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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초대교회사

카파도키아 3대 교부들

카파도키아 3대 교부들
바실리우스, 그의 친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그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우리는 카파도키아 3대 교부로 부른다. 
1. 바실리우스
바실리우스는 비잔틴 전례 문헌에서 ‘교회의 등불’로 정의된다. 동방교회뿐 아니라 서방교회에서도 그의 성덕과 뛰어난 교의 그리고 사변적이고도 실천적 자질의 종합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바실리우스는 330년경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이름 역시 바실리우스였고, 어머니는 에멜리아(Emelia)였다. 바실리우스의 동생 그레고리우스는 후에 니사의 주교가 되었고, 페트루스(Petrus)라는 이름의 그 아래 동생 역시 후에 세바스테(Sebaste)의 주교가 되었다. 장녀 마크리나는 동생들, 특히 바실리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친할머니 마크리나로부터 유년에 받은 교육은 바실리우스에게 종교적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로부터 기초교육을 받다가 체사레아로 가서 공부를 마쳤다. 이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그들은 깊은 우정을 갖게 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옮겼고 351년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수사학 공부를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체사레아에 정착하여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교육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명성에 취해 있던 그를 일깨운 이는 누이 마크리나였다. 세속적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많은 시간을 헛된 것에 낭비하였음을 깨달은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는 복음 진리의 놀라운 빛으로 향하였다……그리고 불행한 나의 삶에 눈물을 흘렸다.”(서한 223,2)
356년경에 고향으로 돌아온 바실리우스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그는 수도생활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세례를 받았는데, 특히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우스(Eustatius)의 엄격한 생활방식에 매료되었다.이 때문에 바실리우스는 소아시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의 수도승 세계를 돌아보는 일종의 견학여행을 시작하였다. 358년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리스 강변의 한적한 곳 안네시(Annesi)에 있는 가족 소요의 땅에서, 이미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누나 마크리나의 모범을 따라, 금욕생활을 시작하고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 공부에 열중하면서『윤리 규정집』(Regulae morales)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실리우스는 이 고독의 삶을 오랫동안 누릴 수 없었다. 그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그에게 사제 서품을 주고 이내 주교의 보조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동안 바실리우스는 열심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약 2백 개에 달하는 질의응답을 모아『소(小)수덕집』(Asceticon parvum)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베네딕투스 규칙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에우세비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바실리우스는 그의 뒤를 이어 체사레아의 주교가 되었다. 이 때 바실리우스는 나름대로 내적 조직과 안정성을 지닌 큰 공동체들로 성장한 금욕가 무리들을 위해『소(小)수덕집』을 새롭게 적용하고 몇몇 구절을 첨가해서『대(大)수덕집』(Asceticon magnum)을 완성하였다. 그는 세상 권력에 용감히 맞서 저항했고, 온 힘을 다해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싸웠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 이단의 확산을 멈추게 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보지 못한 채 378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대 수도생활의 여러 입법자들이 그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베네딕투스를 꼽을 수 있다. 사실 바실리우스는 매우 특별한 수도생활을 창시하였다.곧 지역교회 공동체에 닫힌 수도원이 아닌 그것에 열려 있는 수도생활이었던 것이다. 그의 수도자들은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그곳의 핵심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 다른 신자들에 선행하면서도 단순히 신앙뿐 아니라 애덕 사업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매우 고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실리아데’(Basiliade)라는 구빈 기관을 만들었다. 수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양로원과 병원, 종사자들의 숙소 등을 두루 갖춘 이곳은 가난한 이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한 모습으로 제시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실천적이고도 수덕생활적이지만, 정통교의에 입각하여 엄격하고도 강한 교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같은 하느님임을 거부하는 이단자들에 맞서『에우노미우스 반박』(Contra Eunomium)을 저술한다. 그리고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항하여 성령 역시 하느님이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강변한『성령론』(De Spiritu Sancto)을 저술하였다. 이 외에 성서주석작품으로『7일 창조론』(Hexameron)을 꼽을 수 있다. 
2.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카파도키아의 나지안주스에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는 체사레아,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에서 공부한 후 355-356년경 고향으로 돌아왔다. 357년 혹은 358년경 세례를 받았고, 361년 성탄에 아버지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가,다음 부활절이 되어서야 돌아와 첫 강론을 하였다. 372년 바실리우스가 사시마(Sàsima)의 주교좌를 맡을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교로서의 그의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그는 다시 은둔 생활을 하였다. 3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잠시 나지안주스 교회의 주교로서 일하였으나 곧 셀레우치아(Seleucia)로 물러났다.
378년 발렌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니케아 공의회 지지자들은 다시 응집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 바실리우스가 지도하던 콘스탄티노플의 소규모 정통파 공동체를 규합하기 위해 그들은 그레고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등극한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다섯 편의 『신학적 연설』(Orationes theologicae)을 썼는데, 정통 신앙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의장이 된 그는 공의회가 제안하는 신경이 니케아의 달콤한 샘을 쓴 물결로 잠식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성령의 신성과 동일본질성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선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로마 역시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황제에게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사임하고 2년간 나지안주스에 머물다가 3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리안주스에 있는 가족 소유지로 물러나 기도와 공부에 전념하였다. 
3.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의 동생으로 335년과 34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바실리우스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처럼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서한』13에서 밝히고 있듯 바실리우스와 누이인 마크리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었던 마크리나를 추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누이는 우리 삶의 스승이자 어머니를 뒤이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힘을 솟게 하는 성곽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무기였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같았습니다.” (서한 19,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 문학, 플라톤주의, 스토아 사상, 오리게네스와 필론의 사상 등 폭넓은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360년경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 교회의 독서자였다가, 한때 그리스도교 금욕의 이상을 벗어나려고도 하였다.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금욕적 이상에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할 때 오히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으로 향했으며 수사학자가 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곧 365년경 테오세베이아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은 곧 세상을 떠났다. 이는 후에 그가 결혼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72년 카파도키아 지방이 양분되자 바실리우스는 제1카파도키아에 주교좌를 늘려 형제와 친구들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때 그레고리우스가 니사의 주교가 되었다. 바실리우스의 증언에 따르면,그레고리우스는 천재였지만 뛰어난 행정적 능력은 갖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형 바실리우스보다 니케아주의자들을 더 지지했기 때문에 아리우스파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아 376년 그들의 고발로 378년까지 유배를 당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가장 신뢰받는 정통신앙의 수호자가 되었다. 바실리우스처럼 에우노미우스의 가장 큰 반대자였고,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처럼 아폴리나리우스의 비판자였던 그는 394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자신의 누이가 죽기 전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저술한 『영혼과 부활』이 있다. 또한 그녀의 생애에 대한『마크리나의 생애』(Vita Macrinae)가 있고, 영혼의 상승 과정을 곧 인간이 추구하는 완전한 삶에 대한 『모세의 생애』가 있다. 
4. 카파도키아 세 교부들에 따른 성령의 동일본질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서한 58), 바실리우스는 372년에 강론할 때에는 성령의 신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주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우스(Eustatius)와의 결별과 성령피조설주의자들의 활동이 커지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에우스타시우스에게 보낸 신앙 고백문에서 그는 새로운 본문을 제시한다. 곧 성령은 거룩한 분이요, 성부와 성자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신적이요 복된 본성을 함께 지닌 분이라는 것이다. 375년 저술한『성령론』(De Spiritu Sancto)에서 그는 한 단계 진일보한 입장을 보인다. 곧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영광과 존귀와 예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낮은 위치가 아닌 그들과 동일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순서(ordo)에서는 세 번째 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같은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기에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공경을 받는 분이지, 성부와 성자보다 하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토록 성령의 신성과 동일실체성을 주장한다.그의 주된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성령의 위대함과 위엄에 대해 그리고 그의 역할의 힘과 광대함에 대한 성경의 증언, 2) 성부와 성자가 무엇을 하던, 특별히 성화와 신화의 일에서 성령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 3) 성부와 성자 모두에 대한 위격적 연결이다. 
다른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바실리우스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확장하는 데 그치고 있다. 예를 들면,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세 위격들이 공유하는 ‘본성의 하나됨’을 강조하며, 시편 33,6(“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을 인용하면서 말씀과 성령이 동등한 실재들임을 증명한다. 또한 그는 루카 11,2의 주님의 기도를 번역하면서 “당신의 성령이 우리 위에 내려오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곧 성령의 활동은 성부의 그것과 동일하다. 또한 성자 역시 구분될 수 없기에 세 위격들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없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역시 같은 주장을 한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느님, 그로부터 만물이 기원한 아버지가 계신다. 그리고 한 분 주, 그에 의해서 만물이 존재케 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고 한 분, 그 안에 만물이 존재하는 성령이 계신다. 그렇다고 이러한 단어들, 즉 어디로부터, 의해서, 안에서 등은 본성의 상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로 혼돈되지 않고 계신 본성의 개체적 위격들을 특징적으로 말한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성령이 하느님인가? 그렇다. 그러면 그는 동일실체인가?물론이다. 그분 역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성경을 내세운다. 예를 들면, 요한 4,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로마 8,26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1코린 14,15 (나는 영으로 기도하면서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양하면서 이성으로도 찬양하겠습니다) 등이다. 또한 그는 성령의 특성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고 있으며, 구원 사업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5. 카파도키아 세 교부들에 따른 성령의 기원 문제
카파도키아 세 교부들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성령의 기원 문제이다. 성령과 하느님과의 동일본질을 주장한다면, 하느님이 두 아들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바실리우스는, 성령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나 출생(generatio)이라는 방식이 아니라‘그의 입의 호흡으로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럼으로써 성령의 존재 양식 역시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또한 그는, 한 분이신 성령이 한 분이신 성자를 통하여 한 분이신 성부와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곧 신성이 성부로부터 성령에게 도달한 것은 독생 성자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요한 15,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에 근거하여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한다고 가르친다.“성령은 참된 영으로서 아버지로부터 오시는데 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오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오심은 출생에 의하지 않고 발출에 의한다.” 하지만 발출(processio)의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로써 삼위일체 내의 구별이 정확히 표현된다. 성부의 특성은 ‘낳음을 받지 않은 자’, 성자는 ‘낳음을 받은 자’ 그리고 성령은 발출이다. 
이에 대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명확하게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자에 속한다. 곧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자로부터 받는다.성령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성령의 이중 발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 위격들은 각각의 기원에서 구분된다. 곧 성부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위격들은 기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기원을 갖고 있는 두 위격들 역시 서로 구분된다.한 위격은 성부로부터 직접 나왔고, 다른 위격은 성부로부터 매개자를 통하여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성자만이 독생자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고, 성령과 성부의 관계는 그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또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보기도 하고 그 비유로 횃불을 든다. 곧 성부의 횃불이 성자의 횃불에 전달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성령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본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를 통해 동방교회의 성령의 기원에 대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라는 정식이 형성된다. 
6. 카파도키아 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공식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본체와 세 위격’ 이다. 이로써‘위격’과 ‘본체’가 구분되었다. ‘본체’는 하느님 안에 존재 또는 본질 또는 실체적인 일치를 의미하고, ‘위격’은 특별한 형태로서의 존재 또는 위격 각자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성부의 것은 무엇이든지 성자 안에서 나타나 보이며, 또 성자의 것은 무엇이든지 성부에 속한다. 성자는 성부 안에 영원히 계시고 반면에 그의 안에 성부를 영원히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성자의 실체라는 것은 성부가 알려지는 형상과 현시이다. 그리고 성부의 실체는 성자의 형상 안에서 인정된다.”또한 “본체와 위격의 관계는 공통되는 것과 특별한 것의 관계이다. 우리 각자는 공통된 본체를 통해 존재에 참여하고, 그것으로 인해 개인적인 특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본체는 공통성이고 선성 또는 신성 또는 어떤 비슷한 속성을 드러내는 반면, 위격은 부성(父性),아들성(sonship) 그리고 성화의 능력이라는 특별한 속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서간 214). 결국 바실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구별은 그 근원과 상호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성부, 성자,성령의 근원을 비출생, 출생, 그리고 발현 혹은 파견으로 표현하고 삼위의 특색을 부성, 아들성, 그리고 성화라고 표현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구별하기 힘듦을 지적하지만,삼위는 각각 다른 존재가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세 가지 다른 존재 양식을 가진 것뿐이라고 규명하였다. “시작이 없으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부이시다. 시작 없이 나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자이시다. 나지 않고 발출하시는 분 혹은 오시는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령이시다.” (신학적 연설 30,19). 다시 말하면, 세 위격의 동체성과 단일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개별적 특성에 의해 구별되며, 세 위격을 함께 고찰해 보면 한 분의 하느님이다. 전자는 동일본질 때문에, 후자는 단일성 때문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역시 성부와 성자의 성령 사이의 차등이 없는 하나의 신적 실체 강조한다. 또한 세 위격은 서로 종속되지 않고 항상 삼위일체적 관계에서만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부는 성자 없이, 성자는 성령 없이 생각될 수 없다. 성자를 거치지 않고서는 성부께 갈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자, 성자, 성령은 항상 함께 완전한 삼위일체 안에서 고찰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신경을 반포하면서 성령에 대해 고백한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과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셨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이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