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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인간론

에드워즈와 로크의 인간 이해

에드워즈와 로크의 인간 이해

 

노승환

 

1. 들어가는 말

근래 들어 한국 교계에서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신학자로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강웅산, 이상웅, 이진락 교수님 등 에드워즈를 공부하신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이 왕성하게 활동하시며 에드워즈를 소개해주신 이유도 크겠지만, 에드워즈 신학 자체가 가진 탁월성이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주목받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18세기에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화난 표정으로 지옥을 논하는 부흥사들중의 하나로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페리 밀러의 연구 이후로 에드워즈는 재평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양한 학자들이 에드워즈를 새롭게 주목하였으며, 예일대학의 에드워즈센터를 통해 73권의 에드워즈 전집이 발간됨으로 에드워즈 연구가 가속화 되었습니다[1].

오늘 제가 원우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는 로크와 에드워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살았던 존 로크(1632-1704)에게서 철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혹자들에게서 에드워즈와 로크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신학과 철학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려는 시도 아래에서 생겨난 연구결과로 보입니다. 에드워즈의 당시 존 로크는 많은 인기를 끌었던 철학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입니다. 에드워즈는 학부시절 로크의 글을 접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사상적 체계와 분류 방법은 로크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에드워즈와 로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에드워즈의 사상적 체계는 로크의 아류에 불과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연하게도 에드워즈의 승리입니다. 에드워즈는 로크의 구조적 틀은 다소간에 차용하였을지는 몰라도, 신앙이 의심스러운 배경을 지닌 로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이론을 구조화하였습니다. 저의 이번 글의 목적은 에드워즈와 로크의 학문적 접근 방법론 중 가장 유사한 모델인 인간론에 대한 부분, 특별히 인간 영혼의 기능을 정의하는 부분에서 그들이 개념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철학적 방식으로 살펴보며, 이를 통해서 에드워즈의 신학적 체계가 가진 탁월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2. 인간 영혼의 기능에 대한 역사적 고찰

고대로부터 인간의 존재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어 왔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세계는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와 변하는 현상 세계의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인간 또한 이데아를 감각할 수 있는 영혼과 변하는 현상 세계에 속한 육신으로 구분될 수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현실의 세상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 아래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특별히 영혼과 영혼의 기능에 대해서 더 주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양자는 각각 다른 이유에서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감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영혼을 더 고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육체의 동인이라는 측면에서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영혼의 기능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사유하는 배경 또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플라톤은 인간 영혼의 기능을 이성, 기개, 정욕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으며, 감정을 이성과 정욕 양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2].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을 식물적, 동물적, 이성적 기능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성은 식물과 동물적 기능을 주관하는 것이며, 이성은 판단함으로써 행위의 근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합니다[3].

이러한 흐름은 스토아로 하여금 인간 영혼의 기능을 이성과 감정, 의지로 나누는 모델을 차용하게끔 하였습니다. 이성은 판단하여 인간에게 행동의 근거인 의지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 때 감정은 이성의 판단을 헷갈리게 하는 역할을 하며,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제논은 이러한 감정을 이성에 복속시켜야 한다고 주장[4]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스토아의 이러한 사상은 신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중세까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감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고 이성에 복종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분류방법은 로크와 에드워즈가 활동하였던 17-18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콘라드 체리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의 연구 방법론은 인간 영혼의 기능을 개별적인 것으로 여기는 기능심리학에 가까웠다고 합니다[5]. 이러한 바탕에서 에드워즈가 그렇게 반박하고 나섰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인간 안에서 선택을 하는 부분을 인간 안의 의지라고 명명된 개별적인 개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시대적 배경과는 달리, 로크와 에드워즈라는 두 사상가는 인간 영혼의 기능을 지성과 의지라는 개념의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다음을 통해서 각 학자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로크의 지성과 의지 개념

로크는 지성(understanding)의 발현에 의해서 인간의 인식이 생겨난다고 말하였습니다[6]. 로크의 개념을 엄밀히 파고들자면, 인간의 지성은 능동적으로 대상을 파악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의 단순관념들이 인간에게 지각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크적 개념에서의 지성은 일종의 감각기관이기도 합니다. 로크는 지성의 발현에 의해 생겨난 인식을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마음에 생겨난 단순관념들의 인식  하나의 표시를 다른 표시들로부터 구분하는 개념  지각된 개념에 대한 친밀감이나 혐오감, 동의나 반대(등의 관계 개념등)에 대한 개념. 위의 세 가지의 인식물들은 모두 지성, 혹은 인식하는 능력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7]

 

이를 통하여 로크가 정의하는 지성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단순관념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며, 두 번째는 단순관념들의 차이성을 인식하는 능력, 세 번째는 단순관념들의 관계를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단순관념의 형성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복합관념으로 형성되기 위해 인간 내에서 발생되는 반성능력까지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로크의 지성에 대한 정의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이 단순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단순히 두 개념 사이의 관계만을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친밀감이나 혐오감이라고 이야기한 로크의 예를 볼 때에, 이것은 일종의 감정적 차원의 기능을 포괄합니다. 감정이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인식자의 반응이라고 했을 때, 감각기관으로써의 지성적 기능이 감정까지 포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또한 동의나 반대라는 예를 통해서 로크는 지성에 판단하는 능력까지를 포함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과 함께 감정을 일으키고 판단하는 능력을 포괄하는 지성의 역할과는 달리, 로크는 의지를 선택하는 힘이라고 정의합니다[8]. 사실 의지가 선택하는 힘이라는 본 명제는 당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에드워즈까지도 동의하는 부분이었습니다[9].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선택하는 힘이라는 의지의 정의를 전제로 의지의 자기 결정능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지 자체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행위자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반해 로크와 에드워즈는 의지의 원인을 의지의 외부에 설정함으로 의지 자체를 제약적인 상황에 놓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중 로크는 감각기관으로써의 지성이 의지를 결정하는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로크가 의지에 대해 내린 추가적인 정의는 지성이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결정하여서 행동하게끔 만드는 능력[10]이라는 것입니다. 앞 단락에서 이야기한 지성의 기능은 인식자에게 판단을 일으키며, 이를 통해서 인식자는 즐거움과 고통스러움이라는 상반된 관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경험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로크는 불안(uneasiness)을 느낀다고 보았습니다. 불안은 그것을 피하고 싶은 욕망이 되어 의지의 작용인으로 기능합니다[11]. 즉 로크에게 있어서 의지의 원인자는 지성입니다.

 

 

4. 에드워즈의 지성과 의지 개념

에드워즈도 로크와 마찬가지로 인간 영혼의 기능을 지성과 의지의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성과 의지라는 개념 위에 성향이라는 포괄적 개념을 두어 모두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체계를 구성하였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지성이란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용법과 큰 차이를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지성이란 단순 관념의 인식과 반성 작용을 포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12]. 하지만 이것은 로크의 경우에서와 같이 감정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드워즈의 체계 아래에서의 감정은 오히려 의지와 더 가까운 면모를 보입니다.

로크가 의지의 원인을 지성에 둔 것은, 지성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체계를 만들기 위함과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순환논리를 피하기 위함이라고 사료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같이 행위자의 의지 자체에 자유로운 형태의 선택하는 힘이 부여된다면,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의 자유개념은 깨어지는 셈이 되고 맙니다. 행위자의 의지가 다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되는 이 모델은, ‘최초의 의지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있어 의지의 행위는 항상 자연 발생적이며 불가사의하게 일어나는 것이 됩니다[13].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를 통해 이러한 순환논증을 비판하며, 이에 반박하기 위하여 의지의 원인자를 의지의 외부에 두는 체계를 구성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의지의 원인은 그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의지 안에 포함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언급한 이후에, 의지의 원인을 동기(motives)’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의지를 정의내리기 위해서 의지의 원인을 밝힌다는 사실은 나의 목적과 굉장히 부합되어 보인다. 동기는 가장 인간의 지성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의지를 결정한다[14].

 

에드워즈는 동기에 대하여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선택이 되게끔 자극시키며, 움직이며, 초대하는 역할을 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15]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한 동기와 복합적인 동기로 구분하며, 또한 강한 동기와 약한 동기로 나누었습니다. 에드워즈가 행위자 안에 존재하는 동기를 단순한 동기와 복합적인 동기로 구분하는 이유는 행위자 안에 여러 가지 동기들이 혼재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의 동기는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하나의 행위만을 유발시킬 수도 있으며, 반대로 여러 가지의 동기가 각기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의지의 작용은 가장 강력한(strongest) 동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16]. 강력한 동기란 행위자의 안에서 형성된 좋음(agreeable)’이라는 개념에 의해 선택되는 동기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논의에서 지성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자의 안에서 동기의 영향이 의지나 선택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것(동기)이 먼저 좋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영혼이 어떤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끌림이나 경향성이 작용해야만 가능하다[17].

 

행위자의 안에서 형성된 좋음이라는 개념은 외부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개념이라 할지라도 행위자가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행위자의 의지는 그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의 좋음이란 행위자의 상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좋음을 말합니다.

 

선택할 당시의 특별한 어떤 상황의 영향등의 조건들로 형성되는 특별한 마음의 기질에 의해서 행위자의 마음은 선택의 대상을 그럼직하거나 그럼직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18].

 

다시 정리해 보면 행위자의 의지가 발현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는 행위자의 마음이 판단하기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행위자가 선택 당시에 가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좋을 수도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언급된 마음의 상태를 에드워즈는 특별한 기질(the particular temper)[19]이라고 말하며, 이어진 문단에서 그것을 마음의 경향성(inclination)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20]. 결과적으로 행위자의 의지는 행위자가 가진 경향성에 의해서 부여된, ‘좋음이라는 동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에드워즈의 체계 속에서 의지는 경향성에 기인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성 또한 이 경향성에 의해 움직입니다. 에드워즈는 인간에게 인식된 지식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첫 번째는 로크의 개념에서와 동일하게 단순하게 인식된 개념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마음의 감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선을 알 수 있는 두 종류의 이해 혹은 지식이 있다. 첫째는 이론적 혹은 개념적 지식이다. ……. 둘째는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으로 아는 지식이다. 이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이나 달콤함을 깨달을 때, 마음으로 어떤 것에 있는 실재를 기뻐하고 즐겁게 느끼는 것이다. 이론적 지식은 단지 이론적인 것을 담당하는 기능, 더 정확히 말해서 의지 또는 성향과는 구별되는 지성(understanding)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의 감각으로 아는 지식은 의지(will), 성향(inclination),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21]

 

후자의 분류는 인간의 지성이 경향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식하는 종류의 것을 의미합니다. 로크가 지성의 기능 안에 감정의 작용과 판단의 기능을 포함시킨 것과는 달리, 에드워즈의 체계 아래에서 지성이 판단기능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은 경향성 때문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경향성은 가장 높은 차원의 인간 영혼의 기능입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분류를 두고 존 스미스와 체리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구분이 철저하게 어거스틴-안셀무스-보나벤투라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 동의합니다[22][23].

 

 

5. 평가와 정리

당시까지의 기능심리학적 인간 이해, 즉 인간 영혼의 기능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각자의 기능이 개별적으로 움직인다고 보는 견해와는 다르게, 로크와 에드워즈는 모두 인간 영혼의 기능을 지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로 나누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양자는 의지의 작용인을 모두 의지의 외부에 둠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공통점을 볼 때, 로크의 이론이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로크의 이론을 단순하게 차용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로크는 의지의 작용인을 지성에 두었습니다. 지성이 판단한 것에 대하여 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안이 로크의 개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에드워즈는 인간을 지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 개념만으로 양분하지 않았습니다. 상술한 것처럼 에드워즈는 지성과 의지 양자가 통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의지와 지성 양자를 통합할 수 있는 상위의 개념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입니다. 그는 의지의 작용인을 의지의 외부에 있는 경향성이라는 개념에 두었으며, 경향성을 통해서 좋음이라는 개념이, 좋음을 통해서 동기가 형성되는 구조를 제시하였습니다. 동기를 통해서 최종적인 선택의 작용, 즉 의지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지성 또한 경향성에 의거하여 로크적 복합관념, 즉 비판작용을 하게 됩니다. 지성의 판단작용은 경향성을 통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크의 구조에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성이라는 하나의 개념에 너무 큰 역할을 맡겼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의지의 원인인 불안은 지성이 판단한 것을 근거로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백지설과 선험론을 주장하였던 로크는 왜 모든 사람들의 지성이 동일한 기호와 불안의 경험을 갖게 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행위자에게 인식된 감각이 실재하는 대상과 같다는 것을 보증할 수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박할 수 없습니다.

로크에게 주어지는 본 문제들에 대하여 경험론적 노선에 서 있는 철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노선의 방법론을 취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흄(1711-1776)은 로크를 비판하며 회의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 케이스입니다. 반대로 영국의 주교였던 버클리(1685-1753)는 인식의 과정의 진실성에 대해 보증할 수 있는 대상을 상정함으로 로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존재하기에, 변개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식을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도 로크에게 주어지는 비판의 요소들을 피하기 위해서 버클리와 비슷한 방법론을 취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체계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경향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하나님으로 상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전 인류가 지닌 경향성까지도 타락시켜, 사람들은 악을 좋은 것으로 여기게(agreeable) 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새로운 경향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24]. 이것을 언급하면서 에드워즈가 주입(infus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의해 그가 카톨릭적인 노선에 서 있지 않나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구조가 가진 장점은 칼빈주의적 노예의지론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타락한 경향성이란 이야기는 은혜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경향성이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귀결을 낳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동시에 긍정할 수 있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의 개념에 대한 재 정의가 필요하기에, 에드워즈는 역시 『의지의 자유』를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향성 개념이 혹여나 타락까지도 포함하여 하나님께 죄책을 돌리지 않을까 우려한 그는 본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과 죄책의 정도에 대한 논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25].

 

 

 

 

6. 참고문헌

 

Edwards, Jonathan. Ed. Paul Ramsey. Freedom of the will, WJE 1.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 Ed. Paul Ramsey, Ethical Writings, WJE 8.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 Ed. Mark Valeri, Sermons and Discourses, 1730-1733, WJE 17.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Locke, John.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NY: Oxford University Press in US, 1975).

 

Ed. Craig, 杮䵩Edward.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Milton: Routledge, 1998), CD-rom ed.

Ed. Piper, John, Taylor, Justin. A God-entranced vision of all things : the legacy of Jonathan Edwards. (Illinois: Crossway books, 2004).

 

에드워즈, 조나단, 백금산 역. 『신적이며 영적인 빛』.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4).

체리, 콘라드, 주도홍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서울: 이레서원, 2001).

이상현 편저, 이용중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0).

 

노승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 2012학년도 백석대학교 철학석사 학위논문

 

 

 

 

 

[1] 예일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는 에드워즈 전집을 인터넷에서 열람이 가능하도록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http://edwards.yale.edu/

[2] Edward Craig, "Plato to the Stoics",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Milton: Routledge, 1998), CD-rom ed.

[3] Edward Craig, "Aristotle", op. cit.

[4] K. Scott Oliphint, "Jonathan Edwards on Apologetics: Reason and the Noetic Effects  of Sin", Ed. John piper, Justin Taylor, A God-entranced vision of all things : the legacy of Jonathan Edwards, (Illinois: Crossway books, 2004), 132.

[5] 콘라드 체리,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주도홍 역 (서울: 이레서원, 2001), 47-9.

[6]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NY: Oxford University Press in US, 1975), 142.

[7] John Locke, op. cit., 142. 번호는 필자가 삽입.

[8] Ibid., 143.

[9]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Ed. Paul Ramsey, WJE 1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137.

[10] John Locke, op. cit., 143.

[11] Ibid., 154-156.

[12] 에드워즈가 도덕적 선과 악의 차이를 인식하는 기능으로써 지성을 정의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 Jonathan Edwards, op. cit., 166.

[13] Sam Storms, "The will: Fettered yet free", Ed. John piper, Justin Taylor, op. cit., 203.

[14] Jonathan Edwards, op. cit., 141.

[15] Ibid., 142

[16] Ibid.

[17] Ibid.

[18] Ibid., 143.

[19] Ibid., 146.

[20] Ibid., 147.

[21] Jonathan Edwards, Sermons and Discourses, 1730-1733, Ed. Mark Valeri, WJE 17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414., 조나단 에드워즈, 『신적이며 영적인 빛』, 백금산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4), 39. 의 번역을 사용.

[22] 존 스미스, 「신앙감정론과 마음의 감각」, 이상현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0), 212.

[23] 콘라드 체리, op cit., 56.

[24] Jonathan Edwards, Ethical Writings, Ed. Paul Ramsey, WJE 8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740.

[25] 이 논증의 세부적인 내용은 노승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 2012학년도 백석대학교 철학석사 학위논문의 제 5장에 실려 있습니다.



출처: https://jedwards.tistory.com/3 [조나단 에드워즈와 개혁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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