로비쉬는 "파란 불꽃의 사랑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결혼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자매들에게 꿈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대로의 내용은 아니지만 대충 그 스토리를 옮기자면 꿈많은 여대생이었던 영희는 로맨틱하고 시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자상하게 사랑을 속삭여 줄 어떤 멋있는 백마탄 왕자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상 선을 통해서 만난 남자는 건축공학도였고, 자신의 생각처럼 로맨틱하거나 문학을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하 스토리는 생략하고- 그녀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과 상념에 잠긴 채로 길을 가다가 강위로 가로지른 다리 가운데 와서는 한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 강물을 노을 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강물 위에 비친 다리의 그림자를 보고 그 다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 형제가 만날 때마다 말하던 건축의 조형미가 그녀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이것이 비전이다. 우리의 꿈이 접어지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성경은 일컬어서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때묻고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욕망을 일컬어서 성경은 한번도 비전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비전은 그러므로 꾸어지는 것, 받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비전으로 주실까? 비전을 받았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잘 검토해 보라. 그들은 사실 미래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자신들의 현재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지금을 그리고 여기에서 살지 않는다. 현재를 내일의 염려와 걱정으로 채우고 어제의 후회나 회한, 분노 등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을 경이로움으로 대하여 보라 오늘을 체험하여 보라. 우리는 경험을 놓치고 있다. 고장난 레코드 마냥 똑같은 것을 매일 반복해서 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주님은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하셨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같은 시간을 주신 일이 없다. 늘 새로운 시간을 주시건만 우리는 그것을 늘 똑같은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전이라는 영적 계시는 바로 지금, 여기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난외주를 보면 기회를 사라고 되어있다. 지금 천국을 살지 않는 자가 다음 세상에 천국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이점에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은 천국을 연습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하나님의 레슨이다. 그렇기에 더욱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잠잠히 하여 내 삶을 향하여 넘실대며 다가오는 삶의 파도를 타라. 지금 여기의 영성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레슨을 흥미진진함과 기대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전인 것이다.



2009.0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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