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강단

갈라디아서 2:19-20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바울이 19절에서<~~ 죽었다 ~~살려 한다>라고 하는 표현은 이미 지난 주에 설명드린대로 매우 언약적인 표현입니다. 창세기 39장에 유다와 다말의 사건에서 다말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대표적인<의>에 이미지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 죽었다는<~와 더 이상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율법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지요. 환언하자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기존의 구약적 제의와 할례는 더 이상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미 설명드린대로 우리의 죄악을 고소하기는 하여도 그것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고소를 하려면 그 고소의 당사자가 살아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율법과 관계하에서 우리 자신이 죽은 자가 됨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기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며칠 있지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입니다. 작년 이맘 때, 검찰을 노전대통령을 기소하려는 준비가 한창이었지요. 그런데 갑작스런 노전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은 기소의 대상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소하고 그 고소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둘이 있다면 하나는 그렇게 내어주고 다른 하나로 살텐데, 아쉽게도 인간에게는 생명이 하나 뿐이요.<죄의 삯은 사망>인 고로 누구도 이 율법의 기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율법이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20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율법이 더 이상 나에게 대해 기소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무력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율법의 효력은 여전하지만 내가 그 율법과 관계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혼인관계를 빌어 설명합니다. 여인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 가면 음부가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야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이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죽게 됨으로 더 이상 율법과 관계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란 바로 이 지경까지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런 면에서 아직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에 대하여 살려 함이니라>라는 표현은 그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다말이 자발적으로 유다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 소임을 다한 것을<의롭게, 옳게>여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새 생명은 이제 이 율법의 기소권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율법과의 관계가 무관하냐? 그것은 아닙니다. 앞서도 설명드린대로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이지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여전히 죄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합당한 행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르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됨으로 이전에 없던 인격적이고 자발성이 가득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시켜서 마지 못해서 하던 것이라면 이제는 시키기 전에 애인의 마음을 알고 선물하는 남자친구처럼 부모의 마음을 알고 그를 기쁘게 하려는 자녀처럼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라는 표현의 뜻입니다. 
20절에<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라는 동사는 완료시제의 수동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이미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결과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제 우리 인격 안에 현실화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는 바로 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2000년 전의 십자가가 아니라 그 효력이 그를 믿는 자에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도록 효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주님만 지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실 때 참으로 하ㅏ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언약 백성들 역시 그 안에서 바로 이 죄에 대해서 율법이 고발하는 죄를 행위자가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서 율법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햇지만 20절은<내가>죽었다고 말합니다. 즉, 이 죽음은 곧 나에 대한 죽음입니다.<자기 중심적 존재>로서<나 자신>에 대한 죽음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중심적입니다. 0-3세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협응 자체가 안될만큼 자기중심적 존재입니다. 인간 본성 깊은 곳에 자기 중심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리가 깊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이 자기 중심성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럼 누가 도대체 산다는 말입니까?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실 만큼 사랑의 존재이시며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살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10년 5월 23일 주일 강단 중에서....

'블로그 > 목회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조의 신앙고백(시 78:1-11)  (0) 2018.05.08
갈라디아서 2:16  (1) 2018.05.08
율법의 목적과 용도(롬 3:1-20)  (1) 2018.05.08
남자의 성  (0) 2018.05.08
성도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0) 2018.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