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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초대교회사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들

갑바도기아의 세 학자들
아타나시우스는 A.D.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그의 전 생애를 바친 정통 교리의 마지막 승리를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남긴 저술들을 보면 결국 아리우스주의가 패배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노령에 접어들면서 그와 동일한 신념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신학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바로 갑바도기아인들로 불리우는 이들이다.
갑바도기아 지방은 소아시아 남부에 위치하며 현재에는 터키에 속해 있다. 바로 이곳에 흔히 “갑바도기아인들(The Great Cappadocians)”라는 이름으로 보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곧 “대 바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학자 가이사랴의 바실과, 그의 동생이자 신비적 명상의 경향을 띤 작품으로 유명한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시인이자 웅변가이며 그가 남긴 찬송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 속에서 고전적 작품으로 남게 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이다. 
1. 인물 소개
이들에게 주목하기 이전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 업적이 잘 알려지지 못한 한인물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바실과 닛사의 그레고리의 누나인 마크리나(Macrina)이다.
1) 마크리나(Macrina)
마크리나, 바실 그리고 닛사의 그레고리 등이 배출된 가정은 적어도 2세대에 걸친 신앙을 자랑하는 기독교 가정이었다. 이들의 조부모들은 이미 데시우스의 박해를 피하여 7년간이나 숲속에 피신한 자였다. 당시 그들의 두 아들 그레고리와 바실 등도 함께 동거하였다. 우리들이 살펴 볼 갑바도기아인들의 삼촌이 되는 이 그레고리란 인물은 그후 감독에게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형제이자 마크리나와 그녀의 동생들의 아버지인 바실은 유명한 법률가요, 웅변 선생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순교자의 딸이었다. 따라서 갑바도기아인들의 조부모들은 부모 양쪽이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며 삼촌들 가운데 하나는 감독이었다. 
마크리나는 12살 때 당시의 관습을 따라 부모들에 의해 정혼되었다. 마크리나는 법률가로 촉망되었던 어느 젊은이와의 약혼에 승복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약혼자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마크리나는 다시 혼인할 것을 거부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명상의 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마크리나의 약혼 2,3년 전 바실이 출생하였다. 그는 몸이 몹시 약했으므로 과연 성장할 때까지 살아남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들을 바라왔던 아버지 바실은 자기 아들 역시 법률가이자 웅변자로 키우기 위하여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바실은 그리하여 갑바도기아 지방의 중심비였던 가이사랴와 안디옥과 큰스탄티노풀에서 공부하였다. 마지막에는 아테네에까지 유학하였다. 그는 이곳 아테네에서 후에 나지안주으의 감독이 돌 그레고리와 후세인들에 의해 “대배교자”라는 칭호를 받은 줄리앙 왕자를 만났다. 이러한 공부를 마친 후 바실은 스스로의 지혜에 교만하여 가이사랴로 돌아왔다. 그의 학문과 아울러 가족이 갖는 명망으로 바실의 장래는 확고히 보장되어 있었다. 곧 그에게는 웅변학 교수직이 주어졌다. 바로 이때 마크리나가 동생에게 권면하였다. 그녀는 동생에게 직접 대놓고 말하기를, 그가 마치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인양 방자하게 굴 뿐 아니라, 기독교 신자라기 보다는 이교 지식인처럼 거드름을 피운다고 꾸중하였다. 그러나 바실은 자기보다 학문이 모자라는 누나의 비평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때 비극적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촌에 파묻혀 은둔 생활을 하던 그의 형제 노크라티우스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바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와 노크라티우스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네 노크라티우스가 세속적 명예를 버린 데 반해 바실은 출세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양자의 생활양식은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이때 받은 충격으로 바실은 자기의 생애를 재점검하게 되었다. 그는 교수직 및 모든 명예를 사직하고 마크리나에게 종교 생활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 얼마 전 그들의 부친이 사망했었으므로 당시 마크리나는 가정의 정신적 지주였다.
마크리나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통해 그녀의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안네시(Annesi)로 들어가 명상과 봉사의 생활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진정한 행복은 세속적 영예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의 봉사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과의 일체 유대를 단절할 때만이 진정한 헌신이 가능하다고도 하였다. 의복과 음식을 가능한한 소박하게 하고 완전한 기도 생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즉 마크리나는 사막의 수도사들과 비슷한 금욕 생활을 주창한 것이었다. 
마크리나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몇몇 여인들은 이에 따라 안네시로 은둔하였으며, 바실은 누나의 충고를 좇아 이집트로 가서 수도생활에 관해 더 잘 배워오기로 하였다. 그 후 결국 바실은 헬라어 사용권 교회 속에서 수도 운동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따라서 마크리나야말로 이에 관한 그의 흥미를 처음 일으켰던 만큼 헬라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마크리나는 안네시의 은자로서 그녀의 여생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 바실이 사망한 얼마 후 그들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가 그녀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녀의 명성은 너무도 높아 단지 “스승”이라고만 불러도 누군지 알 정도였다. 그레고리는 「영혼과 부활에 관하여」라는 그의 작품 속에 이때의 방문을 기록하였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성자들 가운데서도 뛰어났던 바실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며, 모든 교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누나, 바로 그의 스승께서 아직도 생존해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임종을 가까이 두고 천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그의 누나를 발견한 그레고리의 심정은 착잡한 것이었다. 그는 기록하기를 “스승의 모습은 나의 고통을 다시 일깨웠다. 왜냐하면 그녀의 죽음도 임박했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일단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애통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도록 한 후, 부활의 소망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를 위로하였다. 결국 그녀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레고리는 자기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감기고 장례식을 집전한 후 그의 누나와 형이 이제 그에게 남겨준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왔다.
2) 가이사랴의 바질(Basil the Great, 329-379)
2세대에 걸친 기독교 가정에서 삼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몸이 허약했던 그는 법률가와 웅변가를 만들고자 한 부친의 기대대로 갑바도기아 지방의 중심지였던 가이사랴와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테네에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의 배교자 율리아누스와 훗날의 나지안주스의 감독 그레고리를 만났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356년 가이사랴로 돌아와 그곳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며 크게 성공하였다. 
누이 마크리나의 간곡한 권면을 무시했던 바질은 세속적인 명에를 거부하고 시골에 묻혀 지내던 형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교수직과 모든 명예를 사퇴하고 누이에게 신앙적 경건과 종교 생활의 비밀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바질은 이집트에서 수도 생활에 정직하였다. 한때 그는 그곳의 시(市) 교육 업무를 도와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헌신된 삶을 위해 거부하였다. 그리고 357년 수세 후 낭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이집트에 있는 여러 은둔지를 방문하며 암자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 이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감독 유세비우스의 요청으로 암자를 떠나 364년 장로로 임직받았으나, 370년 유세비우스의 사망으로 그 곳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는 한 가지 약점을 물고 늘어졌으니 곧 그의 건강 문제였다. 정통파는 이에 대해 우리가 검투사가 아니라 감독을 뽑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결국 바실이 선출되었다. 
이 새로운 가이사랴 감독은 그의 선출이 곧 아리우스파였던 황제와의 대결을 의미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발렌스는 가이사랴를 방문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미 니케아주의자들은 발렌스가 이러한 방문을 통해 아리우스주의를 강화시켜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발렌스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제국 관리들이 가이사랴로 찾아들었다. 이들은 이미 황제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새감독을 굴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바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바실과의 상대에 지친 황제의 친위대장은 바실의 재산을 압류하고, 고문하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바실은 이에 대답하기를 “당신이 압류할 수 있는 나의 전 재산은 몸에 걸친 이 누더기와 서적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나를 유배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관해 말하자면 내 육체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죽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나에게 큰 기쁨이다.” 이에 놀란 장군은 아직까지 아무도 감히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자가 없다고 응답하였다. 바실은 다시 대답하였다. “그건 아마도 자네가 이제까지 진짜 감독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일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황제가 도착하였다. 그가 이 도시에 대한 자기의 애정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헌금을 제단으로 가져갔을 때 아무도 이를 받기 위해 앞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감독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실은 이때 황제의 헌물을 용납함으로서 자기가 황제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건들 이후 바실은 감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강력하고 유창한 논증으로 아리우스를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변호했는데, 저작으로는 「거룩한 성령에 관하여」, 「유노미움을 반박함」이 있다. 바질은 그의 생애를 통해 조직가요 탁월한 군사 지도자로서의 제반 은사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금욕주의자로서 유명한 수도원을 세웠으며 친히 수도사들을 위해 규칙들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직도 헬라 수도원의 생활 규칙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니케아 정통 신학의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방대한 양의 교류와 여러권의 신학 논문들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타나시우스처럼 최후의 승리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381년 소집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니케아 신조를 비준하기 수개월 전 사망했기 때문이다.
3)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0-395)
바실의 동생으로 닛사의 그레고리는 형과는 대조적인 성품의 인물이었다. 바실이 성급하고 오만하기까지 했는데 반하여 그레고리는 침묵과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는 그 어떤 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또한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바실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젊을 때에는 법률가요, 웅변가가 되기를 원한 적도 있었으나 이에 뜨거운 집념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점잖고 학구적인 시인이자 몽상가인 그는 오랫동안 강직한 바질을 따르며 지냈다. 한때 교회 낭독자로 봉사한 그는 수사학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의 사망 후 형인 세운 수도원에 입적하였다. 371년 바질의 초빙으로 닛사의 주교가 되었으나 376년 니케아 신앙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교회 회의에서 파직되었다가 378년 다시 주교직을 되찾았다. 그 후 그는 점차 명성을 떨치며 여러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부탁을 받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지도자의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개회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바실과 황제 바렌스가 사망한 후 그레고리는 니케아파를 이끄는 지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바질에게 믿음이 전투적 소명이었다면 그레고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영혼에 속삭이는 사랑에로의 초대였다. 그는 “그녀(믿음)가 죄에 대한 집착에서 자신을 떼어놓은 후 신비한 입맞춤을 통하여 자신의 입술을 빛의 샘에 갖다 대기를 열망할 때, 그녀는 진리의 빛으로 빛나면서 아름답게 된다. 준마와도 같이 그녀는 감각적으로든지, 이성으로든지 지각하는 모든 것을 뚫고 질주해 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사과나무 그늘 밑을 갈망하면서 쉼을 얻을 때까지 한 마리의 비둘기처럼 비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자가 접근해 오는 동안 발각되지 않게 할 거룩한 어두움에 둘러싸인다.”고 했다.
비록 그의 성격은 조용하고 겸손하였지만 그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영혼 속에 맹렬히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상세한 니케아 신조의 해설은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회의가 끝난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를 자기의 신학 고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그레고리는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제국 전체를 여행해야만 했다. 물론 이러한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나 그레고리는 이를 항상 자신으로 하여금 명상의 생활에 전념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로 여겼다. 
마침내 니케아 정통 신학이 굳건히 확립하게 된 후 그레고리는 세상이 자기를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수도생활로 돌아갔다. 이에 소원은 이루어져 그가 어떻게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 조차 후세에 알려져 있지 않다. 
신학적으로 오리겐의 영향을 많은 받은 그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입장을 취했다. 그의 핵심적 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며, 구속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벌이는 치유 과정에서 가능해지며, 그 구속의 복된 결과들은 성례들을 통해 나타난다고 했다. 이로써 그는 성례 교리를 성육신과 연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저술로는 「신학 입문서」와「동정에 관하여」이 있다. 전자는 종말론, 후자는 실천적 삶에 관한 것이다.
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89)
또 다른 위대한 갑바도기아인은 바실이 학창 시절 만났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 그레고리는 나지안주스의 감독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의 이름 역시 그레고리였다. 당시에는 결혼 생활을 하는 감독들이 많이 있었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노나(Nona)였다. 그의 부친이었던 그레고리는 원래 이단 신학을 추종하였으나 노나의 감화력에 의해 정통 노선으로 돌아섰다. 바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레고리의 가족 역시 매우 신앙심이 돈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레고리 자신과 그의 부모들인 아버지 그레고리, 어머니 노나, 그의 동생 가이사리우스, 그의 여동생 고르고니아, 그리고 그의 사촌 암피로키우스 등이 모두 성자로 추종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위대한 웅변술을 갖고 있던 그는 젊은 시절 대중 연설의 경륜을 쌓겠다는 포부에 차 350년경 아테네의 이교적인 대학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바질을 만나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나는 거기서 웅변술을 추구했지만 참된 행복을 찾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질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귀들을 찾아 나섰다가 왕국을 발견한 사울과 같았다”고 말했다. 362년 그가 나지안주스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강요로 원치 않게 장로로 임명되었다. 그는 한때 바질의 수도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을 도우며 목회하였다. 374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사우리아에 있는 셀레우키아로 가서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그 동안 불편하게 생각했던 바질의 죽을 전해 듣고 친구의 소원이었던 아리우스와의 투쟁을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379년 세속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아리우스주의를 대항한 니케아 신조의 변호를 위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가 거리에 나타나자 폭도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고 아리우스 수도사들은 그의 예배당을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제단을 더럽혔다. 그러나 그는 완강하게 버티며 그 곳에서 귀중한 웅변을 하였다. 또한 자기의 소수 교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몇몇 찬송을 작곡하였는데 이중 일부는 그 후 헬라어 찬양의 고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80년 말 역사의 운명이 바뀌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해왔다. 그는 이때 정통 신앙을 사수하였으므로 모든 아리우스주의자들을 고위 직책에서 축출하였다. 얼마 후 새 황제에 의해 그레고리는 그곳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날은 특히 흐린 날씨로 하늘 전체가 구름에 덮혀 있었는데 단지 한 구멍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이 그레고리를 비추었다. 당시에 참석했던 군중들 일부는 이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고함치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를 감독으로, 그레고리를 감독으로!” 테오도시우스는 기꺼이 이들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그레고리 본인도 결국은 이를 승복하였다. 나지안주스 출신의 이름없는 수도사가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된 것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자의 신성에 관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또한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도 동일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 교리가 확실히 정립되었다. 당시 벌떼처럼 나리를 치는 감독들을 바라보면서 그레고리는 한심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그의 반대자들 가운데 일부가 그레고리는 이미 다른 도시의 감독이므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자, 그레고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직분을 기꺼이 사임하였다. 당시에 콘스탄티노플의 사장격이던 넥타리우스가 대신 감독으로 임명되어 지난 수업 때 발표된 골든 마우스라 불리는 존 크리소스톰에 의해 승계될 때까지 별 탈 없이 직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384년 60세로 타개할 때까지 일체의 세속적, 종교적 사치와 화려함에서 멀리 떠난 생활을 누렸으며, 찬송을 작곡하며 교회를 돌보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저술로는 「아리우스를 반박한 5편의 신학연설」과 바질과 함께 편찬한「오리겐 선집」, 아폴리나리우스를 반박한 여러 저서들과 그 외에 242통의 편지와 시들이 있다.
2. 갑바도기아 학파의 공헌
갑바도기아의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Homoousios)에 기초하여 아리우스의 유사본질(Homoiousios)과 용어상의 구별을 하였다. 즉 이들은 우시아와 후포스타시스를 구분하고, 만약 성부, 성자, 성령이 같은 본질에 속했다면 이들 삼위간의 차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물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오리겐의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유일하고 동일한 본질에 속했으나 세 실체라고 규정하였다. 이 용어들은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서 동의어로 취급되었으나 갑바도기아 학파는 그 둘을 구별하였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 마리아를 보면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개인이지만 셋은 모두 인간들이다. 즉 그들은 공통된 인간의 본체 혹은 실체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베드로를 지명하면서 “이 사람이 누구뇨?”라고 묻는다면, 두 가지 정답, 즉 그는 베드로라고 하든지 혹은 그는 사람이다 라고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는 니케아 신조가 말한 대로 아들이면서 하나님 아버지와는 다른 실체이나 동일한 본질이시다.
하지만 이 해석은 또 다른 이해를 요청하였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 요한, 마리아를 세 사람으로 간주할 때 이를 유추하여 성부, 성자, 성령을 세 하나님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 갑바도기아 학파는 하나님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예외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1) 우리가 보통 세 사람을 별개로 생각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서로 불일치하면서 다른 동기로 행동하고 다른 목적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까닭 때문이다. 그러나 세 신적 본질은 언제나 완전한 일치 속에서 행동한다. 
2) 또 어떤 경우에서 우리는 변형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는 재료를 독립된 개체들과 구별할 수 있다. 바질은 세 개의 구리 동전을 예로 들었는데, 그 세 동전을 가지고 네 개의 동전으로 다시 주조하려면 그 세 개를 한 덩어리의 구리로 녹인 후에라야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특수한 수의 동전들을 그것들을 만들어 낸 재료인 구리와 구별할 수 있다. 반면에 세 신적 본질은 다만 신적 실체를 취했거나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의 본질을, 그것이 취하는 특별한 세 형태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들 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삼중성과 다른 것으로서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분리된 세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이들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인간과 다른 특별한 경우가 되는가를 설명하였다.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은 사회적 유추의 방법을 사용하여 세 개의 신적 위격들의 상호 구별되는 차이점은 오직 그들의 내부적 신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결코 세 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 개의 전달구를 가진 하나의 신적 존재이시다. 즉 세 위격의 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삼위일체의 위격인 person은 오늘날 우리의 인격과는 다르다. 이는 본래 persona라는 라틴어의 의미대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이러한 신학적인 마스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우리의 생각이나 용어로서의 세 위격들이 아님을 알아야겠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참된 모습에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세 인격적인 노출의 특별한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