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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 - 엡 5:18~20과 골 3:16을 중심으로

-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재조명’
하재송 교수 / 총신대학교 교회음악과

1. 서론

교회음악은 그 용어에서 보듯이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교회는 음악적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연구의 대상이다. 따라서 교회음악에 대한 연구는 비단 음악적 접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신학적 접근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교회음악 연구는 음악 작품들의 분석과 연주방법 연구 등 대체로 음악적인 면에 더 치중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음악에 대한 신학적, 이론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수준에 머물러 왔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교회음악계가 보다 힘써야 할 일은 교회음악을 신학적 체계가 견고한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립시키는 일이다.

저명한 교회음악학자 리버(Robin A. Leaver)는 말하기를, “음악과 신학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성경은 실천신학, 즉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해와 설명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실천적인 음악, 즉 그러한 상호작용에 수반되는 것에 관심을 둔둔다” 1) 고 하였다. 이는 음악이 신학과 서로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신학적인 접근을 피할 수 없으며, 교회음악을 실천신학의 범주 안에서 다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음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교회음악에 대한 성경적 연구에서 음악에 대한 기록이 많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연구는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지만, 신약 성경에 근거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음악의 원리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중에서도 교회음악에 대해 가장 의미 있고 분명한 언급을 남긴 사도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2) 따라서 그는 시편창(psalm singing)과 같은 유대교 음악 전통에도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리프블래드(Bruce H. Leafblad)는 바울의 음악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회당의 보다 소박한 음악적 실제뿐만 아니라 성전의 풍부한 음악적 전통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레위인 성가대가 합창 시편들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고, 제사장과 랍비들이 히브리 성경과 기도들을 낭창하는 것을 들었으며, 유대교 예전의 회중적인 시편들과 응답 구절들을 노래하는 것을 틀림없이 배웠다. 왜냐하면 이것은 경건한 유대인 가정에서 선택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유대인의 신앙적인 노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을 20회나 인용했으며 모세의 노래(신 32:1~43)도 3번이나 인용했다. 이는 그가 유대교의 음악 전통에 깊이 젖어 있었고, 신앙적인 노래들을 늘 암송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는 찬송이 늘 생활화되어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조차 찬송했던 사실(행 16:25)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1과 15:52 등에서의 자연스런 음악적 언급들 4)을 보면, 그가 음악적으로도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울러 “학자들은 12편이나 되는 많은 신약시대 찬송들 또는 단편들이 바울의 저작들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5) 이처럼 교회 음악적으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바울이기에 그의 교회 음악적 언급들은 그 자체적으로도 매우 권위가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그는 교회음악과 관련하여 다섯 곳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적인 언급을 하였는데 롬 15:6, 고전 14:15, 26, 엡 5:18~20, 골 3:16 등이 그것이다. 이 구절들 중에서 엡 5:18~20,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와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는 소위 병행 구절로서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의 중심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오스카 죙겐(Oskar Söngen)은 이 두 구절에 대해 말하기를, “이 두 부분은 중심 내용이서로 일치하고, 서로를 부분적으로 보충한다” 6)고 하였으며, 헹겔(Martin Hengel)은 “에베소서의 본문은 골로새서의 그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골로새서 본문에 대한 최초의 주석이다” 7)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서로 연관 지어서 보충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을 살펴봄에 있어 이 두 구절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약 성경이 강조하는 교회음악의 원리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2. 교회음악의 조건

바울은 교회음악에 관한 보다 직접적인 언급을 하기에 앞서 교회음악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먼저 언급한다. 먼저 골 3:16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말씀”(ὉλόγοςτοῦΧριστοῦ)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고 “너희 속에”(ἐν ὑμῖν)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희 마음속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너희 안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문맥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공동체에 대한 언급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결국 개인적인 의미도 내포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8)

덧붙여서, 여기 “거한다”는 단어는 ‘안에 살다’, ‘안에 거주하다’, ‘내주하다’라는 뜻으로, 9)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 따르면 말씀이 우리 안에 “안정된 거처를 가져야 한다” 10)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늘 풍성하게 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행위, 심지어 모든 사람의 숨겨진 충동과 동기까지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1) 바울에 따르면, 교회음악은 이러한 말씀의 지배가운데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하나의 열매이다. 요컨대, 우리 안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며,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그를 찬송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엡 5:18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술에 취하는 것과 대비시킨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모습을 술 취한 것에 빗대는 것은 비단 여기에서뿐만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기록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4절)하니까 그것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13절)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 엡 5:18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술에 취한 사람이 술의 지배를 받듯이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과 연계해서 보면, 술 취함의 결과는 “방탕”이지만, 성령 충만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감사라는 것을 대조시켜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충만함을 받으라”(πληροῦσθε)는 단어는 현재시제 명령형으로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우선 시제가 현재라는 것은 성령 충만이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2) 따라서, 폴키스(Francis Foulkes)의 말처럼, “이는 우리 생활의 각 부분이 성령으로 메워지고 또한 그에 의해서 조절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경험이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13) 또한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해져야 하며 성령 충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충만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연히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찬양의 근원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다.” 14) 결국 “바울이 여기에서 묘사하는 노래는 음악적 관심의 결과도 아니고 단순히 종교적인 관습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그것을 노래로 채우시는 성령의 독특한 산물이다.” 15)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교회음악인이 음악에 앞서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는 사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말씀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이 성령께서는 또한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힘 있게 역사하도록 주장하신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3. 교회음악의 종류 16)

바울은 엡 5:19와 골 3:16에서 당시의 교회음악의 유형에 대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고 동일하게 언급한다. 칼빈도 말했듯이, 바울은 이 세 마디의 말 속에 당시 초대 교회에서 불려 졌던 모든 종류의 노래를 포함시키고 있다. 17)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그 용어들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당시의 독자들은 그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18) 또한 당시의 교회음악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이 지적한 이 세 가지는 일반적으로 회중 찬송(congregational singing)으로 이해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바울 당시의 교회음악적인 상황은 오늘날과 큰 차이가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즉 오늘날의 교회음악은 초대 교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 범위와 종류가 확대되고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음악적인 수준 역시 고도로 발전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바울의 언급을 일반화시켜서 지금의 교회음악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바울의 그러한 언급이 교회음악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 가장 기본적이며 포괄적인 원리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러한 견해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첫째 그룹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는 견해이고, 둘째 그룹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구별해서 이해하는 입장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의 중도적인 입장이다. 우선 첫 번째 견해의 경우로서, 헹겔은 “그것들은 다른 장르들의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또는 동일한 종류를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단지 종교적인 노래에 대한 세 개의 가장 중요한 70인역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19) 라고 말하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같은 종류의 노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링컨(Andrew T. Lincoln) 역시 이렇게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다.

“사실 이 곳에 사용된 세 개의 술어는 저자가 동의어들을 중첩시키기를 좋아하는 것의 또 다른 실례로 보는 것이 가장 좋으며, 또한 이 경우에 저자는 골로새서에서 이를 넘겨받았을 것이다. 골로새서에는 종교적 노래들에 대해 칠십인경에서 가장 흔히 나오는 세 개 의 술어가 나오며, 또한 이들은 시편의 표제어에서 상호 교환적으로 나온다.” 20)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어느 정도 구별하여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음악의 종류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서 각각의 용어가 지칭하는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랄프 마틴(R. P. Martin)은 “시는 구약 시편 저자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진 기독교 찬송을 가리키며, 찬송은 보다 긴 악곡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일부는 실제로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고, 또한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에 의해 고무된 자발적인 찬미의 단편들을 가리킨다” 21) 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특히 “시”를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보다 일반적인 견해와 대조되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보다 조심스럽게 세 용어들의 차이를 구별하는데,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의 경우, “이 셋 사이를 뚜렷이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의미가 좀 겹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22) 고 말하면서 각각이 지칭하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죙겐도 시 또는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서로 다른 종류의 음악으로 이해하면서 초대교회의 노래 형식들이 다양했다고 결론짓는다. 23)

역사적으로 보면 칼빈도 세 용어들을 구별해서 말했으며, 24)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에 따르면, “찰스 핫지(Charles Hodge)나 이어디(Eadie)와 같은 학자들을 비롯하여 에베소서에 관하여 글을 쓴 유명한 작가들과 과거 200년 동안 에베소서를 주석했던 모든 위대한 주석가들”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어느 정도 구별 했다. 25) 더욱이 대부분의 교회음악학자들은 그것들이 확실히 세 개의 다른 음악적 형식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26)

마지막 세 번째 견해는 앞에서 언급된 두 가지 견해들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데이빗 패스(David B. Pass)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용어들에 대해서 양극단으로 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즉,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형태들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뚜렷하게 구분이 되었던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27) 또한 리프블래드는 앞의 두 견해들을 나름대로 종합하여 엡 5:18b~19을 이렇게 이해한다. “Be filled with the Spirit, speaking to one another using the full range of specific sacred musical forms (available to you)” 28)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너희가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범위의 특정한 종교 음악적인 형식들을 사용하여 서로 화답하라).

이러한 세 가지 견해들 중 필자는 많은 신학자들과 대부분의 교회음악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서로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즉, 필자는 이 용어들이 당시 교회 안에서 행해지던 음악의 종류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제 각 용어들은 무엇을 가리키며, 그것은 교회음악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1) 시(Psalms)

“시”는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교회음악이다. “시”(ψαλμός)라는 용어는 고전 저자들에 의해 하프의 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다윗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 사무엘상 16:18의 “수금을 탈 줄 알고”라는 부분에서 70인역 성경은 ‘프살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9) 그러한 견지에서 칼빈은 시를 가리켜 “어떠한 악기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30) 구약성경 ‘시편’에서 보듯이 다윗은 수금(harp)에 맞추어 많은 시를 노래했다. 그래서 카슨(Herbert M. Carson)은 이 시라는 용어를 “다윗의 시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31)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 이 용어는 보통 구약성경의 “시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32) 누가복음 20:42, 24:44와 사도행전 1:20, 13:33에 언급된 “시편”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더 나아가서 이 용어가 “시편”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노래들도 포함한다는 견해도 있는데, 오스벡(Kenneth W. Osbeck)은 “시란 문자적으로 찬양의 노래를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단지 150편의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찬양의 고양된 표현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33) 또한 휴스태드(Donald P. Hustad)는, “시편가(Psalmody)란 유대인의 시편(Jewish psalms)과 그것을 본뜬 캔티클(canticles)과 영광송(doxologies)을 낭창하는 것”이라는 웰레즈(Egon Wellesz)의 견해를 따라, “시”를 “옛날 구약의 노래들과 캔티클, 그리고/또는 유사한 양식의 새로운 재료들”로 이해하고, 그 범주에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4개의 캔티클까지 포함시킨다. 34) 폴키스 역시 “본 절에서는 아마도 구약의 시편뿐만 아니라 시편이 가지고 있던 정신과 그 형태를 간직한 새로운 노래들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것 같다” 35)라고 말한다.

이처럼 학자에 따라 “시”의 범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본적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킨다는 것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시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찬양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재료이자 도구가 되어 왔다. 그리하여 중세 시대까지의 산문적인 시편창(psalm singing)을 거쳐 16세기 중엽 칼빈에 이르러서는 『제네바 시편가』(Genevan Psalter)로 대표되는 운율 시편가(metrical psalmody)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36)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찬송가(hymnody)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시편가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시편가는 우리가 부르는 회중찬송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시편가가 지극히 무시되고 있는 오늘의 교회 현실에 대해 하트와 뮤더(D. G. Hart와 John R. Muether)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개혁주의적 유산을 폐기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개탄한다. 37)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며 순수한 형태의 교회음악인 시편을 어떻게 다시금 회복하고 오늘의 현실에 맞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교회음악적 노력이다.

2) 찬송(Hymns)

“찬송”(ὕμνος)이라는 헬라어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신이나 영웅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38)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에 따르면,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 즉 찬양과 하나님과 노래를 포함해야 한다.” 39) 따라서 “찬송”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정의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하
나님을 기리는 노래, 하나님에 관한 노래, 거룩하고도 시적인 곡” 40) 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사용한 구약의 시편 역시 찬송이라고 할 수 있다. 41) 마태복음 26:30과 마가복음 14:26에는 최후의 만찬을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찬미하고”라는 말은 “찬송을 불렀다”는 말이며, 그들이 찬송한 것은 전통적으로 유월절 만찬 때에 노래된 시편 113~118편, 즉 할렐(Hallel)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42) 따라서 “찬송”이라는 용어는 시편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음악학자인 조핸슨(Calvin M. Johansson)은 그와 같은 입장에서 시편을 “히브리인의 찬송가”(Hebraic hymnal)라고 칭한다. 43) 또한 같은 맥락에서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여러 캔티클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므로 “찬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찬송”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초대교회에서 불려졌다고 생각되는 여러 신약의 노래들도 포함된다고 본다. 44) 이러한 노래들은 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1세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표현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찬송들을 자신의 서신서에 포함시켰는데 에베소서 5:14, 빌립보서 2:5~11, 골 1:15~20, 디모데전서 3:16, 디모데후서 2:11~13 등이 그것들이다. 아울러 요한계시록 4:11, 5:13, 7:12 등도 그와 같이 당시 초대교회에서 노래된 찬송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찬송” 개념을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하면, 찬송이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작한 시나 노래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찬송들을 원형으로 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찬송들을 썼으며, 그것들이 교회 안에서 불려졌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hymnal)는 그러한 찬송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수록한 책이다. 따라서 “찬송”이라는 용어는 성경의 모든 노래들과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쓴 노래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여기 바울이 지칭한 “찬송”과 관련하여 매우 시사성 있는 주장을 하나 소개한다. 그것은 “찬송에 속하는 노래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 졌다”는 것이며, 로이드 존스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는 “우리와는 달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찬송가 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찬송을 배워야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45) 이러한 그의 언급은 오늘날 교회에서의 찬송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찬송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만든다.

오늘날 소위 전통적인 찬송들은 보다 대중적인 “찬양과 경배” 곡들에 밀려 교회음악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특히 어린이로부터 청년에 이르는 젊은 세대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찬송가에 익숙하지도 않고, 그러한 찬송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찬송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교회음악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찬송”의 풍부한 전통과 유산을 우리가 잃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일명 “모세의 노래”(신 32:1~43)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는 말씀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모세가 그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는 기록,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신 31:22)라는 말씀을 통해 큰 도전을 받게 된다. 요컨대 우리에게는 우리 자손들에게 찬송을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찬송을 통해 고귀한 기독교 신앙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3)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바울이 사용한 “노래”(ᾠδή)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노래를 다 지칭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에 “신령한”(πνευματικός)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어떤 특정한 노래로 그것을 한정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시편이나 찬송이라는 말에는 이미 ‘신령한’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지만, ‘노래’라는 단어는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서 여러 가지의 노래를 다 포함하기 때문에 한정어가 필요한 것이다. 46) 그렇다면, 과연 “신령한 노래”란 어떠한 노래를 지칭하는가?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먼저 “신령한 노래”를 단순히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노래 또는 영적인 노래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베스트(Ernest Best)에 따르면, 그것은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거나 지배를 받아 노래하는 것” 47) 이다. 로이드 존스 역시 그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라고 규정한다. 48) 칼빈은 이러한 노래는 “단순한 찬송만이 아니라 권면과 다른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49) 고 말했으며, 헨드릭슨은 그러한 견해를 따라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께 또는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직접적인 찬양 이외의 주제들을 다루는 다른 성스러운 노래들을 주로 가리킨다” 50) 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어떤 이들은 “신령한 노래”를 여러 동방 종교들에서 행해지는 즉흥적이고 도취적인 노래, 또는 “알렐루야”(alleluia)의 “유빌루스”(jubilus)에서처럼 어떤 찬트 형태의 확대된 멜리스마와 같은 독특한 형태의 노래로 본다. 51) 그들은 신령한 노래가 발성연습곡처럼 영적인 기쁨을 나타내며 가사가 없는 노래이거나 아마도 “알렐루야”와 같이 한 단어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거스틴은 그러한 형태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그것은 가사가 없는 어떤 기쁨의 소리이다. …그것은 기쁨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음의 표현이다.” 52) 오스벡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노래를 불렀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신령한 노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이며, 종종 하나님과의 도취적인 경험들로부터 일어났다.” 53)

더 나아가서, 카바노프(Patrick Kavanaugh)는 이 “노래”(odes)를 “도취적인 방언과 아마도 결합된 즉흥적인 노래”라고 칭한다. 54) 또한 조핸슨은 “신령한 노래가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신령한 노래는 성령에 의해 유발되는 노래이며, 대체로 미지의 언어로 노래된다”고 지적한다. 55) 그리고 현대 오순절파와 은사파를 포함한 이들은 신령한 노래가 오늘날 아직도 경험되어지는 자발적이며, 도취적이고, 방언적인 노래라고 주장한다. 56) 그러나 링컨이 말했듯이, “이러한 노래들이 신자들에 의해 서로 화답된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아마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방언으로 하는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일 가능성이 있다.” 57)

브루스(F. F. Bruce)는 말하기를, “신령한 노래는 거룩한 열망들을 소리로 발하며, 성령 안에서 노래되는 미리 생각하지 않은 단어들일 것이다” 58) 라고 했다. 카바노프가 지적했듯이,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안에 있었던 어느 정도 즉흥적인 성질의 음악을 인식했다. 59) 그래서 그는 고린도 전서 14:26에서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한편, “신령한 노래”를 현대적으로 적용하면서, 조핸슨은 오늘날 성령 안에서 미지의 언어로 하는 즉흥적인 노래와 모국어로 하는 즉흥적인 노래가 현대적인 신령한 노래의 예들이라고 말한다. 60) 또한 오스벡은 “신령한 노래는 오늘날의 복음 성가에 대응하는 것이다” 61) 라고 말하면서, 복음 성가를 신령한 노래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신학자들은 신령한 노래를 성령의 감동에 의한 영적인 노래라고 보다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음악학자들은 그것을 성령으로 말미암는 즉흥적이고, 도취적이며, 심지어 방언적인 노래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자들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신령한 노래의 성격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노래들과 음악 실제에 있어서의 즉흥적인 면을 고려할 때 그것이 어느 정도 즉흥성을 띨 수는 있으나 그 언어에 있어서 단적으로 방언적이라고까지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칼빈도 지적했듯이 보다 포괄적으로 영적이며 신앙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사용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용어들은 그 의미와 내용, 그리고 범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물론, “시”와 “찬송”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것들의 내용이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 가지 용어들은 어원적으로, 성경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서로 상당히 구별되는 음악의 종류를 지칭한다. 즉, “시”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는 것이고,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서 일차적으로 성경에 있는 많은 노래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령한 노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이며 일반적인 노래로서 즉흥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음악의 기본적인 종류 또는 장르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교회음악의 기초와 중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교회음악의 기초는 시편을 중심으로 하는 성경의 노래들이며, 그 중심은 시편가와 찬송가이고, 그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하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오늘날 교회음악 현장에서 “시와 찬송”이 상당히 또는 심각하게 무시되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특별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19와 골로새서 3:16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에 대해 중복적으로 언급한 이 말씀은 당시 초대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 교회를 위한 권면이요 명령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말씀에 순복하여 성경적인 교회음악적 원리와 내용을 회복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용어들로 대표되는 교회음악의 모든 종류와 양식들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4. 교회음악의 대상

바울은 교회음악의 대상(對象)과 관련하여 엡 5:19~20에서 “서로”, “주께”, “아버지 하나님께”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우선 “주께”, “아버지 하나님께”라는 언급에서 보듯이, 바울은 교회음악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교회음악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교회음악은 하나님을 향한 음악, 하나님을 위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교회음악의 청중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며, 음악으로 하나님과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하는 것을 말한다. 리프블래드는 이러한 의사소통의 측면을 강조하여, “그러한 노래가 단지 하나님에 의해 구경되어지는 음악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의 한 형태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62) 라고 말한다. 교회음악을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수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많이 강조되어온 내용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교회음악의 대상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서로”라는 단어가 지칭하듯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교회음악이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을 향한 음악,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론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음악은 성도 즉 교회를 위한 음악, 다시 말하자면 교회를 세워주는 음악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스벡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음악적 형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63) 조핸슨은 이러한 교회음악의 수평적인 역할에 대해 “음악사역의 기본적인 과업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성숙시키는 것” 64) 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위한 이러한 교회음악은, 교회의 기능을 고려할 때 교육, 전도, 교제와 관계된 음악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들이라는 교회음악의 두 대상을 여기에서 함께 언급한다. 이는 그가 교회음악적 의사소통에서 양쪽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프블래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게 주께 노래하는 것과 서로 노래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음악을 위한 규범이다.” 65) 그런데 사실 오늘날 교회음악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음악사역의 대상으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음악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음악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바울의 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십자가의 원리를 교회음악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으로서 교회음악의 실제에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

5. 교회음악의 방법

바울은 이 구절들에서 교회음악의 방법들에 대해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언급한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적인 음악 전통과 원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교회음악 행위에 있어서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면 너무 음악적인 면에만 치우쳐있는 교회음악 현실에 대한 새로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면, 여기 바울이 제시한 각각의 요소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교회음악적 의미를 갖는가?

1) “서로 화답하며”

여기 “서로 화답하며”(엡 5:19)라는 말은,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리면, 음악을 통해 “너희는 너희에게 있는 행복하고도 기쁜 감정을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 66) 는 것이다. 리프블래드는 이것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종교적 음악 형식들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하는 음악적 담화(musical speech)” 67) 라고 칭한다. 바울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형태의 히브리 음악에 익숙해 있었는데, 시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시편에는 상대방을 권고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예배로 초청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증거하고 서로가 하나님에 관해 화답하는 등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담화가 담겨 있다. 68) 그처럼 음악적으로 서로 의사소통할 것을 바울은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교회음악은 “단순한 음악적 장식이 아니라 영적인 의사소통” 69)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음악적인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교창(antiphonal singing)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0) 교창은 구약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반적인 노래 방법이었다. 에스라 3:10b~11a에 보면,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제사장들과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이 찬송할 때, “화답하며,” 즉 교창으로 찬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이사야 6:2~3에는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천사들도 교창의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설명이며, 그 만큼 교창이 찬양에 있어서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사실 구약의 많은 시편들은 병행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교창으로 노래하기에 좋았으며, 그러한 이유로 교창은 구약의 예배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더구나 시편 103편과 같이 동일한 어구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구절들71)을 가지고 있는 교창적 시편(antiphonal psalm)은 두 성가대에 의해 교대로 노래되었다. 이처럼 교창은 히브리 음악에서 매우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바울도 그러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여기에서 “서로 화답하며”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 말은 그 당시 초대교회 음악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바울은 교창의 방법을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음악 현장에서 이 성경적인 방법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회중 찬송이나 성가대의 찬양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음악 활동에서도 그저 일방적인 음악 연주만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찬양 가운데 서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음악에 있어서 교창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심지어 교창은 차치하고서라도 교창의 형식으로 전통적인 예배순서 안에서 행해지던 시편교독마저 근래에 주일예배에서 조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로 화답하며”라는 이 바울의 언급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된다.

2) “마음으로”

“마음으로”(엡 5:19)라는 말은 칼빈이 해석한대로 “위선자들처럼 입으로만 하지 말고 마음으로” 72) 주께 노래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링컨은 이 문맥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신자들은 기뻐하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리고 그러한 찬미는 단지 입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가장 내적인 존재, 즉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 곳은 성령께서 친히 내주하시는 곳이다.” 73)

그리고 로이드 존스 역시 그와 같은 관점에서 “성령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74)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래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신비주의적 유대인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주장하였듯이 무언(無言)의 노래(silent singing)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적인 노래를 전제하는 “서로 화답하며”라는 구절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75)

그렇다면, 여기 “마음”은 어떤 곳인가? 성경은 마음은 종교의 자리로서 인간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씀한다. 76) 또한 마음은 인격의 자리로서 인간의 생각, 감정, 의지가 마음에서 나온다. 77)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며, 78) 그러한 상황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노래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79)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정하여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해야 한다. 80) “전심으로”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81) 바울은 바로 그러한 성경적 찬양의 원리를 여기에서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골 3:16)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부분(ἐν [τῇ χάριτι)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라고 해석될 수 있는데, 82) 칼빈은 이것을 “은혜로”라고 번역하여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와 연결시킨다. 83)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반응인 감사” 84) 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찬양은 카슨의 말처럼 “경배하는 사람의 진정한 감사를 표현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동의하는 마음까지도 반영시켜야” 85) 한다. 찬양과 예배에서 표현되는 이러한 감사는 우리들의 삶 전체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이따금씩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 한다. 86)

이렇게 감사는 교회음악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시편 95:2은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라고 권면하며, 시편 100:4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편 147:7에서는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라고 명령한다. 더욱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와서 그에게 감사하는 태도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6. 결론

바울은 엡 5:18~20과 골 3:16에서 자신의 교회음악 사상의 요체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유대인들의 음악 전통에 대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과 지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단지 원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의 실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교회음악에 대한 그의 언급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음악의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음악의 조건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둘째, 교회음악의 종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인데, “시”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고,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서 일차적으로 성경에 있는 많은 노래들을 지칭하며, “신령한 노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이며 일반적인 노래로서 즉흥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용어들은 교회음악의 모든 종류와 양식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셋째, 교회음악의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들이다. 끝으로, 교회음악은 실제에 있어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바울의 교회음악 사상은 교회음악에 대한 이론적 체계가 아직 잘 갖추어지지 않은 우리나라 교회음악계의 현실 속에서 성경적인 교회음악관을 정립하는 데에 필요한 전체적인 구조와 핵심적인 원리들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교회음악을 이론적으로 보다 체계화시키고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강조한 교회음악의 원리들에 비추어 교회음악의 현실을 다시금 조명하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으며, 그에 따라 교회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정비하고 고양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성경적이고 온전한 교회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더욱 굳건하게 세워가는 것이 우리 교회음악인의 사명이다.

<각주>
1) Donald P. Hustad, Jubilate II: Church Music in Worship and Renewal (Carol Stream, IL:Hope Publishing Company, 1993), 24.
2)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3) Bruce H. Leafblad, "An Apostolic Norm for Congregational Song" in We'll Shout and Sing Hosanna, ed. David W. Music (Fort Worth, TX: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98), 10~11.
4)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 “나팔 소리”(고전 15:52)와 같은 부분들을 말한다.
5) Leafblad, "An Apostolic Norm," 13. 랄프 마틴(Ralph Martin)은 바울이 인용한 12 찬송들을 4가지 형태들로 분류하는데, ① 성례전적(엡 5:14, 딛 3:4~7, 아마도 롬 6:1~11과 엡 2:19~22) ② 묵상적(엡 1:3~14, 롬 8:31~39, 고전 13) ③ 고백적(딤전 6:11~16, 딤후 2:11~13) ④ 기독론적(골 1:15~20, 딤전 3:16, 빌 2:6~11) 유형들이다. Leafblad, "An Apostolic Norm," 14에서 재인용.
6) 홍정수, 『교회음악개론』(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8), 50에서 재인용.
7) Martin Hengel, Between Jesus and Paul (London: SCM Press, 1983), 79.
8) Herbert M. Carson, The Epistles of Paul to the Colossians and Philemon, 양용의 역, 『골로새서 빌레몬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122와 Peter T. O'Brien, Colossians, Philemon, 정일오 역, 『골로새서 빌레몬서』(서울: 솔로몬, 2008), 374를 참조하라.
9) O'Brien, 『골로새서 빌레몬서』, 374.
10) John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존 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85), 604.

11) William 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Exposition of Colossians and Philemon(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64), 160.
12) Andrew T. Lincoln, Ephesians, 배용덕 역, 『에베소서』(서울: 솔로몬, 2006), 663과 Leafblad, "An Apostolic Norm," 16을 참조하라.
13) Frnacis Foulkes, The Epistle of Paul to the Ephesians, 양용의 역, 『에베소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210~211.
14) Leafblad, "An Apostolic Norm," 15.
15) Leafblad, "An Apostolic Norm," 16.
16) 본 논문의 중심적인 내용이 되는 이 부분은 필자가 “시, 찬송, 신령한 노래”라는 제목으로 『Choir & Organ』잡지 제102호(2009년 7월)에 기고한 글을 전반적으로 수정, 보완한 것이다.
17)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5.
18) Leafblad, "An Apostolic Norm," 28.
19) Hengel, Between Jesus and Paul, 80.
20) Lincoln, 『에베소서』, 665.
21) Lincoln, 『에베소서』, 665.
22)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
23) 홍정수, 『교회음악개론』, 52.
24)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5를 보라.
25) Martyn Lloyd-Jones, Singing to the Lord, 이태복 역, 『성경적 찬양』(서울: 지평서원, 2009), 24.

26) Leafblad, "An Apostolic Norm," 28. 리프블래드는 음악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시”는 히브리시편들과 칸티클을, “찬송”은 아마도 그리스도에게 중심을 두었을 새로운 찬양의 노래들을,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더 멜리스마적이고 도취적인 노래의 형태로서 즉흥적이고 장식적인, 그리고 아마도 방언적이기까지 한 노래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하면서 그러한 관점이 보다 타당한 것 같다고 말한다.
27) David B. Pass, Music and the Church, 이석철 역, 『교회음악 신학』(서울: 요단출판사, 1997), 129-130.
28) Leafblad, "An Apostolic Norm," 29.
29) T. K. Abbott,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to the Colossians (Edinburgh: T. & T. Clark, 1979), 162.
30)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5.
31) Carson, 『골로새서 빌레몬서』, 124.
32) 대표적인 예로,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4), 158와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를 보라.
33) Kenneth W. Osbeck, The Endless Song (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1987), 51.
34) Hustad, Jubilate II, 146-147. 누가복음에 있는 4개의 캔티클이란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눅 1:46-55), 사가랴의 노래(Benedictus, 눅 1:68-79), 천사들의 노래(Gloria in Excelsis, 눅 2:14),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눅 2:29-32)를 말한다.
35) Foulkes, 『에베소서』, 211.
36) 『제네바 시편가』는 1562년 시편 150편 모두와 십계명, Nunc Dimittis를 포함한 최종판이 발간되었다. 새로 발간된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1)과 “날 구속하신”(548) 등 2편의 제네바 시편가가 실려 있다.

37) D. G. Hart and John R. Muether, With Reverence and Awe: Returning to the Basics of Reformed Worship (Phillipsburg, IL: P&R Publishing, 2002), 162.
38) Abbott,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to the Colossians, 162.
39) Abbott,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to the Colossians, 162. "Oportet ut, si sit hymnus, habeat haec tria, et laudem, et Dei, et canticum." 어거스틴이 이 문장을 포함하여 찬송에 관해 언급한 내용의 영어 번역은 이러하다. “Hymns are praises of God with song; hymns are songs containing the praise of God. If there be praise, and it is not of God, it is not a hymn; if there be praise, and praise of God, and it is not sung, it is not a hymn. If it is to be a hymn, therefore, it must have three things: praise, and that of God, and song.” James McKinnon, Music in Early Christian Literatur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158.
40)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5.
41)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
42)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
43) Calvin M.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Twenty-first Century Directions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92), 124.
44)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 Lincoln, 『에베소서』, 666; Foulkes, 『에베소서』, 211-212;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6-27; Osbeck, The Endless Song, 52;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124; Hustad, Jubilate II, 147 등을 참조하라.
45)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5-26.
46)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7-28.
47) Ernest Best,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Ephesians (Edinburgh: T&T Clark, 1998), 511.
48)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8-29.
49)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5.
50) Hendriksen, Colossians and Philemon, 162.

51)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140.
52) Hustad, Jubilate II, 148.
53) Osbeck, The Endless Song, 54.
54) Patrick Kavanaugh, The Music of Angels: A Listener's Guide to Sacred Music from Chant to
Christian Rock (Chicago: Loyola Press, 1999), 10.
55)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140.
56) Hustad, Jubilate II, 148.
57) Lincoln, 『에베소서』, 666.
58) Bruce, The Epistles, 159.
59) Kavanaugh, The Music of Angels, 10.
60)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140.
61) Osbeck, The Endless Song, 54.
62) Leafblad, "An Apostolic Norm," 19.
63) Osbeck, The Endless Song, 51.
64) Johansson, Discipling Music Ministry, 18.
65) Leafblad, "An Apostolic Norm," 26.
66) Lloyd-Jones, 『성경적 찬양』, 21.
67) Leafblad, "An Apostolic Norm," 24.
68) Leafblad, "An Apostolic Norm," 24-25 참조.
69) Leafblad, "An Apostolic Norm," 26.
70) Best, Ephesians, 511.
71) 1-2절과 20-22절을 보라.
72) John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9, 존 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85), 372.

73) Lincoln, 『에베소서』, 666.
74) Lloyd-Jones, 『성경적 찬양』, 69.
75) Calvin R. Stapert, A New Song for an Old World: Musical Thought in the Early Church(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7), 23-24;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6도 참조하라 비슷한 입장에서 헨드릭슨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inaudible) 노래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William 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Exposition of Ephesi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67), 240-241.
76)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77)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78)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79) 암 5: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80) 시 57: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81) 시 138: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82) O'Brien, 『골로새서 빌레몬서』, 379.
83) Calvin, 『신약성경주석』, vol. 10, 605.
84) O'Brien, 『골로새서 빌레몬서』, 379.
85) Carson, 『골로새서 빌레몬서』, 124.
86) Lincoln, 『에베소서』,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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