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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위격(person)과 양식(mode)
위격의 개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위격이라는 개념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좀더 보강된 용어로서 양식(mode)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이를 대치하고자 했다. 위(person in the trinity)의 통념적 이해를 지적하는 쉬이벤(M.J.Scheeben)의 주장을 근거하여 위로는 표현이 부정확한 부분을 양식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보충 설명하려 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라는 용어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삼위 사이에 존재하는 각각의 상대적(비교적) 특성(relative signification)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삼위에서 아버지도 위이고, 아들도 위이고, 성령도 위로서 일위(the first person), 이위(the second person), 삼위(the third person) 같은 위의 개념으로는 아버지 됨과 아들 됨과 성령 됨의 구별되는 특성을 표현하는데 상대성이 부재하는 문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위(person, position, mask, role)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개념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 같은 구별성(distinction but no separation)을 강조하려는 본래의 의도를 무색하게 하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에게 삼위일라 함은 삼위(the three persons)의 특성들을 분리 없이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구분함을 의미한다. 위(person)의 용어는 교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지만, 바르트는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 가운데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계시는(있는) 한 분 하나님의 존재(본체)의 세 가지 독특한 양식들(modes)이라 칭한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이러한 관계성, 곧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의 관계성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요 그분의 존재(being)임을 강조한다. 즉 바르트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guishable)되지만 분리되지 않는(inseparable) 상호내재적 관계(subsistent relations)로서 발견되는 외적 행동(opus ad extra)을 하나님의 본질(opus ad intra) 곧 존재 양식(mode of being)이라 말한다(C.D. I/1, 333, 364). 그러면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관계성 안에서는 각각의 양식(mode)은 서로를 한정(condition)하며 구성(form)하고 구별(distinguishable)되지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상호교류적 행동(mutual action)과 상호 침투(inter-penetration)로서 연합을 이룬다(C.D. I/1, 370, 396)고 한다. 
이와 동시에 바르트는 성부가 삼위의 근원(orgin)이시며 성자와 성령이 그 근원으로부터의 발출(나옴, issue)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필리오케를 또한 옹호한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교제의 행동과 본질로서의 사랑인 성령은 아버지의 성령과 아들의 성령이라 부르는데, 이는 곧 서웁와 성자가 성령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부의 신성은 오직 성부로부터 기인하며, 성자의 신성은 또한 오직 성부로부터 기인하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발행(to proceed)한다고 바르트는 정의한다.
그러면서 군주론이나 종속설에 관해서는 비록 성삼위의 관계성 내에서는 유기적이고 상호 보완적 위계 관계(hierarchy)가 존재함을 강조하지만, 이는 외적인 경륜적 관계(opus trinitatis ad extra)를 일컫는 것이지 결코 내재적 관계(the immanent Trinity)안에서 서로 간에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분리(separation)를 인정하는 군주론이나 종속설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C.D., I/1 470,479). 
이러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modalism)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양태론은 단지 ‘한’ 양식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그렇지 않다(물이 얼음이든, 물이든, 수중기든 한 계기에는 한 양태로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양태론이다). 그렇다고 양극(two poles)을 이루는 정(thesis)과 반(anti-thesis)이 점찬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객체, 즉 합(synthesis)이 생성되는 헤겔의 변증법의 원리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론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synthesis)의 단계에서도 신서오가 인성이 서로 양극을 이루며 분리나 변질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연합하듯이(co-inherence, subsistent relations), 기독론의 원형이며 본체인 삼위일체의 본질은 성삼위가 서로 구별되지만 섞임(mixing)이나 변질(change or transmutation) 또는 분리(separation) 없는 서로간의 완벽한 동시적 상호 침투(mutual interpenetration at all points and times)와 연합(unity)을 이룬다. 이러한 관계 속의 역동성을 교부들은 perichoresis나 circumincessio같은 용어 처럼 “완벽한 상호침투”(inter-penetration at all points)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성삼위의 완벽한 상호침투적, 상호보와적 ‘행동’ 그 자체이다(divine essence=divine action).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 믿음의 유비(analogia fidei)
바르트는 유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유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고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곳(ground)이다.”(Barth, “Karl Barth’s Table Talk,” 66) 왜냐하면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계시를 받는 상대와 의사소통하시는데 그 대화의 창이 인간 언어의 유비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비법은 바르트에게 신학의 기본적 수단이자, 필수적 장소가 된다. 
바르트는 처음에 카톨릭의 존재의 유비를 비판하였다. 오히려 그는 신앙의 유비를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서 강해로부터 견지해 오던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듯,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영원한 단절(diastasis)을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후에, 쇙엔(Gottlieb Soehngen)과 발타자(Han Urs von Balthasar)의 연구를 통해서 그는 존재의 유비와 믿음의 유비의 상보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1956년 그의 저서인 “하나님의 인간성(Humanity of God)에서 존재의 유비에 관한 자기의 독단적이며 극단적인 이해의 오류를 인정하며, 유비의 상보적 특성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믿음의 유비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발타자가 제시한 것 처럼 “믿음 안에서의 이성”, 곧 믿음의 유비 안에서의 존재의 유리(analogia entis within analogia fidei)라는 유비의 상보성을 받아 들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앎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간접적인 양식으로 전해지는 계시를 이성의 수단으로 인식하며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단절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유비의 상보적 특성의 관점에서 ‘간접적 유사성’을 논할 수 있다. 간접적 소통(indirect communication)은 직접적 동일화(direct identification)와는 다른 것으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더 큰 비유사성 안에서 유사성을 부각시키어 하나님의 은혜로 소통하는 것이다(C.D. I/1, 239). 
그래서 변증법적 신학자로서 바르트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어 있는 피조세계에서 실존적 인간이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being)와 행동(action)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적 계시와 인적 언어, 믿음과 이성, 무한성과 유한성 등의 대치되는 양극적 요소들의 비유사성 안에서 유사성의 상보적 관계를 적절히 유용하여야 하는 점을 잘 지적하였다. 이 양극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서로 무리 없이 공종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곧 그가 말하는 관계적 유비(analogia relationis)이다. 바르트는 유비의 상보적 원리의 바탕이고도 한 신성과 인성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적 존재론(dynamic and relational ont ology)을 인식하고 발전시킨다. 이는 아퀴나스가 제시한 것과 맥락이 같으며 바르트도 이를 신론과 기독론에서 유용하고 적절하게 사용한다. 바르트는 그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의 상호침투적 존재(perichoretic being), 곧 무한과 유한을 연결하는 유일한 상보적 중재자로 정의한다. 그러며넛 창세기 1:26절을 주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상보적 관계의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형상(vestitigium trinitatis)이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상보적 관계의 존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와 유사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도 유비적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관계(the Trinitarian rel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선의 상호내재적 관계(perichoretic relation)의 존재를 통해, 곧 직접적인 동일화가 아닌, 간접적인 유사성을 통해 계시됨을 알 수 있다. 분명, 예수님의 상호침투적 존재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성(the trinitarian perichoresis)과 에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성(the christological perichoresis) 사이의 이질적이지만 비슷한 특성에 관한 유사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서 신성과 인성의 상호침투적 관계 안에서 공존하시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관계적 존재의 간접적 형상이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관계적 유비를 통해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 이레네우스, 후에 아타나시오스 같은 교부들의 입장과 비슷한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God’s mode of being)을 사랑과 자유 안에서의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의 양식인 성부, 성자, 성령 간의 사랑의 관계성(subsistent relations of love) 그 자체로 해석한다(C.D. I/1. 239,366). 그래서 존재란 행동 가운데 표출되는 관계성 그 자체이다(being=relation=act). 
['칼 바르트의 상호침투적 삼위일체론'(오순석)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