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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자기부인의 딜레마

자기부인의 딜레마


노승수 목사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만약 예수께서 자기부인만을 말씀하셨다면 예수의 말씀은 인류사에 빛을 남긴 여러 성인들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자기부인에 관한 전통은 각각의 종교적 전통 속에 면면히 내재해서 흐르고 있다. 모슬렘, 힌두교, 불교, 유대교에도 자기부인의 전통이 있다. 
자기부인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은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부인이 없다면 은혜가 임할 수 없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존재해야 한다. 너무나 낮은 자존감은 오히려 자기를 지키려고 강하게 몸부림치기 때문에 자기부인에 방해가 된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제대로 부인하려면 높은 자존감 즉, 자기가 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자기부인이 갖는 딜레마이다. 
자기부인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아마도 은혜 없이 구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기부인은 누가 하는가? 그것 역시 자기 아닌가? 그래서 아마도 유대인들은 율법의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함정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부인하여도 부인하는 자는 남는다. 이것은 또 다른 자기가 된다. 우리의 자아는 너무나 교묘하다. 그것을 결코 스스로 죽으려 들지 않는다. 자아는 자살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존하는 법을 안다. 자아와 죄는 다른 말이 아니다. 그것은 동의어이다. 죄는 결코 죽으려 들지 않는다. 그의 실존은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렇다고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말라.
또 다른 자기부인의 문제는 자기를 알아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르는 자기를 어떻게 부인하는가? 그러면 알면 어떠한가? 그것을 아는 자 역시 자기 아닌가? 그러나 모르는 편보다 아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무지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는 것의 형편이 더 낫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기부인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많은 경우에 자기부인을 어떤 행위로 오해하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어떤 종류의 행위가 아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다면 그 노력하는 자는 결코 부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안하고는 그분의 선택이다.
복음의 위대성은 자기부인에 있지 않다. 자기부인은 단지 몽학선생(갈3:24)에 지나지 않는다. 복음의 위대성은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에 있다. 우리는 누구도 그것에 저항 할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자기부인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정직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막다른 길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Selection)에 따른 은혜만이 이 막다른 길의 돌파구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시기까지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얼마나 무력한 존재였는가? 그들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렸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뭔가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을 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본문에 의하면 믿음의 원인은 은혜이다. 이 믿음 가운데 성공적인 자기부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자기부인은 일종의 부정적인(negative) 길이라면 믿음은 긍정적인(positive) 길이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1:12)라고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천사들도 우리를 흠모한다고 한다. 심지어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의 뉘앙스는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성경의 증거를 나는 사실로 느끼고 있는가? 성경의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우리는 불신자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미운오리라고 믿고 있는 백조와 같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 엄청난 유전이 묻혀 있어서 부자임에도 이를 모르고 가난하게 사는 가난한 백만장자와 같다. 
청교도(puritan)들의 실패가 바로 이점이다.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는 청교도적 삶의 부정적 측면인 오만한 태도와 순수한 신앙적 경건의 본질을 왜곡하게 했던 무지, 외적으로 경건한 사람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죄성 등 청교도적 삶의 실패를 잘 그려냈다. 초기 한국교회에 이토록 짧은 세월 속에 부흥에는 이러한 청교도적 엄숙주의와 한국 유교문화의 특성이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교도사회가 그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겪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동일한 사회적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데 형식적으로 열심이었다. 자신들이 죄인임은 끊임없이 강조한다.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였다. 그럼에도 죄성은 그들의 삶에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현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나친 엄숙주의는 오히려 자기에 대해 무지하게 만든다. 그토록 부인하고 싶었던 자기는 내 삶에 더욱 은밀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엄습해 오게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해님과 바람의 나그네 옷벗기기 내기처럼 말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나그네는 더 옷깃을 여미게 된다. 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것들(죄)을 우리 삶의 게릴라로 만든다. 그것들은 비정규군이기 때문에 더욱 상대하기 곤란하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는 다윗의 고백을 음미해보라. 다윗은 이 고백을 밧세바를 간음하고 나단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였을 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은닉하기 위해 숨거나 증거를 인멸하려들지 않았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바로 은혜이다. 은혜가 없는 자기부인과 죄의 강조는 그들의 죄를 은밀하게 만든다. 그들의 실패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면서 은혜의 선물은 잊어버렸다. 부정적인(negative) 길은 있었지만 긍정적인(positive) 길은 없었다. 자신이 죄인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 그것이 믿음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말라. 그것을 겸손이나 교만으로 오해하지 말라. 참된 겸손은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분에 음성에 귀기울여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말한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무엇을 실상, 즉 현실로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우리의 생각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 흐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 또는 느낌, 정서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적 불신자가 아닌지 점검해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을 이러한 두 가지 길의 조화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009.01.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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