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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경건의 비결(약 1:16-27)

참된 경건의 비결(1:16-27)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개요]

 

형제들아 속지마라 은사는 위로부터 온다(16-18)

은사는 말씀을 듣는데서 온다(19-21)

듣기만 함으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22-25)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경건은 헛것이다(26-27)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의 마치 잠언의 경구처럼 하나하나가 흩어져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잠언이 그렇게 하나씩 흩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문맥이 있듯이 야고보서 역시 잘 살펴보면 본문의 문맥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데 첫째 주제는 속임에 관한 것으로 16, 22, 26절에서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주제는 말씀과 들음의 주제인데 18, 19, 21-22절에서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두 주제가 서로 반복되면서 들음의 결국은 말씀의 실천 곧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의 실천의 없는 삶이 속이는 삶이라는 점을 두 주제를 반복하면서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해]

 

그러면 하나씩 우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형제들아 속지마라 은사는 위로부터 온다(16-18)

 

이 단락의 핵심은 우리가 들은 바 말씀에 의해서 태어났으며 우리로 열매 맺게 할 목적으로 아버지께서 각양 좋은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벧전 1:23).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변함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라고 말하는 대요. 갑작스런 하나님의 성품의 대한 설명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사실 야고보 사도가 좀 불친절한 편입니다. 여기서 말씀과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겸하여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맺으신 언약의 말씀에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각양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은사는 말씀을 듣는 데서 온다(19-21)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라는 것 역시 어디에 달려 있냐면 바로 이 말씀을 듣기를 속히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이 단락은 우리 마음의 분노와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를 서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왜 하고 많은 것 중에서 분노를 말씀을 듣는 것과 대비해서 설명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듣고 욕망하는 자는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크기와 그 좌절에서 수반되는 분노는 비례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겸손히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본문 1-20절과 21절은 인과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듣기를 속히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들어야(받으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21절의 문장이 명령법인 것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할 바 우리 마음이 심겨진 말씀을 받는 사람은 그의 일상에서 자기 의를 따라 성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라 온유함으로 듣게 됩니다.

 

3. 듣기만 함으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22-25)

 

의를 얻기 위해서 분노하던 일이 우리가 세상에 속은 일이라면 듣기만 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일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거울은 우리 외모와 용모를 다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말씀과 우리 이웃 역시 우리에게 그와 같은 거울이 되어 줍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자기 용모를 잃어버린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을 참되게 받음으로 나타나는 은사의 힘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끼치는 은혜를 힘입어 그 능력으로 말씀의 요청이 실천되는 삶으로 나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4.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경건은 헛것이다(26-27)

 

야고보 사도는 경건을 위해서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말을 제어할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사랑의 실천함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요구합니다. 서두의 말씀드렸던 칼뱅의 정의처럼 경건이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 들은 바 말씀이 결실하도록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들에 의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니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 소견을 분을 내듯이 말하는 것을 제어하고 둘째 하나님 말씀 듣기와 이웃의 필요에 대해서 속히 들으며 셋째 들은 바 말씀을 신실하신 아버지를 의지하여서 사랑으로서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적용]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실 뿐 아니라 기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들을 의지하여서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참되게 의지함은 우리 욕망만큼 분노하고 듣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참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도 이런 신앙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심겨진 말씀으로 대면함으로 우리 죄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데 은혜의 수단이 있는 교회를 통해서 나아가며 실천적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은혜를 입게 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서 마침내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이 우리 삶에서 실천되어지는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로 열매 맺게 하시려고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소견을 제어하고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잘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무엇이 말씀을 잘 듣는 삶을 방해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듣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듣지 않고 속히 자기 소견을 말하며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이웃을 듣기를 멈추고 우리 소견을 나타낼 때마다 분노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잘 듣게 되면 마치 거울을 본 것처럼 우리 영혼의 태도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데 설교를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임과 같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전향적으로 자기 소견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와 의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셋째, 그렇게 돌아서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혀를 재갈 물려 자기 소견을 말하기를 더디게 하는가를 평가해야 합니다. 또한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사랑의 실천이 내게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경건의 실천이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