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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1) : 교만

치명적 죄와 중독(1) : 교만


노승수 목사

 

교만 :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거부함

 

영어 사전은 교만을 이렇게 정의한다. ‘과도한 자기 존중’(Webster), ‘무모한 우월감... 자신의 자질에 대해 오만한 의견’(Oxford English).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교만은 외양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인간이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supra) 곳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을 수퍼비아(superbia)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제로 라틴어 수퍼피아위에 있는 것을 목표로 하다라는 의미히다. C.S. Lewis<단순한 기독교>에서 교만을 사랑이나 만족, 심지어 상식의 가능성을 먹어치우는 영적인 암이라고 불렀다. 죄의 본질은 이기주의이며, 교만은 지나치게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창세기 3:1-5에서 아담의 첫 번째 죄 역시 바로 이 교만에서 출발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보다 더 낫게 보이고자 한다. 앞서 설명한 아퀴나스의 설명대로라면, 자신의 한도를 넘으려는 사람은 교만하다고 할 수 있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부터 시작된다. 교만은 죄가 솟아나는 샘과 같아서, 그 샘을 버리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제프리 초서 목사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는 모든 해악의 총체적인 뿌리인 교만이라고 했다.

 

교만은 자랑과 과시라는 면도 물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피하고자 그분을 회피하고 벗어나려는 태도를 우선 보이며 교만은 서로를 다투게 한다. 교만은 인류 시조의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결심의 재현이며,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태도를 단 두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아모르 수이’(Amor Sui), 곧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밀쳐낸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자신의 것을 앞세운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뜻,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지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회피하려 하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는 것이다.

 

둘째는 아모르 데이’(Amor Dei), 곧 하나님 중심적인 삶,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밀쳐낸다’.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자신의 뜻이나 자신의 지위, 심지어는 혈연 관계마저도 뛰어넘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면서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언제나 자신에게보다는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청하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십자가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가장 교활한 형태의 교만은 거룩한 체 하는 영적 교만이며 겸손한 체하는 교만은 최악의 교만이다. 완벽한 체 하는 사람은 가장 타락이 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서는 사람들이다. 죄의 본질은 이기주의이며 교만은 지나치게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교만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럼 교만이 중독과 어떤 연관을 가질까?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중독에는 자신감의 결여자율성의 결여라는 문제를 가진다고 들었다. 대체로 성인들은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중독이란 증상을 통해서 균형을 이루고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이런 중독으로의 도피를 보인다. 중독의 근원과 교만은 어떤 연관을 가질까?

 

0-3세의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은 대체로 다 경험이 있을텐데, 이 시기의 아동은 타인과 협력하는 놀이가 되지를 않는다. 아이들을 모아 놓아도 따로 노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란 세계 속에 갖혀 있다. 엄마가 유일한 우주이며 세계이다. 엄마는 자신의 다른 이름이며 엄마는 전능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는 심리적 출생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사고방식을 흔히 전능 자아라고 부른다. 대게 어릴수록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영상을 보고 곧잘 모방하는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뉴스에서 아이들이 슈퍼맨이나 타잔 놀이를 하다가 떨어져서 다치거나 죽는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이는 아이들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사고와 전능 자아로부터 출발했다. 이 시기에 아동은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서 첫 번째 성장의 과제를 만나게 된다. 에릭슨의 8단계로 보자면 신뢰와 불신 곧 애착을 안정적으로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숙제로 갖게 된다. ‘안정 애착을 보인 아이는 나중에 사회적 관계리더쉽’ ‘학업 수행 능력에 있어서 보다 높은 점수를 보이는 반면 불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들은 대체로 낮은 점수를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의 과업은 신뢰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 애착 대상의 역할에 의해서 현저히 달라지게 된다.

 

이 시기의 치명적인 죄는 교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건강한 발달은 사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흔히 정신건강이란 나의 감정과 현실이 일치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정신적 불건강이란 이와 반대로 현실과 전혀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이다. 나 아닌 타인과의 소통을 처음 경험하는 시기이다. 앞서 중독은 자신감자율성의 결여로부터 그에 대한 대용물을 찾음으로 생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신감이란 사람에 대한 기본적 신뢰감을 의미한다.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며 자신의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고 상대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주는 공감 능력을 일컫는다. 자율성은 이런 성장의 일련의 작업들이 스스로의 내적 체험과 필요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중독은 자율성대신에 엄격한 자동성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엄격한 자동성은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인 아동이 자신의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는 교만을 약간 다르게 평가했다. 1) 자기 존중, 2) 자기 성취나 소유에 대한 만족으로 정의했다. 만약 이 의견을 따른다면 우리는 건강한 자기 존중을 교만으로 정의해야만 한다. 어니 라센과 케롤 헤가티는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을 위한 <자신을 믿어라(Believing in Myself)>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존중을 함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들을 편안하게 대하고, 자신에 대해 의심을 해 보고,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보다는 얼마나 왔는가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싸움을 동정하는 것과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 사이에는 가는 선이 있다.

자기 연민은 우리가 현실을 못 보게 하기 때문에 자기 존중과 반대로 작용한다. 자기 연민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위를 보지 않고 단지 보이는 부분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을 준비할 때에만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보지 않는 것으로 일할 수는 없다.

 

중독에서 벗어나는데 자신의 가치를 확고히 지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인생에서 행복하고 직장에서 성공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여부에 달려 있다. 떨어진 자기 존중을 높여야 하는 것은 중독이나 의존 상태에서 회복하려는 사람이나 어린 시절에 입은 상처나 아픔의 고통으로 계속 고통 당하는 자들이 치료를 받는 과정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긍심을 갖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의 가치가 우리의 실행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다. 수치심에 대해 나무라는 것과 조금 나은 행동에 대해 우쭐거리를 것을 멈출 때 좋은 자긍심참된 겸손이 나온다.

 

스캇 팩 박사는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마귀의 핵심적 심리를 위에서 말한 자기 연민나르시시즘이라고 보았다. <캔터배리 이야기>의 초서는 교만을 심령의 부풀림이라고 묘사했다. 흔히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 3위가 군대 이야기 이고 2위가 축구 이야기 1위가 군대에서 축구 찬 이야기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에 대한 자기 부풀림이다. 자기 이야기를 군이나 축구라는 이야기 소재를 통해 극도로 부풀려 이야기 하는 습관,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핀 아동의 전능 자아가 가진 사고 방식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심리적으로 태어난다. 이것은 지극히 부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은 그 가능성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기 보다 양육에 의해서 인간의 상태가 바로 잡혀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태는 궁극적으로 현실 속에서 있을 수 없다. 누가 자기 이야기만 부풀려 이야기 하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겠는가?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것은 일정한 정도의 자기 만족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곧 바로 현실에서 그렇지 못함을 확인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무엇인가?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에 대한 과대 포장과 수치심이 반복되면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여러 가지 중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독에서 깨어날 때, 다시 수치심이 그를 사로잡고 그는 더 깊은 중독의 수렁 속에서 자신에 대한 부풀림의 만족을 추구한다. 아이들이 학업에서 성취를 제대로 이룰 수 없을 때,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게임이 가져다는 가상 세계에서의 자기 부풀림에 대한 만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은 자기 이름을 내려는 욕망과 결탁되어 있다. 바베탑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 이름을 내는것이 이것이 교만이라 이름하는 죄의 본질이다. 놀랍게도 11장의 이 사건과 더불어 12장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아이러니하게 대조를 이룬다. 교만이 치명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을 경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만은 모든 중독의 원천이다. 란스 웹(Lance Webb)<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의 정복-Conquering the Seven Deadly Sins>에서 교만을 이렇게 설명했다.

 

각각 다른 여섯가지의 죄들은 아주 명확하게 말하면 교만의 자식들이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탁월하거나 뛰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자애(自愛)이다. 그 결과 미움, 질투, 무절제, 편견, 비방, 잡담하게 되며, 비꼬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키에 맞추는 더욱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분냄은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를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자들에게 적대감과 분노로 주먹을 휘두르는 자애이다. 낙담은 자신을 실망하고 자신을 정죄하는 자애이다. 그 결과 혐오, 무관심, 부주의 그리고 권태다 생긴다. 탐욕은 물질 세계에 자신을 고양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하는 자애이다. 정욕과 탐식은 쾌락과 말초적인 만족에서 자신을 높이려 하거나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피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자애이다.

 

마틴 루터는 칭의의 개념을 유일하게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의 교만이다라고 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의 전적인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감과 그것을 얻기 위한 어떤 노력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에 대한 확신이다. 교만은 자기 연민 속에서 자기를 부풀리며 이름을 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위들이나 능력에 자신의 가치 평가를 의존한다. 이것은 필연 수치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현실은 전혀 이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만은 그것을 행위에서 얻고자 하니 구원의 선물을 받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이다. 교만은 인간의 최대의 창조물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은 바로 이 교만을 치료하는 것이다. 교만은 우리의 눈을 가리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내 눈의 들보이다


*이 글은 강의안입니다. 각주나 출처는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