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목적과 용도(롬 3:1-20)
노승수 목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이 말씀, 곧 율법을 맡음은 의에 이르는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는 용도로 주셨습니다.
1. 유대인의 불평에 대한 변증(1-8)
유대인의 형편이 이방인보다 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음을 갖지 못함에 대한 유대인들의 세가지 반론에 대해 하나님의 성품(속성)으로 변증을 합니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 많은 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맡아 가진 유대인들이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진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진 것이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거짓말 하실 수 없음과 참되심을 들어서 이러한 주장이 잘못 되었음을 변증합니다. 만약 유대인이 율법을 맡아 가진 이유로 복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간 율법과 약속과 예배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신실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결코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폐하시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두 번째 주장은 율법 안에서 살던 유대인은 믿지 않고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코 불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재판정에 재판이 불의하다면 누가 그 재판을 신뢰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결코 불의할 수 없습니다. 또, 불의함으로 세상을 심판한다면 누가 그 심판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 질 것임을 공언합니다.
유대인의 세 번째 주장은 쉽게 짐작할 만한 삐둘어진 마음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맡아서 우리가 불의한 자로 드러나면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기 위해서 죄를 짓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억울함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깊으신 경륜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결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하거나 버리시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라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2. 모두가 죄 아래 있음에 대한 선언(9-18)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밝히고 유대인의 반론에 대해서도 우선 변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 안에 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곧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들보다 낫지 않고 모두가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9). 이 죄를 성경을 통해서 확증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는 것이며, 죄의 최종적 결과는 저희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 범죄만을 죄로 생각하지만 이런 도덕적 문제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맺힌 열매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은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도무지 착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형편을 말합니다. 예컨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낼 때는 늘 품질 관리를 해서 제조 목적에 맞는 기능을 하는 것만 출고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최초에 지으실 때의 영광스런 모습에서 떠나 인간으로서 창조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바로 이 ‘선’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입술에는 거짓과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웃의 피를 흘립니다. 파멸과 고생이 가득해서 그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죄의 목록들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는 죄의 목록의 많은 부분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의 동기는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며 그와 같은 죄를 짓게 되는 이유는 그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Coram Deo)있는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홀로 있을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삶에서 찾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3. 율법의 목적과 용도: 모든 입을 막고 죄를 깨닫게 함(19-20)
사도바울은 율법의 목적과 용도를 밝힙니다. 율법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드러내심으로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나타내시기 위해 ‘더’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나음이지, 의를 얻도록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맡았던 유대인의 세 가지 주장 곧, 첫째, 언약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냐? 둘째, 하나님이 불의하시자 않느냐? 셋째,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의 나음과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힘써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죄인됨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의가 없음으로, 입을 막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의를 삼으려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 있습니까?
두 번째, 율법의 용도는 ‘의롭다하심’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애시당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원래 아담은 이걸 지킬 수 있는 상태였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연약함을 인하여 지킬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각성케 하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이 그와 같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또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전혀 없음을 알려줍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맡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하심이 그 핵심적인 용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어떤 용도로 이해하고 경건 생활과 삶 가운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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