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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로마서강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준다(8:31-39)

<강남성도교회 주일공동예배> 2017. 2. 19.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준다(8:31-39)


노승수 목사


1. 실패의 자리에서 보는 승리의 전망, 영광의 확신(31-36)
우리는 지난주 그리스도와 상속자인 우리가 어떻게 함께하며 그렇게 함께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첫 열매로 주어진 성령으로 인해 그 간구하심으로 우리는 맏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지닌 지위에 걸맞게, 그 영광의 규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도 성령의 간구하심으로 우리가 맏아들처럼 상속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허무한 데 굴복하던 피조물이 아들이 나타남으로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참예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소망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성령의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상속자의 관계와 상속자들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확장하며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마치 한 알의 밀이 떨어져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맺는 것처럼 급격하게 확장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죄의 승리처럼 보이는 현실(3:5-8, 6:1, 15)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기도 합니다. 6-8장의 논의는 이제 결론으로 치닫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지켜 주심과 건져 주심의 확실함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 편이라는 점을 든 것입니다. 특히 자기의 아들을 인간의 곤궁한 현실로 내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으며 이 내어 주심이 다른 모든 것까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사랑의 표지라는 점을 드러내신 것입니다(31-32).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기에 여기에 맞서서 무슨 시비를 걸거나 고발하는 이는 아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무소불위에 권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딴지 걸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당해야 할 정죄를 위해 내어 주심으로 우리 모든 죄를 청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를 그와 묶인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성 시비에 관한 논변(6-8장)의 결론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리고 우리 범죄에 대한 모든 고발에 있어서 하나님 가장 가깝게 그리고 그의 권능의 편에 선 변호인이자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33-34). 이미 여러 차례 우리 구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묶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17절에서부터 설명된 이 묶임의 결정적 본문은 바로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표현에서 드러납니다. 상속자로서 묶임은 영광을 위한 고난도 함께 받기 위한 사랑의 묶임이었기에 그 누구도 무엇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절 하반 절에 “환난과 곤고나 박해나 기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은 36절의 인용과 함께 이해하셔야 합니다. 35절은 시편 44:22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하나님께서 헐값에 파시며 버리신 것을 한탄하는 시입니다(시 44:.12-22). 44편의 기자의 시점에선 이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자들입니다. 그 절망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시입니다. 오늘 본문 35-36절은 희망의 빛깔이지만 시편 44편은 절망의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형편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외롭고 처량하며 비참하기도 하며 슬프지만 그 슬픔을 삼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뭐 하나 버젓하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실패라는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에서 그리스도라는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거 같은 것, 진흙더미(시 44:25)에서 피어나는 장미꽃 같은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바울은 매우 이 장면을 희망적으로 그렸지만 이 밝은 붓 터치는 시편 44편의 어두음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런 희망적 그림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가 처한 곤고함과 이은 흔적이 없이 완벽하게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죽으심, 곧 그의 십자가가 빚어낸 희망입니다. 어떠한 불행도 어떠한 핍절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35-36). 뿐만 아니라 이 인용은 신자가 겪는 고난의 불가피성(36:주를 위하여)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신자의 영광의 자유(21)나 영화롭게 하심(30)이나 대적자의 고발을 딛고 얻게 될 의롭다 함(33)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 믿음과 인내와 이런 고난을 견딤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점도 보여줍니다. 다시 “주를 위하여”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표현 하나로 우리의 실패의 현장성이 영광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힘이 바로 믿음이며 이 믿음이 있어야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실패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8:37-39).
37절이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이어지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35-36절이 희망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처한 인생의 현실이 녹녹치 않음을 암시합니다. 37절 후반 절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역시 신자가 처함 현실이 척박하고 고난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바울의 전망으로 인해 신자가 처한 이 현실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버릇이 있습니다만 7:14이하의 바울의 고뇌를 들여다보면 실제 우리가 처한 비참은 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그러나”에 주목하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편 44편은 마치 로마서 7장 같은 상황 중에 그 곤고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고 바울은 이를 인용하면서 “주를 위하여” 우리가 지금 처한 고난과 곤고가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식이 전제된 “넉넉히 이김”입니다. 바울이 넉넉히 이긴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장밋빛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 게 아닙니다.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가 모든 자원과 지원 가운데 경쟁해서 넉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이 뭔가 계기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절망의 흙더미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바라보는 믿음의 전망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주어진 첫 열매 때문이며 그 성령의 간구 때문이며,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입니다. 이를 본문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37)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의 죽으심으로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39). 우리가 처한 이 절망적 현실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거울처럼 비췬 것입니다. 17절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의 전모입니다. 외적인 실패 중에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이며(37), 우리의 삶을 규범으로 묶는 권세자들의 위협과 우리가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신자의 인생의 모든 형편에서 만나는 위협들은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피조물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된 영적 존재들, 곧 타락한 영적 존재들(고전6:3; 고후12:7; 엡6:12 참조)을 포함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38-39).
뿐만 아니라 이 38-39절의 본문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원론적 내용뿐만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그 안에서 자라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성도의 연합을 끊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고전3:2 참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신자는 바로 이 교회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다루었지만 바울은 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남으로 듣게 된 로마교회의 형편 때문에 복음을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에서 쓴 서신입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 부부와 만남은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에서 비롯된 것입니다(행 18;2). 유대인으로 로마 교회의 회원이면서 추방령으로 추방된 성도들이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더러는 숨어 지냈을 것입니다. 이 추방령은 교회로부터 끊어짐을 유발하는 매우 두려운 현실이었습니다. 이 교회 못 나가면 저 교회 나가면 되지 하고 쉽게 교회를 옮기는 오늘의 풍토에선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태반이 문맹이며 지역 색과 배타성이 강하던 당시 형편으로 생각하면 거주 이전은 삶에 대한 포기며 교회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원론적 선포뿐만 아니라 교회로부터 구체적인 영적 양식을 공급받으며 마침내 승리하는 데 있어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말씀을 처음 받은 구약에 정통하고 익숙했던 유대인 출신의 선생들이 다 추방된 상황에서도 결코 복음에서 그 어떤 것도 너희를 끊어 놓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목적으로 바울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13장에 가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권세자에게 순복하라는 권면은 편안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