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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개혁신학의 유기적 구조들

개혁 신학은 칭의와 중생, 곧 법정적 영역의 것과 존재 본질의 영역의 것을 구분하는 전통입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이 경향은 17세기 신학에 이르러 더 정교해졌고 그것이 반영된 대표적인 신앙고백서가 WCF입니다. 벌코프에 의하면, 루터가 이것을 구분하고 이신칭의를 말했으나 여전히 루터 안에 이 경향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혼재의 경향성 때문에 세미펠라기즘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게 구분하지만 나누지 않는 방식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그에 따라 원죄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에 이르기까지 이 구분을 따라 핵심적 설명이 변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구분을 위해서 칭의에서 중세가 사용하던 "주입"의 개념을 버리고 "전가"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의 함의는 주입은 우리 안에 내재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전가는 여전히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개념이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구원의 공로에 개입할 여지를 기독론 내부에서 차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중세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가 "주입"된다고 가르친 것이죠. 그래서 죄책의 문제를 범책과 벌책으로 나누고 범책은 완전히 사해지지만 벌책은 원죄의 벌책이 제거 되고 "원의가 주입"되며 치명적 벌책은 사소한 죄로 바뀌고 그 사소한 죄를 보속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신학을 전개한 것입니다. 이처럼 중세 신학은 구원의 공로의 일부로 우리의 보속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것에 대한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종교개혁자들이 보인 것이죠.

그래서 범책은 용서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범책이란 범죄의 행위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이 범법의 행위가 우리 존재 본질을 오염시킨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원의의 부재로만 설명하던 이전 신학과 달리 적극적으로 죄로 기울어진 상태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제거하는 기독론적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아담의 최초의 죄를 예로 들자면,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자체는 범책에 해당하고 이는 율법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벌책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은 바로 이 벌책을 담담하심, 곧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며 율법에 순종하심은 아담이 실패한 것에 대한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독론적 변화는 원죄론에도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어기스틴이 로마서 5:12을 주해하면서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씨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했고 이것이 원죄로서 전해진다는 주해를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했고 이 교의를 따라 우리는 생식법을 따라 후대에 원죄를 유전한다고 기독교 1500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원죄가 "영적 전가(?)"라는 다소 엉뚱하고 교회 역사와 맞지 않은 주장은 무슨 주장인지 알기 어렵습다. 어쨌든, 이 교의에도 다소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즉, 칭의와 성화를 구분한 것이, 법정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을 구분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명료하게 만든 개념이 바로 쯔빙글리, 불링거로 이어지는 언약 신학의 개념들이고 이것이 WCF에 탑재된 "행위 언약" 개념입니다. 로마서 5:12-21의 주해를 따라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이 실패했던 행위 언약의 완결자로 묘사한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반드시 죽으리라"는 계명의 형벌로서 십자가의 사망을 지심으로 법적 영역에서 우리 구원을 완결하시고 이것은 오로지 은혜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만 "전가"된다고 설명함으로 다시는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극으로 치닫게 되면 선한 행실과 기독교인의 윤리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하는 바, 종교개혁자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고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은혜의 수단을 믿음으로 사용함으로 맺는 열매로서 선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원죄책은 WCF에서 행위언약의 교리에 의해서 그 만족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언급하고 이를 통해서 WCF(19. 1-5.)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완전히 인정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다만, 당시에도 여전히 법적 영역과 존재적 영역의 혼동이 여전히 남았고 이를 반대하던 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화합과 일치의 차원에서 그것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에 한해서 순화된 표현을 외교적으로 택한 것뿐입니다. 행위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는 부분을 19장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므로 WCF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행위 언약에 의한 죄책의 직접적 전가와 그 만족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이 정리하고 난 후, 여전히 남은 원죄의 개념을 터툴리안으로부터 비롯된 실재론의 개념을 아주 버리지 않고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방식의 거울처럼 "원의의 부재"에 더해 본성의 부패를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대요리문답 25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문. 사람이 타락하게 된 죄의 상태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답. 사람이 타락하게 된 죄의 상태는 아담의 첫 범죄에 따른 죄책과1) 그가 지음 받았을 때 지녔던 의를 잃어버린 것과 또 그에 따른 본성이 부패한 것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모든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행할 수 없으며, 거역하게 되고, 모든 악에 완전히, 기울어지며, 계속적으로 그러게 된다.2) 이것을 보통 원죄라고 하며, 또한 원죄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가 시작됩니다.3)
1) 롬 5:12, 19. 2) 롬 3:10-19, 엡 2:1-3, 롬 5:6, 롬 8:7-8. 3) 약 1:14-15, 마 15:19.

벌코프를 비롯한 모든 개혁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공통분모, 곧 죄를 "죄책"과 "오염"으로 나누는 것이죠. 원죄 역시 "원죄책"과 "원오염"으로 나뉠 수밖에 없고 그 죄책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의 전가를 통해서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이 바로 이 오염의 전이인데 이것을 대요리문답 26문 소요리문답 16문이 바로 "부모로부터 생식법에 의해서" 전이되는 것으로 어거스틴의 원죄를 그대로 받아서 본성적 오염이 전이되는 방식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으로부터의 변화라기보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한 데서 발생하는 변화입니다. "영적 전가"라는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은 이 원죄 교리 자체를 흔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새관점(NPP) 주의자들에게서도 공히 이런 원죄 교리의 부정과 전가 교리의 부정이 나타난다는 점이죠. 북미에서 나타나고 북미 개혁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페더럴 비전 역시 행위 언약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거나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북미 개혁교회가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할 정도면 이것이 얼마나 장로교회의 교의에서 핵심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WCF에서 행위 언약은 여러 신학적 개념에 키 역할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 머레이에서 시작된 단일 언약, 곧 행위 언약을 은혜 언약 안으로 포섭하는 경향은 노먼 쉐퍼드에서 의해서 공식화됩니다. 이 페더럴 비전의 성향을 북미 개혁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 WCF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세 일치 신조, 곧 벨기에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만을 강조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필시 이 신학에 오염된 것으로 보셔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WCF는 행위 언약을 단지 창세기 2:16-17에 국한해 두지 않습니다. 19장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모세의 시내산 언약의 성격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는 페스코나 메르디스 클라인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경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바로 이 행위 언약적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개념이며 이것이 칭의의 법정적인 성격과 맞물려 있는 것이며 원죄에서는 죄책의 제거와 맞물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모든 공로를 그리스도께로 돌린 후에 성화에서 성령의 임재와 교제가 정당화되면서 어기스틴이 세웠던 원죄 교의를 따라 우리 본성 깊이 침투하고 스며 있는 부패를 내적으로는 성령에 의해서 외적으로는 은혜의 수단에 의해서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제거되는 방식을 구체화하고 그 결과 은혜가 주입되는데, 칭의에서는 "주입"을 거부하고 "전가"라는 개념을 썼던 종교개혁자들은 성화에서는 중세 신학과 마찬가지로 "주입"이라는 개념을 써서 의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주입"되는 것으로 그 은혜의 지배로 인해서, 성화의 열매, 곧 선행이 결실하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바빙크, 박태현, 『개혁교의학 4』(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50. 443).

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이처럼 교의학 전체의 구조를 바꿔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 신학의 강조로 드러납니다. 언약이라는 법적 개념의 강조가 법정적 성격의 칭의를 더 정당화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적 강조점은 바로 행위 언약에 대한 이해를 핵심으로 언약적 구조와 통일성을 만든 데 있습니다. 페더럴 비전이 행위 언약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약화시키려는 데는 이런 신학적 구조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약을 이해할 때, 성경의 모든 언약이 은혜 언약이며 우리가 은혜로만 구원받음에도 불구하고 행위 언약적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은혜언약이라는 이해를 놓쳐서는 참된 복음적 이해에 이를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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