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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종교개혁사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1. 배경
A. 교회사적 배경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격변(1555-1648)
나 라         내 용
독일          루터교와 카톨릭의 투쟁
루터교가    카톨릭 교회와 교리논쟁을 접고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 체결
프랑스        카톨릭과 위그노 전쟁(1562-1598)
낭트칙령 발표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의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09)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의 논쟁
영국           청교도 운동
유럽            1618년 이후 ‘30년 전쟁’이 계속 지속되나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체결
○결과: 칼빈주의자들이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얻음


B. 연속성과 불연속성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에 의한 교리 신학의 연구 결과로 생겨났다. '정통‘이란 ’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적 교리 다른 첨가를 배제하였다. 교회의 교훈과 실천에서 비성서적인 교리의 제거를 통해 기독교의 교훈과 삶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신앙과 이성에서 이성의 독자성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 이전의 로마 카톨릭 칭의론에서 인간의 공로개념을 배제함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세웠다. 따라서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정통주의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 사고방식을 신학에 수용하였다. 그 결과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다시 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한 학교에서 만들어 낸 신학을 수립하였다. 13세기 교사들의 신학 곧 학교에서 만들어 낸 신학을 '스콜라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체계신학(조직신학)은 스콜라주의를 끌어들였다. 이 스콜라주의는 학교방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신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언어학적, 철학적, 논리적, 전통적 사상을 신학에 철저하게 사용하여 신학을 체계화하였다. 그러므로 개신교 정통주의를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정통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하였고 교회사에서 교리적 정통을 승계시킬 수 있었으나 종교개혁의 신학과 구별되면서, 13~15세기 신학에 의존함으로써 체계적이고 스콜라주의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통주의는 교회의 신학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법 중에 하나의 본보기로 보아야 한다. 


○결론
연속성   종교개혁을 유지하는 뼈대
불연속성  종교개혁의 신학(이성의 독자성 반대)과는 다른 스콜라주의주의적인(이성의 독자성 인정) 형태의 신학으로 발전


C. ‘개혁 신학’과 ‘칼빈주의’의 용어 정의
개혁파 정통주의란 말과 함께 쓰이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겠다. 개혁파 신학은 칼빈 이전에 발전하였다. 칼빈 이전부터와 칼빈이 살아 있을 때 여러 신학자들이 개혁파 전통 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개혁파’라고 불렀다. 그런데 ‘개혁파’라는 말의 좀 더 좁고 정확한 의미로는 존 칼빈, 존 녹스, 츠빙글리와 그 외의 사람들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칼빈주의’란 용어는 루터파 신학자 요아힘 베스트팔이 1552년에 스위스 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성찬론을 비판하는 논쟁적인 책자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루터파에서 급속히 확산되어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독일 지역 내에 칼빈의 신학이 급속히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 ‘칼빈주의’란 용어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후에 네덜란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으로 확산되었다. ‘칼빈주의’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신학이며,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를 의미한다. 


○결론
개혁파 신학    존 칼빈, 존 녹스, 츠빙글리와 그 외 사람들의 신학 영향을 받은 신학과 교회
칼빈주의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2. 정통주의
A. 정통성의 확립
개혁교회 정통주의는 칼빈주의 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의 죽음(1564년) 이후부터 18세기 초까지의 칼빈주의 신학을 의미한다. 칼빈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여러 가지 견해를 경직된 교리체계로 변경시켰고, 본래의 살아 있는 믿음을 메마른 율법주의로 변경시켰으며, 계시신학을 구손 존재론(Heilsontologie)으로 변경시켰다. 거기에다 정통주의는 종합적이며 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정통주의 신학은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현상을 불가피한 제도화 과정 때문이었다.
개혁교회 정통주의 세대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엄청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16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교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모든 국가의 교회는 보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계속 공고하게 되어야 했다. 그 시대의 교회들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그 시대의 교회는 종교개혁의 새로운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신앙고백, 교리문답, 예배의식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육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새로운 신앙을 계속적으로 확립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개혁의 새로운 신앙은 성취되어야만 했다. 이것을 우해 그들은 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를 기르기 위해서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 아카데미는 개신교 학교 신학(스콜라신학)의 요람이 되었다. 신학교수들은 새로운 교회의 조직을 구상할 뿐만 아니라 향도(嚮導) 기능을 항상 맡아야 했다. 더욱이 신학교수들은 교의학(敎義學)을 완성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로마 카톨릭, 이신론 진영의 공격에 대항해야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을 변호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주의 내부에서 신자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신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아미로(Amyraut)의 이념과 요하네스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해야 하였으며 미묘하게 증대되는 종파 간의 스콜을 문헌으로 완성하였다. 그러한 문헌 완성을 위하여 그 신학은 공식적인 논리의 섬세함을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신학은 합리주의적이며 스콜라신학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비기독교적 철학에 접근해야 했다(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접근).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 철학을 해석하였다.
정통주의 시대는 순수한 교리의 엄수와 십계명의 준수를 위하여 그리고 시민들의 신앙의 확신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국가와 교회가 사법권을 공동으로 행사하였다. 신앙 고백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가 사법적으로 그 신앙고백의 가치를 보호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사교를 믿는 자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누가 배교자이며 불확실한 신학적 호기심을 갖고 있는지를 검열하였다. 이때 검열의 책임은 신학교수에게 주어졌다. 공적인 삶, 교육 또는 개인의 경건은 정통주의의 규범을 통하여 조정 받게 되었다. 모든 이론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 따랐다. 국가적인 당국과 신학자들이 매일 그 이론을 실천하도록 책임을 맡았다. 


B. 보편성
상대적으로 루터교 정통주의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동질적인 지역에 결속되어 있었지만, 개혁정통주의는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게 형성된 여러 나라에서 적으로 여겨졌는데, 프랑스의 경우 종교개혁은 더욱 그러하였다. 칼빈주의는 1560년부터 제3의 교파 세력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제네바로부터 프랑스로, 네덜란드로, 그리고 독일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로, 헝가리로, 루마니아로, 폴란드로 확장되었다. 또한 성찬에 대한 「취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 1549) 이후 스위스의 여러 주(州)로 확장되었다.
개혁정통주의의 흩어져 있는 구조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확실한 일치를 보여 준다. 그것은 칼빈 또는 베자의 생도들이 아카데미의 첫 번째 교수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이 개혁교회 내부에 아주 밀접한 정신적인 결합으로 함께 하였으며, ‘올바른 전통’의 순수성을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교회가 유럽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 교회들은 개혁신학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3. 개혁교회 정통주의
A. 정통주의의 시대별 분류
시대              내 용
초기              칼빈의 죽음(1564)부터 도르트 회의(1618-1619)
절정             도르트 회의에서부터 1670~1680년까지이다. 그것은 「스위스 교회 일치신조」(1675)가 나타난 해이고 정통주의 절정시대의 중요한 대표자인 마레시우스(Maresius, 1673), 보에티우스(Voetius, 1676)와 프랑소아 튜레티니(François Turretini, 1687)가 죽은 해
후기              1720~1730년 사이인데, 베네딕트 픽테트(Benedict Pictet)의 죽음(1724)과 제네바에서 도르트 회의의 신앙고백(Canones)의 폐지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의 출현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출현한 합리주의 또는 19세기 자유 주의 신학의 출현으로 크게 도전을 받았다.


B. 초기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초기 개혁교회 정통주의의 발전은 칼빈이 제네바에 세운 아카데미와 밀접하다. 칼빈은 자신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를 제네바 아카데미에 초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칼빈이 죽은 다음에 제네바와 스위스 개혁파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개혁정통주의의 아버지였으며 파리, 오를레앙, 부르쥐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1548년 제네바, 튀빙겐, 로잔을 방문함으로써 칼빈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였다. 그는 교수로 로잔에서 헬라어를 가르쳤고, 1558년 개혁신학의 중심지인 제네바로 갔다. 그는 「기독 신앙고백」(1558), 「기독교의 질문과 응답의 소책자」(1570, 2부 1576)를 저술하였다.
그는 개혁 개신교주의의 표준저술인 칼빈의 「기독교 강요」(제2판인 1539년 판과 제4판인 1559년 판)에 근거하여 강의하였다. 그는 이중예정론을 연구하였다. 한편 그는 그의 「예장론의 도식」에서 칼빈에게 이미 나타나는 인과관계의 개념을 체계화 하였다. 그리고 자기 저작의 특징적인 제목을 「기독교 전체 요약」(1555)이라 하였다. 베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실현에서 하나님의 뜻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제1원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은 유기(遺棄)에서 그의 의(義)가 나타나는 것처럼 선택에서 그의 자비가 나타난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한편으로는 칭의, 부르심과 성화를 통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강팍함으로 신자들에게 허락되는 제2의 원인을 반대한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실천적 삼단논법을 주장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 선행은 전혀 구원을 보장하지 않지만 증거할 뿐이다. 베자는 순수한 자유가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확인하고, 동시에 신자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확신시키도록 노력한다.
베자는 칼빈의 견해를 유지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칼빈의 견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는 그의 예정론을 하나님의 지식, 의지,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베자는 제한 속죄를 주장하였다. 물론 제한 속죄는 칼빈의 전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이론적 결론이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그러한 이론적 추론을 하지 않았다.
베자는 칼빈의 신학을 명료하게, 일관성 있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료성과 일관성 때문에 그의 선배 칼빈에게서 볼 수 있는 신비감이나 신선감은 없어졌다. 베자는 성경을 일련의 명제로, 동등하게 영감 받은 것으로 보며,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성경의 일련의 명제는 칼빈주의 신학의 체계에 자리 잡았다. 칼빈은 명료하고 빈틈없는 이론을 언제나 거부하였는데, 오히려 베자는 그러한 이론을 부담 없이 칼빈주의적 체계에 끌어들였다.
베자는 또한 칼빈주의와 루터교 사이의 논쟁의 중심이 되는 성찬 논쟁을 가져왔다. 논쟁의 근거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 방법과 방식에 있었다.
이 성찬 논쟁은 승천 후의 기독론의 문제인 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즙에 현존할 수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의 편재가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칼빈과 베자,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을 반박하였다. 이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통합을 가르쳤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즙으로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적인 것과 하나님의 뜻이 모순 없이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성찬을, 인간적인 실체의 우연을 신적인 실체의 우연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즉 칼빈주의자들을 루터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인 신성과 인성이 교류한다고 믿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않았다. 베자, 다내우스, 잔키, 우르시누스, 브렌즈, 켐니쯔, 셀네커, 안드레아 같은 사람들은 루터교의 경우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손상을 받는 것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은 루터교인들을 단성론자들이라고 정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현설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들은 칼빈의 진정한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칼빈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로 낮아지고 인간 본성을 입으셨지만, 그의 영광과 존귀하심이 조금도 포기되지 않았다.
이 교리는 초월적 칼빈주의(Extra-calvinisticum)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의 은사를 교통하기 위하여 성물(떡과 포도즙)의 물리적 조건을 고집한 루터교에 반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신성과 인성의 모든 혼합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찬식의 성물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이해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루터교도들에 의한 성례숭배 및 경건하지 않은 식사(manducatio impiorum)에 영적인 식사(mamducatio spiritualis)로 대립시켰다. 신령한 식사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 것이고,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내우스(Lambertus Danaeus, 1535-1595)는 칼빈주의의 교리에 학교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신학적인 내용을 구성하기 위하여 변증적 방법을 붙잡았고, 수사학의 방법을 의지하였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공공연하게 형이상의 성물로 도움을 받았다.
16세기 말에 제네바는 개혁정통주의의 유일한 중심은 아니었다. 로잔의 아카데미에서 마틴 부처는 하나의 교과서인 그의 책 「신학강요」(神學綱要,1602)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바젤에서는 1596년 이래 폴란스도르프의 폴라누스가 활동하였다. 그는 대단히 광범위한 저술에서 논리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하였다. 더욱이 그는 라미즘의 형성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도식적 형식으로 신학을 설명하였다. 그는 제자 볼렙(1586-1629)은 유명한 교과서인 「기독 그신학의 요약」을 저술하였다. 또한 1626년에 유명한 총괄서 「구원의 사슬」(하나님은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는 공로를 얻고, 말씀은 약속하시고, 성례는 인치고, 신앙은 받아들이고, 입은 고백하고, 행위는 증거한다)을 출판하였다.


C. 스위스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1549년에 칼빈과 불링거가 동의한 「취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 1549 : "the Zurich Agreement")는 츠빙글리주의와 칼빈주의를 하나의 개혁 전통으로 묶었다. 그러나 이 신조는 스위스 안에 있는 개혁교회의 지류들을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서는 되지 못하였다. 스위스 안에 있는 개혁교회의 지류들을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서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이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츠빙글리주의자인 불링거가 완성하였다. 불링거는 1561년에 이 신앙고백의 본문을 기초하였으나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필라티네이트(Palatinate) 영주국의 선제후(選帝侯) 프레드릭 3세가 루터파의 신앙고백과 공통점을 갖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불링거에게 작성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불링거는 수년 전에 작성해 둔 문서를 선제후에게 보내었고,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불링거는 그 문서를 제네바와 베른에 보내어 그 도시의 개혁교회의 평가와 반응을 기대하였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서문은 다시 쓰이고 약간의 수정을 거친 다음 스위스에 이는 대부분의 개혁교회가 받아들이고 서명하였다(1566). 예외적으로 노이샤텔(Neuchatel)에서는 2년 뒤에 서명하였고, 바젤은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서명하였다. 글라스고에 모인 스코틀랜드대회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에 서명하였다. 그 이듬해에 헝가리 개혁교회가 서명하였다. 1570년에 선포된 「폴란드 신앙고백」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개정판에 불과하다. 프랑스 개혁파는 이미 고유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571년 라 로셀(La Roschelle)대회에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개혁정통주의가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개혁파 문서이다. 성찬은 「취리히 일치신조」에 입각하여 칼빈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예정은 칼빈과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중간 입장이었다. 예정을 신론 마지막에 위치시킴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용은 칼빈에 더 가깝기 때문에 구원론의 서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성경의 영감설에 있어서 칼빈과 칼빈주의적 정통주의를 연결시킨다. 칼빈은 성경의 영감을 믿었지만 자신의 신학을 성경의 영감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극단적인 성경적 문자주의의 위험성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성경이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제1장부터 이것을 선언하였다. 신앙고백이 신학의 구조를 바꾸었다고 해도 신앙고백의 내용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경은 성경을 하나님의 뜻의 책으로 보고 거기서 신학을 일련의 명제로 이끌어 내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베자가 죽은 후 스위스에서 칼빈주의 정통주의의 지도자는 베네딕트 튜레티니와 프랑소아 튜레티니 부자였다. 베네딕트 튜레티니(Benedict Turretini, 1588-1631)는 이탈리아 출생이다. 그는 베어미글리와 잔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극단적 예정론 학파였다. 그는 스위스 개혁교회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를 정죄한 도르트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였고, 그 지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도 말년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를 옹호하였다. 베니딕트의 아들 프랑소아 튜레티니(Benedict's son François, 1623-1687)는 대륙 칼빈주의 정통주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직 신학자였다. 그는 프랑스의 스이뮈르(Saumur)에서 일어난 신학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의 명성은 3권으로 된 조직신학 책(1679-1685)「신학적 논박의 강요」로 커졌다.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 강의」 이후 개혁파의 철저한 조직신학 책이었다. 그 「주제」(loci)를 보면 17세기 대륙의 칼빈주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튜레티니는 스콜라 신학에서처럼 서론과 비슷한 머리말을 먼저 배열하고 성경의 권위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관심은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권위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통은 성경과 나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16세기 개혁자들로부터 온 개신교 신학이다. 성서론을 조직신학의 머리에 위치시키고 성경의 무오를 규명하는 것은 후기 칼빈주의의 전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튜레티니와 다른 두 신학자에 의해 작성된 1675년 「스위스 교회 일치신조」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들은 성경의 절대 무오를 주장하였다.
튜레티니도 예정론을 신론 다음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에서 예정을 이끌어 내었다. 그렇게 함으로 예정과 신의 본성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보았다. 그는 베어미글리나 잔키처럼 예정에서 은혜의 선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다른 후기 칼빈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의 순서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이 타락을 허락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이러한 영역은 신비한 것이므로 칼빈은 논하는 것을 금했다.
그는 타락 전 예정(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뜻보다 앞선다는 입장)이 구원의 근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둘째는 타락을 허락하시고, 셋째는 이중 예정을 허락하시고, 넷째는 그리스도를 선택받은 자들의 중보자와 구주가 되게 하시고, 마지막으로 이들을 믿음으로 부르시어 의롭게 하시고 성화와 영화롭게 하셨다고 보았다. 이것은 타락 후 예정론과 같다. 튜레티니는 예정을 타락 후에 정한 것이 아니고 타락을 허락의 의미에서 밝히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의 순서에서 예정이 타락 뒤에 있고 역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타락 후 예정이란 용어가 튜레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택의 결정이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 뒤에 따르며 실제적인 타락 이후로 이어지는 것같이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구원에 충분하지만 오직 선택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이해하였다.
튜레틴은 개혁정통주의의 전형적 해석자였다. 그에게서 스콜라주의 방법론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를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 한다.


D. 독일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16~17세기의 독일에서 칼빈주의 정치적 상황과 관계된다. 또한 루터교만큼 관용을 맛보지 못하였고 독일 내에서 계속 루터교의 압력을 받았다. 칼빈주의의 영향력이 컸던 스트라스부르크는 차츰 칼빈주의가 루터교와 결합하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독일에서 칼빈주의가 가장 활발했던 곳은 팔라티네이트 영지였다. 그 수도 하이델베르크는 정치적 상황에서 선제후의 지지를 받았고,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이 나왔다. 이것은 독일 칼빈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신앙고백 문서가 되었다.
개혁정통주의는 독일에서 부처와 멜란히톤의 유산과 함께 칼빈주의 전통을 결합하였다. 특히 1574년에 작센으로부터 추방되었다가 슬그머니 들어온 칼빈주의자들이 관련된 후에 개혁정통주의는 부처와 멜란히톤의 유산과 함께 칼빈주의적 전통을 결합하였다. 1560년 이후 하이델베르크는 자카리아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를 통하여 칼빈주의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고,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그 해석이 출판되고 계속 반포되었다.
자카리아 우르시누스는 멜란히톤의 제자였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스위스 여행은 성찬에 대한 ‘칼빈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는 루터교 진영에 몰래 들어온 칼빈주의자란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피터 마터 베어미글리의 도움으로 팔라티네이트로 피신하였다. 루터파와 칼빈파가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르시누스는 캐스퍼 올레비아누스와 함께 특히 성찬에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함으로 이 요리문답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었고, 이 요리문답은 독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다.
우르시누스는 다른 독일의 칼빈주의자들보다 교리에서 유연하였고, 칼빈을 더 올바르게 이해하였다. 그는 예정을 하나님의 본성의 필연성이라고 보지 않았다. 우르시누스는 예정을 교회론 다음에 위치시킴으로 구원의 체험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요리문답을 해석하면서 예정을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정의 목회적 중요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죽기 적전에 회심할 수 있기 때문에 유기(遺棄)를 단정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우르시누스는 칼빈이 죽기 전과 후에 칼빈의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역동성과 신선미를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은 베어미글리, 잔키, 베자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도식화되었다. 이러한 경직화는 시작단계부터 칼빈주의에 침투된다.
제롬 잔키(Jerome Zanchi, 1516-1592)는 피터 마터 베어미글리의 제자였다. 그는 스승이 1550년에 이탈리아를 떠날 때 스승의 길을 따른다. 제네바에서 얼마를 머물다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신학교수가 되어 거기서 11년간 머물렀다. 그때 이 도시의 엄격한 루터교파의 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샀고, 결국 압력에 굴하여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신앙고백을 ‘정통형식으로’ 해석한다는 단서를 붙인다. 그는 논쟁 때문에 스트라스부르크를 떠나 4년간 목회하다가 우르시누스의 뒤를 이어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직을 계승한다. 그는 여기서 예정론과 삼위일체론 등 여러 주제에 걸친 광범위한 신학 저술 활동을 한다.
그는 정통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이단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였으나 예정론을 다루면서 칼빈과 후기 칼빈주의자 사이의 구별점을 도식화하는 데 몰두한다.
그는 「확정적이며 단정적인 절대 예정론」에서 예정론을 설명한다. 그는 예정론의 근거를 하나님의 예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전지는 전능과 합하여 모든 것(인간의 운명까지도)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정되었다. 예정은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뿐 아니라 예정은 모든 사건이 미리 결정되는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rule)이다. 그와 같은 전제를 인정하면 칼빈주의의 전형적 이론인 제한 속죄는 논박을 받지 않는다. 그는 빈틈없는 논리로 이중 예정론과 제한 속죄를 확립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이론의 목회적, 신앙적 가치를 밝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의 이론은 비인간적인 합리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칼빈의 예정론을 변경시켰다. 그 변경은 내용 면에서보다 강조점에서 어느 정도 변경을 하였다. 은총의 경험을 표현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추론되는 신학이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제롬 잔키는 1577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또는 신의 속성에 대하여」(De Natura Dei sive de Divinis sttributis),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De religione christiana fides)에서 1585년의 예정론에 대한 베자의 교리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드러냈다. 더욱이 토마스주의를 닮은 하나의 개념에서 드러났다. 은혜의 불가항력 곧 성도의 견인의 첫 번째 교리형성(Formulierung)은 그에게 돌아갔다. 믿음으로 보존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확신은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영속적인 표징들이었다. 잔키도 베자와 마찬가지로 개혁주의 스콜라신학의 아버지에 속한다.
헤르보른(Herborn)은 매우 중요하였다. 개혁정통주의가 네덜란드와 보헤미아까지 뻗어 나가기 위하여 1584년에 설립된 헤르보른의 김나지움(Das Gymnasium illustre von Herborn)은 라인 지역과 베스트팔렌에 걸쳐 개혁파 정통주의가 확산되었다. 여기서 코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도 공부하였다 헤르보른에서의 첫 번째 교수는 올레비안(Johannes Piscator Kaspar Olevian)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선택자 사이에 은혜의 언약의 본질에 대하여」(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inter Deum et electos, 1585)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선택자의 구원의 확신을 결합시키는 견해와 함께 언약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관념은 독일 개혁신학에서 관철되었다. 은혜의 언약과 예정은 같은 목적을 가졌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의를 밝히는 것이었다.
피스카토르(Piscator, 1545-1625)는 성서번역과 주석(Piscator-Bibel, 1579-1603)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금언」(Aphorismi)에서 칼빈의 강요 28 논제(loci)로부터 학문적 토론을 위한 기초를 이끌어 내었다. 만족하는 역사(Wirkung)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oedientia passiva)을 갖고 있다는 그의 논제는 개혁교회 내부에 오래 계속되는 논쟁을 종식시켰다.
개혁주의 신학은 1611년 이후 알스테드(Johann Heinrich Alsted)와 함께 헤르보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알스테드는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 1573-1603)의 영향 아래 자바렐라(Jacob Zabarella)로 말미암는 하나의 새로워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리인이 되었다. 그는 신학에서 분석적 방법의 사용을 옹호하는 편에 섰다. 그에 반하여 개혁 신학자들로부터 준수된 종합적인 방법에 맞섰다. 알스테드는 하나의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백과사전적인 저술을 남겼다. 그는 신학을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혼합된 습관(habitus mixtus e theoria et praxi)으로 정의 하였다. 그리고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고, 어느 경우도 신학과 갈등에 빠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자연 언약(foedus naturae, 자연법과 자연신학)과 은혜 언약(foedus gratiae, 신·구약성경에서 계시)의 구별에 기초하여 언약신학(Föderaltheologic)을 발전시켰다. 그 신학은 칼빈주의 예정론의 틀 안에서 움직였다. 알스테드는 도르트 종교회의에 참여하였다.
브레멘의 김나지움(Das Gymnasium illustre von Bremen)은 1584년에 열렸다. 그 학교는 두 사람의 신학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로키우스(Ludwig Grocius, 1586-1655)이다. 그는 1636년에 「거룩한 신학의 종합」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마르티니(Matthias Martini, 1572-1630)로, 「기독교 교리요약」이란 책에서 계약신학을 제시하고 변호하였다. 그 신학은 코케이유스(Coccejus)가 영감을 얻은 신학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선택은 은혜의 언약을 통해 성취되고 중보자는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것을 통해 자연 언약의 타락을 제거하였다. 마르티니는 도르트에서 타락 후의 예정론 입장을 변호하였다.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결정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중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입장은 크루시게르(Georg Cruciger, 1575-1637)와 괵켈(Rudolf Göckel<Goclenius, 1581-1627>로부터 지지를 받아다. 그들은 마르부르그(Marburg)에서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그 대학은 1605년에 헷센 카셀의 개혁국가 대학이 되었다. 


E.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무엇보다도 네덜란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575년에 라이덴(Layden)에서 교수단이 정비되었다. 거기서 다내우스(Lambertus Danaeus, 1530-1595), 고마루스(Franciscus Gormarus, 1563-1641)와 그들의 적대자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가 강의하였다.
1585년 프라네커(Franeker)에서 아카데미가 열렸다. 그 아카데미의 첫 번째 교수는 베자의 제자인 루베르투스(Sibrand Lubbertus, 1556-1625)였다. 그 밖에 거기서 1615년 이래 타락 전 예정론의 목표를 가지는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1588-1644)와 1622년부터 아메시우스(William Amesius)가 강의하였다.
1614년에 그로닝겐(Groningen)의 아카데미는 그들의 가르치는 자격을 인정하였다. 거기서1618년 이후 고마루스가 강의하였다. 1634년에 우트레히트(Utrecht)에서 김나지움 설립이 계속되었다. 거기서 보에티우스(Gisbert Voetius)는 우선 학장으로, 그리고 나서 신학교수단의 존경받는, 위엄 있는 지도자로 죽을 때(1676)까지 활동하였다.
엄격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뿌리내린 네덜란드에서 아르미니안주의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에 여전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제세례파의 전통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쿠른헤르트(Dirck V. Coornhert, 1522-1590)와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 출신으로 제네바의 베자에게서 칼빈 신학을 수학한 개혁교회의 목사였다.
아르미니우스와 로마루스와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 논쟁은 17세기 동안 유럽 개혁교회와 교수단을 뒤흔들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쿠른헤르트를 논박하는 것을 맡았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개혁파 출신이었지만 쿠른헤르트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중 예정론에 관하여 의심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타락 후 예정론은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예지) 타락을 허락하신 다음, 선택을 타락 후 인류의 한 부분을 구원하는 방도로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타락 전 예정론은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영원 전에(타락 전에) 작정하시고 타락을 이 작정이 수행될 수 있는 수단으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인간 타락의 원인인 자유의지(하나님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미리 아신다.)를 강조하였다. 그는 멜란히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해 죽었고, 또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다. 인간 개별자의 자유의지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1603년에 라이덴에서 교수로 임명된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전 예정론을 믿는 동료 고마루스와 논쟁하게 되었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론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버림으로 미리 예정하셨으며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고 타락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의 죽음 뒤에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도덕적 성화의 종교로 보았다. 마침내 40명의 아르미안주의자들은 신앙성명을 작성하였다. 종교의 관용을 강조하는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nvelt)의 요구로 작성된 항의서(“Remonstrance", 1610)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항의자)은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예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하고 주권적인 결의로 확정된 의지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는 확신을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예정론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예지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선택된 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제한속죄가 아니고 만민을 위한 것이므로 누구나 자발적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원죄를 부인하고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보다 그 정도가 약하다.) 그들은 은총의 불가항력과 견인을 반대하면서 자유의지로 은총의 상실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정죄되고 칼빈주의가 승리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의에 대항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이 도르트 회의의 산물이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벨기에 신앙고백」과 더불어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F. 영국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영국 기독교의 개신교회는 역사적으로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영국 기독교를 개신교화한 것은 1560년 이후 청교도의 역사였다. 청교도 투쟁사에서 만들어진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7세기 대륙의 개신교 정통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특히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에 비견되는 영국의 칼빈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영국의 개혁정통주의는 특히 케임브리지에서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확장되었다. 청교도가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와 존 휘트기프트(John Whitgift, 1530/1533-1604)와 함께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있었다. 퍼킨스는 그의 저서 「금팔찌」에서 1590년 예정론을 베자의 「기독교 신학 총론」을 본보기로 하여 서술하였다. 퍼킨스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구원 교리를 참으로 신뢰하는 전향을 강조함으로, 예정론과 경건을 하나의 종합(Synthese)으로 결합하였다. 이 종합은 에임스(Ames)가 확실히 한 정통의 네덜란드 지역처럼 청교도주의를 형성하였다. 에임스 이후에 아르마그(Armagh)의 주교인 제임스 웃세르(James Ussehr, 1581-1656)에 의하여 영국식 특성을 가진 칼빈주의 정통주의는 그 연속성을 가졌다. 1645년에 웃세르의 「신성의 몸」(A Body of Divinity)은 볼렙(Wolleb)의 「강요」(Compendium)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회의(1643-1648)로부터 나타난 두 개의 교리 문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43~1648년 크롬웰의 혁명과 관계된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영국 칼빈주의 정통주의는 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33개의 장으로 개혁정통주의를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esion, 1647)은 도르트 회의의 신학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에 예정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미리 정해졌다”(Ⅲ,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계약개념을 넣은 첫 번째 신앙고백 문서였다(Ⅳ, 1). 그 회의는 두 개의 교리문답서를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퍼킨스, 웃세르와 볼렙의 영향이 반영되었으며 결의되었다. 「대요리문답」(Larger Cathechism)은 「소요리문답」(Shorter Cathechism)을 확대시킨 것이고, 소요리문답서는 엄격한 주일성수가 요구되었다. 이세 본문(「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위하여 정상적 지위(normativeen Rang)를 갖게 하였다. 그리고 북미(장로교)로의 개혁정통주의의 확장을 위한 중요한 전달자가 되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 설립자인 존 녹스(John Knox, 1513-1572)를 생각해야 한다. 장로회의 전통이 스코틀랜드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칼빈 해석자로 제네바에서 칼빈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칼빈 신학이 연구되도록 장려하였다.
그는 칼빈보다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예정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존 녹스는 16세기 후반에서 가장 순수한 칼빈주의 개혁자였다. 1560년에 존 녹스에 의하여 작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더 많이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칼빈의 사상에 더 가깝다.
영국에서 초기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국교회주의와 뜻을 같이했다. 그들은 국교회와 나란히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영국의 기존 교회를 철저하게 변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보다 더 개혁되기를 주장하는 자들은 더 많은 방법에서 엘리자베스의 결정에 반대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약신학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계약관계인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신학은 대륙에서 우르시누스가 지지하고 17세기에 요하네스 코케이우스가 옹호하였다. 이 신학은 영국에서 파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국가의 형태를 과격하게 변혁시켜야 한다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고 하였다.
초기 청교도 중에는 교회의 행정체제를 감독제가 아닌 장로회제도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중간적 입장을 취하여 감독의 안수를 받아들이면서 회중의 청빙이 없으면 안수 받은 감독이라 하더라도 회중을 다스릴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교도 중 과격한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별도의 교회를 세우기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람 중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란 청교도는 국교회에서 자격을 잃고 1581년 노르위치(Norwich)에 최초의 회중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분리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청교도운동은 칼빈주의와 연합하였다. 메리 튜더(Mary Tudor, 피의 메리를 말한다)가 죽은 후에 제네바, 프랑크푸르트 등 칼빈의 영향이 컸던 도시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옴으로 기인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마틴 부처가 에드워즈 6세기 통치 하에 케임브리지에서 제자들을 길렀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의 해결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성공에 영향을 받고 장로교회적인 교회행정이 성경적 기독교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참된 칼빈주의자인 청교도는 예정론자였다. 그들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본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은총의 경험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정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맥락에서만 말할 수 있는 이론이다.
이러한 선택이론은 예정을 왜곡시켜 정적주의나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영원한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에 참여하여 일하게 하심을 믿었다. 그러므로 활동주의가 선택의 징표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로 시간이나 돈이나 정력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청교도들이 중산층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사상이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에 등장하여 자본주의 경제와 연결되었다.


4. 개혁교회 정통주의 신학의 공통분모 : 예정론
개혁교회 정통주의 연구는 문헌연구였다. 19세기 알렉산더 슈바이처(Alexander Schweizer)는 그의 「개혁교회 내의 교리 발전에서 개신교 중심교리」(1854-1856)라는 저술에서 예정론이 개혁교리의 핵심이라고 이해하였다.
페리난드 크리스찬 바우어(Ferdinand Christian Bauer)의 「기독교 교리사의 교본」(1874)과 빌헬름 가스(Wilhelm Gass)의 「개신교 교의학사」(1854-1867)에서도 그들은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론이 모든 교리를 관통하는 구조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예정론이 정통주의에서 적극적인 위치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에 의하여 내적 원리를 밝히게 되었다. 그 내적 원리로부터 종교개혁 개신교주의의 발전이 분명해지게 된다.
하인리 헤페(Heinrich Heppe)의 「복음주의 개혁교회의 교의학」(1861)은 또한 그 명제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 책은 언약신학(Bundestheologie)과 관계를 갖는다. 그에게 있어서 언약신학(Föderaltheologie)은 특별히 독일에서 개혁정통주의의 결과를 형성하였다.
20세기 한스 에밀베버(Hans Emil Weber)가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는 역시 예정론을 17세기 정통 칼빈주의의 특징으로 나타내었다. 동시에 종교개혁의 유산은 사색적인 정통주의의 합리주의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비쳐(Ernst Bizer)는 초기 「전통주의와 합리주의」(1963)에서 감리교적인 합리주의를 강조하였다. 데오도르 베자, 람베르투스 다내우스(Lambertus Danaeus)와 제롬 잔키는 개혁정통주의에 자연신학의 침투를 강조하였다. 발터 키켈(Walter Kickel)의 「데오도르 베자에 있어 이성과 계시」(1967)는 베자의 예정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영향이 있음을 밝혔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결정론적인 교리는 칼빈보다 베자가 훨씬 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연구들은 그러한 첨가를 포기하였다. 베자, 다내우스, 피터 마터 베어미글리 같은 칼빈의 직접적인 후계자들은 칼빈과의 관계에서 칼빈의 사상을 변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저자들은 이미 칼빈에게서 볼 수 있는 논리적 개념들을 체계화하는 데 한정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처음 스콜라 신학자의 논리적 형식주의(Formalismus)는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합리화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을 제외하는 것도 포함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조정의 필수적인 결과로 고려되었다. 비록 이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그 외의 정통주의는 다만 예정론의 시각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 칼빈에서 퍼킨스까지 개혁신학에서 그리스드론과 예정론」(1986)은 하나님의 의지(구원과 구속)를 밝히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자의 중요한 목표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정론과 기독론은 대립도 아니고, 기독론을 하나님의 의지로 돌리는 것도 아니다.
예정론은 단순히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보장일 뿐이다. 구원의 확신의 문제이다. 아만두스 폴라누스와 윌리엄 퍼킨스는 직접적으로 도르트 회의 전에 하나님의 예정교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경륜의 교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균형을 추구하였다. 삼위일체론적인 형식에서 결합된 기독론적인 동기와 예정론의 이러한 관철에서 개혁정통주의의 체계적 기초를 추구해야 한다. 비록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사이에 하나의 확실한 방법론적 불연속성이 성립된다고 해도 그것은 종교개혁자의 사상의 왜곡이 아니고, 종교개혁으로의 유익한 연속성에서 성립하는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5. 결론
제1세대 종교개혁자들은 스콜라주의와 스콜라 신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은 철학이나 논리를 강조하는 스콜라주의적인 사고로 되돌아갔다. 칼빈의 후계자들은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철학과 논리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신비는 없어지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방식의 도입으로 성경, 전통, 이성을 사용하여 종교개혁 신학에서 신비나 불확실성이나 모호성을 없애고 진리의 포괄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첫째가는 본보기의 한 사람은 데오도르 베자(1519-1605)였다. 그는 1564년 칼빈이 죽을 때 칼빈의 유산을 맡게 되었다. 그와 다른 칼빈의 후계자들은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작정을 논리적 순서로 보았다. 칼빈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인 구속의 범주에 위치시키고 선택과 유기에 있어 하나님의 목표에 대하여는 신비를 인정하는데, 베자와 다른 칼빈의 후계자들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능력, 지식, 섭리의 법칙으로부터 추론하여 신론 안에 위치시켰다. 결과적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예정론 교리를 비롯하여 다른 교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런 것은 칼빈에게는 없었다.
베자와 다른 16세기 칼빈주의자들은 신인협력설(synergism)로부터 예정론을 보호하기 위하여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였고, 이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 논쟁은 도르트 회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두 사상(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의 대립의 결과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표현하는 교리 용어(영어)의 첫 철자로 이루어진 TULIP이란 칼빈주의 5대 강령이 결정되었다. 이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의 결과였다. 이것은 칼빈주의 개혁교리의 부분적 그림이었고, 영국이나 유럽 전체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니케아 신경과 이 5대 강령을 믿으면 칼빈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하였다.
17세기 신학은 유럽에서 칼빈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체계화한 신학이다. 칼빈의 신학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연역(演繹)한 조직신학의 형태로 만든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총회교육자원부 편.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존 H 리스. 『개혁교회와 신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