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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이단사이비

KJV(AV)성경 극단적 옹호론자들에 대한 고찰

KJV(AV)성경 극단적 옹호론자들에 대한 고찰

김영엽 목사

서론
우리가 가진 성경은 66권으로서 하나님의 감동(딤후 3:16)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권위와 함께 이천 년의 역사가 그 권위를 더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소지하고 있는 성경은 오랜 전수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현재의 신구약 본문은 적어도 약간의 상치점들, 난제들, 불확실점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 무오설을 내세우는 모든 진술들은 성경 원본에만 해당된다. 그러나 성경원본들은 지금 교회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본들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그 사본들은 대개 필사본들이었다. 만약 필사자들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필사본이 무오하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정확하지 않다. 이와 함께 모든 번역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오할 수도 완전한 영감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부분적인 번역상의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비교하여 보고 어떤 것이 더 좋은 번역이다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몇 구절을 비교하여 보면서 이런 성경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이런 성경이 완전히 영감되었고 무오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번역본이 있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좀 더 나은 점들 때문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것이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극단적인 K.J.V. 옹호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탈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반박하여 성경에 대한 우리의 바른 수용 자세를 견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 필사자들이나 사본들이 계열이 있고 지금 현재 번역되어 있는 성경들이 좀 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번역된 것이 있고,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번역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입장에서 필자는 글을 쓴다.
본론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먼저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KJV 역본과 그 기초가 된 「전통원문」(Textus Receptus)만이 변개되지 아니한 사본이다. 그 외의 다른 사본들과 그것에 기초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시킨 로마 카톨릭의 변개된 성경들이다. 안티오크 계열의 사본이 있고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이 있는데 현재 번역된 대부분의 영어성경(KJV를 제외한)과 변개된 사본으로 번역된 한글 개역 성경도 모두 변개시킨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을 가지고 번역한 것이므로 사탄의 계열에 속한 성경이므로 전혀 가치가 없고 버려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변개된 영어 성경들은 RV, RSV, NASV, NIV, NEB, NRSV, Good News Bible, NKJV, Living Bible. 등이다. 오역된 성경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오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교회들에게서 분리하고 이탈하라. 그것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경이 문자적으로 무오하게 보존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중요 증거 구절로서는 시 12:6,7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헬라어 TR 성경에 대하여서 추적해 보고, 시편 12편 6,7절을 문맥에 따라 분석해 보고, 그 다음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에 대한 각론과 스스로의 모순성들을 지적해 보기로 하자.
1. TR 헬라어 성경에 대하여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1516년 에라스무스에 의해 만들어진 신약 헬라어 성경이 안티오크 계열에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이 있기 전 서구 유럽에서 주로 쓰여진 성경은 라틴 벌게이트 성경이었다. 르네상스와 함께 고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남에 따라 성경에 있어서도 헬라어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콘스탄틴 황제가 AD 4세기경 기독교를 국교로 한 후 AD 330년부터 AD 1453년까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학자들은 헬라어 신약성경을 잘 보존하였다. 이 사본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온 것이 바로 에라스무스가 1516년의 TR헬라어 성경이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 나오기 전에 크시메네스가 교황 레오 X에게 바쳐진 Complutensian 본문이 있었다. 그 때 사용된 헬라어 사본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이것이 최초로 인쇄되었지만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최초로 발행되었다. 에라스무스가 언제 헬라어 신약성경을 만들려고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514년 8월에 바젤(Basel)을 방문했을 때 그는 그러한 책의 가능성을 잘 알려진 출판업자 요한 흐로벤(Johann Froben)과 의논했다. 그들의 상담이 처음에는 결별된 것 같았지만 1515년 4월에 에라스무스가 캠브리지 대학을 다시 방문했을 때 다시 계속되었다. 흐로벤은 틀림없이 스페인의 다국어 대조성경이 곧 나올 것이라고 들었으며 헬라어 신약의 판이 시장화될 것을 깨달았으며, 크시메네스의 작품이 끝나고 출판이 허가되기 전에 이 요구가 자본화되기를 원했다. 흐로벤의 제의는 그 어느 누가 그러한 일을 위해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에라스무스에게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수반된 것이었으며 분명히 적절한 순간에 제의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 6월에 다시 바젤로 가서 인쇄자에게 보내질 좋은 헬라어 사본들을 찾으려고 했으나 당장 이용될 수 있는 사본들은 상당한 교정이 요구되는 것들이었다. 1515년 10월 2일에 인쇄가 시작되었고 1516년 3월 1일에 1000 페이지에 달하는 큰 2절판 책은 완성을 보았다. 그것은 에라스무스가 후에 선언한 것과 같이 “편찬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재촉되었다.” 사실 스크라이베너(Scrivener)가 언젠가 "이것은 이러한 점에서 내가 아는 가장 나쁜 책이다.“고 했다. 에라스무스가 바젤의 수도원 도서관에 있는 두 사본은 모두 12세기의 것이었다. 계시록을 위해서는 12세기의 단 한 권의 사본밖에 없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기의 친구 Reuchlin에게서 빌렸다. 불행히 이 사본은 그 책의 마지막 6절이 있는 마지막 장수가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역에 의존하여 이 본문을 헬역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러한 절차에서 여기 저기에서 자신이 만든 헬라어 본문은, 어떤 알려진 헬라어 사본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문(異文)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소위 TR 헬라어 성경으로 남아 있다.(계 17:4, 22:16,17,18,19,21, 특히 행 9:6 은 에라스무스가 사본에는 없는 것을 라틴역에서 가져와 삽입한 것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우리말 개역성경에 빠져 있다.) 이 TR판은 1516년과 1519년 사이에 총 3,300부수에 이를만큼 인기가 있었다. 재판은 루터의 독일어 번역의 근거가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아한 글솜씨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지만 그의 주석들(라틴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속에 성직자들을 겨눈 부분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의 학생들이 그 책 파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를 겨냥한 비평 가운데 가장 심한 것 중의 하나는 그의 본문 요일 5:7,8에서 삼위일체적 서술이 없다고 한 크시메네스의 Complutensia 다국어 대조서의 편찬자들 중의 한 사람인 Stunica의 도전인 것 같이 보인다고 메쯔거는 말한다. 에라스무스는 단 하나의 헬라어 사본이라도 이 구절을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면 장차 나올 Comma Johnneum판에 삽입할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발견되었는데 그 사본은 약 1520년에 Froy 혹은 Roy라고 하는 프란시스코 수도사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문제가 된 말을 라틴역에서 가져왔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약속한 대로 1522년의 제 3판에 삽입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그 사본이 자신을 논박하기 위해 급히 준비되었다는 의심을 나타내는 긴 설명을 달았다. 에라스무스 시대 이래 검사된 수 천개의 신약 헬라어 사본 가운데 단 세 개의 다른 것이 그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본들은 Greg.88(12세기 사본), Tisch. w110 (16세기 사본 복사판), Greg.629.(14세기 혹은 16세기 후반부의 것)등이다. 그 구절은 요한 일서의 라틴어 사본에 가장자리 주석으로 쓰여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5세기 동안에 고대 라틴어성경의 본문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구절은 A.D.800년경 이전의 라틴어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는 1527년 제 4판을 냈는데, 계시록에서 Complutensia 본문에 근거해서 약 90절이나 개정했다. 1535년 제 5판을 비롯해서 30판 이상의 허가 없는 재생판들이 Venis, Strasbourg, Basel, Paris, 그리고 그 외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1518년에 세 부분으로 된 헬라어 성경이 알딘 출판사에 의해 나왔고, 1546년과 1549년의 Stephanus에 의하여 헬라어 성경이 나왔다. 스테파누스의 셋째 판은 영국 사람에게 수납된 혹은 표준적인 헬라어 본문이 되었다. 칼빈의 수제자였던 데오도르 베자(Beza)는 1565년과 1604년 사이에 9판이나 되는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고, 제 10판은 1611년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Beza 작품은 Textus Receptus를 대중화시키고 고정시키려는 범위 내에 머물고 있다. 1611년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1588-9와 1598년의 Beza 판들을 많이 사용했다.
소위 TEXTUS RECEPTUS라고 불려지는 본문은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가 출판한 판에 섞여 있는 헬라어 본문의 형태를 현대 출판업자들이 자화자찬적 광고라고 부르는 광고들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것은 1881년 이전 구라파 말로 된 모든 중요한 신교 번역들과 흠정역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본문은 본질적으로 후기(11,12세기)의 되는대로 수집된 미나스클 사본이며 한 타-스의 성구의 이문들은 알려지지 아니한 헬라어 증거물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1611년의 흠정역의 역자들은 1588년과 1589년도의 베자판을 사용하였다. 결과적으로 TR 헬라어 성경도 여러 사람에 걸쳐 여러 수정판들이 나온 것 때문에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성경의 원본이 완전히 보존되기를 원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그것은 원본이라는 두루마리 자체가 우상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만수는 그의 책에서 에라스무스를 “중도의 노선을 걸었지만 타협한 자들의 계열을 정리해 보자. 물론 그들 역시 알렉산드리아 계열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 중에 에라스무스가 포함되어 있다. 에라스무스가 알렉산드리아 즉 배교한 계열의 사람이라면 그가 만든 TR 성경은 당연히 알렉산드리아 계열로 구분되어야 하지 않는가? 정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시켰다고 하는 안디옥 학파를 언급할 때 TR 헬라어 성경은 언급하면서 에라스무스를 빼 버렸고, 자칭 초대교회 시대의 분파주의자, 분리주의자들을 자기네 계열로 삼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베자의 TR판을 이야기하면서 베자의 스승이었던 칼빈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배도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는가? 베자는 칼빈의 수제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12세기의 사본이 더 원본에 가깝겠는가? 4세시 5세기의 사본들이 더 정확하겠는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서 로마 카톨릭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시내 사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객관적인 사고보다 주관적인 사고로만 그쳐 버리고 자기 것만을 고집하다가 보면 잘못된 주장을 하고 만다. 결국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지경에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전통원문은 카톨릭 학자가 편수한 것이며 루터가 사용했다. 에라스무스와 스테파누스는 카톨릭의 학자이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장하고 분리했을 때 그들은 루터를 비난했던 것이다.
2. 성경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 구절 중 근본이 되는 시편 12편 6,7절의 해석
극단적 KJV 옹호론자들은 한결같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결같이 잘못되었다. 시편 12편은 그 시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을 보존하신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했던 시편 119편과는 달리 압박 받는 가련한 성도가 탄식하는 중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를 보호하여 지켜주시는 것을 확신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1절부터 8절까지를 자세히 문맥을 따라 공부해 보면 7절에 나오는 “저희”란 말이 그 바로 윗절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1절에서 8절까지에서 나타나는 핍박받는 경건한 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착각을 일으키는 구절로서 이사야 34장 16절이 있다. 이사야는 열방에 임할 주의 진노를 언급하면서 들짐승들을 말하다가 1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했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고 그 앞에서 계속 언급된 짐승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34장 전체의 문맥을 보기보다는 그 한 구절에 얽매였기 때문에 그 지시대명사가 지칭하는 본래의 것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이용해서 말씀의 짝을 억지로 맞추는 것들을 종종 본다. 물론 평행구절은 있다. 그러나 반드시 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 15장 29절의 짝은 어디인가? 그 내용 즉,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 것”에 대한 내용은 성경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가 없다. 시편 12편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말은 객관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주관적으로만 해석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주관적인 해석은 반드시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에 의하여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 만약 그 검증을 무시한다면 이단이 되고 만다. 기독교에 이단이 그렇게 많은 것은 바로 이 객관적인 검증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주석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박윤선 주석에 의하면 “ ‘보존하리로다’란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티쯔레누인데"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그를 보존하시리이다’이다. 여기서 ‘그를’이란 단수 대명사는 성도들을 개인 취급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시한다.”고 7절을 주석하고 있다. WBC 주석을 보면 “불순한 말의 힘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의 신빙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때, 시편 기자는 그가 1절에서 간구한 확신을 7절에서 도달하게 되었다.” 악한 혀의 공격에 대한 해결책은 악한 말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즉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보존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 찾을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7절의 확신 즉 경건한 자를 지켜 주신다는 확신을 유발시킨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고도 참되다는 인식이었다. 우찌무라 간조도 “저희”를 “그 지극히 순수한 약속의 말씀으로 성실하게 사는 자”라고 주석하고 있다. 풀핏 주석에서도 여전히 “저희”를 “모든 의인들”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칼빈은 “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라는 말에 이어 ‘보존하시리라’는 두 문장은 동일한 내용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러나 둘째 문장에서는 시편 기자가 한 사람을 통하여 선한 소수의 사람을 지적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석했다. 이상근 주석에서도 “저희”를 1절에서 말하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한다. 메튜 헨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세대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자기를 위하여 택하신 남은 자를 보호하실 것이다”고 주석하고 있다. 바울 성경 연구 시리즈 12권의 시편 주석에서도 “압제받는 자” “그를 믿는 자”를 보존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두란노 서원에서 만든 강해에서도 “악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방지일, 박조준도 역시 그들의 강해집에서 성도들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면에서 볼 때 “저희”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12편 1절에서부터 언급되는 성도로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이런 결론에 의하면 극단적 KJV옹호론자들은 분명히 그 출발과 전제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KJV 성경의 실체
극단적 옹호주의자들은 KJV가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 “영감된” 성경이라고 서슴찮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과연 흠정역 성경이 무오류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미 그들이 중요한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TR 헬라어 성경의 유래와 시편 12편 7절을 상고해 봄으로 충분히 살펴보았지만 KJV에 대한 권위 있는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KJV 번역자들이 말하는 KJV
“진실로 우리는 새로운 번역 작품을 만들려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좋은 작품 중에서 하나의 원천적인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역자들은 신개정판(KJV)이 분리주의 적 성경이 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특별히 고안된 규정들에 충실하였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교회 용어들”은 보존되어야 했으며, 교회라는 단어는 회중(Congregation)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없었다.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때 대부분의 교부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의미가 보존되어야 했다. 서문에서 그들 출중한 번역자들은 그 이전의 영역본들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가장 천한 번역본일지라도”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제임스 국왕 폐하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폐하의 권력으로 이루어진 것과 “폐하”라는 말이 26회나 사용될 정도로 아부성이 농후한 점, 번역자들이 시편 12편 7절을 지금의 극단적 옹호론자들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그 어떤 단어나 징조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 번역자들 역시 부족함과 오류가 있으리라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든 디.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의 견해
이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하나의 번역본만을 사용한다면(성경연구에 있어서)그 번역본이 취사선택한 석의적인 의미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어려움이 있게 된다”고 하면서 KJV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는 고전 7:36의 번역에서 “KJV는 매우 문자적이지만 별로 도움이 못된다. 바울이 모호한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데 KJV는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삼상 8:16에서 “너희 소들과 나귀들 중 가장 좋은 것”을 KJV에서는 “너희 가장 좋은 젊은이들과 너희 나귀들”이라고 번역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히브리어의 your young men은 “바후레켐”으로 기록되어 있고, your cattle은 “바쿠레켐”이었기 때문이다. 곧 필사자가 철자 하나를 잘못 필사함으로써 의미상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막 1장 2절에 KJV는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바와 같이”라고 했고 개역성경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되기를”이라고 했다. 가장 신빙성 있는 초기의 헬라어 필사본들은 모두 한글 개역성경(NIV 도 물론 이것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후대의 필사본들이 KJV의 본문을 취하게 된 연유는 본문 뒤에 따라 오는 인용구절이 말라기 3:1과 이사야 40:3의 복합문이므로 후대의 필사자가 좀 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의 원본을 교정한 것이다. 흠정역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역본일 뿐만 아니라 영어권의 고전이기도 하다. 불후의 어구들이 도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 1611년의 KJV 번역자들은 천 여 년에 걸친 필사의 과정에서 생긴 오류들을 집성해 놓은 후대의 헬라어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본들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3) 킹 제임스 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D.M 로이드 존스의 견해
그는 흠정역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흠정역에 대한 평들을 살펴보자. 로마서 강해 1권에서 롬 3:25,26절을 언급하면서 “사면”이란 단어를 쓴 흠정역을 이렇게 혹독히 평가하고 있다. “미안하게도 흠정역 성경은 이 전에 있어서 정말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흠정역이 표준개역(RSV)을 포함한 개정역(RV)보다 못한 경우들 중의 하나입니다. 개정역에서는 이 점이 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흠정역은 다음 이유 때문에 잘 안된 번역입니다.” 같은 책 146쪽에서는 로마서 3장 27과 28절의 자랑(boasting)이라는 말이 흠정역에서는 자만(glorying)으로 더 많이 번역된 것을 잘못으로 지적하고 있다. 같은 책 160쪽에는 롬 3:29의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라는 구절에서 흠정역에 있는 정관사 “THE"가 없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오류들에 대한 지적은 204쪽,261쪽,290쪽 등에서 언급되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로마서 강해 8권까지에서 수도 없이 언급된다.
4) KJV성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에 대한 반박
①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 “100% 순도의 성경”,“번역을 위한 성경은 반드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어야 한다.”,“완전하게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
; 성경이 영감되었다. 성경은 무오류하다는 말을 이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저들의 정체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전제 뒤틀려져 있는 가운데 세워진 분리주의자들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말은 “왜 하나님께서 원본을 보존하시지 않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진정한 답변을 할 수 없게 만든다.
② “킹 제임스 성경은 판권이 없다.”
; 1611년에 만들어진 원본 2절판 성경은 각각 25실링에 팔렸다. 인쇄공 로버트 바아커가 제임스 왕이 지불허가를 해 준 것 때문에 그 당시는 판권을 주장할 수도 판권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1611년부터 1800년 사이에 킹 제임스 성경의 증보판의 숫자는 영국과 외방 성서공회에 따르면 거의 1,000종류에 달했고 원판과는 약간씩 다른 책들을 수 천 종류 출판하였다.
1612년에 로버트 바아커는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킹 제임스 성경의 간편한 2절판과 옥타보판을 만들었다. TR판 헬라어 성경도 흐로벤과 에라스무스의 장사속이 맞아떨어져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볼 때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판권은 단지 이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책의 보존을 위한 책임까지도 수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전도서 8:4절의 인용은 얼마나 아전인수격의 이야기인가?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나니” 이 말을 그들이 이용하는 대로라면 로마의 교황의 권위와 같은 힘을 입고 있는 카톨릭의 권위는 얼마나 더 큰 것이겠는가? 박만수는 그의 [증거I] 책 P.115에서 “1611년판 이래 단 한 번도 개정됨이 없이 단 하나의 오류도 찾아낼 수 없는,실로 경이롭고도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고 했는데 얼마나 무식한 소리인지 이루 말할 수 없다.
③ “KJV는 무오류하고 빠진 것, 삭제된 것이 없다.”
1611년 판의 킹 제임스 성경은 요한 일서 5:12절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라는 구절이 빠져 있다. 1613년판에도 빠져있다. 그러다가 1638년 판에야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다. 이 1638년판에는 행 6:3에 “ 우리가... 맡길”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올리버 크롬웰이 인쇄업자들에게 1,000파운드의 뇌물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KJV의 극단적인 옹호론자들의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바티칸 사본과 시내사본에 대하여서는 데이빗 비일의 책을 참조해 보라.
④ 요한 일서 5장 7,8절에서 개역성경에 대한 공격
이 구절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구절로써 박만수의 역에서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님, 말씀님, 그리고 성숨님이시며; 이 세 분들께서는 곧 한 분이십니다.”
; 이 구절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인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곧 그들의 안티오크 계열을 따라 보존된 성경이라고 했는데 요한 일서의 이 구절은 1574년-1575년에 한 프랑크푸르트 출판업자가 그것을 최초로 (루터의 사후 30년이 지난 후) 삽입할 때까지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 구절은 1596년까지 비텐베르그판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 개정 벌 게잇판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극심한 성직계급의 압력 하에(그의 뛰어난 판단력에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마침내 이 구절을 그의 3판 헬라어 성경에 포함시켰다.(1522년)
⑤ “킹 제임스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성경이다.”
교리는 어느 한 구절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교리는 성경의 전반적인 것에 일치해야 된다. 어떤 한 구절을 가지고 교리화시키고 어떤 몇 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시킨다면 그것은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사탄의 성경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고전 15장 29절 같은 구절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말을 가지고 교리화하거나 그 하나로 로마 카톨릭의 성경이다라고 말해도 럭크만의 논리에 의하면 무리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KJV가 절대적이고 기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논조로 가고 마는 것이다.
⑥ “킹 제임스 성경에만 허락된 성경 배열순서 때문에 KJV는 최초의 원본보다 낫다.”
럭크만은 70인역에도 허락되지 않은 순서를 흠정역에만 허락했으므로 최초의 원본보다 낫다라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무식하고 우직하고, 어리석은지를 잘 말해준다. 근본주의자들을 배교한 자라고 공격하면서 그야말로 근본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는가? 완전히 이상한 주장 하나를 보면 흠정역 1611년판 성경은 총 31,175구절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운데 구절이 시 118:8인데 “It is better to trust in the LORD than to put confidence in man”로 번역되어 있다. 가운데 ‘the LORD'를 중심으로 왼쪽에 일곱 개, 오른쪽에 일곱 개가 있다. 이런 기가 막힌 순서와 위치에 “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성경이 있다면 찾아내 보라고 주장한다. 희극이다.
만약 고도로 잘 분석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성경을 조합시켜 그들의 말대로 짝이 탁탁 맞게 맞추는 성경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이다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시편 119편 41절도 왼쪽 오른쪽에 일곱 개의 단어가 있고 그 가운데 말이 “O LORD”이다. 의식하고 넣었지 무의식적으로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설혹 비의도적으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감된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4. 한국에서 극단주의자 중에서도 과격한 사람 박만수의 글에 대한 비판
① “삼위일체 논쟁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모든 논쟁들은 참 성경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모든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에는 참 성경의 단 한 말씀이면 충분하다.” 초대교회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와 라틴 학파가 있었다. 안디옥이 유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알렉산드리아가 헬라적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A.D. 380년경에는 안디옥 학파의 디오도레가 총주교였다. 그것은 그 때에 오히려 안디옥이 로마 카톨릭의 본산지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안디옥 학파가 없어서 삼위일체 논쟁이 있었던가?
② 딤전 3:16에서 한글 개역에는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한 것을 공격했다. 흠정역에는 “그는”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글 개역이 엉터리다고 했다. 그런데 15절에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가 받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며 개역을 엉터리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로 너무했다.
③ 박만수가 인용한 이송오의 새성경은 실제의 이송오역 성경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증거 I 의 p.156에서 새성경의 “진정”이란 말을 “주께서 진실로”,“매사에”를 “모든 일에”, “이 일에”라는 말이 새성경에는 없다. 인용하는 데에도 이런 엄청난 삭제가 일어난다. 그런데도 그런 극단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유의 예들은 그의 책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④ 신약과 구약을 “옛 유언”, “새 유언”으로 번역해야 하며, “족보”를 “세대”로 번역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글에 있어서 유언이란 말은 죽은 자의 죽은 다음에 효력을 발한다는 의미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유언보다는 언약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다. 한국 교회가 역사적으로 그 말로 신구약을 해석해 왔다.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평적인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아예 무시하면 반드시 이단으로 가고 만다. KJV 번역자들도 그런 이유 때문에 KJV이전의 모든 영어 성경에서 사용한 고유명사의 발음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족보”라는 말도 히브리 문화가 동양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족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좋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으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더욱 잘 나타내 준다. 안디옥 학파의 주된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 그 특색이었을진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족보라는 말이야말로 정말 잘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철하는 그의 책 p.152에서 여전히 “후기 안디옥 학파는 다른 전통의 강한 영향 밑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리겐주의의 좌파라고 할 수 있는 아리우스 내지 반아리우스주의를 통하여 오리겐주의의 로고스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⑤ 유아세례와 유아 제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매도하고 있다. 유아세례에 대한 것은 사실이라도 유아 제물에 대한 그들의 찬성 섞인 발언은 어떤 고대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유아 제물에 대한 이야기는 초대 속사도 교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의 핍박을 받을 때 누명으로 쓰였던 죄목이었다. 아테나고라스의 변증서에서 “우리에 대한 세 가지 비난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신론과 티에스티안 잔치입니다.”라고 했는데 그 “티에스티안 잔치”는 성례를 행할 때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여기는 것을 가지고 오해하여 사람들의 피를 마신다고 고발하였던 것이다. 이 오해 외에 어거스틴이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⑥ 박만수는 그의 책 214쪽에서 KJV에 의하면 예수 크리스트님의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엡 2:8,9,롬 3:21,22 에서 AV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 2:20도 그렇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구원받는 믿음, 능력 행하는 믿음, 확신하는 믿음 등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믿는 자의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이 수없이 많다.(요 3:16.36, 또한 복음서에서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께 치유 받을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박만수는 한 가지만 알고 또 다른 것은 전혀 고려치 않는 이상한 사람이다.
⑦ 시편 119:160절에서 “주의 말씀은 시초부터 진실하며”라는 것이 흠정역의 기록이며 한글 개역에서는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라는 번역을 공격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찾아보면 그 부분이 “로쉬 데바르카 에멭”으로 되어 있다. 로쉬란 말은 일반적으로 머리, 시작,sum,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 번역을 반드시 시작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으며 우두머리, 또는 강령(sum)으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영어 일변도, KJV일변도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그의 책 238쪽)
⑧ 로마서 1:18절의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라는 말이 흠정역에는 “불의 속에서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라고 되어 있으며 그것이 맞고 개역성경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송오가 번역한 새성경을 보면 한글 개역성경과 같이 되어 있다. 이송오가 가지고 있는 KJV가 진짜인가? 박만수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인가?
⑨ 마태 13:33절의 하나님의 나라 비유에서 “누룩”을 뜸씨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완전히 알레고리를 택한다. 알레고리 성경 해석의 원조가 그가 철저한 배교자로 알고 있는 오리겐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알레고리 해석도 얼마나 엉터리인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그의 무식을 폭로한 극치이다. 성경에서 누룩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난다. 하나는 변질케 하는 못된 누룩이고 하나는 모든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의미로서의 누룩이다. 물론 전자의 것을 누룩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것을 뜸씨로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누룩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는가? 원래 비유의 해석은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한 것이다. 거기서 누룩의 비유는 모든 밀가루에 퍼진다는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알레고리 해석도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사탄의 나라로 해석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그 뒤의 313쪽에서 마태복음 11:12의 해석도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사탄의 나라로 설명하고 있어서 그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났다. 박만수는 그의 책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들을 담고 있어서 도무지 다 언급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람의 각주 없는 글에 대하여 우리가 현혹될 필요는 전혀 없다.
결론
KJV 성경은 1825년까지는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넣어 부록과 같은 형식으로 발행했으나 그 다음해부터 외경을 제외했다. KJV가 흠정역으로 되었던 이유는 왕에 의해서 명령된 것이었고, 문학적인 우수성 때문이었고, 헬라어 사본들 중 바티칸, 알렉산드리아, 시내 사본들이 거의 19세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당시 제네바 성경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의 명령으로 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되어졌기 때문에 흠정역으로 되어졌다. 또 한 가지는 바로 번역의 웅장함과 우아한 문학성 때문이었다. 문자적으로 번역된 것으로 원문의 어순, 문법, 문체, 용어, 표현법 등을 그대로 살린 것이었다. 극단적인 옹호론자들이 결정적인 배교자로 여기는 웨스트코트에 의하면 “17세기 중반부터 전 세계에 걸쳐 영어를 사용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성경이었는데 이는 이 성경이 최고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라는 평을 받았던 것에도 바로 그 권위를 볼 수 있다. 권위 있는 헬라어 성경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300년 동안 독보적인 존재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이 KJV가 절대적이며 영감 되었으며, 오류가 없으며, 그 외의 다른 번역이나 다른 계열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지금도 그 성경은 여전히 영어 사용권에서는 Authorized Version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는 역사적인 모든 업적들을 배타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안다.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그야말로 배교(*?)의 성경인 한글 개역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 이송오, 박만수, 김재근, 정동수 등도 한결같이 기존의 한글 개역 성경을 읽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흠정역 성경의 진가를 발견하기까지의 모든 신앙생활이 엉터리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존의 개역성경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의 모든 진실한 크리스챤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분명 잘못되었다. 앞으로 계속되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서 분별할 수는 있겠지만 기독교 역사는 항상 “이것만”, “우리만”을 강조한 자들의 결국이 사탄이 기뻐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번역판이나 헬라어 사본들은 우수하거나 덜 우수하고,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고, 개신교적이거나 카톨릭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절대적이든지 상대적이든지, 택할 것이든지 버릴 것이든지 하는 흑백논리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 표시 글은 오독을 방지하기 위하여 옮긴이가 첨언함)
여러 가지 역본들과 사본들을 통하여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발견해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교리적인 업적들에 대해서도 그 교리들의 업적을 이용해서 기존의 성경의 잘못된 번역 부분들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힘써야지 기존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그런 처사는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교만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 나무의 질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말씀 보존학회나 말씀과 만남 출판사와 도서출판 안티오크는 다시 한 번 겸허히 자신들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참된 뜻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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