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의 빛과 내적인 조명
(시 19, 개정)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서론]
C.S.루이스는 시편 19편을 "시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편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가지는 자연스런 인식론의 구조이면서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칼뱅의 기독교 강요가 이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며 2권은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룹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1-6절과 7-10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시작할 때, 인식론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으로 기초 놓았는데, 1권과 2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면 3권은 이 지식에 반응으로 믿음을 다루고 4권은 믿음의 증진을 위한 은혜의 수단을 다뤘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은 그것이 우리 내면을 조명하여서 11-14과 같은 내용을 불러오게 합니다. 이 복음의 핵심은 로마서 1:18-3:25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1:18-32은 자연 만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2:1-3:20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구속주 하나님을 다루고 3:21-25은 믿음의 도리와 은혜의 수단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
자연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19:1-6
율법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19:7-10
하나님을 만난 자의 내적인 변화 19:11-14
[본문의 이해]
1. 자연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19:1-6
이 시편은 바울의 말처럼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해서 사람이 그것을 모를 수 없음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롬 1:20).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는 표현 역시 이 시편에서부터 온 것입니다(롬 10:18).
1절은 전반절의 “하늘”과 후반절의 “궁창”이 같은 의미며 전반절의 “하나님의 영광”과 후반절의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이 같은 의미며 전반절의 “선포”와 후반절의 “나타내는도다”가 같은 의미입니다. 즉 하늘이 하나님의 창조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2-3절은 1절에서 말한 창조의 지식이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세상 끝까지 퍼져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자연 자체를 지식과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6절은 1-3절에서 말한 하늘이 드러낸 하나님의 창조의 지식의 가득함의 구체적 예시로 하늘의 해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왜 하필 해를 들었냐면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는 숭배되던 해조차도 하나님께서 펴신 장막에 거할 뿐임을 드러냅니다(신 4:19, 17:3 왕하 23:5). 해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고의 은유인 셈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연에 충만한 창조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고 맙니다(롬 1:21-25). 이것을 벌코프는 영적 문맹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2. 율법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19:7-10
7-8절 역시 1절과 같은 평행법을 사용해서 의미를 드러냅니다. 7절 전반절의 “여호와의 율법”은 후반절의 “여호와의 증거”와 같은 의미이듯이 8절 전반절의 “여호와의 교훈”과 “여호와의 계명”이 같은 의미로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완전”과 “확실”하며 “정직”과 “순결”하여서 우리의 “영혼의 새롭게”하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하며 “마음을 기쁘게”하고 “눈을 밝게”합니다.
9-10절은 7-8절에서 말한 율법의 영광을 더 풍성하게 드러냅니다. 7-8절의 끝에 눈을 밝게 하다와 9-10절의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는 서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먹음으로 우리 눈이 밝아져 바르게 분별하여 알게 된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칼뱅은 믿음을 “영혼의 입”이라고 묘사했는데 우리 영혼을 밝게 해주는 율법의 성격을 7-8절이 드러냈다면 9-10절은 이 율법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는 점을 드러내줍니다.
더 나아가 1-6절의 창조의 영광은 온 세상에 가득하다면 7-10절의 율법의 영광은 영원에 이르도록 가득하고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3. 하나님을 만난 자의 내적인 변화 19:11-14
이미 앞선 단락에서도 보았듯이 율법이 우리 내면에 그 계시의 빛을 비춤으로 눈이 밝아져 우리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단락은 그렇게 말씀에 대면하여 선 시인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의 “이것”은 율법이며 이것은 시인에게 “경고”와 함께 “지킴으로 큰 상”을 얻게 합니다. 12절은 이 율법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숨은 허물까지 깨닫게 합니다. 숨은 허물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고의적 범죄에 빠지게 됩니다(ex. 압력밥솥의 예). 13절에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이런 점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계시로 말미암아 조명된 말과 묵상을 주께 헌물로 드리는 시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여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적용]
1-6절의 창조에 드러난 영광은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원래 영광이란 하나님의 일이 그 완전성을 드러낼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이며 그 구원의 완전성이 자연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렇습니까? 우리가 머문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기억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7-10절은 창조주를 대면함으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내면의 상태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가 닿을 수 있도록 장소나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잇닿을 수 있도록 그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교훈을 따라 우리 마음을 밝힐 것과 그것을 사모함으로 어그러지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신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고 우리는 이 땅에 거함으로 생기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장막을 우리 가운데치고 거하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대면하여 사는 삶입니다.
11-14절은 이렇게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자연과 말씀을 통해서 대면한 신자의 삶의 목적이 죄를 끊어내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영광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율법, 창조주와 구속주는 우리 마음의 숨은 부패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은밀한 죄가 우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큰 배가 키 하나로 조정되듯이 우리말과 생각은 우리를 움직이는 키와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일일 때는 수습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커지게 되면 우리 힘으로 수습하기 힘든 지경이 도래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화재 진화에서도 초기 진화는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만 불씨가 커져서 집을 삼키게 되면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내면의 은밀하고 부패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도]
성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로 삶의 모든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며 우리 내면이 “영원”에 가 닿도록 율법을 통해서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시며 율법을 대면하여서 우리 죄를 깨닫고 우리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우리 생각과 말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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