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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개혁교회의 절기 이해

개혁교회의 절기 이해 

K. Deddens(캐나다 개혁신학교)

□ 특별히 안식의 날에□ 
이 글은 캐나다 개혁 교회의 신학교 교수인 K. Deddens 쓴 "Fulfil Your Ministry"라는 책의 Ⅳ "I WILL WORSHIP . . ."에 나오는 첫 번째 소논문입니다. 이 책은 K. Deddens 교수가 개혁주의 잡지들에 기고한 22개의 소논문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이 소논문에 나오는 모든 각주는 역자의 것입니다. 이 소논문은 본래 Clarion이라는 캐나다 개혁교회에서 나오는 잡지에 Vol. 35, No. 10, 11, and 12 (1986)로 세 번으로 나뉘어 실린 것입니다. 원문을 읽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 사이트로 들어가서 보세요. 
http://www.spindleworks.com/library/deddens/sabbath.htm
○ 주의 날 
우리 모두는 이 소논문의 제목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38주일에서 인용한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제 38주일에서 "제 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첫째로. . . 특별히 안식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 대답 속에 공적 예배와 관련된 네 요소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답 속에 공적 예배의 특별한 순서인 말씀-성례-기도-봉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이 순서가 변한다 할지라도, 이 네 요소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안식의 문제를 생각합시다. 이제 우리가 "특별히 안식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한다"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이 표현은 내가 일요일에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안식의 날은 공적 예배의 날입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 안식의 날에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배를 드리는 다른 날이 많이 있습니까? 만약 예배를 드리는 다른 날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날이 있습니까? 그 많은 날을 다 준수하려고 해야 합니까? 기독교인의 절기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찬송가의 "찬송곡과 추가곡"의 약 30%가 기독교인의 절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이 절기와 연관된 찬송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교회정치 52항에서 "당회는 매주일 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 요약된 하나님의 말씀 교리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한 규칙으로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공적 예배를 드리는 다른 날이 있는가? 
그러므로 일요일에 두 번 공적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예배를 드려야 하는 다른 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교회 정치 53항에서 이른바 기념의 날에 대해 나온 것을 봅니다. 이 53항에 보시면, "해마다 교회는 당회에 의해서 결정된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부어주심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53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의 사실을 주의 날 외에 어떤 특별한 날에 기념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실들은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당회에 의해서 결정되어 지는 방법으로"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이른바 기도의 날에 관하여 말하는 54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전쟁의 시기나 일반적인 재앙이나 교회 전체가 느끼는 다른 큰 고통이 있을 때, 기도의 날이 총회에 의해서 그 목적을 위하여 지명된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다"고 합니다. (Burlington-West 교회가 이 목적을 위하여 지명된 교회들 중에 하나이고 다른 교회는 Edmonton의 Providence 교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흥미롭다.). 또한 이 54항에서도 어떤 특별한 날이 주의 날 외에 이 목적을 위하여 선택되었다는 것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정치 65항에서 장례식도 교회적인 일이 아니라 가족적인 일이므로 가족적인 일로 치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평일에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식은 어떻게 됩니까? 교회정치 63항에 따르면,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즉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사적인 의식일 수도 있고 공적 예배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볼 때, 결론은 신앙고백(예를 들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도, 교회정치에서도 평일에 많은 예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공적 예배의 날인 안식의 날로 주의 날을 축하하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절기에 대해서 성경에서 무엇이라 하는가?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앙고백과 교회정치가 평일에 많은 예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성경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정말로 성경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날과 특별한 예배에 관해서 거의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특별한 날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이런 날과 시는 우리를 위한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벨직 신앙고백 25항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이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거기 25항을 보시면, "모든 그림자가 성취되어, 이 그림자를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신약에서,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유월절이 기독교회를 위한 특별한 날로 그 날을 기념하는 문맥 내에 있지 않고 (유월절 이후에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시려고 의도하셨다고)언급된 시간에 관한 언급으로서만 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또한 신약에서 오순절 날에 대한 이런 저런 기사들을 읽습니다(행20:16, 고전16:8). 거기에 행20장 16절을 보시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고 합니다. 저는 칼빈이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한 것에 동의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서둘러서 갈 강력하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는 그 날의 거룩함이 자신에게 많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절기의 날을 위하여 도처에서 이방인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절기의 날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인 고전 16장 8절 이하를 보시면, "그러나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오직 시간 계획과만 연관하여서 오순절을 언급하고 그는 이 같은 고전 16장에서 예배와 관련된 특별한 날로서 일 주일의 첫 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바울은 공적 예배의 한 가지 요소 곧 연보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고전 16장 2절입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그래서 일주일의 첫 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이 일주일의 첫 날이 특별한 이름을 받은 것을 읽습니다. 요한은 기록합니다(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였다." 주의 날은 일주일의 첫날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특별한 날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신약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도다!"라고 책망하는 것을 읽습니다(갈4:10). 바울은 이 구절에서 모세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목록을 제시합니다. 즉 날(안식일, 금식일, 절기일, 새로운 달), 달(특별히 바벨론 포로 기간동안 지켜졌다, 사66:23),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봉헌의 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매 7년마다 안식년과 50년째 해인 희년).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한 자기 주석에서 질문하기를, "바울이 어떤 종류의 것을 지킨다고 비난하였는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은 이에 대해 대답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수적인 종교행사인 것처럼 양심을 억압하며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 14장 5절이하에서 말한 대로 '이 날과 저 날을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절기는 구약에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 이후에 어떤 사람이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다시 칼빈을 인용합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그들은 여러 날들 중에서 한 날을 구별, 즉 분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날들 중에서 특정한 날들을 분리시켜 종교적인 찬송을 드리는 날로 구분하기를 좋아했으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런 구분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도 몇 몇 특별한 날들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그 날들이 거룩한 날로 성별되어졌고 또 그 날에 일하는 것이 합당치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날을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그 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통치와 질서를 위한 것이다"고 합니다. 칼빈은 통치를 위한 결정을 존중합니다. 저는 우리의 요점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오직 기독교인의 절기의 날 곧 주의 날만 축하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 합니다. 
○절기의 폐지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이른 아침과 저녁에 교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절기들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습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습니다. Farel과 Vinet도 어떤 인간적인 제도를 인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주의 날만을 존중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개혁에 있어서도,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총회는 성탄절 전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설교하고, 부활절 주일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해서 설교하고, 오순절 주일에는 성령 부으심과 관련하여 설교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기들은 주의 날보다 더 위대한 절기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총회적인 결정은 시민 정부에 의해서 올바르게 인정되지 않았고, 모든 지방에서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은 몇 몇 절기들을 유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1578년 총회에서는 "사람들이 절기의 날에 놀고 지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부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이 절기의 날에 설교가 행해져야 한다고 결정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비록 마지못해서) 정해진 두 성탄절과 부활절과 오순절과 일부 지방에서의 신년의 날과 승천절과 언급되지 아니한 때때로의 일부 다른 절기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 이외에 특별한 기독교인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에 대항하여 많은 교회적인 저항들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Koopmans, 1941:22ff,). 
○가장 오래된 절기: 부활절 
기독교회의 초기에는 교회가 오직 주의 날만 축하했습니다. 교회는 주의 날을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주간의 첫 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경축하는 날이고 성도들의 모임으로 축하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아주 이른 시기부터 확정되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이 오순절 시대의 초기에 곧바로 폐지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안식일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고 주의 날로 대체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익나티우스는 기록하기를, "2세기 초에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로마에서 공적 예배의 날로서 '주의 날'이란 용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 이외에, 매해 초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죽은 후에 일세기와 2세기 중반으로 들어가는 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고대 기독교인 저자인 터툴리안이 살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이미 한 날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파스카(Pascha)"라는 용어로 부활절 절기의 기간과 세례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초기에 행해진 사르디스 교회의 감독 멜리토가 한 부활절 설교가 보존되어져 있습니다. 멜리토는 2세기 후반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멜리토의 부활절 설교를 읽어보면, 그 시대에 부활절을 기념하는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부활절과 분리하여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소위 말하는 성 금요일이 기념되어서는 안되고 고난과 죽음과 부활 전체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구원사역이 이른바 파스카란 말로 요약됩니다.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주의 날외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년마다 축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년 달력과 연관하여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 날짜는 유대인 달력에 따라면 니산월 14일째입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에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날짜에 부활절을 지키는 것을 반대하고, 그 날짜에서 더 연기하여 부활절을 축하하는 날짜를 정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을 축하하는 날은 초승달이 뜰때에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결정이 여전히 실행되고 있습니다. 즉 봄의 첫번째 만월 직후에 첫째 주의 날에 부활절을 축하합니다. 
○ 4세기의 예루살렘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교회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단순함이 풍성함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의 대조적인 태도가 하나의 조화로 바뀌었습니다. 이교도의 신비적 종교들, 신비적 견해로부터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가 인정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성직의 중심들이 생겼고 예배문제와 연관된 고려할만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폐회한 후에, 콘스탄틴이 예루살렘과 자기와 자기 어머니 헬레나가 건축한 교회 건물을 방문했습니다. 이 방문은 4세기에 예루살렘 교회의 예식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거룩한 도시로 헬레나가 순례한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후 381-384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에게리아(Egeria)라고 불리는 북스폐인의 수녀가 있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 여행기를 기록하여 감독 시릴의 인도로 드려진 예루살렘 예배에 대한 많은 상세한 부분을 제시했습니다. 에게리아는 되풀이 해서 "예루살렘에서 드린 예배에서 부른 찬송과 응답송과 성경봉독은 '날짜와 장소에 따른 것'이다"고 기록했습니다. 에게리아는 계속 말합니다. 특별한 주의가 일요일 곧 부활절 전 일요일에 주어 졌습니다. 이 날 감독이 전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그 주변에 둘러서 있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특별한 주의가 많은 것 곧 부활절 전 주일과 부활절 바로 그 주일과 같은 이른바 위대한 주일에 드리는 많은 예배에 주어져 있습니다. 감독은 또한 그리스도의 위치이고,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예배를 인도합니다. 모든 예배들은 지형상에 따라 조건지워집니다. 감독이 예배를 인도한 그 장소는 환경과 시간의 요청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선택된 장소입니다. 구원이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성취되었을 때 일어난 것을 이런 극적인 모방(dramatic repetition)으로 모두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주 드리는 예배는 성도들을 매우 지치게 만들어서, 한 거룩한 장소로부터 다른 거룩한 장소로 그리고 한 거룩한 예배로부터 다른 거룩한 예배로 감독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한 주간의 내내 극도로 피곤하게 됩니다. 에게리아는 성금요일의 이른 아침의 정경을 기록했습니다. "감독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연설을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긴 밤 시간 동안 노동을 했고 이 온 종일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사람들에게 더 큰 상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할 수 있는데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말하기를, '이제 다시 여러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잠시 앉아있다가 약 8시가 되면 여기로 돌아오도록 준비하고, 지금부터 거의 정오까지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거룩한 나무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해 유익이 되는 바가 있으리라 믿는다. 정오부터 다시 우리는 여기에 모여야만 한다. 곧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밤까지 전적으로 성경읽기와 기도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특별한 날들과 특별한 예배들로 부활절 전체 순서가 진행됩니다. 로마 교회는 십자가 주변을 행진하고 십자가를 숭배하는 영광의 일요일을 예루살렘에서 하는 그대로 배웠습니다. 
에게리나는 "그리스도의 죽음후에 4세기 이상이 지나서 예루살렘 주변에서 십자가로 사용했던 나무를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에게리나는 또한 "그 나무가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로 사용했던 나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에 에게리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감독의 의자가 십자가 뒤에 골고다에 놓여졌고 지금 그곳에 서 있다. 감독은 그 의자에 앉았고 감독 앞에 세마포 천으로 덮힌 탁자가 있다. 집사들이 그 탁자 주변에 원을 그리며 둘러서 있고 금으로 장식된 작은 은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안에 거룩한 십자가 나무가 들어 있다. 그 상자를 열어서 집어낸 십자가와 표제의 두 나무가 탁자위에 놓여 진다. 그 나무가 탁자위에 있는 동안, 감독은 앉아서 자기 손으로 그 거룩한 나무의 끝을 잡고 집사들은 감독 주변에 둘러서서 지켜 본다. 여기서 집사들이 이 나무를 그렇게 둘러서서 지키는 이유가 있다. 모든 사람들 곧 신자와 세례지원자가 한 사람 한 사람씩 그 탁자앞으로 나와서 절을 하고 그 십자가에 입맞추고 이동한다. 나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누군가가(나는 누군지 모른다) 이 거룩한 십자가에 흠집을 내거나 일부를 훔쳐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제 누군가가 다시 이 거룩한 십자가를 훔쳐가지 못하게 하려고 집사들이 이 십자가를 지켰다. 그래서 먼저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씩 지나가면서 이마를 조아려 절을 하고 다음으로 눈으로 십자가와 그 표제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 입맞추면서 누구도 그 십자가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십자가에 입맞추고 지나갔다. . . ." 
전체 부활절 순서는 에게리나가 기록한 이 예루살렘 모형을 묘사한 것에 따라 발전시켜서 계획했습니다. 
4세기후에 교회 달력에서는 점진적으로 절기들과 축제일과 성인의 날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8세기에는 일년 달력에 106일이 특별한 날과 절기로 표시되었습니다. 16세기 곧 중세의 말에는 오직 4일만이 그때까지 절기나 특별한 날이 아닌 날로 비어있었습니다. . . . 
결국 기독교인들은 일년내내 거의 날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특별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적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성탄절 
이렇게 예루살렘에서의 예배 형태가 로마로 전해져서 발전이 있었고, 주의 날 하루를 절기로서 특별한 예배를 드리던 것이 많은 날, 거의 일년 모든 날에 절기로 특별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주기가 있습니다. 즉 부활절전(금식시간), 다음으로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의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탄절 주기입니다. 
성탄절을 지키는 날에 있어서, 동방교회는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고 예수 공현 축일(Epiphany)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서방교회는 약 336년에, "아니오, 성탄절은 12월 25일이 틀림없소"라고 말한 이래로 이 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킵니다. 
그러나 두 날짜가 다 이교도에서 시발된 것입니다. 동방에서 땅위에 하나님의 출현일인 예수 공현 축일은 기독교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역할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문제입니다. 예수 공현 축일이 점점 더 그리스도의 출현의 날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 받으심의 날이 되어갔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사람들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 날은 또한 원래 이교도의 축제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날짜를 알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추측을 했습니다. 3월 25일은 로마에서 봄이 시작되는 날이고 세상 창조의 날짜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린 날임에 틀림없다고 논합니다. 다음 결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이 동일한 날 즉 3월 25일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난 날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30번째 탄생일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새로운 시작, 곧 출발이 수태를 알린 날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결론은 마리아가 9달 동안의 임신기간을 거쳐서 12월 25일에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추측은 믿음을 수 없는 공상일뿐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결국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하게 되었습니까? 만일 우리가 마음속에 3-4세기에 로마에서 12월25일이 이른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날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지킨 이유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태양신을 경배하는 종교가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방에서도 있었고, 로마제국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우리는 또한 신비적 종교의 영향을 알아야 하고, 거기에는 로마군인들이 포함되어져 있고, 예를 들면 페르시아에서와 같습니다. 일종의 태양 종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로 온화한 따뜻함과 맹렬하게 뜨거운 능력으로 땅위에 높은 곳에 있으나 땅위에서 능력 있는 태양은 모든 것을 아시나 무엇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 신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 태양은 어두움의 정복자라고 불리었습니다. 태양의 승리는 특별히 변화하는 날인 겨울 계절의 한 날에 기념되었습니다. 태양은 항상 일주일의 진행과정속에서 감소되는 듯하다가 다시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면 태양의 능력이 다시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로마에서 약336년에 그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을 기독교 절기로 정하게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13세기에 시리아 본문에서 빛이 비추어집니다. 우리가 그 본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부들이 1월 6일이던 축일을 12월 25일로 바꾼 이유는 이런 것이다. 이방인들이 12월 25일에 태양신의 생일을 축하하여 그 날에 밝은 등불을 비추었다. 이방들인들은 또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즐거움과 볼거리가 가득한 이 날에 참여하게 했다. 교회의 교사들은 기독교인들이 이 축제에 유혹을 당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경계하여서 이 12월 25일을 앞으로 진정한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게 했고 1월 6일은 주현절이 되게 했다." 
여기서 이방 축제와 경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게 되었다는 진실을 명백히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 어떤 날인지 알지 못하고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께서도 이 날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셨기에 만약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성경에서 언급되어서야 할텐데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도 진실입니다. 
어쨋든,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 아닙니다. 내가 12년전에 베들레헴에 갔을 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하는 12월 25일 그 시간에 결코 양들이 들판에 있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12월달부터 1월말까지 양들은 항상 우리 안에서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325년 이후에, 자유가 기독교에 주어졌을 때, 기독교가 중요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교회와 연합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교회가 세상화되어지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방적 방식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기독교의 보호아래 온갖 종류의 관습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온갖 종류의 많은 여신들을 숭배하던 것을 이제 이른바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동일한 빛 가운데서 우리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는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적의 태양을 숭배하는 축일로 12월 25일을 기념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금 이 12월 25일을 이른바 의로운 태양의 탄생일로 지키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그래서 이제 12월 25일로 지키는 성탄절은 기독교인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탄절 날짜가 이교도에게서 가져온 것이고 적어도 이방인의 날짜에 성탄절을 맞춘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때때로 12월 25일을 이른바 최고의 날로 생각하고 성탄절을 가장 거룩한 절기라고 생각할 때 이런 역사적인 면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절기는 폐지되었는가? 
우리는 지금 기독교의 모든 절기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계를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별히 사회적 동기가 있을 때, 그 가운데서 역사적 요소가 또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침착해져야 할 것을 호소할 뿐입니다. 많은 절기들이 주의 날과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교회헌법의 새로운 판에도 보면, 정당한 침착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평일날 드리는 온갖 종류의 예배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우리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런던의 피난민 성도들이 매주일 드렸던 예배가 예언적 특징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 매주일 드리는 예배는 성경의 특별한 부분을 가르치고 토론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지금 성경연구를 위해서 주중에도 기독교인 모임을 가집니다. 나는 그 모임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실제적이고 참된 절기인 주의 날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일요일에 공적 예배를 쉽게 무시하고 이른바 기독교인의 절기들에 드리는 예배를 빼먹기는 싫어하고 심지어 절기의 날을 점점 더 늘려갈려고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많은 성도들이 갖가지 의미를 가진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어 지키려고 합니다. 이런 환경가운데서도 우리는 절대 침착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절기적인 기념으로서 주의 만찬을 생각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주의 만찬 속에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포괄적으로 요약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의 목적,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심이 주의 만찬 속에 개관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송구영신, 성금요일, 승천일,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특별한 날을 기념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의 만찬을 규칙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기념해야 한다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만찬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미주
[1] 개혁주의 찬송가는 주로 시편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찬송(Hymns)과 추가곡(Paraphrases)이 포함되어서 있습니다.
[2] 실제로 편집인이 우리교단(고신)에 속한 대학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는데 그 교회에서는 주일 외에 다른 날 그리스도의 구원 사실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탄절에도 예배로 모이지 않았고 주일날 성탄절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송구영신 예배와 같은 그런 예배는 아예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부족한 점들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저에게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3] 아마도 캐나다 개혁교회에서 실제 이 조항이 시행된 경우의 예를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이 소논문에서 festival을 절기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절기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가 season입니다.
[5] 원문에는 times or seasons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한글 개역 성경에 따라 절기로 번역합니다.
[6] 원문에는 한글개역 성경의 “몸”에 해당되는 단어가 substance로 “몸”이 아니라 “실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고 이해도 잘 될 것입니다.
[7] 참고. 이 말씀은 골2:16,17입니다.
[8] 우리 한국 교회는 이 보다 더 타락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주의 날 이외의 날에 성탄절 예배, 송구영신 예배, 정사예배, 개업예배, 이사예배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예배들이 아무런 교회적인 저항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9] 참고로 로마교회는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해마다 춘분 뒤 만월 직후의 첫 삽밭날에 조상들의 애굽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고 보고 이에 따라서 부활절을 파스카 축제로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