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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현대교회사

현대교회사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제1부 정통, 합리주의, 그리고 경건주의
제1장 
도그마와 회의의 시대-13
합리주의가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재능인 자유이성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 문제들에 관해 답을 줄 수 있는데, 왜 분쟁과 편견만을 낳기 마련인 기독교리의 세밀한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하느냐는 것이 이 운동의 주장이었다. 
도그마가 신앙을, 그리고 정통교리가 사랑을 대체했다. 개혁파, 루터란, 그리고 가토릭들은 모두 신자들이 고수해야할 정통 신조들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순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감리주의자들과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은 채, 보다 열정적이고 개인적인 신앙과 경건성을 배양하는 길을 택했다. 
제2장 
30년 전쟁-17
16세기 독일 내의 종교전쟁을 종식시켰던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화의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종교적 이유로 평화는 양측에서 서로 무력으로 상대방을 이길 자신이 없을 때만 유지될 수 있는 잠정적 휴전에 불과했다. 
폭풍의 예고-18: 가톨릭 측인 페르디난드 국왕의 프라하 왕실위원회가 주민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부하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반란을 일으켜 왕의 고문 두 명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흔히 ‘프라하의 폭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야말로 20세기 이전까지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유럽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진행-20: 보헤미아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곳을 떠나라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 포고령으로 시작된 유럽 종교인들의 이동은 유럽전역에서 전쟁으로 번졌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덴마크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하고 독일로 침공하여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드 2세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고, 뒤에 스웨덴이 동맹군으로 참전하고 마침내 프랑스까지 가세하는 30년 전쟁이 되었다. 
웨스트팔리아 화약-25: 독일인들은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에 의하여 국토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인간들은 이 전쟁을 통하여 종교적인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기독교리에 관한 회의적인 태도는 정교분리라는 세속국가를 발전시키게 했다.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화약은 종교자유의 원칙을 나타냈다. 
제3장 
광야교회-29
프랑스 왕 헨리 4세의 암살은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위태롭게 했다. 문제는 30년 전쟁 동안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을 비밀리에 지원했던 가톨릭 추기경 리슐리에가 왕의 고문관이 되면서 터졌다. 그는 이른바 폰텐블루 칙령을 반포하여 아트칙령을 취소하고, 프랑스 국내 프로테스탄트인 위그노를 탄압하고 학살하고 강제로 개종하게 했다. 이때 대부분 상인과 전문직 기술자들인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독일로 스위스로 영국으로 신대륙으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에 심대한 경제적 타격이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책은 태양왕 루이14세가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비밀리에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는데, 안토안 코트가 제1회 총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스위스 로잔에 망명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길러서 프랑스 내에 개혁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제4장 
청교도 혁명-39 
제임스 1세-40: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식이 없었으나 후계자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지명했다. 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취임하면서 두 왕국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때 청교도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칼빈 개혁파들이 교회는 성경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영국국교-성공회에 대항했다. 이런 불화는 제임스1세의 재위기간 내내 발전되었으나, 흠정역 영어 성경(King James Version)은 이때에 번역되었다. 
찰스 1세-47: 찰스는 부친으로부터 의회와의 대결을 그대로 세습했다. 이 당시 청교도주의에 가장 열렬한 반대자였던 윌리엄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올랐다. 대주교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성공회 예배의식을 강요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교회의 총회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찰스왕은 스코틀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는 오히려 반란군에 동조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단기의회’사건을 일으켰다.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50: 수년 동안의 계속된 불경기를 겪고 나서 찰스 왕은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장기의회’로 불리는 새로운 의회는 이전의 의회보다 더 힘든 상대였다. 의회는 청교도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왕의 측근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을 불러 왔다.
내란-54: 찰스 왕은 아일랜드 가톨릭에 원조를 요청했고,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원조를 바랐다. 의회는 국왕의 지원세력이던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장로교적 제도를 실시했다.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유명한 칼빈주의의 토대가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전쟁에서 이긴 의회는 청교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장로교적인 정부형태를 주장했으나 군부의 반발에 부딪쳤다. 의회는 자체 숙정을 실시하고 이른바 ‘잔부회의’에서 찰스 왕을 참수했다.
호민관 제도-58: 잔부회의에서 실권을 잡은 크롬웰은 잔부회의의 이름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평정했다. 그는 스스로 호민관이 되어 왕이 없는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공화국의 수립을 꿈꾸었으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왕정복고-60: 호민관 제도가 실패함에 따라 다시 왕정복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찰스 왕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이 되었다. 왕은 국교 안에 장로교를 용인했으나 나중에는 감독 제도를 부활하고 장로교를 불법화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측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고 말았다. 찰스가 죽고 제임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가톨릭을 복원하고자 했다.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나서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가고, 윌리엄과 메리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장악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가 공식 종교가 되었고 잉글랜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유명한 존 번연과 존 밀튼은 각각 [천로역정]과 [실락원]을 썼다.
제5장 
가톨릭 정통 
고올주의와 교황 권력에 대한 반대-64: 트렌트 종교회의 당시에는 국가주의가 융성해가고 절대군주 제도가 강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국가주의자들은 교황의 권위 아래 중앙집권화된 교회의 개념을 반대하고 있었다. 반대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이름을 따서 이를 고올주의라 한다. 교황의 권위를 주장했던 자들은 교황권 지상주의자라고 불렀다. 특히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예수회가 클레멘트 교황에 의해서 해산되자, 전 세계를 통치영역으로 주장하던 교황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얀센주의(Jansenism)-67: 트렌트 종교회의는 은혜와 예정론에 관한 루터와 칼빈의 일체의 입장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1640년 얀세니우스의 [어거스틴]이 출판되자 논쟁은 다시 살아났다. 얀세니우스가 발견한 어거스틴의 은혜와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칼빈의 신조들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얀센주의는 교황 우르반 8세에 의하여 정죄 받았지만, 얀센주의 지도자들이 뒤를 이어 나왔다. 마침내 얀센주의는 정죄당하고 핍박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의 특징과 형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정적주의(Quietism)-72: 가톨릭 내에서는 ‘정적주의’ 운동이 큰 논쟁을 일으켰다. 스페인인 몰리노스는 {영혼의 안내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수동성을 주장했다. 기독교의 명상은 순수한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육체와 영혼을 막론하고 일체의 행동주의는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로 들어간 정적주의는 마담 기욘의 극단적인 운동이 있었으나, 캄부레이 대주교 페네론은 정적주의에 동의하고 실천했다. 그는 빅톨 유고의 [레 미제라블]의 밀리엘 신부의 모델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이런 모든 사건들을 정리하고 가톨릭 정통신앙을 정의했으며, 교황을 교회 권력의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가톨릭은 약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제6장 
루터란 정통주의 
필립파와 엄수 루터란-78: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은 후 매우 호의적인 평을 했다. 그러나 루터란의 다음 세대는 분열되고 있었다. 멜란히톤이 [신학강요]를 내고 루터를 계승했으나 어떤 이들은 그를 루터의 충실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루터가 이성을 더러운 이성이라고 말하면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결별한 뒤에도 멜란히톤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이신득의 교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선행이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증거로서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곧 “필립파”와 “엄수 루터란”이라는 양 진영의 대치상태를 가져왔다. 
가톨릭과 타협을 이루고자 시도했던 아우구스부르그 잠정협정이라는 문제가 이런 사태를 표면화시켰다. 이에 대해 플라키우스가 이끄는 엄수파 루터란들은 반대하고 서명을 거부했으나, 멜란히톤이 이끄는 비텐베르그 필립파들은 수정안에 서명했다. 멜란히톤은 이에 대해 복음의 진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지켜야 하나, ‘아디아포라’로 불리는 부수적인 요소들은 타협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플라키우스는 명백하게 자기 신앙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자들은 부수적인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엄수파 루터란들은 구원에 있어서 필립파가 인간의 역할을 너무 중시한다고 비난했다. 처음부터 ‘노예화한 의지’라는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멜란히톤은 인간의지에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옮아갔으며, 결국에는 성령 말씀 그리고 인간의지의 협동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엄수파 루터란들은 죄의 결과로서의 인간본성의 부패를 강조했으며, 플라키우스는 타락한 인간본성 자체가 부패라고 인정했다.성찬에 주님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의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으나, 이런 논쟁적인 문제들은 결국 ‘콘코드 신조’를 성립하게 했다.
정통주의의 승리-81: 가톨릭과 여러 형태의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차이점들을 강조하는 한편, 루터란 내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의 타협을 모색하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학파들이 루터란 신학을 주도했다. 루터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터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신학을 했던 예수잇들과 같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적 신학방법을 사용했다.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는 곧 사라졌으나, 성경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고백주의 정신을 뒤에 남겼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성경영감설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분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신적 행위였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은 독자들을 그에게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란 스콜라 학자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영감 되었음을 강조했다. 
게오르그 칼릭스투스와 “혼합절충주의”-84: 갈릭투스는 신실한 루터란으로서, 비록 루터란 교리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모든 다른 이들을 이단, 혹은 가짜 신자들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다른 신앙고백들을 믿고 있는 신자들 사이의 화해를 촉구했다. 그는 멜란히톤과 비슷하게 중추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들을 구별하고 중추적인 것들로서는 ‘처음 5세기 동안의 합의’를 제시했다. 기독교 5세기 동안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 와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루터에 의해 주자된 이신득의의 교리가 옳은 것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가톨릭이 이단으로 정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방법에 관한 루터란ㄷ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의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칼릭툿의 입장은 혼합절충주의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망각되었다. 왜냐하면 각 교파의 정통 신학자들이 교리들의 모든 점에 있어서 자기들과 동의하는 인물들만을 진정한 신자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7장 
개혁주의 전통
17세기에 개혁주의 전통은 그후 정통으로 받아들여질 신학을 정립했다. 이는 두 개의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곧 도르트 종교회의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알미니우스주의와 도르트 회의-89: 알미니우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에게서도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조국 네델란드에 돌아온 그는 칼빈의 예정론을 부인하는 쿠른헤르트 의 이론을 반박해주도록 요청을 받았다. 그는 두 사람의 신학을 비교한 결과 상당한 양심의 갈등 끝에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동료교수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예정의 근거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 했다. 90.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과연 예정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양자가 동의했다. 왜냐하면 이에 관한 성경의 언급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정의 근거에 관해 의견을 달리했다.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예정은 과연 누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했다. 반면 고마루스는 신앙 자체가 예정의 결과로서,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과연 누가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자체를 결정한 것이라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이에 대해 예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중보자이자 구세주로서 결정한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정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반응에 의존하지 않는 주권적 명령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에 관련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니라, 그의 신적 예지에 기초한다고 했다. 신적 예지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속의 기초에 대해 각 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알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 교회에서가 아니라 다른 교파들-특히 감리교-를 통해 계속 남아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9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야말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 중요한 문서이다. 제1장은 모든 종교 논쟁의 ‘지존의 심판관’인 성경의 권위를 취급하고 있다. 즉“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은 뜻대로 장래의 모든 사건들을 전혀 착오 없이 미리 정하셨다”고 인정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장래 행동이나 개인들의 반응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일체의 선행을 하고자 않으며, 할 수도 없으며, 반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들을 추종하게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원하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신다고 표현하여 제한적 구속을 주장했다.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이러한 택자들은 성령께서 적당한 시간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치유함을 받게 하신다. 그 후에는 비록 이승에서는 완전할 수 없으나 분명히 성화가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가 없으며, 반드시 끝까지 견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 후에는 청교도 혁명 당시 잉글랜드에서 문제가 되었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나 엄격한 정통신학에 충실하고자 했던 점에서 도르트 회의의 성격과 같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8장 
이성주의자들의 선택 
18, 19세기에 극성기에 달했던 이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그 특징으로 한다. 
데카르트와 그의 이성주의-100: 데카르트주의가 보다 깊은 철학적 신학적 발전을 낳은 분야는 정신과 물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주제의 문제는 데카르트가 이들 두 개의 존재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이 어려운 질문에 관해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으니, 곧 기회원인론(Arnold Geulincx, Nicholas Malebranche), 일원론(Baruch de Spinoza), 예정조화론(Gottfried Wilhelm Leibniz) 등이었다.
경험론-105: 존 로크는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감각을 통한 '외부적 경험'과 우리 자신과 우리 지성의 기능을 알게 해 주는 '내면적 경험'을 둘 다 포함한다. 이는 곧 유일한 진정한 지식은 우리들의 세 가지 차원의 경험에 기초한 것들임을 의미한다. 세 가지 경험의 차원이란 곧 그 존재를 우리들이 계속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 바로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진 외부의 실재,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과 그 경험에 의해 매순간 증명되는 하나님이다. 이 세가지 차원을 떠나서는 확실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록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가운데서 기독교야말로 종교들 가운데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진수는 하나님의 존재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마지막으로 분석해 볼 때, 기독교란 결국 인간들이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진리와 법칙들의 보다 명료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신론-106: 17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파들의 끝없는 논쟁과 갈등에 지친 사람들은 편협한 정통성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종교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들을 흔히 이신론자라고 부르는데, 무신론자들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신론자들은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를 점하고 있던 편협한 교리우선주의를 반대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경험주의 비판-108: 흄에 의한 이러한 경험론적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신론은 종식되었다. 만약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진정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즉 누군가가 이 세계를 야기시켰다는 이론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지 속성들에 관해서만 합리적으로 논할 수 있고, 이것들을 초월한 실체에 관해 논할 수 없다면, '영혼, 그리고 '하나님' 등의 개념들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새로운 사조들-111: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철학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가장 뛰어난 인물은 볼테르였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낙관적 이성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데카르트주의는 마치 소설과 같아서 모든 주장들이 그럴 듯하지만 진리는 하나도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신론자들은 인간이성의 한계 이상으로 하나님과 여온에 대해 안다고 주장한다고 야유했다.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몽테스큐는 국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므로 삼권분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원래의 자연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영혼의 불멸, 그리고 도덕적 질서들로 구성된 자연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길을 닦고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113: 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하나님, 영혼, 영원 등에 관한 것은 우리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들을 수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곧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는 비록 순수이성은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종교의 기초로서 도덕성을 제시했다. 실천이성은 “당신의 행동을 위한 규칙이 우주적 규칙이 될 수 있는 형태로 행동하라”는 근본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실천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도덕적 행동을 위한 조건으로서, 죽은 이후에 선행에 대한 상급과 악행에 대한 형벌의 재판관으로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9장 
신비주의자들의 행로
끝없이 게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도그마에 관한 논쟁들, 그리고 기독교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한 정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만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교육기회가 없었으므로 신학의 복잡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복잡한 도그마의 미로 속을 누군가가 인도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
야곱 뵈메-118: 그는 제화공이었다. 그는 환상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썼다. 그의 저서는 나중에 영국에서 ‘뵈메주의자 운동’이라는 신비주의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121: 당시 영국에서는 수많은 종교적 분파들이 있었으며, 폭스는 이들을 모두 섭렵해보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마다 ‘내면의 빛’이 있어 이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교회를 위선자들과 삯꾼들로 가득 찼다고 비난했다. 그가 자기의 메시지를 전하자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종교적 감정으로 마구 떨었는데, 이로 인하여 ‘퀘이커-떠는 자’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폭스는 어떤 설교가가 궁극적 진리는 성경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고, 이를 반박하여 궁극적 진리는 성경에 영감을 준 성령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일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퀘이커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은 펜실바니아주의 이름을 탄생시킨 윌리암 펜이었다. 그의 부친은 해군제독이었으며, 그에게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여러 종교를 거쳐 퀘이커 신자가 된 그는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나중에 국왕으로부터 받을 빚 대신에 그는 현재의 펜실바니아주의 땅을 받기로 했다. 그는 다시 이 땅에 대해 인디안들에게 다시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이 땅에 퀘이커주의자들을 정착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가진 도시를 만들었다. 그 중심지는 형제사랑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필라델파아가 되었다. 그의 신성한 실험의 하나였던 종교 자유의 원리는 이제 많은 국가들의 헌법 속에 반영되었다.
임마누엘 스웨덴 보리-128: 세 사람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앞의 뵈메와 폭스는 평민이었는데, 스웨덴보리는 귀족가문 태생이었다. 또한 뵈메와 폭스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경향을 보였는데, 스웨덴보리는 청녀시절 학문에 몰두했으며, 결국은 이를 통해 종교적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영계로 옮겨지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때 영원한 진리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의 반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상응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영계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경을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비주의 운동은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퀘이커들을 제외하고는 전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10장
경건주의 운동
경건주의라 하면 스페너와 프란케가 이끌었던 독일에서의 움직임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진젠돌프와 웨슬리도 포함시켜보자 
독일의 경건주의-132: 스페너를 경건주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그는 ‘경건의 모임들’을 만들고, [피아 데시데리아]라는 경건주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루터의 만인제사장 설을 통하여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이점들을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책임에 중점을 두도록 제안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종교개혁-16세기에 시작되었다가 교리적 논쟁들에 의해 중단된-을 완성할 것을 제안했다. 전통적인 설교가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단지 정확한 교리와 일반적 사회규범에 맞는 도덕적 생활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한 주장은 안정을 누리고 있던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스페너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는 프란케였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했다. 스페너와 프란케는 루터란 출신이었으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개혁파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경거주의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젠돌프와 모라비안-137: 열렬한 경건주의자 진젠돌프는 어렸을 때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 모라비안들을 만났는데, 이들에게 사유지를 제공하고 정착지를 주었다. 이들의 경건한 생활 공동체인 헤른후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느낀 그는 궁정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했다. 그는 루터란 선교사에 의해 개종한 일단의 에스키모인들을 만나보고 선교에 열정을 불태운다. 이들의 열정은 19세기의 선교 열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 웨슬리와 감리교에게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죤 웨슬리와 감리파-139: 존 웨슬리는 1735년 인디안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가던 배에서 폭풍을 만났다. 그는 난파의 위기 앞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던 경건주의 모라비안들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경험한다.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의 양육을 받고 자란 그는 화재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그의 경험과 정결한 신앙생활을 했던 탓에 항상 자신을 모법적인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파의 위기 앞에서 자기의 목숨에 연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조지아에서 사역을 하다가 중도에 좌절하고 그만둔 그는 영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 로마서 주석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을 때 구원을 경험한다. 신앙의 확신을 얻은 그는 다시 모라비안들과 연락해서 그들의 공동체가 있는 헤른후트를 방문했다.
한편 그의 동료였던 조지 휘필드는 유명한 설고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혼자 사역을 감당할 수 없어 웨슬리를 초청했다. 비록 웨슬리가 휘필드의 초청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휘필드의 감정적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옥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다. 웨슬리와 휘필드는 한동안 함께 사역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적 차이 때문에 갈라서게 되었다. 휘필드는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조직했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이 협회가 너무도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가운데 난관이 뒤따랐다. 웨슬리가 속해 있고 남아 있기를 원했던 앵글리칸교회와의 갈등이 벌어졌고, 추종자들은 갈라서기를 원했다. 미합중국의 독립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앵글리칸 사제들이 영국으로 귀환하는 바람에 미합중국 교회에서는 성찬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웨슬리가 그에게 소속된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합중국 주민들의 영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784년 이 신생국가를 위해 두 사람의 평신도 설교가들을 장로로서 안수하고 앵글리칸 사제였던 토마스 코크(Thomas Coke)를 '감독'(superintendent)에 임명하였다. 그는 물론 이 단어가 헬라어로 '감독', 혹은 '주교'를 의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 및 다른 지방에서 사역할 자들을 성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조처들을 행한 후에도 계속 영국국교와 결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생 찰스는 신세계를 위한 교역자들의 성직 임명 자체가 이미 영국 국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감리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산업혁명 때문에 야기되었던 새로운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화라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구가 공업중심지로 이동해 갔다. 여러 가지 경제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당시의 교구체제로서는 도시인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교회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 가운데 감리주의는 그 수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착민들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으므로, 수많은 인구가 전통적인 교회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개척민들 가운데서 감리교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북아메리카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가 일찍이 공식적으로 독립교회가 되었다. 
177년 웨슬리는 평신도설교자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감리교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는 국경과 보조를 맞추도록 조처한 것은 애즈베리였다. 13개식민주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웨슬리는 이들의 반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내 감리교 설교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며, 최소한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미합중국내의 감리교신자들은 계속 웨슬리를 존경하면서도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미합중국내의 감리파가 결국 감리주의 감독교회를 조직한 것도 웨슬리의 뜻을 어기는 줄 알면서도 앵글리칸 성직자들이 부족했던 현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라는 명칭 자체가 웨슬리의 뜻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자신과 코크를 가리켜 감독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보다 평범한 용어인 'superintendent'라고 칭했다. 그는 코크와 애즈베리가 자기를 가리켜 '감독'(bishop)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때부터 아메리카 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와는 달리 감독을 가지게 되었다. 
제11장 
13개의 식민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문명국가에서 종교가 강제로 성행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강제로 성립된 획일성은 조만간 내란을 일으키고 양심을 짓밟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박해하고, 수백만 영혼들의 위선과 파괴를 불러오게 된다.”(로저 윌리엄스)
16세기에스페인과 포르투칼이 거대한 식민지 건설에 착수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정책은 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의 해외 영토에는 후에 미합중국으로 독립하는 북아메리카의 13개주가 있었다.
버지니아-153: 영국 국교 내에서 청교도들이 영향력이 한창 극성이었을 때에, 버지니아 식민지가 창설되었으므로 많은 주주들과 정착민들은 이곳 식민지를 청교도적 원칙에 의해서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처럼 거룩한 식민지 건설의 꿈은 정치적 현실 앞에서 무산되었다. 국왕 제임스는 청교도주의를 혐오했으므로 1622년 발생한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구실로 1624년에는 이곳 식민지를 자기의 직접 통치 아래 두었다. 이때 본국에서는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었다. 
후에 찰스 1세도 버지니아 일대의 청교도들을 배격했던 제임스정책을 답습하여 버지니아 중 거대한 지역을 빼앗아 매릴랜드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가톨릭 신자에게 양도해 주었다. 이곳 식민지들에서 담배가 경작되고 수출됨으로써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담배경작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1619년부터 이곳 식민지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정착민들이 대부분은 계속 영국국교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이는 더 이상 과거의 청교도적 앵글리칸주의가 아니라, 보다 귀족적인 앵글리칸주의로서 대농장 소유주들에게는 적당한 것이었지만, 노예들이나 대부분 빈곤층들과는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영국국교는 노예들의 개종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원래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이 기독교인들은 같은 신자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이러한 원칙이 유효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예소유주들은 차라리 노예들이 세례 받지 않기를 원했다.
1667년에는 세례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는 곧 기성종교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기꺼이 타협하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법률이 통과된 후에도 노예들이 개종을 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소유주들이 노예들을 무지 속에 버려두는 것만이 이들의 복종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남부에도 다른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캐롤라이나주에서 발전한 사회는 상류층은 영국 국교에 속했으며 하류층의 대부분은 퀘이커 혹은 침례파가 되었다. 
조지아주는 두 가지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의 북진을 저지하는 것과 감옥으로 보냈던 채무불이행자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앵글리칸 교회가 공식 종교였지만 식민지에서는 별 세력을 얻지 못했다. 웨슬리 형제와 휘필드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운동을 이끌었으며, 후에 감리교와 침례교 등이 이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었다.
북부의 청교도 식민주-157: 청교도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북쪽 지방이었다. 잉글랜드를 떠나 네델란드로 갔던 일단의 반체제적 청교도 인사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세계로 떠났다. 이들은 잉글랜드 국왕 아래 있으나 ‘메이플라워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주장했다. 그들은 일단 케이프 코드에 상륙했다가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이들이 정착한 이후 1,000명 이상의 영국 청교도들이 로드 대주교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의 박해 기간 중에 10,000명 이상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로 도주하여 코네티컷과 뉴 헤이븐을 건설했다. 이처럼 날로 강성해 가던 청교도주의의 중심지들을 파괴해 버릴 계획을 하던 찰스1세는 내란에 말려들어 왕위와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와 청교도들의 승리는 이주의 물결을 멈추게 했다. 왜냐하면 이제 미지의 대륙이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 내에 청교도들이 꿈꾸는 거룩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소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신세계의 정착민들은 중립을 지켰으며 자기들의 영토를 넓히고 사회조직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스튜어트의 왕조복고가 잉글랜드의 퓨리턴주의에 극심한 박해를 가져왔지만 이곳 정착민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곧 왕실의 결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반포되었다. 그런데 청교도 식민지들에서 신학적 논쟁들이 일어났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련하여, 유아세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옛 이스라엘이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듯이 언약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어야한다는 주장과 회심을 경험한 뒤에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진정한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결국은 반 길 성약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낳았다. 
한편으로는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도 시작되었다. 1641년 모히칸족 사이에서 전도했던 존 엘리옷의 사역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사라진 10지파라고 확신했으므로, 이들을 개종시키기만 하면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개종자들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통치했던 촌락들 안에 수용했다. 그러나 인디안들을 적으로 간주했던 백인들에게 수많은 인디안들이 살해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로드 아일랜드와 침례파-163: 청교도들이 통치했던 식민들에서 시행된 종교획일주의 때문에 이곳을 떠나는 인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로저 윌리암스는 보스턴에서 목회자로 사역하기를 거부하고, 인디안들에게서 토지를 구입하여 프로비던스 식민주를 건설했다. 그에 의하여 프로비던스에 세워진 교회는 침례교가 되었다. 대부분의 침례교도들은 재세례파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약연구를 통해 교리를 추출한 것이었다. 네델란드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일단의 침례교도들이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고, 영국으로 이 사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영국에 남아 있던 이들은 청교도 운동의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는 엄격한 칼빈주의를 계속 신봉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두 파는 일반 침례주의자들과 특정 침례주의자들이 되었다. 전자는 알미니우스주의자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오직 구원받기로 택함을 입은 자들만을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을 거치면서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정 침례파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메릴랜드의 가톨릭-166: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가톨릭 중심지는 메릴랜드였다. 식민주는 가톨릭 지주들에 의하여 운용되었으나 주민의 대부분은 프로테스탄트였다. 퀘이커들이 건설한 펜실바니아주에서도 읠리암 펜이 주장한 종교자유의 원칙에 따라 상당한 숫자의 가톨릭들이 거주했다. 
대서양 연안의 식민주들-167: 대영제국은 북아메리카 일대에 일련의 식민주를 건설했다. 이 식민주들은 로드 아닐랜드와 펜실바니아의 모법을 쫓아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은 몇 번이나 유럽을 황폐화하는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종교적 편견보다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노예제도의 도입,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 인디어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는 만행들이 나타나면서 최초의 정착민들을 고무했던 종교적 열정과 성한 왕국 건설의 소망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대각성169: 독일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에도 경건주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철저한 칼빈주의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회심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던 인물로서 이러한 물결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회중파 목사였으나, 그는 앵글리칸이었던 휘필드를 자기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했고, 휘필드가 설교하는 동안 에드워즈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부흥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신파에 속한 장로교 목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인사들도 합류했다. 침례교에서는 처음에 이 운동을 저급하다고 간주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의 목적은 신자들 각 개인을 깊은 영적 경건과 철저한 성경연구로 이끌고자 함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침례교에 유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회심의 경험이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이는 유아세례를 의심하도록 이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각성 운동이 강조한 개인적 경험의 중요성을 받아들인 많은 회중파와 장로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침례교신자들이 되었다. 한 교회의 전체 회중들이 이 길을 택한 경우들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각성 운동은 또한 심대한 정치적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대각성 운동이야말로 후에 미합중국을 결성하게 된 13개 식민주 전체를 포용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식민주들 가운데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권과 정부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유포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들이 식민주들 간에 날로 성장해 가던 일체감과 어울려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낳게 한 것이었다.
제2부 19세기 
제12장 
정치적 지평선: 미합중국 
13개 식민주의 독립-178: 시초부터 영국령 식민주들은 상당한 독립을 향유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고, 세금을 추가 징수하고, 토지취득을 제한하는 등의 직접통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자 갈등이 일어났다. 13개주는 반발했고 양측이 충돌하는 가운데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7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1783년 파리회담에서 도립협정이 조인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립을 곧 진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진보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가 가지는 교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자연종교' 혹은 '본질적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 이성 혹은 보편적 윤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전통적 교훈들과 신앙은 과거의 유물로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 후 하나로 결합하게 된 두 가지 운동을 통해 조직되었으니, 곧 유니테리언주의와 만인구원설이다. 전자는 실질적으로 독립과 함께 생겨나 더 이상 전통적 정통신앙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앵글리칸과 회중파 교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운동에서 결과된 교회들은 특히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했기 때문에, '유니테리언'이라고 불렸으나 실제로 이들은 정통적 교리들과 많은 점에서 상이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초자연적 신비와 인간의 죄성을 강조했던 정통 교리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지적 능력을 보다 강조하는 이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상인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종래는 모든 인간들이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만인구원설은 원래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영국 감리교신자들에 의해서 독립 직전의 식민주에 소개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운동은 유니테리언들과 합류한다. 
또한 이들로부터 소위 '초월주의'(Transcendaentalism)에 찬성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자로서 랄프 왈도 에머슨을 들 수 있는 이 운동은 이성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한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우주와 우주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유니테리언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월주의에 빠진 것은 주로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많은 주장은 결국 이 새로운 국가의 다른 부분들에까지 침투했다. 진보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가 가지는 교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자연종교' 혹은 '본질적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 이성 혹은 보편적 윤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전통적 교훈들과 신앙은 과거의 유물로서 간주되어 마치 진보라는 이름의 배가 항해하는데 불필요한 화물처럼 생각되었다. 
웨슬리는 철저한 왕실지지자였으므로 식민지의 감리교 신자들에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명령했다. 독립선언 후 애즈베리를 제외한 식민지의 모든 영국인 감리교 설교가들은 대영제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미국측의 애국자들은 감리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즈베리의 꾸준한 노력으로 아메리카 감리교는 특유한 성격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설교가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마침내 1784년 '크리스마스회의'(Christmas Conference)에서 미국 감리교는 영국 감리교 및 앵글리칸 교회와 결별한 새로운 교회로서 탄생했다. 또한 미국내 감리교는 주교들에 의해 영도될 것도 결정되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종교적 복수사회 속에서는 이미 유럽의 교리우선주의가 불러 왔던 유혈극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교회를 모든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교회들, 혹은 교파들은 신자들이 나름대로의 확신과 선호에 따라 창조하고 가입한 자발적 조직체들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식 기독교의 교파주의에 의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The Disciples of Christ) 교파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토마스 캠벨(1763-1854)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1788-1866)로서, 처음에는 새로운 교회나 표가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 
이민-184: 당시 유럽에는 나폴레옹 전쟁, 공업화로 인한 사회의 격변, 왕실들의 폭정, 흉년 등으로 인해 대량이민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가톨릭 교인들의 유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메이 플라워를 타고 필그림들을 비롯하여 미국이민자들과 정착민들은 그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계속 서진했다. 펜실바니아에 세운 모라비안 공동체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외에도여러 공동체가 실험되었는데 모두 재산의 공동소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제2차 대각성 운동-187: 18세기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제2차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부로 나아간 개척지의 상황은 뉴잉글랜드와는 달랐다. 1801년 켄터키에서 발생했던 케인릿지 부흥(The Cane Ridge Revival)은 천막집회 를 시도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개척지대에서는 이러한 부흥집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감리교와 침례교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이들 교파가 성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설교가들을 기꺼이 사용하여 가능한 한 쉽게 기독교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파들이 엄격한 교육수준을 요구했던 반면, 감리교와 침례교는 누구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감리교의 선봉에 선 것은 주교들의 감독 아래 봉사한 평신도 설교가들이다.
침례교에서는 생업을 가진 농부들을 개교회의 목사로서 활동하도록 했다. 새로운 정착지에는 기꺼이 말씀 선포의 직분을 감당할 경건한 침례교 신자가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감리교와 침례교는 새로운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했으며, 마침내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되었다. 제2차 각성운동의 중요한 결과는 출신민족들과 특정교파간의 상관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운명에의 길’과 멕시코 전쟁-191: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온 청교도들이 처음 상륙한 이후, 신세계의 영국령 식민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하시는 사명을 띄고 세워졌다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다. 독립전쟁 지도자들은 인류를 발전과 자유의 길로 인도할 새로운 실험을 부르짖었다. 후기의 이민들은 미합중국을 자유와 풍요의 약속된 땅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가톨릭보다 우월하며, 가톨릭은 진보와 자유를 저해하는 방해물이라는 확신과 결합되었다.
1823년 제임스 몬로 대통령은 미합중국이 더 이상 유럽 국가가 서반구를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운명은 특히 서반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당시 멕시코는 가톨릭이었다. 텍사스는 멕시코 영토 코아후일라주였으나 미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다. 멕시코는 이주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주민들은 멕시코를 미국에 합병시킬 음모를 꾸미고 ‘엘 알라모’ 요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몇 번의 패배 끝에 반란군이 멕시코 대통령을 포로로 잡는 일이 벌어졌다.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텍사스는 곧 미합중국에 가입하고 말았다. 그 다음 해인 1845년에 미국의 확장주의를 의미하는 ‘운명에의 길’이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했다. 
이는 멕시코 영토인 서부와 남부를 침략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1848년에 끝났으나, 멕시코는 1,500만 달러에 300만 평방Km를 양도해야 했다.오늘날의 미국 남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대부분이 ‘리오 그란데’라고 부르는 새로운 국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지역에 정착민들이 몰려 들어가자 교회는 서진정책에 합세했으며, 일부 교파들은 하나님께서 멕시코인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문을 여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서부에 남아 잇던 멕시코 가톨릭교회는 동부 미국 가톨릭교회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스페인계 신부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노예제도와 남북전쟁-196: 식민지 시대부터 노예제도는 많은 이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했으나, 입장은 모호한 것이었다. 감리교 목사들은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으며, 장로교총회는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노예제도 폐지는 반대한다고 하였다. 반대자들 중의 일부는 노예를 사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늘날 라이베리아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남부와 북부 모두 노예제도에 반대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부는 그대로 반대하였으나, 남부는 찬성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남북 교회들은 서로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에 서있다고 설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인들은 남부를 경제식민지화 했다. 남부의 교회들은 공공연하게 흑인들을 조소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은 흑인들의 복수를 두려워해서 KKK단 발족을 지지하기도 했다. 남부교회들은 이전의 노예로서 출석했던 흑인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흑인 교파들이 생겨났다. 곧 흑인교회들은 흑인들을 연합시키고,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등, 흑인사회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이들은 또 아프리카 선교의 중요한 몫을 감당한다.
남북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201: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과거의 사회적 경제적 긴장 관계는 계속 증가했다. 남부는 더 인종 차별주의적이며 반지성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며, 북부는 새로운 흑인 이주민들로 도시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구긔 통일성에 기여한 것은, 미국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을 위한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맡아가지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직분은 대개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즉
인종적으로는 앵글로-색슨족의 백인들,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정치적으로는 자유기업 위에 기초한 민주정치체제였다. 따라서 북부 유럽 인종들은 나머지 세계의 ‘보다 후진적’인 인종들을 문명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은 당시 미합중국 내의 도시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몇 가지 기독교 조직체들이 이를 위해 활동했으나, 가장 성공한 것으로는 YMCA와 YWCA가 있다. 다른 것으로는 주일학교였다. 프로테스탄트 측은 옛날의 천막 집회를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켰다. 그리하여 부흥회가 다시 도시지역 종교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이 운동 초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드와이트 무디였다. 그는 회중파 교회에서 시작했으나, 곧 독립파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또 YMCA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의 설교내용은 간단하고도 열정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도시 빈민들을 기반으로 발전했던 감리교가 점차 중산층으로 파고들면서 가난한 자들을 등한히 하므로, 이에 대해서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영국에서는 윌리암 부스에 의해 구세군이 창설되었다. 구세군은 시초부터 도시 빈민들의 영적, 육체적 복리를 위해 활약했다. 구세군이 미국으로 건너오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내에서도 감리교회의 분파가 생겨났다. 특히 성화에 대한 강조 때문에 성결교회라고 불리는 분파가 나타나서, 성령의 은사-특히 방언, 치병, 예언 등을 중심으로 예배를 했다. 이러한 모습은 곧 시들해졌으나, 1906년 로스안젤리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재등장했다. 바로 이 아주사 거리의 신앙 부흥에서 시작된 ‘오순절의 불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흑인과 백인들의 양 교파로 퍼져 나갔는데, 오순절파 잡지 발행인이 ‘성령세례를 믿는 자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했다.
남북전쟁 후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교파는 제7일 안식교라고 불렸다. 버몬트에 살고 있던 침례교 신자 윌리암 밀러는 1843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예언했다. 예언했던 날자가 그대로 지나자 추종자 대부분은 흩어졌으나, 화이트 부인이 나타나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주일 대신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하기 시작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유럽에서 건너오면서 기독교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역사 비평적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으로 과연 사실인가에 의문을 던졌다. 우선 방법론적 전제로서 기적들은 부인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학자들은 인간의 능력에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상의 구조 속에 기독교를 집어넣고자 했으며,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상의 전체적 흐름을 본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야말로 기독교신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일부 과격파-현대주의자-Modernist-는 기독교의 성경을 다른 종교의 경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본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대응했다. 이런 움직임은 ‘복음주의 동맹’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뉴욕주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열린 1895년 열린 집회에서 기독교의 다섯 가지 이념들을 정립했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동정녀 탄생,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그의 육체적 부활과 임박한 재림이었다. 얼마후 장로교 총회도 이와 비슷한 원리들을 채택했다.
근본주의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성경해석을 창출했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로 불리는데, 사이러스 스코필드 박사는 그의 주석 성경을 출판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역사를 세대로 구분하여 지금은 여섯 번째 세대에 해당한다고 했다. 어쨌든 근본주의는 세대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자유주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 불리는 움직임을 통해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된다. 라우쉔부쉬가 이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그는 한 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은 복음의 요구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정책이 불평등과 부정의를 낳게 된다고 역설했다. 
신흥종교-208 : 19세기 미국 종교계의 중요한 현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신흥종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파의 출현이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로는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쳔 사이언스 등이다.
모르몬교는 조셉 스미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는데, 천사가 준 금판의 기록들을 번역했다는 모르몬경전이 있다. 추종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오하이오에 정착했다가 일리노이로 옮겨갔다. 스미스가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살해된 이후 브리감 영이 이들을 이끌고 유타주로 가서 독립 국가를 세웠는데, 미국의 서진정책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들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가 미국민의 반발을 받고 폐지하였으며, 공동체 생활의 강조를 포기하고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을 마치 미래의 사건들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읽는데서 발생한 종교이다. 창시자 찰스 러셀은 사탄의 세 가지 무기는 정부, 기업, 교회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인했으며, 예수님의 재림은 이미 1872년에 이루어졌고, 세상의 종말은 1914년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세상의 종말이 오는 아마겟돈 전쟁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루드포드 판사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조직을 거대한 선교단체화 했으며, 1914년의 추태 이후 러셀의 교훈을 재해석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창시한 베이커 에디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큄비의 치료를 받고 낫게 되자, 병은 진리의 지식만 있으면 낫게 되는 허상에 불과한 서이라고 했다. 이에 관해서 [과학과 건강, 성경을 푸는 열쇄와 함께]라는 책을 출판한 것을 계기로 추종자들이 ‘과학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책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용어들을 본래의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영적’으로 해석했다. 그녀의 교리가 약속한 행복과 건강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는 말년에 극심한 고통과 번민에 빠져 있다가 죽었다.
제13장
정치적 지평선: 유럽
프랑스 혁명-215: 루이16세는 왕실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과세하고자 했다. 왕은 성직자, 귀족, 부르주아로 구성되는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부르주아의 요구에 따라 단일화된 ‘국민의회’는 정부 측의 반대로 회의를 열지 못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난동을 일으키고, 왕은 이에 굴복하여 헌법제정의회를 구성했다. 이 회의에서 ‘인권선언’과 ‘성직자 시민헌법’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운동은 유럽 각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1791년 헌법제정의회는 ‘입법의회’로 대체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했다. 왕은 반역음모죄로 처형되었다. 혁명파들도 서로를 고발하여 단두대에 처형하는 공포정치가 실시되었다. 
혁명파들은 종교란 인간의 무지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며, 자기들은 일체의 미신과 종교를 극복한 과학과 이성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종교’에서 후에는 ‘지존자의 종교’라고 불리는 자기들의 종교를 조작해 냈다. 형식상으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었으나, 소위 ‘자유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기를 거부하는 신부들은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단두대로 보내졌다. 나중에는 시민헌법에 서약을 한 여부나 가톨리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마구 잡아 죽였다.
1795년에 공포정치는 끝났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계속 기독교에 대적했다. 이때 군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와 화해를 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피우스7세 교황의 집전으로 황제 대관식을 올렸다. 그러나 황제의 야망과 교황의 입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다시 사로잡혀 연금 상태에서 나폴레옹의 몰락을 기다려야 했다. 
새로운 유럽-222: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은 각국의 왕실들이 전복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유럽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으며 전쟁이 그치고 평화를 회복했다. 그렇지만 평화적인 표면 아래에서 사회적 정치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음모와 반란과 폭동은 그치지 않았다. 신학적 자유주의와는 또 다른 성격을 띤 경제적 자유주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자율적으로 조정된다는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아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신봉된다. 1848년 프랑스에서 제2공화국이 선포되고 공산당 선언도 이해에 발표된다. 신학발전과 선교활동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19세기의 문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관계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이러한 현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왕정복고 후에도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이전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국가 통일을 위해 폐지되었던 옛날 법률들 속에는 종교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조처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유럽 전역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도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데 따라 '자유교회'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고에 의해 유지되는 국교들과는 대조적으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독일과 북부 유럽 일대에 걸쳐 감리교와 침례교가 퍼져 나갔다. 
영국에서의 발전-227 19세기는 유럽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트측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받았다. 따라서 19세기는 현대사상들에 대해 가톨릭 측의 반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대영제국과 독일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자유, 진보주의야말로 이미 한물간 권위주의적 가톨릭 측에 대한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제14장
정치적 지평선: 라틴 아메리카 
요약해서 말하면, 19세기는 유럽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트측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받았다. 따라서 19세기는 현대사상들에 대해 가톨릭측의 반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대영제국과 독일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자유, 진보주의야말로 이미 한물간 권위주의적 가톨릭측에 대한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새로운 국가들의 태동-231: 정치적 격동들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느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칼령 식민지에서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사람들(페닌슐라르-Peninsula)과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백인 원주민(크리올-Creole)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크리올들은 식민지의 발전이 자기들의 노력의 결과이기에 페닌슐라르보다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성속을 불문하고 중요한 직책은 유럽에서 임명했으므로 페닌슐라르가 차지했다. 
남부에서 크리올들은 스페인 본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가 연이어서 독립을 선언했다. 북부에서는 시몬 볼리바르가 군대를 조직하여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대콜롬비아를 선언했다.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포용하는 거대한 공화국의 성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각 지역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분열정책으로 좌절되었고,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볼리비아 등으로 분열되었다.
멕시코의 일부였던 중앙 아메리카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혼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으로 나뉘어졌다. 브라질의 독립 역시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었다. 포르투칼 후앙 6세는 나폴레옹을 피하여 브라질에 자리를 잡았으나, 나중에 본국으로 복귀하면서 아들을 남겨두었다. 이 아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페드로 1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곧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아이티는 나폴레옹의 전쟁이 직접저적인 결과였다.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틈을 타서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독립을 얻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를 뒤흔든 사상적 논쟁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사상을 수입해온 반면에, 자유주의자들, 혹은 진보주의자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에 의존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이들의 주도하에 혹독한 독재정치와 폭력이 극에 달한 혁명들이 반복되었다.
새로운 국가들 속에서의 교회-237: 식민지 시대에 걸쳐 라틴아메리카 현지의 주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부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따라서 페닌슐라르와 크리올 사이의 긴장관계가 교회 안에서도 존재했다.
독립 후 주교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수많은 교구들이 비었으나 성직자들이 없었다. 진보파와 보수파들 사이의 투쟁은 대치되는 종교정책들로 나타났다. 보수파들은 성직자와 교회의 전통적 특권들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진보파들은 이에 반대했다. 자유파와 자유주의자들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자유주의자들이 반가톨릭 감정을 가지게 했다.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인류사회는 삼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신학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증 과학적 단계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실증적 원리‘에 의하여 사회가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 콩트의 주장이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진보파와 교회 사이에 갈등은 새롭게 가열되었다. 
새로운 사상들이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교회 정치가들은 더욱 격렬하게 이런 사상들을 정죄했으나,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은 신앙을 교회와는 별개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도달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쉽사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제15장 
프로테스탄트의 신학
새로운 사상의 주류들-244: 19세기 초 산업혁명은 유럽의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신세계의 일부까지도 미쳤다. 그 효과는 단순히 경제 분야를 넘어 인간들의 생활 전체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생애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보게 되었으며, 개인주의와 나라는 주제가 철학과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이러한 신기술의 적용으로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했다. 
이러한 사고는 1859년 출간된 다윈의 [자연적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표면화되었다. 결국에는 현재의 인류는 과거의 인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인류의 지적, 혹은 종교적 관념 역시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시기에 발생한 빈민들의 문제의 규모가 너무도 거대했으므로 많은 이들이 급격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기독교신자들을 비롯하여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결국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주의 저술가는 1848년 [공산당선언]을 출판한 칼 마르크스였다. 
그가 제안한 이론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 속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 아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분석의 중요한 내용은 지배계층은 순수한 합리적 이론의 가면 아래 실제로는 기존질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종교 자체도 유력한 자들을 지지하기 위한 기반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에는 노동자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고, 그 다음에는 국가의 존재까지도 무용해지는 계급 없는 사회 즉,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수년 동안의 관찰을 통해, 인간의 사고는 단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무의식의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도 좌우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성과 호전성은 아무리 이들을 억압할지라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이제 과학적 논리가 자연과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사회와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도 적용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 학문 분야의 확장 속에서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247: 칸트의 역할을 통해 18세기의 순진한 이성주의는 종식되었다. 만약 “순수이성”이 하나님의 존재, 혹은 죽음 이후의 생명들과 같은 의문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신학은 종교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길들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또한 사고의 구조가 우리들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현실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궁극적 실재들에 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슐라이어마허는 칸트가 인간의 도덕률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이성주의 방식을 더 이상 주장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게풀’이라고 부르는 ‘절대자를 향한 의존의 감정’에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의 신학의 기능은 의존의 감정을 세 가지 차원 속에서 탐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자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의존의 감정에 관련되지 못한 것은 신학 속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창조론을 생각해 보자. 이 신조는 절대 의존의 감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는 일체의 존재가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적 종교 감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의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창조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세기에 표현한 창조는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이 사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 신학탐구를 위한 정당한 대상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의존의 감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에 관련된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 정보는 우리들이 의미하는 신앙의 신조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절대 의존의 감정은 이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나, 새로운 형태나, 혹은 보다 명백한 정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존재, 사탄의 역할 등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현대과학에 위배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구분은 초자연이 드러난 사건이나 장소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의 감정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종교가 지식과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과학의 발견들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할 수 있었다. 
헤겔의 체계-251: 칸트의 비판 이후 남겨진 또 하나의 길은 인간의 지성이 일체의 지식을 인증한다는 데에 그와 동의하면서도 이를 이성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증명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이성이 실재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우리가 실재, 혹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우리들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야말로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이다.
헤겔은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의 수업을 닦았다. 그러나 후에는 신학이 학문탐구의 영향으로서는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종교뿐만 아니라 실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재는 서로 관련되지 않는 일련의 사물들이나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는 이성과 실재가 동일하다고 인정할 때에 이러한 작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혹은 실재가 이성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 곧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는 이성이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합리적인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헤겔이 언급한 '이성'이란 단지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혹은 논리의 결론들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이는 오히려 사고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에 어떠한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고정된 사상 앞에 서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사상을 제시하고, 이를 초월하기 위해 점검하거나, 혹은 다른 사상을 선호하여 이를 부인하며, 마지막에는 이전의 두 가지 사상 속에 담겨 있던 가치를 포함한 일체를 포괄하는 제 3의 사상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테제'를 제안하고, '안티테제'의 방법으로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결국에는 '합'에 도달하는 과정을 가리켜 헤겔은 '이성'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는 동적 이성, 계속하여 발전하는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성은 단지 인간의 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 이성 - 헤겔은 이를 가리켜 우주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이야말로 실재의 전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우주정신의 변증법적이고 동적인 사고이다. 
헤겔은 기독교야 말로 절대종교라고 확신했다. 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을 부인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헤겔이 볼 때 기독교야말로 모든 종교들의 종합으로서 인간의 종교적 발전의 전체과정을 종합한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중심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육신의 교리에서 절정에 달한다. 왜냐하면 성육신 속에서 신과 인간이 완전히 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초기의 종교들 속에서 은연 중에 잠재해 있었던 신과 인간의 연합이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교리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궁극적 실재의 동적인 본질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변증법은 세 가지 움직임을 포함한다. 우선 신은 영원한 사념으로서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합리적 실재의 발전을 초월해서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곧 '아버지의 왕국'이니 이는 다른 일체의 존재들로부터 하나님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아들의 왕국'은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로서, 그 결정은 신과 인간 사이의 궁극적 일체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성령의 왕국'은 이러한 신과 인간의 종합을 뒤따른다. 그리하여 공동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속에서 나타난다. 이들을 종합한 것이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도덕적 생활과 국가의 질서 속에서 역사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이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헤겔은 국가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헤겔은 이러한 결과 일체의 교조적이고 부분적인 체계들의 편협성을 탈피하는 철학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이제 드디어 역사야말로 영원한 실재들을 파악할 수 있는 배경으로 간주되었다. 후기신학자들로 하여금 성경적 관점의 많은 부분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러한 관념이 헤겔 및 19세기가 남긴 유산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키에르케고르의 업적-255: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뛰어난 지능을 자각하고 특별한 임무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혼도 포기하고 외로운 신앙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것은 칸트를 비판하는 제3의 길이었다. ‘순수이성’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신앙은 하나님을 직접 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국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우리에게 펼쳐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큰 대적은 기독교권이었다. 기독교권은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유대인이나 모슬렘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들은 이교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설교가들이 기독교를 쉬운 것으로 설교함으로써 이러한 착각을 촉진하고 있다. 이야말로 기독교를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을 바보'로 생각하는 '기독교권의 범죄'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깨닫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이러한 기독교권의 비극에 대응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물론 그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잘못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은 진정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독교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통 없이 우리는 기독교권의 한 구성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기독교신자는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단지 지성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자체와 관련을 가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체계'의 환상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계는 물론 그가 헤겔의 철학을 조소하여 붙인 명칭이었다.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 한 것이란 고통과 회의와 절망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진정한 존재에게 설 자리가 없는 구조물을 지어낸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화려한 궁전들을 지어놓고는, 그 궁전이 너무나도 화려하기 때문에, 헛간에서 살기로 결정한 자들과 같았다. 진정한 고통의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며, 본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에 관한 강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물론 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그와는 판이한 흥미와 관심을 추구했다. 존재란 투쟁이다.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태어나기 위한 고통의 투쟁이다. 이처럼 존재를 사물의 중심에 놓을 때, 인간은 헤겔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체계들을 포기해야 하며, 어떤 일관성 있는 체계를 향한 희망까지도 저버려야 한다. 비록 현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체계라 할지라도, 존재의 한 가운데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특별한 형태의 존재, 즉 기독교적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역시 어떤 체계로서 축소될 수 없었다. 기독교권, 즉 쉬운 기독교의 비극이란 이러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모험이나 계속적 위험이 되지 못하고, 도덕 혹은 교리 체계의 형태로 전락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만인들에게 계시하고자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거대한 문제는, 우리가 기독교권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야 하는 약점을 안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역사-258: 기독교 교리(도그마)가 여러 세기를 통해 진화했다는 사상은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진화는 단지 초기 기독교 당시 이미 잠재해 있던 가르침들이 점차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돌프 폰 하르낙(1851-1930)은 도그마의 발전은 초대교회 신앙의 점차적 포기로서, 원래의 예수님의 가르침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들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성과 인류의 형제애,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명령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후일에 장기간에 걸친 과정을 거쳐 예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또한 사건들, 특히 예수님의 사건들에 관한 사실적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실제 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신학이 이를 망각할 때 이는 이성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교부라고 불리는 알브레히트 리츨은 이러한 오류들에 대항하여 역사 연구는 예수님이 남기신 교훈의 중심에 하나님의 왕국과 '사랑에 기초한 행동을 통한 인류의 조직'이라는 윤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밝혀준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리츨의 신학은 앞에서 거론했던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의 기초가 되었다
19세기에 두드러졌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 예수의 탐구”였다.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교회의 신앙과 복음서의 기록들 뒤에 숨겨진 사실적 예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초 슈바이처 박사는 이러한 탐구가 예수님 자신을 발견하는 대신에 19세기의 이상적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결론지었다.
제16장 
가톨릭 신학
교황청과 프랑스 혁명-263: 프랑스 혁명 당시 교황은 피우스 6세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성직자들의 시민 헌법’을 반포하고,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은 더 이상 그곳의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교황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교황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집전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교황청은 보수주의로 흘러 정치와 결별하기 시작했다.
피우스 9세-266: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피우스 9세(1846-1878)는 당시의 패러독스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런 패러독스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교황들이야말로 무오하다고 선언했던 이때에 이들은 권력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황의 주권은 바티칸 궁에만 제한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상실 속에서 피우스 9세는 단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자기의 주권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854년 그는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한다. 이 교리에 의하면,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택정 받았기 때문에, 마리아 자신도 원죄를 포함한 일체의 죄 및 그 영향으로부터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는 이미 카톨릭 신학자들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수세기 동안 논쟁을 거듭한 문제였다. 그런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도그마를 교회의 공식 교리로 선포함으로써 피우스 9세는 종교회의의 지원 없이 독단적으로 도그마를 정의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했던 교황의 칙령 인에퍼빌리[Ineffabilis]야말로 세계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칙령에 대해서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므로 교황무오설의 교리가 그 뒤를 따르게 된다. 
먼저 쿠안타 쿠라 회칙과 80개의 오류목록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무오류설이 선포되었다. 이에 반발해 네델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 가톨릭교회로서 독립했다. 고올주의자들과 교황권 지상주의자 사이의 투쟁에서 결국 후자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이전에 고올주의자들이 두려워했던 교황청의 권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레오 13세-271: 레오 13세는 현대의 새로운 조류들을 무시하지 못하면서도 언젠가는 교황청에 의하여 성립된 원칙에 이끌어질 가톨릭 사회의 실현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재임 중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를 다룬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칙령을 반포했다. 이는 개인들의 사랑과 자선이 정의를 수행하기에 불충분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있다.
피우스 10세-275: 가톨릭의 보수주의화로 현대사상의 주류 및 사회의 흐름과 가톨릭 사이의 간격은 넓어지기만 했다. 어쨌든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세계 제 1차 대전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카톨릭 교회를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했으며, 가톨릭 측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야말로 현대 세계의 도전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그 이단적 특성을 드러내었다고 확신했다. 
제17장 
지리적 확장
19세기의 눈부신 지리적 확장은 오직 16세기의 그것에나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가 가톨릭 확장기라고 한다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확장시대였다. 
이처럼 거대한 움직임의 정확한 결과를 아직도 확실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의 역사에서 볼 때,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야말로 모든 인종들과 국가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우주교회의 설립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이러한 모습이 식민지주의와 경제적 제국주의의 기틀 아래 이루어졌음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식민지의 확장-278: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이전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식민지를 인수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신 식민주의가 팽배했다.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개척은 군사점령과 정치적 점령이라는 보다 전통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도 가속화되었다. 서구국가에 의해서 완전정복을 받지 않은 경우에도 무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서구세계의 많은 이들은 물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이러한 식민지의 확장이 자기들의 국익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이를 반대했다. 대부분 기독교신자였던 또 다른 집단은 식민지화된 현지의 주민들에 대한 착취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식민자들은 피식민지들이 누릴 혜택에 따라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인들의 수중에 서구문명과 기독교 신앙을 맡기셨다. 따라서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은 세계의 나머지 인류와 이를 공유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나머지 세계에까지 공업화,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혜택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백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물론 이러한 환상을 꿈꿀 근거들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의학의 혜택이 오지에까지 전파되어 수많은 인명들을 구했다. 교역과 공업발전은 여러 지역의 부를 증가시켰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지인들 가운데 일부 계층은 기꺼이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현지인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방황하게 되었으며, 수백 년 동안 현지를 이끌어 왔던 문화와 전통이 파괴되었고, 전 세계에 걸쳐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커져가기만 했다. 어쨌든 이러한 전체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인종적, 문화적 자만심은 20세기 중반을 특징짓는 반식민적 반동을 불러 올 수밖에 없었다.
선교 활동-281: 교회는 이러한 상황들과 사사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의 열려진 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선교사들이 식민지에서 사역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백인상인들이나 정복자들보다 먼저 오지에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의 관리들이나 상인들은 선교사역을 반대하고 훼방하곤 했다. 그러나 서구 제국의 식민지 확장과 선교영역의 확장이 중복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들 양자는 상황에 따라 서로를 돕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선교협회들의 출현은 19세기 선교운동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즉 일반신자들에 의한 폭넓은 지원이다. 그 이전의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선교활동은 국가의 공식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정부들은 선교활동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같은 경우는 자기들의 교역지에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대부분의 유럽 정부들과 미국은 선교사들과 그 사역에 대하여 중립적인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약간 적대적인 - 태도를 견지했다. 이론적으로 불 때 선교사들이 다른 자국민들보다 더 특별한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특히 재정지원의 측면에서 볼 때, 현대의 선교사들은 그 이전의 현상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선교활동을 위해 자금을 제공하는 정부나 교회들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교지로 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대중들에게 직접 호소해야만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협회가 성장하고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가운데에서는 여성선교사들이 고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설교나 교회개척 등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특히 당시의 인종차별로 말미암아 열등한 인종들에게는 백인여성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이러한 여성들의 모범과 이들의 성공담에 힘입어 유럽과 미합중국내의 여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이러한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교활동이야말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는 여성운동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의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여러 교파들 사이에 발생한 협동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유럽이나 미합중국 내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교파들 사이의 경쟁이 인디아나 중국의 선교 사역현지에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이들을 통한 개종자들은 교파간의 울타리를 낮추고자 노력했다. 어떤 선교협회는 여러 교파로 구성되었다. 또한 선교지에서는 경쟁을 회피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항상 간구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활동의 경험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285: 아시아의 경우 식민지 확장의 영향을 직접 받은 곳은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스리랑카 등으로 이루어진 인도 대륙이었다. 오랜 엣ㄴ날부터 기독교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가톨릭교는 16세기에 , 프로테스탄트는 18세기에 최초의 선교사들이 덴마크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왔다. 
동인도회사는 처음 백 년 동안에 선교를 반대했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의 노력의 결과 이런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윌리엄 캐리는 원래 앵글리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침례교로 개종했다. 그가 현대선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당시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는 달리 복음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에까지 전도해야 한다는 특별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선교의 길에 나서 가족과 의사 1명을 데리고 인도에 도착했다. 
캐리는 나중에 합류한 제2진 선교사들과 함께 가장 시급한 성경번역 사업을 시작해서 임종 시까지 35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인도에서 캐리의 tkur은 많은 개종자를 내진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알레산더 더프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00년 후 인도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도의 최하위계층의 사람들이 대량으로 개종했으며, 여자들도 기독교를 통해 해방을 맛보았다.
동남아에서는 사이암 왕국(현재 태국)이 독립을 지키면서 기독교를 받아 들였다.
중국에서는 극동의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선교사들이 들어갔으나, 혹독한 박해와 고립상태로 말미암아 종적을 감추곤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리슨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했으나, 7년 동안의 개종자는 고작 1명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난관은 중국 정부가 외국인들의 존재를 반가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을 양도받고, 5개 항구를 개항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이 주재할 권리가 주어졌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독교 포교의 와중에 기독교에 심취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15년간 계속된 이 난리로 2,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태평천구의 난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중국 내지 선교회를 영국에서 조직하고, 이 기관의 이름으로 분열 없이 기독교를 중국에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의화단의 난동으로 수천 명의 선교사와 개종자들이 살해되었다. 서구연방은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고 중국을 함락했다. 이로 이해 중화인민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수만 명에 달했으며, 각 지방마다 번창하는 교회가 있었다. 이 때의 상태가 너무도 낙관적이었으므로 일부 서구인들은 콘스탄틴 대제 시대의 로마제국을 방불케 하는 중국 전체의 개종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언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일본은 폐쇄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 해군 제독 페리가 1854년 강제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인들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재빨리 간파하고 가능한 한 이를 빨리 습득하고자 했다. 이의 결과로 19세기 말에 일본은 발전된 공업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패배시킬 수가 있었다. 급속도의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주요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교회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페리 제독의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낸 일본은 1876년 한국에게 문호개방을 강요했다. 한국은 어쩔 수없이 일본에게 뿐만 아니라 서구제국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도 1884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미국으로부터 들어왔다. 비록 1910년 일본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한국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얼마 안 되어 한국은 필리핀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기독교 신자를 자랑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이미 오래전에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어있었고, 주민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칼의 식민지였으나, 19세기 초에는 네델란드 수중에 있었다. 19세기 말에는 기독교는 인도네시아에서 숫적으로 굉장히 성장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영국의 제임스 쿠크 선장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영국인들은 이곳에서 본국과 비슷한 교회들을 설립했다.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뉴기니의 깊은 내륙 오지에만 아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모슬렘 세계-294: 수세기에 걸쳐 모슬렘 세력은 남부와 남동부를 향한 유럽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근동 및 아프리카 북해안은 오토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이미 다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원래 기독교는 이곳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방교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오래된 교회들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었다. 로만 가톨릭교회는 모든 동방교회들과 모슬렘들을 개종하여 교황청에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동방교회들과 협력하고자 했으며, 협력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보수적인 집단은 옛날 관습으로 돌아갔으며, 진보적인 집단은 프로테스탄트 화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결국 모슬렘들까지도 개종시킬 수 있었다. 
19세기 초에 암흑대륙 아프리카에는 유럽인들의 거주 지역이 별로 없었다. 식민지의 확장과정은 상당히 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 각국에 의해 식민지화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에서는 가톨릭이,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장 중요한 선교사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다. 그가 선교사이자 영국정부의 대표로서 탐험보고 기록은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노예폐지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4년에는 내륙의 큰 도시뿐만 아니라 오지의 촌락에도 교회들이 존재했다. 
라틴 아메리카-299: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은 모든 국가 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다. 처음에는 이민의 결과로 이러한 현상이 이루어졌다. 유럽인들의 이민 장려는 결국 가톨릭이었던 원주민들 사이에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전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초에 프로테스탄트 측은 라틴 아메리카에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교파 분열도 새로운 교회들을 낳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에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 중에는 라틴 아메리카 자체 교파에 속해 있는 숫자도 많았다.
에큐메니칼 운동-302: 19세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때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전 세계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현지교회가 자체적으로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주교회, 혹은 보편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의미로 볼 때,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생을 뜻한다. 첫째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 사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19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는 실질적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만약 '에큐메니칼'이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의 연합, 혹은 통일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현대적 기독교 통일운동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선교활동임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제3부 20세기
제18장 
격변의 시대-309
19세기에 걸쳐 서구문명은 세계를 행복과 번영의 시대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에 불타고 있었다. 중국의 의화단 사건 같은 반작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가까운 장래에 세계의 모든 인구가 기독교 신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찍이 세계가 경험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을 유발시킬 흐름들이 이러한 표면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러시아의 혼란은 혁명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제 3의 로마'라고 자칭하고 있었던 러시아교회는 마치 터어키의 침략 앞에 놓여 있던 비잔틴교회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내외적으로 경제정책과 전쟁에서 실패한 니콜라스 황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책을 지향하는 온건 정부에 정권을 넘겼으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과격한 레닌과 볼셰비키 일당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공산당 혁명이 성공하자 그들은 교회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곧 국제여론과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혁명주의자들이 대항하는 내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적군이 승리하게 되었을 때, 소비에트정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교회야말로 자기들의 숙적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미국은 뒤늦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이 전쟁의 결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국은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국제연맹에도 참가를 거부했다. 내부적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대공황이 닥치자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실행해서 불황을 극복했다. 멕시코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교회재산이 압류되었다. 가톨릭교회와 혁명파 사이에 갈등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유럽에서는 많은 이들이 국제연맹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파시즘의 출현으로 이러한 소망은 무산되었다. 처음 무솔리니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에서 강화되었던 파시즘은 전쟁을 신성화하여 상처 입은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했으며, 국가전체를 전체주의적 병기로 변화시켰다. 이들의 사회문제에 관한 정책은 혼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격한 혁명분자들과 합세했으나, 곧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산업자본가들과 연합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새로운 귀족층을 창출했다. 어쨌든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하고,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증오하면서 일부 자본가들을 위한 독재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파시즘의 전체적 양상이었다. 무솔리니의 표현대로 이들은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임무라면, 전쟁이야말로 남자들의 의무'라고 부르짖었다.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아탈리아의 파시즘을 압도했다. 나치당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국제 파시즘의 도그마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가 내란에서 승리했다. 기독교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태도는 여러 가지였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는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무솔리니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항상 변했다. 히틀러는 인류에 대한 사랑 및 다른 뺨까지 돌려대는 기독교의 윤리의 교훈이, 정복과 권력을 부르짖는 그의 궁극적 목적에 상치된다고 생각했으나,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파시즘의 매력 중 하나는 그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재건을 약속했다. 그리스의 파시스트들은 스파르타식 군국주의와 비잔틴제국의 영광을 약속했다. 스페인의 팔랑헤당(Falagistas)은 스페인제국의 '황금시대'를 중흥시키겠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여러 가지 약속과 소망들은 상호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배경에 자리 잡은 전쟁의 신격화, 언론의 자유에 대한 혐오,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일체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기반으로 파시스트의 운동들은 한데 뭉쳐 일체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혹은 평화주의에 대적했다.
1939년 6월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연합 추축국과 대항하여 다시 한 번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본이 이에 가세하면서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미합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통적 국가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편, 서구세계에서 최근까지만 해도 2등 시민으로 만족하고 있던 계층 - 특히 여성들과 흑인들 - 이 갑자가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3차 세계대전의 예측과 관련되어 있다. 즉 기성 지도자층이 세계를 이런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면서, 이제 또 다른 계층이 지도적 기능을 담당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합중국의 흑인들과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종전 후 이들은 다시 원래의 피압박 상태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민권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은 흑인들과 여성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세계를 지도해왔던 백인남성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도 존재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존재했다. 그 어떤 국제기구나 회사나 정치적 운동보다도 교회는 국경과 계층과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우주교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20세기의 몇몇 학자들은 전 세대의 선교사들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들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로 이 선교사들이 모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독교의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국제적 규모의 교회에게 있어서 20세기의 과제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인종과 계층 간의 분쟁이 이전의 신학적 차이점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는 박해를 받기도 했으며,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신자들은 분열되고 방황하고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이들은 영원한 평화와 정의의 통치를 이루실 그 분을 증거했다. 
제19장 
동방 기독교
20세기 기독교인 모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콘스탄틴 이후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른 다시 말해 교회가 어떻게 콘스탄틴 이래 당연히 누려온 정치적 지원 없이 생존해야 할까 하는 의미이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서방기독교는 항상 기독교에 적대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세속국가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비잔틴 기독교-320: 교회가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받았던 지원들은 축복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희랍교회는 방대한 특권을 누렸으나, 동시에 그 자유는 제한받아야 했다. 서방의 경우 교황들이 국왕들보다도 더 강력했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동방에서는 황제들이 교회를 통치했으며, 황제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총대주교들은 그 직위을 박탈당하거나 대체되곤 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자기 조직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와 재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을 때, 비잔틴교회 내의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1년 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터어키인들에게 함락 당했다. 수많은 비잔틴기독교신자들은 이 사건이 동방교회를 이단적인 로마와 강제로 연합시켰던 황제의 폭거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했다.
콘스탄티노플 시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반수가량은 모스크로 전환되었으나, 나머지 교회에서는 국가의 완전한 보장 아래 기독교의 예배를 계속할 수 있었다. 1516년 오토만제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게 되자, 그곳에 있는 기독교신자들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두었다. 1년 후 이집트가 터어키에게 함락되었을 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하여금 그곳의 신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를 통해 총대주교들은 터어키제국 내에서 또 다른 별개의 기독교 국가를 통치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술탄의 정책에 반대하는 총대주교들은 가차 없이 그 직위가 박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쳐 헬라어 사용권 교회들의 신학활동은 서방의 영향 아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기간 중 서방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학적 문제들은 헬라어 사용권 교회에서도 논의되었으며, 162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ucaris)가 펴낸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짙은 프로테스탄트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비록 루카리스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살해당했으나, 그의 이름은 계속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신앙고백은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1672년의 종교회의는 그를 "칼빈주의적 이단자'라고 정죄했다. 
오토만 터키 제국이 몰락하자,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루마니아 등에서 국가별로 정교회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유럽 다른 지역 국가 정교회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들 국가는 주로 소비에트 종교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교회-323: 러시아의 많은 신자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이단적인 로마와의 재결합에 동의한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로서 로마를 대체했듯이 이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는데 까지 발전해 갔다. '제3의 로마'야말로 정통신앙을 수호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1547년 러시아의 이반IV세는 "짜르", 즉 황제라는 칭호를 자칭했다. 이는 곧 그가 그 옛날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황제들의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마찬가지로 1598년 모스크바의 대주교(metropolitan)는 총대주교의 칭호를 차지했다.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1689-1725)는 또 따른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그리스 정교 신자들과의 화해보다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교회 역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호했든, 이들은 자기의 본래의 정교회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카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의 방법론 등을 도입하여 정교회 본래의 신학을 발전시킬 길을 찾았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일부는 카톨릭적으로, 일부는 프로테스탄트적으로 기울어져 공존했다.
그러나 19세기말 민족주의적 반동이 강하게 일어나, 러시아 고유의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친슬라브주의(Slvaophile)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끈 중심인물은 평신도출신의 신학자 알렉시스 코미야코프로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도입하여 정교회가 주장했던 보편성이야말로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의 통일과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하는 복음의 자유를 포용하는 완전한 신테제(Synthesis)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러시아 혁명은 이 모든 논쟁을 종식시켰고,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불법화되었다. 
다른 동방 교회들-325: 세계전역에는 정교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중국, 한국의 정교회는 러시아 교회가 남긴 유산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지역 내에서는 하나의 교회만을 인정했지만, 이민을 떠나 정착한 신자들은 출신지역이 다르므로 이른바, 정교회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게 되었다. 
5세기에 있었던 기록논쟁 시기부터 동방 정교회 내에서도 종교회의의 결정에 대해 일치할 수 없는 입장들을 유지했다. 이전 페르시아 제국 영토내의 대부분 신자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므로 네스토리우스파라 불리기도 했다. '앗시리안'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이러한 신자들의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다. 중세의 한 동안은 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중국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치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특히 모슬렘 신도들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20세기 초에는 핍박 때문에 신자들의 수가 격감했다. 많은 생존자들은 서구로 이주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사이프러스로 일단 이주했다가 결국은 시카고에 정착했다. 현재 10만 명에 달하는 이들 기독교신자들은 이란, 이라크, 그리고 미합중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칼케돈종교회의의 '신앙의 정의'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자들은 흔히 '단성론자'(Monophysites)라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이 이들의 기독론적 입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집트의 콥트교회와 여기서 파생된 이디오피아 교회이다. 후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야곱파"(Jacobite)라 알려진 고대의 시리아 단성론파 교회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야곱파의 수장인 안디옥 총대주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자리잡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인디아의 시리아파 교회는 사도 로마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자칭하고 있으며, 토착화된 형태에서 약 50만명의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아르메니아교회는 칼케돈 신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를 침략했을 때 로마제국이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던 데에 있다. 이들의 영토는 터어키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이들은 계속하여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터어키인 정복자들과 계속 갈등상태에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갈등은 폭력사태로 나타났다. 터어키의 지배 아래 있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약100만 명이 이를 피해 이주했는데, 그 결과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란, 이라크, 그리스, 프랑스 그리고 서유럽 일대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소련의 영토 일부가 된 아르메니아지방에서는 정교회가 영토내의 다른 교회들과 비슷한 상태로 계속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교회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는 이들 교회들이 눈부신 속도로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에, 이제 서로 비슷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게 상당한 통찰력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서방 기독교신자들이 동방교회로 하여금 가장 혹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예배의식의 힘을 과소평가했었다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다.
제20장 
로만 가톨릭교
가톨릭교회는 현대의 각종 사상과 운동들을 공포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동을 가져온 이유들 가운데는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에게 교황령을 빼앗겼다는 것, 새로운 세속국가들이 가톨릭교회의 사역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현대사상에 의해 신자들이 무신론적으로 물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이들 비판세력들은 계속 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당했다. 따라서 20세기의 가톨릭교회 역사야말로, 트렌트회의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계속 고수하는 세력과 현대세계의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베네딕트 15세로부터 피우스 12세까지-330: 베네딕트15세 교황은 전임자들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별로 유능한 교황은 못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피우스11세는 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가톨릭 선교사의 숫자가 두 배로 증가했으며, 최초의 중국인 주교들을 임명한 것도 그였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 특히 무신론적 입장에 대해 크게 우려했으나, 초기 파시즘은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다. 
독일의 경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겁낸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기세를 떨치고 있던 나치를 지지했다. 로마에서는 나치정권을 인정하는 바티칸의 입장을 천명하는 화의를 발표했다. 교황이 나치즘의 위험을 깨달은 것은 수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는 누구도 공산주의와 협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피우스12세는 몇 시간씩 기도와 명상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혹사하는 엄한 상전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매력 때문에 친구와 적들에게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초기는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얼룩져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우스 12세는 언젠가 때가 오면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할 욕심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의 위치 때문에 나치의 잔악한 유대인 학살사건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이 때문에 후에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까지도 당시 교황이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이들은 교황의 항의도 이를 방지하지 못했으리라는 구실로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그는 비이탈리아인들도 쿠리아(교황청)에 참여시켰으며, 추기경단을 국제화하여 그의 임종 시에는 3부의 1만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339: 그러나 요한23세라는 칭호를 택한 나이 많은 교황의 짧은 재임기간(1958-1963) 중 역사적 변화들이 발생했다. 그가 일찍이 아비뇽 교황시대와 피사에 거주했던 반교황(anti-pope), 요한23세에 의해 얼룩진 요한이라는 칭호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중한 임무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았음을 자각했던 요한23세는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교황선출 후 3개월 만에 에큐메니칼 종교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황청 내의 많은 인사들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과거의 종교회의들은 대부분 교회가 당면했던 시급한 문제들 - 특히 위험한 이단사상들 -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교황무오성의 교리가 반포된 이후에는, 이미 종교회의시대가 막을 내렸으니, 이제 교황은 절대적 군주로서 교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피우스9세 이루 가톨릭교회는 일련의 중앙집권화 현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23세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주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 불렀으며, 이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충고를 듣고 싶어 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전면 개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확신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전체 교회주교들의 단결된 지혜와 관심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수백 년 동안 가톨릭교를 지배해 온 고루한 사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종교의 자유 및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문서들이다, 전자는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종교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모든 종교단체들은 '인간의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질서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원칙에 따라 조직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에 관한 목회헌법'(Pastoral Constitution on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은 바울6세 때 공의회에 의해 발표된 가장 긴 서류이며, 19세기에 고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가톨릭교의 원칙들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 내용은 현대생활의 여러 방면에 관하여 적극적 개방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가정생활, 경제와 사회문제, 정치, 기술과 과학, 인간문화의 중요성과 다양성 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두를 보면 그 전체 내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들의 기쁨과 소망과 슬픔과 고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슬픔이요 고통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고 모든 이들을 위해 마련된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공동체는 스스로 인류 및 그 역사와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바울6세가 사망하자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탄생했다. 요한바울2세는 신부들이 정치적으로는 공식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교회는 정의의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적 발전-345: 가톨릭교회의 내부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세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준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낳게 한 신학적 작업은 이미 5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신부의 노동현장 개입운동과 같은 실험은 로마당국이 찬성하지 않았던 신학적 탐구의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바티칸에 의해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던 신학자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테이야르는 종군 병사로 참전하였으며, 예수회에 가입하고,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항상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이는 창조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력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결과였다. 그는 진화론의 일반적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적자생존'이 진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는 다윈의 제안을 부인했다. 그는 대신에 '복잡성 및 지각에 관한 우주법칙'을 제안했는데, 이는 보다 복잡하고 보다 높은 지각을 향해 진화가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스도 속에서 인성과 신성이 완전하게 결합하듯이 우리들도 최후에는 완전한 우리들 자신임과 동시에, 완전하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야말로 종착점에 중심을 두고 있는 역사적 실재이다. 따라서 데이야르는 과학과 신학, 그리고 신비적 요소까지를 한데 결합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신비주의적 전통과는 달리 이 세상을 인정하는 신비주의자였다. 
이러한 테이야르의 전 우주를 포괄하는 체계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진화과정을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초로' 관찰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망라한 현대 신학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에 큰 관심을 갖도록 했다.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에 현대신학에서 종말론은 다른 신학들에 첨부된 부록으로서가 아니라, 중요한 시발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진화과정의 계속성과 이 가운데 참여하는 우리들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했던 테이야르의 덕분으로 다른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참여하는 인간의 모습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적극적 동인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창했던 이성적 신비주의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건생활을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결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루백(Henri de Lubac)은 테이야르처럼 광범위한 우주적 관심에 기울어지지는 않았으나, 초기 기독교전통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 때문에 가톨릭신학에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테이야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한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역사는 이러한 목표의 관점으로부터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데, 이 목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법률적 기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영체로서의 교회야말로 세계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성레(sacrament)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또 다른 전문가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역시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1939년 프랑스군 병사로 참전하여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전쟁포로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보다도 현대인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득한 바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그는 후에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도미니크수도원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루백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각종 신학논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 전통의 범위를 좁혀 왔기 때문에, 원래의 전통이 가지는 풍성함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교회의 자기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시 지도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던 바, 교회를 법률적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원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 속에서 평신도야말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20세기 초의 많은 가톨릭신학자들과는 달리 다른 교파에 속한 신자들에게도 매우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칼 라너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생전 3,000편 이상의 책들과 논문을 남겼다. 그 내용은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신학 문제부터, '우리는 왜 밤에 기도하는가?' 등 평범한 일상생활까지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모두 비슷했다. 그는 전통과 현대세계를 모두 인정하고서, 전통을 향해 일반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적 본질 자체를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신비성을 일상생활에 도입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실존주의의 지도자이자 그의 교수였던 마틴 하이덱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일반 평신도들을 위한 저술은 매우 적었으며, 주로 신학자들을 상대로 글을 쓰면서 이들로 하여금 전통의 새로운 해석에 눈을 뜨게 하고자 노력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전통적 해석들과는 다른 해석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프랑스인들처럼 로마 당국에 의해서 금령을 받지 않았다. 그의 영향은 직접 간접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선언문들에 미쳤으나,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야는 역시 감독제도의 기능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수세대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는 왕실 정치의 본을 따라 로마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라너는 감독제도의 개념을 탐구하여, 로마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감독제도의 집단지도 체제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는 곧 로마가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 즉 보편성을 갖게 됨을 의미했다. 로마나 서구 유럽적인 관점을 진리의 기준으로 고집하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적응해 나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집단성의 개념이 단지 감독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용어의 사용, 그리고 각양 문화의 상황에 따른 예배의식의 적용 등에 관한 공의회 결정의 배경을 이루었다.
건전한 신학적 학문과 전통의 이해와 재해석,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라너의 모습은 그 후 나타난 각종 신학들, 특히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펴볼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들을 수용하고 평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20세기 로만가톨릭의 모습은 수세기에 걸쳐 현대세계의 도전을 단지 대결과 정죄로 일관했던 입장을 벗어나, 이 세계와 새로운 대화를 모색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가톨릭 신도들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신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가톨릭교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제21장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 
19세기에 가톨릭교가 현대세계의 도전들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프랑스에서는 회의주의와 세속주의가 창궐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자유주의의 낙관적 희망의 실패로 말미암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영국 등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했던 지역에서도 역시 회의주의와 세속주의의 세력이 득세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20세기중반에는 이미 북부 유럽이 프로테스탄트의 본진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했으며, 그 지도적 위치는 다른 지역들로 이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354: 1914년 전쟁이 발발할 즈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고조되어가는 긴장을 감지했으며, 교회들의 국제적인 조직을 이용하여 전쟁을 방지해 보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이러한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국가주의적 감정에 휘말려 들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화해의 통로로 사용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인물은 1914년부터 루터란의 웁살라 대주교였던 나단 죄더블롬이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양측을 망라하는 지기들을 통해 기독교가 가지는 교제의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인 본질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전쟁 후, 평화애호자로서 명성과 노력을 통해 그는 초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시대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할 신학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질과 능력에 관하여 한없이 낙관적이었던 자유주의는 당시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죄더블롬 및 기타 스칸디나비아 신학자들은 루터 및 그의 신학에 관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학자들은 루터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독일정신의 진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스칸디나비아 및 독일신학자들은 루터의 신학을 보다 깊이 탐구하면서, 그 이전의 해석과는 상이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문에서 중요한 업적들은 구스타브 아울렌의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과 앤더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는데, 이는 그 전 세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칼 바르트에게서 나왔다. 바르트는 제네바에서 처음 목회를 하면서 칼빈의 [기도교 강요]를 정독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빈농들과 노동자들이 사는 샤펜빌로 옮겨 목회를 하면서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auxauc 친구들을 위해 집필했던 [로마서주석]의 전면 수정된 제 2판을 끝내자마자 괴팅겐의 교수로 갔다. 그는 그후 뮌스터, 본, 그리고 바젤 등에서 계속 교수로 재직했다.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제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영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 인간의 업적과 하나님의 행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 등을 주장한 데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은 바르트의 [로마서주석]개정판이야말로 일찍이 키에르케고르가 저술했던 [기독교권에 대한 비판](Attack on Christendom)의 바르트 판이라고 말해왔다.
바르트가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가 나름대로의 새로운 학파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학파는 흔히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신학' 혹은 '신정통주의'라 불렸다. 그의 신학은 절대로 우리들의 소유가 될 수 없이 항상 우리들에게 대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학, 이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에 “예”이면서도 “아니오”, 즉 동시에 긍정과 부정이 될 수 있다는 신학,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들의 노력에 안식과 영감이 아니라 위기를 가져다준다는 신학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불트만과 고가르텐은 바르트의 사상이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 지나치게 정통적이며, 현대인들의 회의에 정면으로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 집단을 떠나게 된다. 또한 브룬너 역시 자연과 은총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바르트와 동의하지 못했으므로 갈라서게 되었다. 브룬너는 은혜가 행동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속에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르트는 그렇게 할 경우 자연주의신학이 다시 도입되게 될 뿐만 아니라, 은혜가 스스로 그 자체의 '접촉점'을 마련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쨌든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순례를 계속했다. 1927년에는 [기독교교의학] 제 1권이 출판되었다. 바르트는 그 가운데에 신학의 목적은 슐라이어마허나 다른 이들이 주장했던 바처럼 기독교신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그의 작품의 분위기 역시 변화했다. [로마서주석]에서는 과거의 오류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으나, 이제 그는 또 다른 조직신학을 수립하고자 애쓰는 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위기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전체계획이 사실은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르트는 안셀름을 연구하고,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신학을 살펴본 결과 자기의 [기독교교의학]이 지나치게 철학에 양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교의학]에서 신학은 우리들의 가장 깊은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제안했으며, 자기의 신학을 대신할 기본구조로서 실존주의 철학을 사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해답뿐만 아니라 질문까지도 부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를 들어서 죄의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처음부터 죄를 자각하고 복음이 이에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모르고는 은혜도 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 때문에 바르트는 그의 거대한 조직신학적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신학의 교회적 지표를 강조하기 위해 이를 [교회교의학]이라 이름했다.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이 13권으로 된 저술들은 1932년에서 196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의 [교회교의학]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신학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이들이 체계화된 신학은 과거의 유물이며, 신학은 기껏해야 전공논문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바르트는 가장 뛰어난 신학을 위한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의 [교의학]을 읽노라면 그가 초대교회로부터의 기독교전통에 통달하고 있음을 즉각 알게 된다. 또한 거의 40년에 걸쳐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체작품이 일관성 있는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제목에 따라 그의 강조점은 바뀌지만, 전혀 새로운 출발점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전체적 신학 작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바르트 자신의 자유와 비판의 정신이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란 아무리 진실하거나 정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작업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유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유머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갈등-360: 바르트가 [교회교의학]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히틀러는 독일내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통일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독일민족의 우수성과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는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에 의해 재해석된 전통적 기독교신앙과 인종적 우수성의 관념과 독일민주주의를 한데 합친 '독일기독교당'(German Christian)이 출현했다. 이들의 의도들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상치되는 개념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독일제국의 반유대 정책에 공헌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여 1933년에는 연합독일복음주의교회(United German Evangelical Church)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연합교회가 택하고 있는 방향에 대하여 바르트와 불트만을 포함한 일단의 신학자들이 ‘증인들의 총회’를 개최하고 고백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사건들과 권력들, 인물들이나 혹은 신조들을 마치 하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인양 받아들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거부했다. 
히틀러 정권 아래 박해를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였다. 그는 산상보훈을 상황화한 [제자도의 대가]와 [성도의 공동생활]을 출판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 고백교회의 요청을 받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로 돌아와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신학교는 곧 폐쇄되었고, 그는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종전을 며칠 앞두고 처형되었다.
이때의 서신들과 그가 남긴 유작들을 통해, 그는 후세대들에게 커다란 연구과제로 남겨졌던 새로운 사상들과 씨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세계가 '성숙'단계에 있으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현명한 부모와 비슷한 것으로서,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간다고 묘사했다. 이와 연결하여 그는 존경하고 있었던 바르트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사실상 계시의 한계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뛰어넘어 '계시의 실증주의'(positivism of revelation)을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문에서는 바르트의 주장을 수용하여 과감하게 바르트의 원칙들을 적용해 보고자 했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종교란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본회퍼는 '종교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후세인들은 이러한 암시들을 서로 다른 몇 가지 방법들로 따르고자 했다.
전 후-365: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들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상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의 대화는 프라하 코메니우스신학원의 학장이던 요셉 로마드카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헝가리가 후스의 출생지였으며, 이곳의 30년 전쟁의 피해를 극심하게 경험했던 지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이후 이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을 자기들의 박해자로 간주했다. 따라서 공산주의 정부가 모든 교회들을 평등하게 취급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바티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새 정부를 반대하고 나서자,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은 이를 가톨릭 측에서 상실했던 주도권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침략군에 대항한 후스파의 저항시대부터 기독교신앙은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보다 강렬한 정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로마드카 및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로마드카는 세계 2차 대전 이전부터도 러시아식 공산주의자야말로 세계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서, 새로운 시대에서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또한 1933년에 이미 그는 또한 나치주의의 위험들을 경고했다. 독일이 고국을 침공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8년간 킹스턴 신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라고 칭하는 것은 단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의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자기 원래의 신념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에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의 존재란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경과 기독교신앙이 계시하는 진정한 하나님은 공산주의가 부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쓸데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양극화가 가져오는 차이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에 존재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불의를 그냥 인정해서도 안 된다. 
유럽의 또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에 참여했던 마르크스주의 인사들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분석에 관한 마르크스의 근본요소에 찬성하면서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추구해 보고자 했던 수정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에른스트 블로흐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그는 종교 일반, 특히 기독교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박해자들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에 찬성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나타난 이론인, 초대기독교는 또한 박해에 대항한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블로흐는 기독교신조들과 성경에 나타난 교훈들이 긍정적 가치들을 가지도록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가치가 소망의 메시지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소망의 원칙'이야말로 초대기독교가 인간역사에 미친 가장 위대한 공헌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마르크스 수정주의자들의 사상과 함께, 이러한 소망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자 사이의 대화를 위한 통로를 열었다. 이러한 대화-특히 블로흐의 사상-는 20세기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에 공헌했으니, 이는 곧 기독교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로서 소망과 종말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소망의 신학]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출판한 몰트만은 소망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의 중심 분야라고 주장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나시고 우리들을 미래로 부르신다고 했다. 그리하여 소망의 신학은 신자들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미래, 즉 빈곤과 박해에 대항한 투쟁에 우리를 불러들이신다는 것이다.
한편 쏘련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서부 유럽에서는 세속화 과정이 가속화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 출석율이 10% 이하로 떨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루돌프 불트만의 노문 [신약과 신화]에 의해 제공되었다. 불트만은 신학의 메시지가 신화 속에 쌓여 있으므로 오늘날 이를 듣기 위해선 “비신화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신화화 과정이 없이는 신앙이 오해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현대세계는 더 이상 초자연적인 개입이라는 관념을 수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들의 용어로써 하나님을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 및 이러한 모든 관념들은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불트만의 책이 출판 된지 20년 만에 앵글리칸 주교 존 로빈손의 [신에게 솔직히]가 나타났다. 불트만뿐만 아니라 본회퍼 및 폴 틸리히의 이론들을 보다 대중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이 책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6년 프랑스에서는 감리교와 회중파내의 개혁파신자들이 연합하여 프랑스 개혁교회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특히 공업화된 지역 내에서 전도와 선교에 투신했다. 마찬가지로 서독의 경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13만 명의 인원들을 동원하여 독일 및 해외의 사회문제 및 구제 사업에 헌신했다. 이러한 운동 뒤에는 세속화가 아닌 순종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받아들였던 수백만 명의 헌신적 신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정부가 교회출석을 탄압한지 40년 후에도 전 인구의 2/3가량이 기독교신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마침내 1978년, 정부는 교회와 합의에 도달하여 기독청년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고, 지역적 전국적 집회를 허락하며, 몇몇 교회건물의 건축을 인정하기로 했다. 1983년 정부와 교회들 -로만 가톨릭을 포함하여-은 연합으로 루터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했다. 비록 20세기의 획기적, 충격적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어떤 곳에서는 소수화하기도 했으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그 생명과 활기를 잃지 않았다.
제22장 
미국 내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제1차 세계대전부터 대공황 시기까지-371: 미합중국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유럽과 같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평화운동을 지지했던 교회들은 이제 전쟁을 위한 선전에 가담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을 막론하고 '문명을 구원할'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보다 극단적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당시 사건들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평화주의 노선을 고수해 온 메노나이트와 퀘이커들을 제외하고, 교회들은 전쟁의 열기와 국가적 우월감에 사로잡혔으며, 일부 강단에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체 독일국민들을 멸종시키라고 고함치기도 했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 선데이는 '과격파'들을 추방하는 것은 충분한 처벌이 되지 못하므로, 대신 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시키자고 소리 질렀다.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전후에 특히 격화되었다. 바로 이때가 근본주의자들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의 학습을 금지시키고자 했던 노력의 절정을 이루었던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이 발생한 시기였다. 거의 모든 교파들이 근본주의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의 무오설이었다. 성경의 무오설이야말로 근본주의 정통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후에는 이러한 분리가 공개적인 분파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북장로교 근본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 그레셤 메이쳔은 1929년 미국 근본주의신학의 아성이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으며, 결국은 이를 중심으로 정통장로교회가 성립되었다(1936년).
세계 1차 대전과 그 후 10년 동안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전쟁과 그 참혹상은 먼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 미합중국 내에서는 아직도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다. 교회들과 강단에서는 유럽에서 이미 전 세계들의 낙관론을 경험한 후 생성되었던 새로운 신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아직도 '자유인들의 나라이자 용사들의 고향'이라는 미국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불황이 닥쳐왔다.
불황과 제2차 세계대전-375: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의 주식시장이 파산했다. 서구시장의 대부분은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도 노동인구의 1/4은 실업상태에 빠졌다. 사회주의에 물들 것을 우려했던 미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없었다. 미국의 실업자들은 기댈 것이 없었다. 은행이 문을 닫고 부도수표가 남발되고 개인재산은 차압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는 불황의 존재를 부인하고 낙관적으로 대처했다. 평생 부족한 것을 몰랐고, 앞으로는 더 잘 살게 될 것을 믿었던 세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무제한적 낙관주의가 퇴색했다.
이제부터 보다 덜 낙관적인 신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미국에 소개되었고, 니버 형제의 동생 라인홀드는 [미국내의 하나님의 왕국]과 [교파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냈고, 형 라인홀드는 유명한 저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를 내고,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야말로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 기독자연맹’을 조직했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가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왔다. 그는 현대인들의 가장 심오한 실존적 질문들-궁극적 관심-을 찾아내고, 복음이 어떻게 이에 대응하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의 [조직신학]은 이러한 방법의 기반위에 기독교 신학의 중심주제들을 파악하려는 노력이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뉴딜정책이 등장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이 주장해온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불황을 일시에 걷어내게 만들었다. 
세계가 전쟁에 의해 분리된 와중에서도 양측 기독교 신자들은 교제와 대화의 다리를 놓고자 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전쟁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진다. 
전후 시대-381: 추축국들의 패전이 확실해지자마자 보다 더 위험한 대적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등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색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메카디 시대에는 교회 등록교인이 아니면 반미국적을 가졌다고도 생각될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교회들은 급성장했다. 각처의 유복한 교인들이 아름다운 예배당과 교육관, 기타 교회건물들을 지었던 교회건축시대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빌리 그레이엄복음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단순한 미국의 전통적 부흥회의 연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관은 풍부한 재정지원을 이용하여 가장 뛰어난 대중 전달매체와 기구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협회는 공식적으로 보수적 신앙노선을 겸비했으나, 가능한 한 다른 경향의 신자들과의 마찰을 회피했다. 동 협회는 곧 세계전역에서 사역했으며, 이를 통해 모든 대륙에 미국적 부흥회 전통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일들이 잘 되어간 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교파 교회들은 이제 가난한 자들과 소수민족들이 점거한 도시들을 포기했다. 물론 일부 예외적인 인사들은 있었으나, 대교파지도자들은 새로이 구성되기 시작한 풍요한 교외지역들의 상황에 적응해 버리고, 대도시 및 시골지방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 시골의 경우, 전통적인 교파에 계속 남아있던 신자들은 점차 새로운 지도층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성결교회가 이러한 공백을 메꾸고자 했으나, 주민들 대다수는 결국 모든 형태의 기성기독교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1950년대의 대부흥 현상 20년 만에 도시를 구조하자는 새로운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이 과업을 이룰 수 있을지 분명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도시 속에서 종교적 활력이 재생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현상은 상당히 부유한 층들이 다시 도시로 귀환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전후 기독교부흥의 또 다른 특색은 기독교신앙을 내부적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종교저술가들 중 하나는 노만 빈센트 필이다. 그는 정신건강과 행복에 이르는 수단으로 신앙과 '적극적 사고'를 주창했다. 역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은 이 당시의 종교성을 가리켜 '신앙 자체에 대한 신앙' 즉 '마음의 평화와 자신 있는 생활'을 약속했던 신앙에 대한 동경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의 종교성은 시대와 부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혼란된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평화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책임에 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냉전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미국 내의 정치여론을 극우적으로 몰아갔던 이들과의 대결도 회피했다. 
정부는 1949년 군대 내에서의 인종분리를 철폐하고, 1952년 역사적인 대법원판결을 통해 공립학교내의 인종통합을 명령했다. 일부 백인들도 이러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큰 힘이 되었다. 전국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와 여러 대교파들도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이끌고 간 것은 물론 흑인들 자신의 적극적 참여와 지도력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활약한 흑인 목사 루터 킹은 남부기독교지도자 연맹을 결성했으나, 이것만으로는 블랙 파워를 외치는 흑인들의 원한과 울분을 풀어줄 수 없었다. 킹 목사의 움직임은 인종분리의 문제를 넘어서 불의에 대한 싸움으로 번져 갔다. 그들의 투쟁은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가난한 이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행진’을 주도하던 중에 암살당했다. 그러나 교회는 흑인 저항운동의 집회소이자 훈련소가 되었다. 마침내 ‘흑인신학’이 나타났다.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제임스 콘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보편적으로 차별당하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일체성을 갖지 못하는 기독교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핍박당하는 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 신학은 복음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셨던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하나님, 그들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민권운동처럼 널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여권신장운동이 일어났다. 교회내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성들도 안수를 받고 말씀 사역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나는 것과 이제까지 남성들이 주도해 왔던 전통적 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여성 안수를 시작했으며, 신학분야에서도 남성우위의 신학을 교정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흑인들과 여성들이 관련된 움직임들과 함께 또 다른 국제, 국내정세들이 미국의 사고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전쟁이다. 처음에는 소규모군사작전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1965년에는 미국이 참전했던 가장 장기간의 전쟁으로 화했다. 원래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던 미합중국이 부정부패로 가득 찬 정부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약소국들을 상대로 막대한 화력을 쏟아 부으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언론은 전쟁의 참혹상을 국내의 각 가정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국민과 의회는 전쟁확장의 주원인이 되었던 '통킹만 사건'에 관해 오도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실망과 좌절과 반전데모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결국 학생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무력이 동원되어 켄트주립대학과 잭슨주립대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합중국은 전쟁을 종료하기로 했다.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이다. 국내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해외에서의 자기방어를 상징하는 '자유인의 나라, 용자들의 고향'이라는 개념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공업의 발전과 생활의 풍요로 인해 일부인사들은 미국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체제 자체가 인위적으로 전쟁을 발발시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한 미국민들의 분노와 회의 속에서 닉슨대통령이 사임했다.
세속적인 관념과 용어로 기독교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노력은 ‘사신신학'으로 나타났다. 하비콕스는 [세속도시]를 통해 도시사회의 측면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재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와 도전들을 평가해 보고자 했다.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한 신학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세 가지 공통된 주제가 존재한다. 즉 미래지향적 태도와 사회정치학적 현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한데 묶어 조정해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신학들이 택했던 길은 종말론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회복해 보고자 한 것이니, 다시 말해 현대의 사회 속으로 깊이 참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예배의 종말론적 차원과 그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예배의식의 부흥이 있었다.
1973년 이러한 사상을 함께 하는 일단의 기독교지도자들은 '시카고선언'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미합중국내의 신자들 가운데 점차 고조되고 있는 확신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선언문이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던 전 세계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 의한 각종 선언문들과 비슷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 속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전 세계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미합중국내의 교회들이 마침내 콘스탄틴 이후 시대와 에큐메니칼 시대의 도전에 비로소 응답하는 듯 보였다. 이는 또한 교회가 '우주시대'의 새로운 비젼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구는 마치 언약한 '우주선'과 같았으며,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함께 공존하든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제23장
지구의 끝으로부터 
19세기 후반부터는 각 지역 교회들 간에 보다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현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연합을 위한 추구-394: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 총회를 모태로 하여 세계선교사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결성되었다. 총회가 거듭될수록 많은 대표들에게 교회의 본질 및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는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교회의 본질적 성격 및 기타 중요한 신학 문제를 먼저 논의하지 않고 선교작업만을 취급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과 규범에 관한 1차 회의를 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한 것이다. 2차 회의는 1937년 에딘버러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만장일치를 고집하지 않고 합의된 내용들을 정리한 뒤에 합의되지 못한 의견들을 병기해 두었다. 합의되지 못한 문제들은 더 많은 대화와 설명을 통해 극복될 것으로 믿었다. 
마침내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가 열렸다. 이들은 신앙과 규범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계속 세계회의를 조직하고 준비하도록 했다. 이후 협의회 회원들은 계속 증가했다. 제2차 총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렸고, 163개 회원 교회가 참가했다. 제3차 총회는 1961년 뉴델리에서 열렸으며, 197개 회원 교회가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국제선교사협의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합류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모든 교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 연합하여 공존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후에 교회연합은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 끝으로부터의 선교-401: 선교 사역은 항상 세계 각처에 현지인들이 이끄는 성숙한 교회들을 설립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교초기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을 막론하고 신생 교회들은 기독교신학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없으리라고 간주되었다. 기껏해야 이들 현지교회들은 자기들 고유의 문화 환경 속에서 서구적 신학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정도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 식민지주의의 종식, 그리고 신생 교회들의 자신감 획득 등에 따라 이들은 원래 피선교교회들이 예기치 못했던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적용이 아니라 이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띤 질문과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저서들이 출판되었다. 아시아의 경우, 태국에 갔던 일본출신 선교사 코야마 코수케가 [물소신학,Waterbuffalo Theology]을 저술했다. 수년 후에는 중국인 초안 셍송이 [제3안의 신학: 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신학,Third-Eye Theology:Theology in Formation in Asian Settings]과 [인자하신 하나님,The Compassionate God]을 출판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한 투쟁의 와중에서 알란 뵈삭이 [순수여, 안녕, Farewell to Innocence]을 저술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리교도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가 [혁명적 상황 속에서의 신학작업[,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과 [기독신자와 마르크스주의자,Christians and Marxists]를 저술했다.
이들은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즉 기독교신학 전체를 전통적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조망한 것이다. 대부분 이처럼 상이한 관점을 택하게 된 것은 단순히 문화적 배경들만이 아니라 피압박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저항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복음이 결국 교회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단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해방신학자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구스타보 구티엘레즈와 후앙 루이스 세군도가 있다. 이들이 제안했던 것은 단지 해방의 문제에 국한된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신조와 생활전체를 하나님에 의하여,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래로부터' 힘을 받은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이 비록 전격적으로 새로운 모양이기는 하지만, 정통기독교신조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특히 성경 속에서 전통적 신학이 무시했거나 추상화했던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활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새로운 복음해석에 응답하여야 했던 전 세계에 걸친 기독교공동체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그 반응은 곧 나타났다. 로마당국은 라틴아메리카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주교들은 다음 회의에서는 메델리 선언으로부터 한걸음 후퇴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1978년 멕시코 푸에블라(Puebla) 회의에서 주교들은 자기들의 원래 입장을 고수했다. 서구의 언론에서 해방신학은 동서간의 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 흔히 '마르크스신학'으로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자체에서도 이에 극렬하게 반대한 인물들이 많았다. 투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반대파들도 단결했다.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는 그를 기존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본 집단에 의해 피살되었다. 바젤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는 주교들을 헬더 카마라와 파울로 에바리스토 아른스가 영도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샌다니스타 공산정권과 기독교사이의 대결이 고조되었다. 과테말라 및 인근제국에서 수백 명의 가톨릭신자들이 반역혐의를 쓰고 살해당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신학자들은 이 새로운 신학을 부인하거나 무시했으나, 수많은 신학자들과 기독교지도자들은 이를 복음이 시사하는 바를 또 다른 측면에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이러한 논쟁들과 대결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전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세기 말은 북부와 남부 사이의 점차 증가하는 긴장 상태로 점철될 것이다. 북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서방 진영의 대결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기독교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는 곧 일방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대편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체제사이의 대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한 문제 자체가 달라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3세계를 더욱 더 극심한 빈곤과 결핍으로 밀어 넣지 않을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과 국가 간의 부의 재분배, 그리고 북부에 존재하는 강대국들을 위한 대리전쟁의 참혹한 전장으로 화할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전되는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반구가 점차 기독교화하고 있는 반면 숫자적으로 볼 때 교회는 남반구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했던 남반구의 교회들이 새로운 활기와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49.9%가 유럽에 거주했다. 1985년에는 그 추세가 27.2%로 추산된다. 또한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81.1%가 백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나아가면 서기 2000년에는 그 숫자가 39.8%로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에서 출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신학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보한다 하더라도, 21세기에는 남반구가 북반구를 향해 거대한 서교사역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그리하여 1세기 전만해도 '세계의 끝'이라고 간주되었던 나라들이 이전에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의 후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