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 없는 음해를 받은 지 1년 여가 지났군요. 지나고 돌아보아서 여러분이 읽었던 이 요약이 더 잘 이해되었다면 지난 한 해 당했던 어려운 일이 무의미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이전 시기에는 의화라 하고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죠. 왜 그랬을까? 생각이 있다면 이 지점을 잘 궁구해보면 개혁자들이 왜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실 아직도 로마 가톨릭은 의화라는 표현을 쓰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구원에 우리 행위가 가미되는 세미펠라기즘을 고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계속되는 논쟁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가 개입될 여지를 막기 위해서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것 전체를 그리스도께 돌렸습니다. 이것이 칭의고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는 이 부분을 가지고 고해와 보속의 교리를 주장했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혁파는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돌릴 뿐만 아니라 우리 상태가 부패해서 의를 행할 수 없는 상태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적인 원의의 주입 곧 믿을 때 하나님의 형상의 주입을 거절하고 이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는 의가 바로 칭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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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_교리와 구원론
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됩니다.
죄책은 "#행위_언약"을 근거로 #직접_전가 됩니다.
오염은 #생육법을 따라 부모를 매개로 #간접_전달 됩니다.
죄책은 #벌책과 #범책으로 구성됩니다.
#벌책은 #그리스도의_수동적_순종을 통해 원죄책과 자범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을 사함받습니다.
#범책은 일단 성립되면 용서로 사면되지 않습니다(벌코프 449).
#범책은 전가되지 않습니다.
#범책은 원죄에서는 성립하지 않고 자범죄에서만 성립합니다.
#범책은 더럽혀짐(defiling, 벌코프 462)이며 그 결과 #오염을 야기합니다.
#중세신학은 오염 개념이 체계화되지 못했습니다.
#중세신학은 #원죄의_상태를 #의의_부재로 이해하며 중립적이고 정욕은 단지 죄의 재료일 뿐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17세기 신학과 #WCF은 #죄책과 #오염 개념을 명확히 하고 이것의 제거로서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명확히 하되, 구분하지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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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문 : 아담의 첫 범죄transgression 안에서 모든 인류mankind가 타락하였습니까?
답 : 아담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신 것은 아담만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그의 후손posterity까지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그로부터 "#보통_생육법_ordinarygeneration"으로 출생하는 모든 인류는 모두 그의 안에서 그의 "#첫_범죄에_참여하여" 그와 함께 타락하였습니다.1)
1) 창2:16-17; 롬5:12; 고전15:21-22
"#보통의_출생(생육법)"이란 "#아빠의_정자"와 "#엄마의_난자" 간의 #수정을_통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정요석
#소요리문답_삶을_읽다 216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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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_문답의 증거 구절 로마서 5:12은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후기,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통해서 확립됩니다. 어거스틴은 구절을 주해하면서 모든 인간은 ‘씨앗 형태’(ratione seminali)로 아담 안에 있었고 부모의 육체적 관계로 출생할 때 죄를 물려받고 출생하는 것으로 원죄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이 어거스틴의 간접적인 전달 방식의 설명이 지닌 문제점은 이런 방식이라면 후대로 갈수록 점점 악화되어야만 하는 인간성의 부패가 나타나야 하지만 우리가 관찰하는 바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17세기 신학자들은 "#벌책의_전가"와 "#오염의_전달"을 구분합니다.
그 벌책의 전가를 설명하는 언약 신학이 바로 WCF의 신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행위언약 교리입니다. 창세기 3:15 이하를 모두 은혜언약이라고 봄에도 불구하고 WCF나 페스코 등이 그러하듯이, 모세의 시내산 언약의 성격을 행위언약적 성격으로 규정합니다(WCF 19. 2.). 이 율법의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 시효가 만료되었으며(WCF 19. 3-4.), 도덕법으로서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며 십계명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WCF. 19. 2.). WCF의 이 같은 진술은 우리가 행위 언약 아래 있지 않지만(WCF 19. 5.), 우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이 언약적 요구가 만족되어 짐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이를 WCF 19. 5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the perfection of his obedience이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벌책은 은혜 언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전가받음으로 해결됩니다. 이 행위 언약의 완전성이 하나님의 만족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전가가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수동적 순종은 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순종하신 순종의 정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범책으로 말미암아 우리 존재에 스며든 오염을 성령을 통해서 제거하시는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통해서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따라 성령께서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삶에 적용하심으로 오염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염의 제거에도 남는 범책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로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의롭게 된 죄인"으로 우리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약화는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인식의 약화,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의 약화, 구원론과의 연결의 약화를 불러서 성화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무력하게 합니다.
이처럼
#원죄의 교리는 구원론 교리와 연결됩니다.
#벌책은 #칭의를 통해서 제거되며
#오염은 #성화를 통해서 제거됩니다.
#칭의는 법정적이며 믿는 순간 완결됩니다.
#성화는 존재적이며 점진적으로 죽음까지 계속됩니다.
#성화를 위해서 #은혜의_방편을 주셨습니다.
#원죄_교리, #행위_언약, #칭의, #성화 는 이렇게 서로 맞물리는 교리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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