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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목사가 지닌 한계와 그 너머

 

 

노승수 목사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공동체여야 하지만 현실 교회들은 지역적인 색깔이나 계층적인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현상을 벤게메렌은 "현실정치"라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에 백성대중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현상을 두고 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진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진 자의 편으로 더 기울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더 가난한 자의 편으로 기울어지는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맑스는 물적 토대가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유물론에서 비롯된 통찰이지만 놀랍지 않습니까? 그가 처한 현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3:2). , 목사는 가진 자의 편이나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마저 허무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했고(2:14) 실제로 교회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일 때, 계층의 갈등이나 양극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4개나 받았습니다.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얻는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잘 다루었습니다. 그리스어로 기생충(Παράσιτα)남의 식탁에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묘사는 훌륭하지만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현실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문제로 사회를 통합하기보다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목사는 어떤 사람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고 위의 가치를 구함으로 참으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양극화의 문제든지,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문제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다수의 회중의 목소리가 목사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벤게메렌이 말하는 현실정치의 성경 속의 구체적인 사례를 예레미야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까불지 말고 바벨론에게 포로로 가라. 이것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과 거기에 편승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유다와 그 선민인 그 백성을 버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외쳤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을 맞아 유다는 여러 다른 정치적이며 종교적 메시지로 인해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았던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를 취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버렸습니다.

유대 백성의 시각에서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비쳤고 거짓 선지자들은 애국주의자이자 참 선지자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현대 한국 사회의 상황과도 너무 잘 어울립니다. 지금에 관점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마치 일본이나 북한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며 나라를 파는 매국노처럼 보입니다. 내부적 논리로는 일본을 혐오하는 것이 더 인기 있을지 모르며 북한에 대한 경험적 반공주의를 부르짖는 태극기 부대의 메시지가 더 정당해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상황을 경험적으로 보면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을 향해 토착 왜구라는 표현과 함과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보이며 보수 진영은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반공 이미지와 기독교가 완전히 결탁된 상황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더 인기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어 했던 소리였습니다. 벤게메렌은 다수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현실정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이런 현실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경의 메시지여야 합니다. 우리가 물적 토대인 생산수단에 기대어 살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며 목사가 지닌 태도가 중요합니다. 오늘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현실정치화한 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촛불집회와 태극기부대에서 같은 성도들끼리 척을 지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란 단지 설득의 절차만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목소리는 소수자 문제를 들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가 틀렸다고 합니다. 지금 자라는 세대의 젠더 교육에 이런 시각이 가득 담겨 있기도 하죠.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과 성경이 하나님과의 관계 왜곡에서 비롯된 죄로 정죄된 동성애는 별개로 다뤄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도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때로 매국적 상황을 부르기도 하며 때로 사회적 상식에 반하기도 하며 다수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기도 합니다.

목사의 시각은 교회의 양무리를 목양하면서도 시선은 그들과 맞추면서도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나이 드신 목사님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때,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젊은 목사들이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속한 시대의 다수의 대중에 목소리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되고 말테니까요. 목사는 자신의 속한 그룹의 한계를 넘어 성경에 그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