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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예전에 어느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출처가 확실치 않을 수도 있지만 꽤 의미 있는 이야기라서 다시 기억나는대로 옮겨 봅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이 요리를 하는데 집 안에 굴뚝이 없는 채로 매운 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요리를 하는 아낙들을 보고서 선교사가 굴뚝을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아낙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이 집들은 개미들 때문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지 개인이든지 뭔가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의 균형점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분석 책에 나오는 하나의 사례를 옮겨 보겠습니다.

 

엄마와 지나치게 결탁되어 있던 딸을 의사는 계속해서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분리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리의 과정을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엄마가 자살을 해버린 것입니다. 치료는 중단되었고 환자의 상황은 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귀신이 나가고 보니 집이 정리되어 있어서 거할 곳을 찾지 못하던 귀신이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 상황이 더 나빠진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눅 11:24-26).

 

누가복음 11장에는 세 개의 경우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것을 놀랍게 여기는 무리들(눅 11: 14)과 귀신을 힘입어 그런다고 믿지 않던 무리들(눅 11:15) 이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이 나감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나서(눅 11:16-26) 예수를 찬양하는 여인(눅 11:28)이 등장한다.

 

이 세가지 경우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일 수 있습니다. 자기 세계에서는 온전한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소한 변화에도 위에서처럼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고 극것은 마치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거하는 것처럼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변하려면 예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는 말씀처럼 우리가 얻는 영생의 복은 그 말씀을 지키는 데 있으며 그 말씀은 다름이 아닌 다음에 이어지는 요나의 표적으로 은유된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처럼 고해-보속-사죄의 구조가 아니라 사도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믿음-율법에 의해 무능력을 확인함-은혜의수단-율법의 요구에 응하게 됨(롬 8:4)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누가복음의 그리스도는 가장 율법주의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조가 아니라면 일곱 귀신 든 자처럼 우리 자체의 스스로의 청소가 오히려 우리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빚을 것입니다.

 

우리 나름의 최선은 긍휼과 불쌍히 여김의 조건일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도리어 우리 형편을 더 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사악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3년 12월 19일 이진우 씨는 동작대교 중간에서 자신의 아들과 딸을 한강을 내던졌습니다. 지나가던 소설가 서현우씨가 이 장면이 목격하고 차량번호를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렇게 잡히게 된 범인은 현장 검증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기자 :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범인 : 착찹하고 괴롭습니다.

기자 : 왜 그랬습니까?

범인 : 살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기자 : 그럼 왜 같이 안 죽었습니까?

범인 :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다.

기자 : 기독교인인데 사람은 죽여도 괜찮습니까?

범인 :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곱 귀신에게 장악당한 은혜를 모르는 기독교인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11장의 회중들에게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우리 행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해 은혜로 나가는 자만이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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