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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의 정치 문화적 기원



일본의 쇼군 이에야스는 그 속내를 보면 조선의 사정과 정반대였다. 실질적인 제왕학은 주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反주자학인 코가쿠(古學)과 코쿠가쿠(國學)이었다.

원래 일본의 주자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는데 첫째, 정통 주자학을 추종하여 쇼오헤이코오(昌平?:도쿄제대 법학부의 전신)에서 쇼군의 정치고문을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게이시하(京師派)며, 둘째,  교토를 중심으로 한 카이난하(海南派)였다.

특히, 카이난하의 출현은 주자학의 내부 붕괴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당시 카이난하를 대표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는 왜란 때 전해진 퇴계의 대의명분론을 차용해 주자학과 일본 전래의 신토(神道)를 접합시킨 소위 「수이카신토(垂加神道)」를 주창했다. 이는 훗날 메이지유신 때 尊王論(존왕론)과 결합해 倒幕(도막: 바쿠후 전복)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양명학을 받아들인 반잔은 「集義和書(집의화서)」에서 주자학의 人欲天理說(인욕천리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사람은 먹고 마셔야 할 이치에 따라 음식을 먹고 마시며, 남녀도 예가 있고 이치가 있어 서로 친하게 된다. 이것이 道이다. 어찌하여 人心(인심)을 人欲(인욕)이라고 하는 것인가』

반잔은 古代 중국의 도덕질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유학은 死學(사학)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일본의 양명학은 「수이카신토」와 마찬가지로 훗날 메이지유신 때에 이르러 倒幕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메이지유신 전에 오사카(大阪)의 도시 빈민폭동을 지도한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와 에도바쿠후 말기에 도막운동에 종사한 시시(志士)들 중 상당수가 양명학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좀더 근원적으로 주자학에 통타를 가한 것은 古學이었다. 古學은 「修身齊家(수신제가)를 통해서만이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자학의 기본이념에 근원적인 회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古學의 창시자인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는 교토의 호리카와(堀川)에 私塾(사숙) 코기토(古義堂)를 열고 유교의 진리를 곧바로 孔孟(공맹) 내지 그 이전의 六經(육경:「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주례」)에서 찾을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는 「童子問(동자문)」에서 수신제가를 통한 치국평천하를 강조한 주자학의 도덕주의를 이같이 비판했다.

『쓸데없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진실되게 하는 것만 알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백성들과 같이 할 수 없다면 治道(치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修身齊家와 治國平天下는 별개이고 治學의 요체는 治國平天下에 있다" 내면을 닦는 것과 치국을 별개로 본 것이다. 야마가 소코오(山鹿素行: 1622~1685)의 주장은 더욱 통렬했다. 그는 人慾(인욕)을 唾棄(타기)하는 주자학의 엄숙주의를 이같이 비판하고 나섰다.

『사람이 색을 밝히고, 천하의 미인을 구하는 것은 본성일 뿐이다. 본성을 다할 수 있어야만 부모를 따르고 군주를 섬기는 데 그 지극한 바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거부해야 할 것은 인욕이 아니라 욕망의 迷惑(미혹)이다. 미혹은 곧 過不及(과불급:지나치거나 못 미침)을 의미한다』

이런 통치 원리는 일본인의 겉으로는 예절 바름과 속으로는 혐오와 따돌림을 일삼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통치 원리는 곧 민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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