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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2) : 시기

치명적 죄와 중(2)  : 시기

 

노승수 목사

 

시기 : 악한 눈으로 저지른 죄

 

시기는 언제나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사실에 근거한 비난, 혹은 사실에 가장 근접한 비난을 제기한다. 그것이 상처가 더 깊다.

 

시기라는 단어는 악의를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에서 유래했다. 신약성경에서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악한 눈을 갖다는 뜻이다. 시기는 7가지 치명적인 죄 가운데 가장 더럽고 추악하고 야비하고 불쾌한 것으로 불린다.

 

시기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한탄한다. 우리 민족은 시기와 관련이 깊은 민족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조선은 당쟁의 역사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북인의 영수는 남명 조식, 남인의 영수는 퇴계 이황(영남학파, 주리파) 노론의 영수는 율곡 이이(기호학파, 주기파) 소론의 영수는 우계 성혼(강화학파, 양명학 연구)등으로 갈리었다. 시기는 이글거리는 석탄처럼, 때가 되면, 스스로를 태워 없앤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시기는, 의복을 갉아 먹는 좀벌레처럼, 사람을 갉아 먹는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경쟁자들을 해롭게 하는 것이 시기의 본질이다. envy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소유를 부러워하는 것이라면 jealousy는 상대의 재능이나 소유를 빼앗으려는 마음이다. 헬무트 쉐엑은 시기는 탐나는 물건을 갖고 싶어하지도, 그것을 즐겨하지도 않고 다만 다른 누군가 그것을 갖는다는 사실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다.’고 했다. 시기는 단순히 다른 누군가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는, 어떤 사람의 좋은 것이 우리의 좋은 것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좋은 것을 두고 통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이 시기이며, 언제나 죄악이다라고 했다. 시기는 리바운드의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상대 선수를 밀쳐 내는 농구 선수처럼, 상대방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낸다. 시기는 교만에 뿌리를 두고 증오의 꽃을 피워올린다. ‘악의적 기쁨을 뜻하는 독일어 schadenferude가 선명하게 드러 내어준다. 쇼팬하우어는 시기를 인간 본성의 가장 나쁜 특징이라고 했다.

 

시기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두 감정 모두와 손을 잡고 걷는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그 점을 과시한다. 반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연민하고 차이를 없애려고 애쓰며 번번히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들추어냄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축소시키려 한다. 그럼에도 교만한 사람들과 달리 시기심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시기는 단 한 번의 기립박수도 먼저 제안하지 않는 악덕이다.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시기를 일체의 미덕과 선함을 반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가장 나쁜 죄라고 불렀다. 4세기의 교부 가이사랴의 바실은 사람의 영혼에 뿌리 내린 시기심보다 해로운 악덕은 없다. 활력을 갉아먹고 결국 그를 다 태워 없애버리는 질병이며 가장 미개한 형태의 증오'라고 했다.

 

본래 7가지 치명적인 죄들은 반대되는 덕이 있다. 교만은 겸손, 식탐은 절제 등, 그러나 초서에 의하면 더러운 죄이며 최악이다. 왜냐하면 모든 덕과 선함을 비웃기 때문이다. 성경은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27:4)

 

시기는 모두가 범하지만 아무도 고백하지 않는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알아차릴만한 몇가지 징후가 있다. 첫째는 앞서 여러 차례 언급된 악의이다. ‘해를 끼치려는 악한 의지가 이런 시기의 징후이다. 다른 징후는 질투이다. 대개 목사들이 다른 목사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징후는 낙담이다. 근본적으로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은 배아파한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낙담한다. 시기의 네 번째 징후는 위선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시기는 우리를 그와 반대로 행동하게 한다. 시기에는 진정으로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체 하게 된다. 마지막 징후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시기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게 한다.

 

성경적으로 보면 시기는 성경에서 두 번째 등장하는 죄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지위를 넘보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게 한 것이 두 번째 등장하는 죄이다. 성경에서 다윗과 사울의 사례, 요셉과 그 형들의 관계에서도 시기를 엿볼 수 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속에서 살리에르의 시기를 엿볼 수 있다. 하늘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방탕한 모차르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열망하지만 재능이 없는 살리에르, 살리에르의 시기는 결국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 독백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게는 허락하시고 자신에게는 주시지 않은 재능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했다. 시기는 살리에르에게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며 그를 미치게 했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음으로 몰고 가듯이, 시기는 살리에르에게 치명적이었다. 시기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오디디푸스적 요소를 가진다. 엄마와의 동일시의 관계의 발달이 있은 후 아동은 삼자로서 아빠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한다. 이는 남성이나 여성 할 것 없이 엄마를 아빠와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시기에 유혹에 직면한다. 어쩌면 시기는 교만에서 파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능자아를 가진 아동이 타인과의 교류가 전혀 없던 아동이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을 내것으로 삼고 싶은 유혹이 내재적으로 존재했다. 다만 타인을 의식하기 전까지 그 죄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마태복음 20장에 시기에 대한 또다른 신학적 성찰을 발견할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아침부터 한데나리온을 약속하시고 포도원에 들이신다. 거의 1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에 들어온 이가 먼저 한데나리온을 받자, 아침 일찍 들어온 일꾼은 저가 더 받을 줄을 생각한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한 데나리온 이를 원망하자, 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앞서 시기에 대한 정의를 언급할 때, 시기는 악한 눈으로 보는 것 곧 인비디아(invidia)라고 했다. 지금 이 일꾼의 죄는 바로 시기의 죄이다. 시기는 선한 것을 선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사실 이 일의 본질은 주인이 그 일군들에게 자신들이 한 것보다 품삯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악하게 보는 것 그것이 시기이다. 시기는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깨닫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선하심도 기뻐하지 못하게 한다.

 

놀랍게도 이 시기는 기이하게 우리 삶에 나타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시기하기를 바란다.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길 바라고 그것을 즐긴다.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부러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시기를 산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자리를 부러워한다. 이것은 시기의 또 다른 모습이다. 토니 캠폴로는 시기에 대해 일종의 악한 심리학적인 성취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경제 이론가 중의 하나인 토르스타인 베블린(Thorstein Veblen)은 사람들의 소비 습관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게 함으로서 얻는 정신적인 즐거움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물건은 매우 비싸다고 널리 광고함으로 특별히 좋은 품질이 아닌 물건을 사람들이 사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블린이 과시적 소비라고 부른 이 습속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싼 자동차를 사도록 자극한다. 왜냐하면 이 자동차는 매우 비싼 것이라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산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비 심리학적 성찰은 시기와 중독의 관계에 대한 단초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람들은 왜 쇼핑에 중독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특별히 여성에게 많은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준다. 쇼핑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은 시기에 빠져있다. 승려 법정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들을 난 당최 이해 할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얼핏 듣기에 매우 선한 양심의 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지 않는다 하여 지옥 불에 던지던 신이던가? 오히려 다 지옥에 갈 판에 믿음이란 구원의 도리를 베풀어 구원의 길을 주었더니 시기에 찬 눈으로 신을 악하다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도리는 믿지 않는다 하여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창조주의 선함과 자비를 기억치 않고 도리어 배반하고 대적하고 미워하는 까닭에 다 멸하여도 유구무언이거늘 하나님이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믿음이란 구원의 도리를 허락하시고 아무도 창조주를 찾지 않는 까닭에 추적하고 추적하여 반드시 건져내고 구원해내는 믿음의 도리를 주신 것이 악하다고 칭하여져야 하는가? 이는 시기에 찬 눈이요. 자기의에 가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시기는 악의에 찬 눈이요 그것은 사태를 삐뚤어지게 보게 만든다. 시기에 대한 해독제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감사만이 시기를 근절한다. 그러나 감사는 역시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피죽도 못얻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비로서 죽 한 그릇도 감사하게 된다. 자신이 날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있다는 이 시기에 찬 눈은 자신의 비참함을 눈뜨고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기를 도리어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사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일과 자신을 아는 일은 결코 따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자신을 모르는 것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요. 자신을 아노라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역시 참되게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다. 시기는 이처럼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살리에르가 시기에 눈이 멀어 자신과 모차르트의 삶을 망친 것처럼 시기는 중독을 가져다주는 악덕이다.

 

중독은 이를테면, ‘유사 만족이다. 실연을 당한 여인이 사랑의 만족감 대신에 음식의 만족감에 집착하게 되는 것, 그것은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놀랍도록 유사하기 때문에 마치 다른 사람의 시기어린 눈을 바라면서 명품 비슷한 짝퉁을 구입하는 것처럼, 시기는 왜곡된 눈으로 중독과 파멸을 불러온다. 시기는 허영과도 결탁이 되어 있다. 이부분은 호색에 관해 다루면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자


*이 글은 강의안이다. 각주와 출처는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