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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개혁교회의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이해

개혁교회의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서창원 목사*


*총신대학교 졸업,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London Theological Seminary졸업, 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 졸업(Dip.Th.) Edinburgh University 대학원 (New College)졸업 (M.Th.역사신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역임,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개혁주의설교연구원 대표, 진리의깃발 편집장 겸 발행인




이끄는 말

교회 예배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치는 설교 다음으로 중요하다. 어떤 교회는 설교보다 음악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것 중에 하나가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음악 예배 혹은 찬양 예배 시에 설교는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하나님 말씀 선포가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도리어 찬양대의 찬양이 별로 유익하지 못한 설교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구실 삼아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가치를 저하시키며 음악의 기능을 상대적으로 격상시키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 시대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예배 음악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중심 축이 되어 온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예배에 있어서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음악의 중요성 혹은 필요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이 출처를 찾기 위해 뒤적이는 구약 성경은 찬양대의 역할 자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하신 큰 일들을 지극히 높여드리는 제사의식의 한 요소로 여길 뿐이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제사 드릴 때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호를 높여드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구약에서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구약에서 제사의식과 관련이 있는 찬양대의 사역과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 사역은 사실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다. 신약에 와보면 이것이 더 명확해 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드려진 이후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에 있어서 구약시대의 레위인들이 주로 맡아 했던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어떤 음악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는다. 

도리어 구약에서조차도 찬양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볼 수 있는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에서 보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였다. 즉 회중 중심의 찬송이었지 특수한 찬양대 중심의 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신약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 찬양을 읊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회중 찬송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를 통해서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 음악이 어떠해야 하는지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정체 불명의 무분별한 교회 음악이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하나님의 성호와 그 분의 존귀하신 은총을 감사 찬미하는 예배 음악은 일종의 세속 음악으로 전락되어버렸다. 이런 현실에서 바른 예배 음악이 무엇인지 개혁교회는 예배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단지 음악하는 자들에게 일임하여 온 지난 세월이 교회 안에 신학적 특색도 없고 예배 대상자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아니라 예배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즐겁게 하려는 세속적 음악으로 흘러가 버려도 도리어 그렇게 하고 있는 무리들을 칭찬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고에서 개혁 교회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다루고자 한다. 올바른 찬송 신학을 정립하여 개혁교회에서 사용되어지는 예배 음악이 예배를 받으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합당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또한 세상 음악이 예배 음악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바른 예배 음악을 통해서 바른 기독교 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구별된 예배와 예배 음악 문화가 새롭게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1. 개혁 교회 예배 음악에 대한 정의 

일반적으로 교회 음악이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지는 모든 음악을’ 뜻한다. 그러나 개혁교회 예배 음악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성경을 근거로 한 교회의 공적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을 말한다. 적어도 이 정의는 예배 요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의 요소는 우리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의 기록에 보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꺼이 수납될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어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시사(示唆,suggestions of Satan)에 따라, 어떤 유형한 표현이나 기타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 받지 않게 하셨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배에 있어서 회중이 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예배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배의 모든 요소도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대로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논고에서 다루고 있는 교회 음악 부분도 그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함을 개혁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찬양을 하는 행위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행위는 성경 읽기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행위이다. 물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기도에도 종종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에 찬양과 감사의 내용들이 풍요롭게 들어간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는 예배의 한 요소이며 찬양도 예배의 또 다른 요소라는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 유사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두 요소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 역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만 하듯이 찬양 역시 반드시 하나님이 기록된 계시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종교개혁자 칼빈도 교회 음악 혹은 예배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종에서 비롯된 것’ 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가 음악에 대한 신학적 관점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허영심과 욕심에 차 있는 인간의 음악에 대한 오용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칼빈의 이 사상은 성 어거스틴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것 외에로는 주님께 합당한 것으로 노래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음악은 가볍거나 경박해서는 안되며 권위와 위엄을 지녀야 하고 온건한 것으로 절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 음악은 단지 듣기에 감미롭게만 작곡되어서는 안되고...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사람의 마음에서 최상의 것은 음악이 아니라 무엇이 노래되어지는가 하는 가사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개혁교회 전통에 있어서 예배 음악은 반드시 그 내용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야 함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인간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은총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인간이 부여받은 재질의 우수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2. 예배 행위로서 찬양 부르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찬양 부르기는 비록 그 내용에 있어서 기도나 성경 읽기(예를 들어 성경의 어떤 부분은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실례로 마리아의 노래, 미리암의 노래 등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성만찬까지도 감사와 기쁨이 포함되어 있어도 그 모든 것들은 다 각기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배 요소들로 구별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를 찬양이나 기도에 관한 성경적 내용을 가지고 결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찬양 역시 기도나 성만찬에 대한 계시의 말씀으로 찬양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모든 내용이 다 계시에 부합되어야 하는 제한적 조치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찬양할 때에도 우리는 임의대로 선정하여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배의 한가지 요소와 관련된 근거를 가지고서 예배의 다른 요소를 평가하여 논리를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 예배에 있어서 온 회중이 다 함께 부를 노래와 관련한 성경적 근거에 대한 질문은 예배의 요소와 관련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철저하게 기초하는 답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어려운 점은 신약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근거를 뛰어넘어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본 논고는 이 질문에 관한 성경적 증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공 예배 때에 성도들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김은주씨는 자신의 논문에서 칼빈의 예배 음악에 대한 연구 조사 결과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① 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력이 있다. 
②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가사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시편이야말로 교회에서 부르기에 합당한 것이다
③ 예배시에 사용되어지는 음악은 말씀과 결합되어 있는 성악 음악이어야 하며 다성 음악은 가사의 의미를 혼란시킬 위험이 있기에 제창으로 부르는 단선율 시편가인 제네바 시편을 채택하였다.
④ 교회 음악에서의 악기 사용을 구약 시대의 그림자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여 폐지하였다.
⑤ 교회 음악은 선교적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같은 사례에서 개혁교회 예배 음악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을 내세우는 한국의 개혁 교회는 작금의 기독교 예배 음악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한국교회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는 회중들이 공 예배에 부를 시편 찬양곡 작성에 대한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3. 성경적 증거들이 말하는 온전한 찬양 

첫째, 마태복음 26:30과 마가복음 14:26절 말씀이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본문의 내용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시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찬 예식을 제정해 주시고 나서 감람산으로 가시기 전에 함께 부르신 찬양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헬라어 ‘흄네스앙테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찬미하였다’(having hymned)라는 뜻이다. 다른 자료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불려진 노래가 시편 113-118편에 구성되어 있는 할렐이라는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임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머레이 교수가 말하고 있다: 

① 영감되지 않은 찬송가 부르기를 위한 사례를 끌어드릴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다. 이 본문에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를 불렀다는 증거는 없는 것이다.
② 우리가 가진 증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시편의 한 부분을 노래였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③ 구약의 절기인 유월절과 신약의 성찬 예식을 지키는 것과 관련하여 이 시편이 불려졌다는 사실이다. 

둘째, 고린도 전서 14:15, 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15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내가 영으로 한 시편을 찬송하고 또 내가 마음으로(이해력을 가지고) 한 시편을 노래하리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또 26절에서도 ‘각각 한 시편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번역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서 불려진 노래가 시편이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노래가 사도에 의해서 인준되어진 것이며 그 역시 시편을 부름으로 확정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이 어떤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자들은 이 시들은 영감된 시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시인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권위 있는 것이요 사도들이 사용하고 확정한 것이 틀림없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영감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에베소서 5:19, 골로새서 3:16절 말씀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서 우리가 알고 갈 것은 본문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공 예배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 예배가운데 성도들 서로간의 관계에 있어서 신자들의 행동과 관련한 권면에만 집중하고 있는 바울 사도는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문맥 자체가 성도들이 공 예배에 모여서 서로에게 격려하고 화답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성도들의 삶에서 격려하고 위로하며 덕을 세우는 최고의 덕목들과 하나님의 영광에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하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예배의 기능을 볼 때 찬양과 성도들의 교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내용은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가운데 지적된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연관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일 사도 바울이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성도들이 서로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기독교적인 삶에 있어서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감당케 하는 하나의 도구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사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별한 행위에 있어서는 더욱더 사도적인 인증과 권위있는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기독교적 예배 행위에 있어서 사도들도 사용한 노래들이 시편이요 찬송이요 신령한 노래들이었다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은 교회의 온 회중들이 모여 경배하는 곳에서는 더욱 더 특별히 사용되어져야 할 것들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비공식적인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제한된 것이라면 공적인 예배에 있어서 얼마나 더 많이 제한되어져야 하겠는가! 따라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말이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현대적인 단어들과 동일한 언어로 사용된 것인지 그 본래 의미와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와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경의 용도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 실지로 사도 바울의 개념 속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찬송(hymns)과 신령한 노래(일부 목사들은 이것을 복음 송과 혼돈하고 있음)와 같은 개념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② 성경의 용도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라는 단어인 psalmos 는 헬라어 성경에 94번 사용되었다. 구약의 70인역에서 87번 그리고 신약에서 7번 사용되었다. 이 사례의 대다수는 시편에 있다. 그 중에 67번은 시편의 제목에 나타나 있다. 신약에서 발견되는 일곱 번 중 세 번은 예외없이 시편과 관련된 것으로 사용되었다. 두 번은 시가서(Biblos Psalmon, book of Psalms)라는 말로 사용되었고 하나는 둘 째 시편을 지칭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 94개의 사례 중 70개가 시편을 혹은 시가서에 있는 시편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이것이 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용된 ‘찬미’(humnos, hymn)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 19번 사용되었다. 그 중 17번이 구약에서 두 번은 오늘의 본문에 있는 것들이다. 17개 중 13번이 시편에 있으며 6번은 시편의 제목에 나타나 있다. 제목이 나타나 있지 않은 7개도 각 각의 사례가 다 하나님의 찬양 혹은 시온의 노래들을 가리키고 있다. 구약의 나머지 네 군데도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드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노래에 해당하는 말인 ‘Ode’는 헬라어 성경에 총 86번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80번, 신약에서 6번이다. 오늘의 본문(엡 5:19, 골 3:16)을 제외하고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요한 계시록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80번 중 45번이 시편에 나타나 있으며 36번은 시편의 제목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이 시편에서 얼마나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오늘의 본문인 에베소서 5:19절과 골로새서 3:16절이 오로지 시편만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사한 실례들을 무시하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③ 신약 성경에서 ‘시’(Psalmos)라는 말은 일곱 번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두 번이 오늘의 본문에 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4:26절에 있고 누가복음 20:42절과 사도행전 1:20절에 있는 두 사례는 시편을 가리키고 있다. 누가복음 24:44절은 구약을 가리키고 있는 말로서 하나님의 영감된 성경을 지칭하는 것이며 아마도 시편을 가리킴이 틀림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13:33절은 두 번째 시편을 가리킨다. 이처럼 그 어디에서도 ‘시’가 영감되지 않은 인간이 작사한 것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모두다 이 단어는 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킨다고 동의하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된 ‘흄노스’도 오직 이 본문에서만 언급된 것이다. ‘찬미하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동사 흄네오(humneo)는 네 번 사용되고 있는데(마 26:30, 막 14:26, 행 16:25, 히 2:12) 이미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 주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불려진 할렐 노래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25절은 감옥에서 부른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2:12절은 구약의 시편 22:23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언급을 제외하고 노래하다는 의미의 ‘오데’는 신약에서 오로지 요한 계시록 5:9, 14:3(2), 15:3 뿐이다. 따라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이들이 천상에서 불렀다고 주장할 만한 증거는 없는 것이다. 

④ 이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들 몇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과 구약에서 사용된 ‘시’라는 단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발견하였듯이 그 단어들은 한결같이 다 시편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참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미스모르’를 번역한 사례들 대부분이 시로 번역되었고 극소수만이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시로 사용하기도 했다. ‘살모스’라는 뜻은 ‘찬미의 노래들’이라는 말이다. 제목들에 자주 등장하는 시라는 말은 시편을 70인역에서 ‘살모이’(PSALMOI)로 부르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tehillim’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기자들이 헬라어로 된 구약 성경에 친숙한 그들로서 ‘살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에 구약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약의 사용된 단어 시편들(살모이)이라는 말이 분명히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 시들을 시편으로 불렀다. 

따라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용된 시가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다 영감된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라는 말은 다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린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힘노스’라는 말도 70인역에서 17번 사용되었다. 그 중 13번이 시편에 있다. 그 중 대 여섯 번이 히브리어 ‘네기노쓰’(Neginoth) 혹은 ‘네기나’(Neginah)에서 번역되어 시편 제목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본문에 언급된 대부분의 찬미라는 단어가 쓰인 사례들은 시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힐림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시편이 찬미로 찬미가 시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시편과 찬미가 서로 전적으로 다른 분류의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의 시는 단순히 시만을 의미하지 않고 찬미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찬미라는 말 자체가 영감되지 않은 어떤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데’ 역시 힘노스보다도 더 많이 시편의 제목들에서 사용되었다. 36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대부분이 ‘삼노스’를 가리키고 있다. 이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들이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영감 받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 의해 사용된 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된 유일하고도 독특한 찬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단어인 것이다. 더구나 신령한 노래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 즉 영감되지 않은 것에 신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⑤ 따라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찬양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를 결코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더 놀라운 것은 시편의 몇몇 제목들에 보면 세 가지 단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음율적인 작품들이 시와 찬미와 노래로 동시에 불려진 것이다. 물론 이 세 단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노래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즉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 사용될 찬양의 풍부함을 나타내고 있는 세가지 유형의 표현인 것이다. 

⑥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신령한 노래’(ODAIS PNEUMATIKAIS)라는 노래의 특성을 눈여겨보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페뉴마티카이스라는 말이 신약에서 성령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이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뜻하고 있는 단어인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들이 작사한 것이나 영적인 분위기에서 주어진 것들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F B Meyer의 지적대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 즉 ‘theopneustos'을 의미한다(엡 5:19절 참고). 이 문맥에서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한다. 마치 고린도 전서 2:13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영감된 말씀과 성령에 의한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페뉴마티코스’라는 말이 시나 찬미라는 말에는 붙지 아니하고 ‘오다이스’(노래)라는 단어에만 붙었는가? 이다. 이 질문에 합당한 답변은 이것이다. ‘페뉴마티카이스’는 모든 세 여격 명사에 해당되나 그 여격 명사의 성(여성명사)은 그 명사와 제일 가까운 명사의 성에 끌리는데 기인한 것이다.

골로새서와 같이 접속사를 빼고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신령한 노래는 시와 찬미와 같은 유형에 속한 형태의 노래로 보는 해석이다. 이것이 마이어 목사의 견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시와 찬미와 노래들은 다 신령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영감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신령한 이라는 단어가 노래에만 해당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이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 혹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와 찬미는 신령한 것이 아니라도 괜찮으며 오직 노래만 신령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와 찬미도 다 하나님의 감동을 주어진 성경의 시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시와 찬미를 한 종류로 신령한 노래를 다른 종류로 분류해서 설명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도 찬미도 영감된 것이며 노래도 영감된 것인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신령한 것으로 특징 지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영감되지 않는 노래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둘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다 성령에 의해 감동된 것들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있어서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셋째, 시편이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준다. 에베소서 5:19절과 골로새서 3:16절은 바로 시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존 머레이 교수의 주장은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찬양해야 함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으며 영감되지 않은 것으로는 사용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무엇을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 짓는 것은 반드시 성경에 한정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혁교회 예배에 있어서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직접 찬양할 수 없다는 문제점

그러나 일반 찬송을 부르자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및 부활하심을 다른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유럽의 다른 개혁교회들이 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영감된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약 성경에 나오는 노래들과 음율적인 표현들을 찬양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음악의 문제는 성령에 의해서 작사된 것으로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실지로 구약의 시편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명백하게 증거하셨다(누가복음 24장).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은 성경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시 45:6-히 1:8, 시 110:1-마 22:42-45 비교), 그의 영원한 아들되심(시 2:7-히 1:5 비교), 그의 성육신(시 8:5-히 2:9, 40:7-히 10:5-7 비교), 그의 중보자적인 직임(선지자직: 시 40:9-10, 시 22:22-히 2:12 비교, 제사장직: 시 110:4-히 7:17 비교, 왕직: 시 45:6-히 1:8 비교, 시 110:1-마 22:42-45, 히 1:13 비교), 그의 배반당하심(시 41:9-요 13:18 비교), 그의 고민하심(시 22:2-히 5:7 비교), 그의 심문받으심(시 35:11-마 26:59,60 비교), 그의 거절당하심(시 22:60, 마 27:21-23, 눅 23:18-23 비교), 그의 십자가 죽으심(시 22편, 49편), 그의 장사지내심과 부활하심(시 14:9-11, 행 2:25-31 비교), 그의 승천하심(시 47:5- 행 1:11, 살전 4:16 비교, 시 48:18-엡 4:8-10 비교, 시 24:7-10과 계 5:6-14 비교) 및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시 50:3-4, 98:6,9-마 24:31, 고전 15:52 비교)에 대하여 충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주장처럼 예배음악이 선교적인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조지 목사 역시 그의 글에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이야말로 가르침과 권면을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시편과 견줄 수 없는 것임을 피력하였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성경의 권위만큼 강력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음악이 이런 교육적이고 선교적인 유익이 있다고 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시편만큼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그 고백이 노래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 찬양의 고백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편에 담긴 내용들이 심지어 원수들을 심판해달라는 개인적 탄원까지도(예를 들면, 시 55, 59, 69, 79, 109, 137편 등) 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시편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감정 표현과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작사한 것들이 참으로 뛰어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마치 거듭난 성도가 먹고 마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동일한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자가 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히브리서 13:15절에 나오는 “찬미의 제사”(thusian ainesews)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호 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아이노스’(ainos)는 신약에서 6번 사용되었는데(마 21:16, 눅 18:43을 포함)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 행위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눅 2:20, 행 3:8), 혹은 제자들이 함께(눅 19:37), 또는 믿음의 공동체가 더불어(계 19:5)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반드시 노래만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노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보다 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그럴지라도 우리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공 예배의 찬양으로서 이해할 때, 앞에서 언급한 존 머레이 교수의 여러 헬라어 단어들과 관련하여 예배 음악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주로 하나님의 영감된 시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볼 때, 제사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집전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찬미의 제사 역시 사람들의 고안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노래되어져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야말로 아름다운 찬양임을 말할 수 있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당장 징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찬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우리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으시고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이렇게 단언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 ‘테힐라티’(Tehilati, my praises)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을 가리키는 테힐림에서 나온 단어로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적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백성이 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찬양은 그들이 지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 말과 가장 가까운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E. J. Young박사가 이사야서 주석을 쓰면서 언급한 것과 같이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여기서 대다수의 영어 성경은 우리말에 덕으로 번역된 ‘아레아테스’를 하나님의 찬송들로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하신 일들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택함과 구속함의 목적 역시 주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서 이루어져야할 특별한 것이라면,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음악에 있어서 하나님의 찬송 즉 시편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가는 말 

지금 한국의 개혁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들은 성 삼위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가사들과 적어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래들이 쉽게 불려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지로 성도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회개와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총회는 속히 시편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교회 예배음악을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한 출판사(기독지혜사)가 시편 찬송가집을 출판하였고 필자의 교회에서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편가를 번역하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고신측 계통의 군소 교단에 속해 있는 한 교회에서 시편집을 편찬하여 사용하고 있는 등 점차 시편을 불러야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범교단적으로 우리 장로교의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 예배음악의 특색을 살리는 일에 우리 교단만이라도 힘을 기울여줄 것을 간곡히 사모하는 마음에서 본 논고를 준비하였다. 시편편찬 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음악인들에게만 일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자들과 경건한 음악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한국교회에서도 시편이 유일한 찬양곡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더욱이 우리 교단의 헌법에 실려 있는 예배 모범에서도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다루면서 시편을 부르라고 권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찬송집을 편찬하지 않는 것은 총회의 직무 유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시편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온 교회는 이 문제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중 성 삼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들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가사들은 바르게 고쳐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 개혁교회 특색을 살리는 주된 일이라고 본다.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예배를 통해서 정립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본 노고를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