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연구
김성수 교수(합신)
목회를 하면서 우리는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교회를 세우는것, 개척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일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개척, 혹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는데 그것에 대하여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이 사람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이렇게 모이는데 글쎄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예배를 드리면, 예배란 것이 무엇인가? 어떤 형식과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하는가? 그 다음에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과 은혜의 가장 귀중한 수단이 말씀인데 글쎄 무얼 전해야 할 것인가? 지금 모여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무얼 전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습니다. 별다른 내용이 아니라 A.B.C. 즉,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인데, 실제로 목회를 해보니까 그런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제일 많이 빼앗아 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들이 아니고 아주 사소한 일들이 우리의 시간과 힘과 관심을 많이 빼앗아가고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찾아와서 상담을 하고 심방을 하거나 할 때 그들이 부닥치는 문제 자체는 아주 사소하거나 사소한 것들입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도 있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제 그런 문제가 사실은 그 하나만 두고보면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역의 본질, 가장 중요한 부분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그런 한 부분으로 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주 원칙적인 것은 비교적 손쉽게 알 수 있는 반면에 가장 세부적인 것, 가장 어떤 면에 있어서 사소한 것들, 쉽게 말해서 교회의 헌금하는 것, 또 공예배 횟수를 정하는 것이라든지, 교인들간의 교제를 갖는 문제라든지 등 이러한 것도 그저 뭐 다른 교회에서 이때까지 배워 온 대로, 그냥 뭐 아무렇게나 따라하는 것도 한 방편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가장 원칙적인 데부터 시작해서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고 가장 원칙대로 지키려 할 때 우선 나 자신부터가 문제입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가장 핵심적인 데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장 본질적인 명료한 것으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이것을 본질과 관련시키는 작업이 힘들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되고 결론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작업을 포기했을 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중심되는 어떤 사역의 본질과 항상 관련을 맺으면서 어떤 해답을 구할려고 하는 자세를 버릴 때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저 남이 하는 것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또한 아무 의미없이 자기가 한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하니까 그저 무의미하게 적당히 해 넘기는 것으로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떤 의미에서 변질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심방하는 것이나, 그 권면하는 것이나 상담하는 이런 것들이 어떤 목회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그 나름대로 굴러가는, 적당한 대인관계 수준으로 떨어져 가고 목회는 별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사소한 부분들이 이렇게 되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일에 완전히 치여 가고 목회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목회하는 일은 사실 이제 교인들과의 어떤 그런 접촉에 의하여 대부분 이런 사소한 일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 실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사소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것과 관련성을 상실하게 될 때는 어떻게 돼냐하면, 이런 일에 완전히 얽매이게 되고 그래서 이런 부분이 목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리고 관계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점점 목회자 자신도 사역의 본질과는 관계 없이 이런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갖고 흘러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의 큰 병폐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심방을 하는데 계속 심방을 할 때 심방이 목회의 본질과(쉽게 말하면 복음인데) 복음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 본래의 목적과 기능과 의미는 다 없어져 버리고 그저 심방 그 자체 그것을 통해서 교인들이 얼마나 교회에 잘 나오냐 그 정도의 수준, 얼마만큼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냐 이 차원으로 그냥 전락이 되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사소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과 관계를 맺는,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고 힘들찌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회자 자신이 살 수도 없고, 그와같은 가르침에 의해 양육을 받는 회중들도 결국 서서히 본질에서 떠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얼마만큼 취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떤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취급하는 내용이 얼핏보면 뭐 그렇게 굉장히 심오한 무엇이라고 보기보다, 우리가 가장 늘 겪는 평범하고 통상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이 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고린도교회가 물어온 또는 바울이 어떤 고린도교회로부터 온 사람들에게서 들은,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서 또는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사도께서 질책하시는 내용과, 권면하고 책망하는 어떤 그런 바른 것에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보면 고린도전서는 그저 사례 모음집, 그저 교회에 생기는 이런 저런 일들, 잡다한 일들을 모아 놓고 그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께서 이런 저런 권면을 한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린도전서를 자세히 보게 되면 이것은 이런 저런 교회에서 생기는 잡다한 문제들, 서로 상관성 없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모아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이제 바른 가르침을 주는 그런 책이 아니고, 취급한 순서를 잘 보고 전체 내용을 보면 이 전체가 신학적으로 하나의 꽉 짜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무엇으로 세워지고, 그 교회의 성격이 무엇이며, 본질이 무엇이며, 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그 전체 교회적 삶, 또는 교회적 존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그 깊은 원리를 가르치고 있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물론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그랬겠지만 참 이렇게 경이로운 것은, 어떻게 그렇게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물어온 그런 구체적인 사건, 뭐 별 의미없는 사건인데, 이런 사건들에 대한 권면을 하시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교회가 무엇이냐?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런 깊은 원리를 담아서 그것도 신학적으로 틀이 꽉 짜인 그런 서신 형태로 제시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은 경이롭습니다.
첫째가 분쟁문제고 이 분쟁을 통해서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말할 수 밖에 없었고, 교회의 터, 토대가 무엇이냐? 교회가 무엇으로 세워졌느냐?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여기서 자연히 넘어가서 이제 그 분쟁의 사건을 다루면서 결국 분쟁이라는 것 자체가 사역자 때문에, 고린도교회를 거쳐가는 사역자, 복음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일어난 그들이 하나의 분쟁의 계기, 실마리가 될만큼 지도자가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자연히 음행의 문제로 넘어가면서 교회의 성결문제로 넘어 가고, 교회가 지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거룩한 모습 그리고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문제를 통해서 결국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자체가 큰 허물이다. 이것이 세상에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고 말씀함으로서 교회의 삶의 수준, 성결의 수준은 수준이 얼마나 세상보다 높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음에, 결혼문제나 등등 이런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첫 창조질서, 육적 차원의 질서를 우리가 신앙인으로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 등의 말씀도 원리를 다루고 그 다음에 특히 우상제물과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만 영적 차원의 교회적 삶이라 그럴까요 그래서 처음에 부정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피하라는 등의 영적인 더러움을 피하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성만찬 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성만찬 논의로 넘어가면서 결국 이제 언급되는 것이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이니까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기도라든지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 다음에 와서는 이런 것들이 단순한 어떤 인간적 차원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되어지는 무엇이 아니고, 여기서 항상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전제와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연히 성령님의 은사에 관한 것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물론 고린도교회 당시에서 생긴 문제들도 다루고 있습니다만은 그것을 계기로해서 결국 이제 교회의 삶이라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 은혜의 수단들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성령님의 역사가 수반될 때 그것이 교회가 교회를 존재할 수 있게 하신다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 이것이 자연히 14장 이쪽으로 가게되면 좀더 형식화(former)되어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공예배가 어떠해야 되는가? 하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5장에 가면 부활을 말씀하면서 결국 이제 교회가 이와같은 지상적 교회의 존재와 삶의 궁극적인 종착점이 어디인가? 그 종국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 우리가 어떠한 종국을 바라보고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있어서 15장에 부활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로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보면 고린도전서는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것까지 다 그 내용을 그저 신학적인 형태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고린도전서의 신학적 용어가 특이한 것은 매우 사려깊게 고려되고 숙고된 다음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결국 아무렇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고 그 전체로서 어떤 일관된 흐름이 있고, 모든 것이 유기적인 어떤 구조를 갖는 그런 형태로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이제 개략적인 것을 그렇게 말씀드리고 난 다음에 조금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고린도전서 1장 1절-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문안 인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교회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요, 모든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더불어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울 서신에 보면 인사말에서 대개 앞으로 말씀하실 내용들이 어떤 것일까 조금 짐작가게 하는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가르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부도덕한 면이고 바울 사도께서 교회의 성결에 대해서 말씀하리라고 하는 것을 들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결국 마찬가지 이고, 그 다음에 모든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더불어라고 하는 말은, 특히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 분열 상태를 의식하고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흔히 보편교회(catholic church)라 하는 하나이지 말하자면 고린도교회라는 지역교회 그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항상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함께 교회된 자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말씀을 강력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대개 서두에서는 결국 성결문제와 교회의 하나됨, 통일성이 크게 부각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4절 이하에 보면 고린도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데,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부요케 하시는 데 특별히 말씀과 지식에 있어서 부요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말과 지식이 언급되었는가? 뭐 그것은 특별히 고린도교회가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12장-14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특별히 부여했던 은사들에 관한 말씀으로, 어떤 은사였든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은사를 베푸신 것은 무엇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가 하면, 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가운데서 굳건하게 확립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교회 내에서 확실히 설 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라고 하는 것이, 그의 능력있는 통치가 교회에서 확실히 서게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실히 전해지는 것과 더불어 이런 모든 은사들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 부요하게 부어졌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은사에 은혜에 부요케하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의 계시 즉,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다시 말하여 재림을 소망하여 사는 너희들이 어떤 은혜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지상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교회로서 존재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베푸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역으로 바꾸어 이야기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베푸시는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이 됩니다. 그 다음의 논의는 금방 여기에 대해서 지금 현재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이 세상 지상에서 존재하는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그의 은사를 베푸시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에, 현재만 교회가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로 이렇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와같은 교회적 삶은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보장이 되어있다는 말씀을 거기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너희를 굳건히 세우실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세우시리라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신실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특별히 이제 교회, 하나님의 은사로 존재하는 은혜로 이 지상에서 존재하는 교회에 은혜를 베푸셔서 살아가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런 교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교회는 너희가 이런 식으로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진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전혀 흠이 없도록 굳건히 서게 하실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궁극적 목표에까지 반드시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그의 은혜와 함께 세우실 것을, 마지막 날에 이루실 것을, 흠없이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만은 9절에 보면 하나님의 편에서, 성부의 편에서 그의 교회를 붙드시는, 마지막 날까지 붙드시는 신실하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비슷한 말로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으시다.' 부르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곧 나옵니다만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그가 먼저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그와같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불러내심, 그와 사귐과 교통케 하신 그 부름에는 결코 후회하심이 없다. 우리를 실망시키실 법이 없으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서문에 보면 이미 대개 고린도교회에 이 바울 사도께서 어떤한 일을 취급할 것인가가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로 부족함 없이 풍성한 은사를 주셔서 이 교회를 지상에서 교회로 살아가게, 마지막 날까지 이 교회를 붙드셔서 최종목표, 흠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 어떤 궁극적인 소망, 소망에 확실한 마지막 어떤 그 역사의 종국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게 하시는 어떤 내용까지 이 고린도전서가 다룰 것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제 서문 다음에 바로 시작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태도를 일변한다고 할까요, 형제들이여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라.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강한 권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권면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인데, 어떤 분열 고린도교회가 분열되어 있었다. 어떤 분열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분열의 원인을 에레이스라고 말합니다.
분쟁, 어떤 그런 갈등, 서로 삐걱거리는 것 등이 있어서 그런 분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무엇을 둘러 싼 갈등이냐? 그것은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 싼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바나바, 게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요것만 봐서는 과연 이제 그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뭐에 속했다 하는 이런 어떤 말의 의미가 정확한 의미와 성격을 추정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왜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는 것이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것이 다시 분열에까지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그 정확한 내용과 과정을 우리가 추측하기는 힘듭니다만은 나중에 14절 이하에 보면 바울 사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소수, 몇몇 소수인 외에는 내가 세례 준 적이 없다라는 말씀을 보아서 어떤 특정인, 어떤 특정 영적 지도자에게서 세례 받은 것을, 그와 어떤 특별한 관계 성립의 근거로 생각하는 어떤 그런 폐단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에 세례를 받았다. 영적 지도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특정인에 속하였다. 그와 어떤 특정한 관계에 있다는 이런 어떤 생각을 하게된 것 같습니다.
어떤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 싼 이런 분쟁을 보고 바울 사도께서 이와같이 반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졌느냐? 교회의 하나됨과,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reaction(리액션)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나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분열된 것, 영적 지도자들을 두고서 교회가 분열된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나눠지느냐? 그냥 교회가 나누어지느냐?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눠졌느냐? 이렇게 물음으로서 이것은 이제 암시적으로 교회의 하나됨의 토대와 그 근거가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본질 또는 토대,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반문이 계속되는데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는 그런 반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교회의 토대와 근거가 되시고,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가 되신다는 앞의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느냐? 이 말씀은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시요, 믿는 자를 위해 죄와 사망과 흑암의 권세를 무력케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믿는 자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의로울 수 있게 하시는 가장 핵심적이요 근본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십자가가 없이는 교회라는 것이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토대부터 무너져 나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느냐?는 것은 바울이 교회를 세우느냐? 바울이 너희에게 새 생명, 새 존재를 가능케 한 인물이냐?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누구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느냐? 누구와 연합함으로서 누구 안에서 누구 이름으로 이 구속을, 이 구원을 받아 누리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모든 구원의 은혜가 내것이 되는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이것이 바로 세례의 본질아라고 할 수 있는데, 너희가 누구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누구 안에서 이런 새로운 존재가 되었느냐? 이렇게 반문합니다. 결국 이제 정상대로 돌린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객관적인 토대요, 이와같은 구속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합해서 이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세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외부적인 어떤 의식, 이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더 나중에 12장 13절에 보면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분명히 말씀하고, 너희가 동일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 안에 속하였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의 본질, 실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 전 인격적으로 전 영혼, 영적, 내적 차원에서 이 구속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 우리의 것이 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 성령세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제 이와같은 말씀에 의해서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전서에서 어떠한 문제들을 취급할 것인가? 어떠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실 것인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둨느냐?고 이제 반문하신 다음에 곧 이어서 이제 내가 누구 누구 수인 외에는 세례주지 않은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에 계실 때 세례준 것을 언급한 것을 보아서 대개 지금 문제가 되고있는 사람들은, 특정인에게 세례 받은 것을 그와 특별한 관계성립의 근거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외적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내적, 영적, 세례의 말하자면, 세례일체를 상징하고 지시하는 표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구약의 할례와 비슷한 할례도 언약의 하나의 신약의 세례와도 일치합니다만은 언약으로 확인하고 인치는 어떤 표였습니다. 사인(sign) 곧 어떤 외적 의식으로서의 세례라는 것은 즉 영적 세례, 성령세례를 상징, 지시하는 표호에 불과합니다. 또 외적 의식으로서의 세례를 집례하는 집례자, 어떤 사역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해서 내적, 영적 세례의 외적 표시, 확인의식을 행하게 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행하신 그 영적 세례를 그리스도를 대리해서 어떤 그 교회 지도자가 구속을 인치는, 확인하는 외부적 의식을 행하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물론 이 말에서 우리가 세례의식을 가볍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내적, 영적인 성령세례가 없이는 외적 세례가 무의미하다. 어떤 내적 실체가 있고 나서야 외적인 확인이고, 인침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자가 행한 의식은 성령께서 이미 행하신 그 세례를 그저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외적으로 시행하는, 대리적으로 시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이 외적 의식 자체가 영적 실체인 것 처럼, 영적 실체를 결과하는 것 처럼 생각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떤 그런 요소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집례하는 집례자와 특별한 영적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와 모종의 유사 영적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것들이 거부감을 느낍니다만은 영적 아버지다 영적 어머니다 이상한 소리들은 물론 바울 사도께서는 그 나중에 나옵니다. 어떤 그 교회의 지도자들,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정당한 어떤 존경과 또는 어떤 그와의 어떤 영적 유대관계 그런 것들을 전혀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어떤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 또 집단적으로 말해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어떤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것이 실체고 본질이고, 토대이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의미에서 대리적 수행자요, 그것도 하나의 어떤 의미에서의 도구와 통로, 채널일 뿐이지 결코 그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구속을 토대로하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사 우리에게 적용내지 실현하시는 영적세례, 성령세례인데 성령님에 의한 영적세례의 상징에 불과한 외적세례의 의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 일군에 지나지 않는 안내자와 특별한 영적관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그 영적 유대관계를 근거로 파당을 형성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회의 진정한 토대와 통일성의 근거되시는 그리스도를 조각조각내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라는 책망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에 가보면 우리가 얼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려함이 아니요, 복음을 전하게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세례를 준다고 하는 것은 문맥으로 보아서 그저 외적 세례의식을 베푸는 의미로 사용한듯 합니다. 만일 여기 세례를 준다는 것을 거저 세례의 실체, 성령님에 의한 내적 세례를 뜻한다고 하면 그것은 좀 곤란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만일 영적 세례를 뜻하는 것이라면 곧 복음과 다르지 않아요? 복음 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서 이제 특별히 사도로서 보냄을 받은 바울의 사명은 세례의식을 베푼는 것이 아니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고 말씀한 것은 여기서 바울 사도께서 세레의식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어떤 소용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보다 이런 대조적 어법에 의해서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가?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어떤 그런 핵심적인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닌가,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를 가리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서 세워졌다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시고, 또 사도가 교회의 시작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도 이 말이 적응이 됩니다만은 특별히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까? 1년 반을 유하면서 참 힘을 쏟아 개척한 교회가 바로 이 고린도교회라 이 말입니다.
계속 읽어내려가 보면 알겠지만 '내가 너를 낳았다'는 표현이나, 그런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은 바울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서 바울 사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말할 때는 그 바울의 사역, 어떤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사도로서의 사역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관계, 마치 고린도교회의 개척자로서의 어떤 자기 사역을 염두에 두고 말씀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의 개척자로서 내가 한 일, 나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복음전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개척자로서의 바울 사도의 사역이 복음사역이었다. 그러면 교회를 개척한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결국 복음전하는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쉽게 표현을 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세워지는가?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지는 것이라 하면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자, 그 사람에게서 제일 먼저 있어야 될 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할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성경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수천 페이지짜리 논문을 쓰라하면 쓸 수 있고, 강의를 하라면 강의를 할 수 있고,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라면 얼마든지 논쟁을 벌일 수 있는데, 그러나 내 앞에 앉아 있는 수 인 내지 수십 명, 수백 명의 살아 있는 영혼, 그 영혼들을 대면해서 또는 개개인으로 만나는 그 사람에게 이것이 생명이요,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고 하는 그런 살아 있는 어떤 그런 선언, 선포,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과연 저들에게 무얼 전할 것인가? 그런데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빠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상한데로 가지요, 교회의 어떤 외적인 틀을 갖추는데 급급하게 됩니다. 이 전할 것이 분명해야 됩니다. 나중에 이야기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와서 삶이 많이 강조가 되죠, 그러나 복음은 윤리적 삶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 속에 그런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이 그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삶은 복음의, 결과이지 복음이 무엇인가? 추상적으로 하나의 객관적인 대상으로 냉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살아 있는 영혼을 앞에 두고 진심에서, 마음에서 이것이 당신을 살릴 것입니다. 당신을 영생하게 할 것입니다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전할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이 없으면 아예 나서지 말아야합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인데요. 내가 말의 지혜로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 말의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쉽게 말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으니 말의 지혜라 그러면, 말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속에 있는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이성이란 말을 한 마디로 씁니다만 헬라어에는 '로고스'란 말과 '누스'란 두 단어가 있습니다. '누스'란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것, 뚫고 들어가서 본질을 파악하는 이런 것, 어떤 정신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고,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밖으로 잘 드러내는, 표현하는 이런 어떤 이성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고스'라는 것은 이성 뿐 아니라 말이란 것에도 사용됩니다.
말이란 것은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니까,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소피아', 지혜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보통 원래의 뜻이 스킬=기술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 라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는 삶의 기술이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하나의 스킬 쪽으로 본다면 말재주로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재주로 전할 경우 십자가가 공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무력하게 됩니다.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음에 나오는 '소피아'와 '두나미스'가 단순한 스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가진 것들이라고 이야기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의 '소피아', 말의 지혜라고 하는 것도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무엇일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내용이 무언지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어떤 독특한 사상, 복음, 이런 것들을 뜻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것으로 봐서 그 해석을 배제하기는 힘들지라도 그러나 구체적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만큼 조금 난감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진부하지만 첫번째 설을 따릅니다. 말재주로 복음을 조리있게 잘 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을 논리도 맞지 않게 엉터리로 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조리있게 설득력 있게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을 변화, 믿게 만들진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으로 전했다가는 십자가가 무력하게 된다거나 공허하게 됩니다.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논의가 계속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가 받은 사명, 또 개척자로서 고린도교회를 세운 그의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었는데 이것은 말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할 경우에는 오히려 십자가가 무력하게, 공허하게,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주장을 하시는데 이 말씀의 구체적인 근거에 대해서 그 아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도는 망하는 자들에게서는 어리석으나 구원 받는 자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대조를 시킬려면 서로 아귀가 맞아야 하는데 어리석으면 지혜가 나와야 되고 능력이면 무능력이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대조가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어리석음과 능력이 대조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의 어법상의 기술이라고 할까요. 사실 이 두 가지는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리석음과, 지혜 그리고 무능력과 능력 이 두 가지를 다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고 무력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지혜요,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바로 그 아래에 보면 그 말씀들이 쭉 나옵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복음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인데 이 복음은 망하는 자들에게서는 어리석고 무능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의 참 진정한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와 같은 복음을 전할 때 왜 설득력이 있는 말로하면, 오히려 조리있는 말 차원에서 복음을 잘 전하면, 그 정도의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왜 십자가가 무력하고 무능력하고 무용지물이되고 공허하게 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이하에 보면 자연인의 지혜, 지적 능력으로는 이 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해를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도 한데 하나님의 뜻은 지혜자의 지헤를 멸하시고 똑똑한 자들의 이해를 무력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학자라 할지라도, 지식을 많이 소유한 자라 할지라도 적어도 '아이오노스 투 투' 이 세대의 차원의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지혜로는 이 세상, 자연인으로서 특히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케리그마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외쳐대는, 소리질러대는 방법입니다. 조리있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말로서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의 설교가 비논리적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논리 자체가 어떤 논리적 설득력이 이 복음의 내용을 깨닫게 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뭐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저 사람의 설교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서 감화를 준다. 뭔가 복음의 역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것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야 형식이나 여러가지 논리성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게하시는 방법은 케리그마의 방법이라 그말입니다. 외치는 것, 선포하는 것, 이것이다라고 외치는 방법, 그 외에는 그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2절에 보면 이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대개 이 표적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만은 대개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늘에서 온 표적'을 보이라고 할 때, 즉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어떤 신적 능력의 현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하는 것을 증명해줄만한 어떤 표, 능력 있는 이적적인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주장의 진리성을 판단할 때 이것에 많이 의존하는 것을 조금전에 말씀드렸듯이 복음서를 보면 많이 나타납니다. 당시 예수님을 향하여 바로 그런 증거를 대쇼 할 때 표적을 보여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반면에 헬라인들이 추구한 것은 소피아,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적인 노력을 필로소피아, 지혜를 사랑하는 노력이라고까지 이야기 한 것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지혜를 사랑한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은 학문적으로 세련된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에 표시를 구하는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스칸달론', '오펜시브', 말하자면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원래 '스칸달론'은 '오펜시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대개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에 전혀 반해서 영 엉뚱한 것을 갖다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을 놀리느냐?하는 감정이 생기게 되겠죠. 이런 경우 '스칸달론'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이 바란 메시야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강력한 그런 권세와 영광, 어떤 외적으로 화려한 그런 의미에서의 통치하는 메시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이신 메시야상은 나약하기 이르데 없이 십자가에 유대인에게 잡혀 십자가에 그냥 처형당한 그것이라 말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자랑스럽다고 전해대는 어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오펜시브'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능력이냐 그말입니다. 자기 몸, 자기 생명 하나 구하지 못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 무슨 하나님의 능력이냐 그말입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어떤 지적 노력, 지적 설득을 통해서 복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만은 저는 그것은 잘못되지 않았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우리 말이 비논리적이거나 방언을 해야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알아 듣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지적 설득력이 믿게 만든다고 하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럽니다. 복음이 아무리 바로 전해져도 아무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해져도 인간 자신은,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그 역사 가운데서 구원을 행하신 그런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유대인들, 그리고 지적인 면에서 세상 학문적 면에서 가장 세련되고 심오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는 헬라인들에게 다 복음은 똑같은 미련하고 실망시키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복음이 의미가 있는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그럽니다. 사람이 자기의 지식으로는 결코 복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결코 복음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얼 전제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그 선택에 따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사람이 복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복음을, 구속을 이루신 것이나 또 그 이루신 구속을 받아 누리는 것, 또 그것을 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의지대로, 그의 주권대로 그의 처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조직신학의 a.b.c.입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를 하면서 이 부분에 충실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더라는 말입니다. 나는 괜찮은데 옆에서 자꾸만 뭐라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자꾸 뭐라 그래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하시는 부르심의 모습을 가만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자 부르심을 받아서 있는 너희들의 모습을 보아라. 너희 가운데 문벌 좋은 자가 있느냐? 뭐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느냐? 세상 학문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 있느냐? 없다. 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아니냐? 하나님의 부르심이 왜 이러한가? 그 이유는 인간으로 자랑치 못하도록,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30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은혜를 받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된 구원이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너희들 사람, 인간의 무엇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지혜가 우리에게 계셨으니 그 지혜의 구체적인 내용은 의와 거룩과 구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하나님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되게 하시는, 그리하여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이 죄인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능하게 된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씀합니다.
2장에 가면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선 복음을,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할 때에 말이나 지혜의 뛰어남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교회를 개척하실 때 복음을 전할 때에 그의 복음 전함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선포할 때 말이나 지혜의 뛰어남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는데, 물론 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 말의 앞뒤가 안맞아서 듣는 사람이 무슨 말인가 몰라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나 말의 조리가 있어야 한다는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겠는데 좀 그 근사한 어휘, 또는 언변을 구사해야 된다고 합니다. 한편 이야기를 들은면 그럴듯한데 이 성경을 읽으면 좀 아주 난감해집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말이나 지혜의 뛰어남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알려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려 했고 너희들을 향해서 인간으로서의 나 바울은 약함과 떨림과 두려움에 차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함과 떨림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무능함, 무력함을 철저히 깨달은 자의 태도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무엇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절대 떨거나 두려움이나 약함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 지혜에 있어서, 세상 학문에 열등감을 느껴서 이럴까요? 저는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인간적인 능력을 철저히 불신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나는 부족하다. 겸손하다. 그 정도가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능력과 지혜, 그런 것을 철저히 불신하는 그러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즉 자기에게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연히 복음을 전하는 태도에 있어서 약함과 떨림과 두려움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없으니까. 나의 말과 선포가, 나의 복음 전함이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의 나타내심을 따라, 증거하심을 따라 전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 논리적인 설득력, 그것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논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따지고 들어가야 되겠지만 흔히 논리적 설득력, 그것이 사람을 믿게 만들지 못합니다. 언쟁을 벌여갖고 저 사람은 나한테 꼭 말 한 마디 못하도록 딱 입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일상 경험에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나타내심, 어떤 분은 성령님의 나타내심에 대해 어떤 이적적인 표적,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여기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너희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 거기에 근거한 믿음, 이러한 그런 뜻이 되는데 어떤 이적적인 표적이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만 보아도 알 수 있죠. 뭐 수 많은 이적을 보고도 안믿었으니까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도 안믿는다고 했습니다. 표적, 이적적인 능력을 보는 것이 믿음을 산출해낸다고 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께서 이런 이적적인 것을 행하고 따라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보는 것은 조금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나타내심을 따라 증거했다고 하는 것은,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여튼 설교를 할 때, 복음을 전할 때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내심을 따라 증거하심에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나타내심이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이라고 했는데 그 아래 설명이 됩니다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시하신 것과 그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복음이 받아들여져 믿어지는 것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복음을 계시하시는 것 사도들에게나 선지자들에게나 복음을 계시하게 하신 것, 그 복음을 사역자를 통해 전하게 하시는 것, 이것을 또다시 받아들여 믿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이 성령이 나타내심을 따라 증거했다는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2장 6절 이하에 보면 우리 온전한 자 가운데서 말을 해보자. 말하자면 너희 신앙이 성숙한 사람, 온전한 사람을 보고 완전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고 뭔가 사리를, 영적인 일을 분별을 할만한 사람끼리 이야기해보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이 세상의 그런 지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관원들, 말하자면 어떤 지식적인 면에서, 어떤 지적인 면에서 남을 지배하고 가르치는 어떤 그런 가장 최고 형태의 세상적, 세속적 지식,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떤 눈도 보지 못했고, 어떤 귀도 듣지 못했고,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듣도, 보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 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이를 감당케 하신 이 복음은 사람들이 듣지도 보지도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찰하시는, 아시는 성령께서 이것을 계시하시고 인간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가 전함에 있어서도 인간들의 지혜로 깨달은 것, 어떤 가르침을 받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우리가 전하고 이것을 받아 들임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퓨뉴마티코스'가 아니면, 성령으로서가 아니면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복음을 계시하시는 것, 이것을 전하는 것, 이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모든 것이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과 결합이 됩니다. 결국 성령 일변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간추리면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 내에 있는 어떤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너희가 어찌 이렇게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가? 그 분열된 원인이 영적 지도자들 때문인데 이것은 너희가 잘못이다. 교회의 토대는 어떤 인간들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의 십자가요, 그와 연합한, 연합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의 구속을 실현시키시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신자가 될 수 있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고, 이것으로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가 세워지는데 이 복음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그 복음을 복음의 내용, 이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인데 그가 하신 일, 구속인데 인간의 구원의 객관적인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다 그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계시, 그 의미를 그 사건의 말의 의미를,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그 모든 것을 계시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계시하신 것이요, 이것을 전하는 것도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믿어지는 것도 성령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복음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분명히 복음을 사도 바울이 외쳤습니다. 외쳤으나 그 복음을 전함으로서 세워지는 교회는, 교회의 세워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가장 드러난 가장 구체적인 사실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성삼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세워지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결국 그저 본질이 희미하면 그 희미한채로 놔두면 되는데 교회가 교회를 목회하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구사항들이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아까 그 자질구레한 일들에 치여가지고 점점 본질에 흐려가지고 본질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나중에는 본질과는 동떨어진 지엽적인 일들에 파뭍혀서 그걸로 끝장이 나버립니다.
저 자신의 경우 아직 교회가 적어서 그런지 뭐 특별히 부딪히는 문제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저 자신이 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참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 부족하고, 참 온전히 성령님께서 나타내심을 따라 증거하는 일이 부족해서 말에 어폐가 있습니다. 저 자신의 부족 때문에 많이 곤혹스러워 합니다만 실제 교회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첫번째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세워집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그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그 첫 시작부터, 그 근원에서부터 가장 구체적이고 지엽적인데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참으로 우리 심령의 고백이 되고 실제 내가 행하는 모든 목회에 있어서 이 믿음의 고백, 이 믿음의 고백이 실제 목회로 나타나면 그런 것이 목회인가? 하고 알게 됩니다. 그것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고 이 복음이 나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복음이 전해지고, 이 전해짐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을 체험한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피곤하고 이 첫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익숙해서, 많이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그 실제 자체는 귓가로 스쳐 지나가고 마음의 표피에서 스쳐 지나가고, 입에 스쳐 지나갈 뿐이지 이것이 참으로 우리의 심령에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우리 자신이 믿고 참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복음이 심령에 참 받아들여지고, 그것에 놀라운 구원이 이루어짐을 체험한다고 하면 그처럼 복된 일이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대개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세상의 어떤 뭣을 주던지 목사직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이보다 복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체험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편해요? 얼마나 편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 뭔가 목회를 하다가 막혔다, 뭐가 잘 안된다 그래서 막 아둥바둥 애를 써야겠다고 마음에 뭐가 심어져 오면 아이구 뭐가 잘못됐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둥바둥해야 할 일이 아닌데 왜 내가 아둥바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내가 은혜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있는 역사 속에 내가 있지 못하다라고 하는 증거가 아닌가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워가시는 이와같은 강력한 세상의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사 속에 그저 우리는 거기에 참여해서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도구가 될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가장 보람된 일이고 기쁜 일이요, 복된 일인데 그 은혜에서 떠나면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불안하고,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불안인 것 같아요. 그 은혜 안에 있으면 불안할 이유가 없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불안할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경우 내가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그런 것이 눈에 보여도 조금도 걱정이 되거나 불안하질 않아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아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아니까. 그가 인도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한데 그렇지 못하면 불안해지기 시작해요.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어떤 그런 분명한 의식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 자연히 내가 어떻게 움직여 봐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냥 아까 어떤 분이 좌충수를 둔다 그것이었는데 그렇게 불안이 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이 되면 정말 좌충수를 두게 됩니다.
일에 대해 온갖 어떠한 행동을 해보지만 결국 그냥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성령님의 역사는 구체적인 사건, 역사적인 사건에 토대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일, 십자가의 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매우 곤란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복음은 나중에 후기, 목회서신 쪽으로 갈수록 계속 어떤 말씀이 많이 나오는가 하면 이 건전한 교훈, 바른 교훈, 바룬 가름침이라고 많이 나옵니다. 그에 반대되는 것을 거짓 선생, 거짓 선지자 이러이러한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결국 교회 내에서도 복음이 많이 변질되어서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죠.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 복음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변질될 수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교묘하고 간교한, 그리고 참으로 구분하기가 힘든 형식의 변질이 흔히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외적으로 가장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갈라디아에 넘어가서 그 부분을 취급할까, 아니면 고린도전서를 계속할까를 마음 속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하지만 분명히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나 있는 만큼 넘어가기로 합시다.
갈라디아서 초두에 보면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줬는데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준 나, 우리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미 전해준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그 변질된 복음, 다른 복음이란게 무어냐?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니까 오늘 우리로서는 행하지 않는 할례를 붙이고 있으니까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내용 그 자체는 아주 교묘한 것입니다. 결국 이제 그것이 무어냐면 자기 의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만이 구원을 얻는 구속의 완전성,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의 충족성 그것을 완전히 붙잡지 못하니까 뭔가 덧붙여야 합니다. 내가 율법의 무엇을 덧붙여야 한다는 그것이 얼핏 보기에는 참 경건한 것 같고, 그 실제에 있어서 교회에서 가르칠 때 이 부분을 제대로 헤아려서 가르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많이 오해도 하고 잘못 가르치기도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안될 것 같은 그것이 무서운 변질된 복음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 고린도전서에서 계속 말씀을 보겠습니다.
2장까지는 교회는 철저히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세워진다고 하신 다음에 3장에 와서는 다시 처음에 문제가 되었던 교회의 분쟁, 분열의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그의 능력으로, 그의 은혜로, 철저하게 세워가시는 이 교회에서 도대체 복음 사역자, 사도나 교회의 직분자, 지도자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교회의 지도자, 사역자들은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하는 사역자 문제에 대해서 3장, 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이 고린도교회의 성숙지 못함을 나무라신 다음에, 자기들은 온갖 신령한 은사가 있고, 또 교회에서 한껏 교만해진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이다고 말씀합니다. 네피오스, 즉 젖먹이들이라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전에도 너희는 단단한 식물, 말하자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어떤 상태에 이르지 못했으나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한다고 교만해진 그들에게 말합니다. 지식으로는 수 많은 그런 참 성경지식, 말씀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또 조리 있게 표현할만한 그런 능력도 있는 사람이요, 거기다가 성령님의 어떤 그런 나타나는 이적적인 은사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특별히 그런 것이 많았습니다.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문제가 될 정도로 많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영적으로 어린아이다. 아직도 사르키마우스 육적인 사람이다. 왜 육적이라는 말을 쓰는가 하면 너희들에게 생겨난 그 분쟁, 교회에서 생겨난 분쟁이 어떤 종류의 분쟁인가 하면 3절 말씀을 보면 젤로스 카이에리오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생겨난 분쟁이 무엇이든간에 시기, 질투에서 비롯한 분쟁이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1장에서는 고린도교회에서 생긴 분쟁이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싼 어떤 암투였고, 그것으로 비롯된 분열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해놓고 여기 와서는 그 동일한 분쟁에 대해서 그 분쟁이 진짜 어떤 내적인 동기는 시기심, 질투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대개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싼 그 분쟁의 성격을 이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바울파다. 바울이야말로 참 훌륭한 진정한 지도자다. 적어도 고린도교회에서 그는 개척자요, 그가 이 교회 참, 진정한 지도자다고 보았습니다.
그 후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는 성경지식에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참 복음을 바로 전해듣고 그 많은 성경지식으로 고린도교회에 많은 유익을 끼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 역시 훌륭한 사람이다. 거기에 나느 게바가 좋다. 나는 게바나 누구도 다 싫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이런식으로 있었겠습니다. 이렇게 이런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파당을 형성한 것이 여기서는 내적 동기가 질투심, 시기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어떤 순수한 동기에서 나왔다기 보다 결국 이 사람들이 영적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파당을 형성한 것이 결국 이런 식의 파당형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바울파라고 함으로써 말하자면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과 나 사이를 연관시킴으로써, 나 자신의 지위 향상을 노리는 여기서 주로 책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물론 평신도도 있겠지만 주로 그 후에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나, 교단의 높은 어른과 자기는 연줄을 매어갖고 나는 이 사람에 속한다 그래갖고, 결국 이렇게 한 것은 그 지도자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결국 나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서로 교회 내에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교만과 어떤 자랑 말하자면 교만, 자기를 높이려고하는 욕심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면 시기심으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 둘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어찌해도 좋다 하는 사람은 시기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시기라고 하는 것은 항상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 그것은 결국 뭐냐하면 나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있을 때 시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어떤 그런 이런 것이 있을 때 시기가 생겨나는 것인데 교회의 분쟁을 가리켜 내적 동기가 시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지도자를 둘러싼 파당이라는 것이 악한, 추한 어떤 것이 동기였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교회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일이 존재해 왔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얼마나 이런 것이 심했습니까 지금 크게 개선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를 내세우려는 그것이 동기가 되어 파당을 형성한 것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니 그것이 무엇을 잡든지 요즘같은 경우 지방색을 상당히 큰 원인으로 잡습니다만은 저는 지방색이 없어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기심이 있는 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자꾸 나타납니다.
교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것이 학벌이라는 형태로, 학연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데 문제는 그것이 시기심으로 말미암는다 그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참 너희들은 육적인 사람들이 아니냐? 너희들이 어찌 인간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아니냐? 교회는 아까도 봤듯이 교회가 세워지고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성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있는 역사로 되어지는 것인데, 이런 시기심에 의한 파당형성이 과연 성삼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대답은 뻔합니다. 인간을 따라한 것이 아니냐. 인간은 타락한 것이 아니냐 그말입니다. 타락한 인간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아까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하지 않으면 자연히 인간을 따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간지대가 없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 그말입니다. 이런 시기심에서 뭐냐 애매한 영적 지도자들을 불러서 자기들끼리, 자기들 욕심을 따라 파당을 형성해 놓고 지도자들 간의 관계를 서먹하게 만드는 것, 입장 곤난하게 만드는 것, 하여튼 이런 일을 두고 바울 사도께서는 교회에서의 지도자, 사역자들의 위치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4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 속했고,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 속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어찌 너희들이 인간들이 아니냐?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에 의해서 세워졌는지, 누구에 위해 세워지고 존재하는지 안다 그러면 나는 바울파요, 나는 게바파요, 아볼로파라는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는가? 도대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을 통해서 너희들이 믿은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너희을 믿게 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디아코노이 남에게 부림을 받는 일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께서, 주께서 각자에게 일을 맡기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따라서 나는 심었고, 고린도교회를 개척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양육을 했으되, 그러나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중요한 것은 자라나게 하신 이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1, 2장에서 말씀하신 그것을 결론 삼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인데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에 자신이 고민하고 애쓰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내가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 내가 교회를 위해서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만 결국 실제에 있어서 그런 근심을 하는 가운데 내가 내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그런 악심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교회는 내가 세우는 것인가? 내 힘으로 내가 세우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그대로 순종하여 그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 어떤 부분은 책임회피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세워가시고 부족한 저들에게 가르쳐서 그저 순종하게 해달라라고 하면 목회가 그렇게 참 편안할 수 없습니다. 어찌그리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나중에 일이 많아져서 고달파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근본적인 마음은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리는 그의 일의 심부름군이니 그저 얼마나 짐이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근본적인 펀함이 있어요, 일에서 다 놓여나는 그런 편안함이 있어요. 그저 묻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밖에 없고 그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 밖에 없고, 참 깨닫게 하시는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지 내가 열심히 교회를 개척해 심고, 열심히 말씀으로 양육하나 그러나 자라나게 하시는, 그 뿌려지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이 심령 속에 싹터서 영혼을 그 영혼으로 자라게 하시는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이것이 분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맡았던지 간에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맡기셔서 행하게 하시는 일군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건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나중 23절 22절과 관련해서 중요한 말씀인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건물이라는 것이 조금 이 말의 어감을 분명히하기 위하여 설명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세우려 하시는 것, 그가 역사하셔서 가꾸시고, 일구시고, 심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 어떤 그 모든 역사하심의 목적, 터전, 일의 대상이 누구냐?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세우시려고 하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건물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건물이 너희라는 것이고,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역자의 위치는 무엇이냐? 동역자들입니다. 일군들이다 그 말입니다. 그 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하는 일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장차올 것이나, 현재 일이나, 이 모든 것이 바로 너희 것이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교회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역자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교회가 사역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세우시려고 하는 것은 그의 교회입니다. 그가 뜻을 정하시고 그가 선택하사 부르신 사람들을 믿게 하셔서 교회를 이루시는데 또 그 교회로서 존재하게 하시는데 그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세우시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교회라 그 말입니다. 사역자는 바로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 참 귀중하긴 하지만 그 사역자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의 독특한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그의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일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대체 바울이 뭐냐? 아볼로가 뭐냐?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0절 이하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워가게 하심에 있어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그 후에 여러 다른 복음 사역자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일했겠습니다. 이렇게 사역자를 통해서 그의 교회를 개척, 세우시는, 심고, 물주시고 함으로 교회를 세우고 성장하고, 자라게 하시는데 이런 그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가 교회를 이루어가는 이 그의 사역자를 통해서 그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 바울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 대해서 10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내가 터를 닦아 두었고 다른 이들이 그 위에 세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어떻게 그 위에 건설하는지 주의해서 건살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아무도 다른 터를, 이미 닦여진 그 터 위에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신데, 터 위에 매, 다른 터를 세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선 10절 말씀에 보면 바울의 사역의 독특함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토대를 놓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놓은 토대 위에 아볼로는 세우는 사역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닦아놓은 터 위에 다른 사람들이 세우는데 이 위에 세울 때 매우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닦아논 터 외에 다른 터를 닦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닦아논 그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서는 절대 안됩니다. 바울이 닦아놓은 터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왜 바울이 내가 닦아놓은 터 위에 다른 것을 닦지 말라고 했는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일종의 바울이 텃세를 하는 것인가? 내가 선임자니까.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를 닦고 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니까? 거기서 다른 터라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그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라디아 1장과 매우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내가 전해준 그리스도의 복음 그것을 변절시키지 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 혼자서만 진리를 가졌는가? 나만 복음을 아는 사람인가? 어찌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교만한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은 여기서 바울은 조금 다른 어떤 위치에서 자기의 독특한 위치를 인식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로서의 위에 교회의 터가 세워졌다는 말은 그것은 사도나 선지자의 어떤 특별한 사역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보다 특별히 사도와 선지자를 언급한 것은 그들이 받은 계시의 말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와 선지자를 불러서 행하게 하신 사역의 독특한, 특별한 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바른 복음을 그들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계시하셔서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전하는 말이면 다 옳은 것이냐? 말하자면 어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된 복음이냐 아니냐,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 그것을 판가름하는 것이 결국 사도가 전하는냐 아니냐에 달린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그의 복음을 상대에게 전하게 하시고 계시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복음의 참된, 어떤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사도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어딘가하면 갈라디아서 1장 8절인데 거기를 보면 복음을 이미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미 전하여진 그 무엇이다 그 말입니다. 객관적인 실체라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 이미 확실히 전해졌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했지만 이 복음을 전한 우리가 복음 외에 딴 소리를 하면 이미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되므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복음의 진의가 그것을 말한 사람이 사도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도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로 전해졌다는 사실이고, 전해진 그 복음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복음이요, 단지 그것이 사도를 통해 전해졌다는 것뿐입니다. 이미 바른 복음은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점을 바울 사도께서 분명히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곳에서 바로 내가 그리스도라는 터를 이미 닦아 놓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 터를 변질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조금 전에 드린 말씀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텃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 자신이 진리를 독점해서 나 외에는 바른 복음을 전할 자가 없다는 그런 유아독존적인 생각에서도 아니요, 자기가 고린도교회에 전한 그 복음은 참되니 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복음은 흔들릴 수 없는, 변개될 수 없는 참된 복음이니 절대 변개시키지 말라.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바울이 닦아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의 터 위에서 여러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위에 지어져 가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밭이라고도 표현했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건물이라고도 표현했는데 이것이 16절에 가면 이것을 가르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의 터, 우리의 교회를 세워갈 때도 주의해야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그 위에 세우는 모양도 다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재질이 다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무나 짚이나 돌로도 할 수 있고, 금이나 은과 같이 이와같은 귀한 것으로 할 수 있다 그럽니다.
대개 여기 이것은 여러가지가 나옵니다만 결국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불에 의해서 타 없어지는 것과 타 없어지지 않는 것, 말하자면 영원불변한 것, 그런데 집은 영원불변한 것으로 세워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것으로, 참된 것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런 것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 16절에서 너희는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멸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가 바로 그러한 자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가는 super structure, 교회의 모습, 성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어떤 그런 전으로서의 성격을 한 마디로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 그러니 너희도 바로 그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교회는 거룩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가는 교회의 모습은 거룩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기 다시 반복이 됩니다만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지는 것으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며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이루사 거룩하게 하시는 곳이 바로 교회인 만큼, 18절 이하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속지 말라 이 세상에 있어서 자기가 똑똑한 것, 지식이 있는 자라면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래야 진정한 지혜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이요, 이러한 인간적인 지식, 인간적인 지혜, 세상 것으로는 결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논리, 지혜있는 자들의, 학식있는 자들의 논리를 헛된 것으로 아신다고 합니다. 21절 이하에서는 이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바로 너희들을 거룩한 교회로 세워가신다고, 하나님 역사의 목적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사망이나, 죽음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차 올 모든 것이 바로 너희들의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께 속한 것일뿐이요,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그가 아무리 훌륭한 영적 지도자라 할지라도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지 교회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런 교회에서 인간으로 자랑하게 하지 말라. 인간이 나서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4장 1절에 보면 교회 내에서 사역자들의 위치에 대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만큼 그와같은 교회 내에 있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내세울 것이 못된다. 특히 바울은 무엇이고 아볼로는 무엇이냐? 말하자면 참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주인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한 다음에, 그러나 그와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일군들이 바로 이 사역자라고 말씀합니다.
다음에 4장에 와서는 조금 시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반드시 이것이 전제가 되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다. 사역자든 누구든, 아무든 간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를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는 바로 그의 소유라고 하는 것이 항상 근본 토대가, 근본 전제가 되어야 하고 이런 전제 하에서 우리가 고려할 것에 대해 4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들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로 여기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이코노모스=청지기라는 단어인데, 청지기라는 것은 알다시피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위탁 받아서 대신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우선 청지기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말은 맡은 자로 되어 있습니다만은 청지기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피스토스라 그럽니다. 페이풀, 여기에 충성이라고 하니까 대개 교회에서 년초에 직분을 맡길 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시오.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런데 피스토스의 첫째 요소는 열심이 아닙니다. 피스토스는 페이풀, 그리고 이 피스토스라는 말이 참 청지기라는 말과 함께 쓰였기 때문에 청지기의 본질이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페이풀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그가하는 모든 일이 주인의 것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인만큼, 얼마만큼 주인의 뜻에 충실한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 목회자의 사역, 교회 사역자에 있어서 그의 사역의 평가는 바로 이 길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충성이라고 해서 막 눈코뜰새 없이 뛰어야 그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 피스토스의 첫째가는 중요한 어떤 것은 특별히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열심이 아닙니다. 주인의 뜻에 얼마나 합한가? 주인의 뜻에 얼마나 충실하게 그의 사역이 행해졌는가? 그것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의 것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한 일 같으면 그야말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것을 낭비하고 착복한 자지 그것이 어떻게 청지기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청지기에게서 요구되는 첫째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부합하게 일하였는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하의 말씀에서는 각자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것을 강조한 다음 그와같은 말씀 배후에는 사역자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을 암시하는 그런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 모든 종은, 일군은 그 주인에게 책임을 지는 자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못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물론 교회의 정당한 질서와 제도에 따라 어떤 제재를 가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역자들에 대해서 그 사역자들은 원칙적으로, 각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원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인정하라는 그런 뜻이 그 아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사역자에 대한 평가를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 사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좀 괜찮아 보이는 데 알고보니까 순 도둑놈같은 사람도 있고, 처음에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했는데 알고보니까 괜찮은 사람도 있고, 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람의 속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모르니 평가나 판단에 있어서 신중할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아래에서 사역자들에 대해서 너무, 이제 여기 4장에서 한 마디 말씀은 앞에서는 사역자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한 후에, 교회는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것이고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일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해놓고, 4장에서는 그러나 그러한 일군으로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뜻대로 사용하는 그런 청지기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위치를 인정하라는 말이 그런 것이 4장의 주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나옵니다. 너무 이제 도를 지나쳐서 사역자들을 혹평하는 것을 책망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파당이 형성될 때는 이것이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파당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냐하면 나는 모 지도자가 좋다. 그 사람이야말로 신실하다. 그 속 동기야 이기적인 무엇이 있든지간에 그가 좋다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쁘다고 나타나야 그래야 파당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파당형성에 있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게 되고, 자기가 비난하는 자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거나, 깍아 내리거나 억울한 어떤 혹평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바울파에 속했다는 사람은 다른 파에 속한 사람들이나, 그 지도자인 게바나 아볼로에 대해서 혹평, 낮게 평할 것이고 이렇게 또 다른 아볼로파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낮게 평가하겠죠. 이렇기에 이런 글이 게재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리 없이 왕노릇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되게하셨다. 사도라고 하는 것은 그 직분 서열, 그 직분의 중요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맨 선두에 선 직분입니다. 이 직분 맡은 자를 만물의 찌끼 같이 되게 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굳이 언급한 것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 맡은 자를 만물의 찌끼와 같이 가장 미말에 두신, 미말의 취급을 받게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파당형성이나 이런 곳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시기, 분쟁, 혹평, 자기 교만, 자기를 높이려는 것에서 결국 교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만이 게재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사람들에 대한 외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도들을 가장 험한 대접을 받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미말에 위치하게 하신 뜻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겸손을 말한 말이겠습니다. 16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와의 특별한 관계, 내가 복음을 통해서 너희를 낳은 자라, 아비와 같은 자라고 말씀하면서 그들에게 권면하시되 너희는 나를 따르는, 모방하는, 닮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디모데를 통해 확인해보면 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모든 일을 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교회에서 항상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나의 모든 일을 상기시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께서 자기를 닮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특별히 마지막에 디모데를 통해서 내가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데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그 길들을 네가 상기시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의 뜻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자기가 모든 교회에서 가르친대로, 어떤 교회에 가서든 가르치는대로 그 원칙에 충실해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그와 같은 바울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언행일치라 그럴까요. 그가 가르친 그대로 행하는 그 모습을 디모데를 통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선 이 말씀을 들으면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닮으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여기서 분명히 바울은 자기가 가르친대로 모든 어느 곳에서나 실천하는 자기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잘 모르고 그냥 들으면 교만한 소리 같은데 그러나 바울의 의중을 좀더 깊이 이해한다면 이것은 교만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5장에 가면 그 말씀이 나옵니다만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바울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그 말씀, 또한 가르치는 그 말씀이 자기 삶 속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을 보고 나를 닮는 자가 되라고 말하였는데 만일 바울이 자기가 이처럼 말씀을 자기 생활 속에 실현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닮는 자가 되라고 했다면 분명히 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삶에 대해서 내 마음과 내 삶 속에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 실체화 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런 자세로 살았다고 한다면 나를 닮으라고 한 말은 좀 더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은혜 안에 너희도 거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이 자기를 그와같은 사람으로 만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나를 닮으라고 한 것은, 인간 바울, 말씀의 실천자로서의 그런 바울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그 동일한 은혜를 너희도 받아들일 것을 간곡히 원하는 그런 말씀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다고 그러면 여기서는 교만한 자를 책망하는 가운데 자기도 동일한 교만한 자가되고 말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책망하는 가운데 곧 교색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씀,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능력있게 역사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사변적인 생각 속에나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삶에 있어서 그 능력을 나타내는 역사하는 나라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특별히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까 그 자기가 가르친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진 자기의 삶의 모습을 닮으라고 권고한 모습이 더 잘 이해가 될 줄 압니다.
이와같은 능력 있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는 실제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자신에게 이루어져서, 가르침이 자기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자로서 이러한 나를 닮으라고 권고하고, 그 다음에 교회의 권징문제로 넘어갑니다.
교회에서 사역자의 위치가 지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아까 충성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충성은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은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시면 인간은 가만히 앉아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열심이 없는 것인가? 인간은 아무 것도 안하고 사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인가? 이것을 부분적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이지, 가르침을 받아 산다는 것이지, 그것이 외향적으로만 따져 그것이 적극적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아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인간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것은 무얼 전제로 하고 있느냐 하면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면 인간들은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하고 인간의 모든 것은 배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조금 전에 이야기 했습니다만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시면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와 인간의 노력을 완전히 분리해 버리면 그것을 프로테지로 따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항상 성령님과 나와 상관없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항상 성령님 안에 있기를 원하고 그가 원하시고 그가 힘주시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지 이 둘이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육을 따라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이 두 경우 외에는 없습니다. 육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그럽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럼 성령 안에 살 때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에게만 참 순종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그럼 성령님을 따라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분명하면 해답이 다 나오리라 생각하는데, 우리 신자는 때로는 성령님을 떠나서 자기 혼자 행하고, 때로는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밖에 있는 것은 항상 악하고 육적인 생각이고 항상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사는 것입니다.
우선 이제 성령님께서는 먼저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가 항상 마음에서 시작되게 되어 있잖아요. 마음에서 결정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하게 되어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감화하셔서 물론 다른 외적으로도 역사하십니다만은,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를 따라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지, 순종하게 하시는데 이때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를 어떤 엉뚱하게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은 말씀을 깨닫게 하고, 그 말씀이 내게 실현되게 하시는 것,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내게 평안을 주시고, 참 평강을 주시는 것, 나로 하여금 순종할 마음을 주시고 또 순종하게 하시는 그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별하는 것도 항상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판별 기준도 항상 성경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나타난 외적 현상, 뭘 보았다. 붤 느끼는 이상한 것들은 어떤 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좇아가지 말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적적인 것이 나타난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요한 일서에서는 분명히 그럽니다. 영들을 다 믿지 말라 그랬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속하였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냐 시험하라 그랬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라 그랬습니다. 확인한 다음에 어찌어찌 하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실 인간적으로 많이 유혹을 받습니다. 열심히 하고나면 무엇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르면 좀 부족한대로 있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나 자신이나 교인들이 동심한다고 하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에 대해도 바로 가르치지 못했구나 생각하고 바른 것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어떤 좋은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타날 때 우리는 항상 그것의 근원이 되는 내부로부터, 더 근본적인데서부터 돌아가서 거기서 어떤 고장이 생겨나서 밖으로 이런 잘못된 것이 드러났느냐 이것을 자꾸 보자는 것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특히 어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능력으로 사는, 어떤 그런 영적인 것이 전제되지 않고 자꾸 외부적인 것만을 거론할 때 결국 그 과정이 오래 누적이 되면 결국 율법주의가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은혜와 외부적 삶의 통합, 긴밀한 관계성, 그것을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적인 연관성을 늘 강조해서 함께 묶어서 이야기하지 않을 때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제입니다.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지 먼저 열매가 있고 뿌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문제를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면 믿음이 없다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깥이 뭐가 잘못됐다 그러면 그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왜 한국 교회 이 모양이냐 뜯어 고치자 그 정도로는 안된다 그 말입니다.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 그 행동 뜯어 고치시오 한다고 해서 그가 고치겠습니까? 그 사람을 불러다 놓고 당신 교회의 집사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겠소? 그리고 정 안되면 면직시킨다고 해서 그렇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외부적인 치료나 강제적인 어떤 것이 치료가 될 수 있겠는가? 권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교회에 어떤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나쁜 영향을 줄 때에는 권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다고해서 그 사람이 고쳐지느냐 입니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밥보다 반찬이 많다고 하는데 배보다 배꼽이 크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지엽적인 것 그런 것이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을 차지하게 되면 본질적인 것을 소홀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 한계를 우리가 인식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은 교회에서 보통하셨고, 잘 알지만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요즘 그런 쪽으로 많이 나가니까 다시 한번 본질적인 것을 되새겨보자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인가? 무엇이 토대고 무엇이 지엽적인 것인가? 한번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공중 앞에 설 때 마땅한 태도도 있고 말하는 태도나 쓰는 말투 뭐 여러가지 문제가 되겠습니다만은 왠만큼 상식을 갗춘 사람이라면 알지 않겠습니까? 요즘에 와서는 복음이 마음 속에 있으면 그것에 적합한 태도나 뭐가 자연히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특별한 오랬동안 어릴 때부터 형성된 나쁜 버릇이 아닌 이상 뭐 그런 것이야 교정을 해야 되겠지만 스스로 알게 되고 적합한 태도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요즘에 와서 그런 언변이나 여러가지 조직을 통하여 어떻게 적극적인 효과를 내어보자는 쪽이니까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요즘와서 어느 교회 어떤 사람은 축도할 때는 마이크를 에코로 해놓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한다는데 생각이 그런 쪽으로 발전하다보면 그렇게 되는가 봅니다.
저는 권징의 주된 의도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리라는 말이 여기 안나오죠. 사실 논리라는 말 자체가 애매한 것입니다. 논리라고 하면 사고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사고의 법칙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몇 가지 이야기한 것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받아들일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점을 분명히 하고자하는 것,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인간은 그냥 무의식 상태에 가만히 있는데 뭐가 그냥 번쩍해서 들어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논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좀더 폭 넓게 생각하면 이성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데,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타락했기에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타락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인간은 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해 있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도 불구하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항상 이성적인 존재로 존재론적으로 말합니다. 생각하고 이해가 되는 쪽으로 그렇게 가게 되어 있고, 이런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 형식이라고 봐야지 그것을 갖다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와같은 존재방식, 하나님께서 그와같은 존재로 만드셨으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자가의 도를 알리실 때도 이 존재 방식을 경유해서, 통해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은 저의 이야기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왜냐하면 종전에 우리는 이성이라는 말을 다르게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종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정신작용이라고 그럴까요, 정신기능이라 그럴까요. 그런 것을 통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인간 정신기능을 많이 나누어 가지고, 특별히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로 어떤 자체의 권위를 가지는 무엇으로 이해를 해왔는데, 그런 기존의 이성 개념 때문에 조금 약간 서로 의사소통하는데 모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넓은 의미로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정신적인 작용, 기능, 질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베푸신 존재형식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꾸 믿음과 삶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봅니다. 그것은 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삶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다보면 그것은 자연히 포함되게 되어 있고, 자연히 삶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인데, 먼저 복음을 전할 때 우선 죄인인 것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죄인인 것을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 가르치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까? 아니오. 율법은 그렇게 기능하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면 정상적인 사람은 그 앞에 죄인인줄 알고 고꾸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고나면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요? 이미 죄인임을 만들 때 동일한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선포한 것인데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이제 이렇게 생각하시는가 본데 믿음을 강조하게 되다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거룩한 뜻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선포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율법은 동전의 양면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보면 이 경건치 못하고 악하다는 것부터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한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아주 무력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이런 율법의 원리, 말하자면 지켜 행해서 의로와서 생명에 이르는 이 율법의 원리 외에 또 다른 하나의 원리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의롭게 되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자체도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사는 새로운 생명, 부활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새 생명의 본질 자체가 뭔가 하면 죄에 대해서 돌아서고 하나님을 향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면 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 어떤 의미에서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으니 뭐 따로 살라 어쩌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에 자기가 뭘 어떻게 지켜서 이른다는 것이 율법주의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은혜로 이 생명에 이르러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종하여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존하여 믿음의 원리로 산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자체가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향해 사는 방법,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인가? 그런데 첫 부분이 제대로 이루어 졌으면 둘째 부분에 문제가 생길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누어 생각하지 맙시다. 흔히 삶의 문제를 취급할 때 흔히 야고보서를 율법주의에 가까운 책으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만 그 반대입니다. 말하자면 믿는다 하면서도 열매가 없으면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바꿔 이야기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상 상태에서 살아 역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히 생산적이어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삶을 분리해갖고 이것 따로 저것 따로 분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행위가 잘못되었으면, 믿음과 행위는 항상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 원인을 근원적인 것인데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크게 이제 지도자를 둘러싼 교회 분쟁과 관련해서 교회가 무엇이냐? 그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또 이것이 지도자를 둘러싼 분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이 지도자, 사역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되 복음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세우시나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 위에 그가 이루신 구속 위에 세우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가? 그 교회의 귀함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우는 교회의 귀중함, 소중함에 대해서 좀 비유적인 표현들을 쓰되, 뭐 그리스도의 귀중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위에 세워지는 super structure에 대해서 참된 교회는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이 불변의 것, 참된 것, 비유적인 표현입니다만 이런 것들로 지어져 간다고, 또 다른 표현으로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거룩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귀중함에 대해 그 아래에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있는 일이나, 장차 올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교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함으로서 교회가 비록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그의 소유인 것은 사실이나 또 동시에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그와 관련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가시는 것인 만큼 그 뭐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염두에 두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물주는 아볼로나 심은 나 바울이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고 말씀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일에 대해서 그것을 염두에 둘 때는 교회의 사역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4장에서는 좀더 시각을 달리해서 하나님께서 사역자 저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시는 그 사역자의 위치 그것을 또한 인정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고 말씀하면서 그와같은 위치를 인정할 것을 특별히 명하는 것은, 지도자를 둘러싼 부작용으로서 어떤 것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고린도교회 교인들 내지, 그 이후의 사역자들이 상당히 교만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오류를 거쳐서 5장의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앞에서 특별히 고린도교회의 교만함을 지적한 다음에 5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거론하는 것은 그의 교만을 꺾는데 아주 유효적절한 내용 배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의 교만을 꺾기 위해 여기 이것을 위치시켰다기 보다는 바로 조금 전에 3장에서 교회의 귀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교회의 성격을 한 마디로 성결, 거룩이라고 말한 다음 자연히 순결에 대해서 그 다음의 논의로 이어지는 것은 또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있어서는 이방인 가운데서, 믿지 않는 자 가운데서 오히려 찾아보기 힘든 것인 불륜이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잘 압니다. 이와같은 고린도교회에 성결 파괴 현상을 거론하면서 바울 사도께서는 매우 강력한 권징 시행을 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권징을 강력히 시행해야 한다는 이유로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이하에 보면 너희 자랑이 선치 못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결국 여기서 이제 강력히 권징을 명하는 이유에 대해서 첫째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오염성이 있어서, 전염성이 있어서 그것을 제거하지 않을 경우 온 교회가 결국 멍들 수 밖에 없다. 함께 그 죄에 물들 수 밖에 없다는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 통일성 그것을 전제로 하는 교회의 유기성을 설명합니다. 교회의 전염성이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유기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처리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죄가 가만히 있으면 범죄한 그 한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이 없으면 뭐 얼마든지 기다려도 됩니다만, 그것이 처리될 때까지 내버려두고 돌아오면 다행이고 안오면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지만 이 죄는 전염성이 있어서 그저 가만 내버려 둘 경우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악을 제거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죄가 왜 전염이 되게 되어 있는가? 그것은 죄 자체의 성격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러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즉,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별히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 유대관계라는 것이 매우 긴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동체, 유기적 공동체로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멍들면, 병들면 그것이 그 자리에 가만 있지 않고 전교회에 퍼지게 되고 전체를 부패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그런 독특한 성격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누룩 등을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의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이런 말씀들에 의해서 구약의 유월절과 무교절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셔서 애굽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어 자유케 하신 날입니다. 그날로부터 칠일동안 유교병을 먹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영적본질을 상징하는 어떤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노예 신분, 세상의 노예로 있던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떤 새로운 존재가 된 누룩없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을 기념하여 칠일동안 지키라고 한 것은, 죄에서 자유케된 어떤 그런 나중에 이러한 말이 반복이 됩니다만 죄에서 놓여나 자유케된, 거룩하게 된 순결한 상태를 언제나 지켜 나갈 것을, 보존할 것을 명하는 하나의 예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9절 이하에 보면 바울에게 한 가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한 내용이 있는데 이전 편지가, 여기 이전 편지라는 말이 없습니다만 그 뒤에 음행자들과 함께 섞여 살지 않도록 이미 썼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5장 앞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미 이전에 또 다른 서신을 보낸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만은 제 경우는 이미 다른 서신을 보낸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여기서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음행자들과 교제하지 말 것을 명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행자들과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그런 믿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 음행을 하는 자들이나 뭐 여러가지 우상숭배자들과 완전히 교제, 접촉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참으로 의도하시는 것은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 교제를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형제라고 불리우는, 이름하는 자들 가운데서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술취하는 자들 등등의 그들과 함께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먹지 말라는 것이 성만찬을 함께하지 말라는 것인지, 수찬금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먹는다는 것이 성경 여러 곳에서 교제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비유적인 표현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함께 먹지 말라는 것은 교제를, 영적인 교제를 단절하라는 의미인지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성만찬, 수찬금지, 물론 성만찬 자체도 교제적인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만 좀더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교제를 단절할 것을 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면 조금은 의아스럽지만은 어떤 신자간의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팩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관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완전한 관계를 끊을 수, 접촉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라 그러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형제라고 불리우는 사람 중 그런 자가 있거든 교제를 끊으라는 강력한 말씀을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 이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불신자들, 세상 사람들, 교회 밖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아무 상관이 없다. 교회 밖 사람들은 본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희가 판단을 해야하지 않느냐? 교회 밖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겠지만은, 판단하시겠지만은 이런 음행하는 자는 너희들 가운데서 제거하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 권징과 관련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5절 말씀, '내가 그들을 사단에게 넘겨주고 육체를...'이 우리 말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육체를 파괴하도록, 멸하도록으로 번역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단에게 넘겨 주었는데 그 목적에 대해서 그의 영혼은 주의 날, 마지막 날에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 치리 즉, 권징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권징의 목적이 그의 영혼으로 마지막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으로 보아서 권징의 궁극적인 목적, 물론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 올른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권징을 행하는 자의 자세에 있어서는 그 궁극적인 소원, 바램이 일단 그로 하여금 구원얻게 하려는 사랑의 동기, 자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함께 모여서 이런 일을 결정했다는 등등은 치리, 권징에 있어서 어떤 목사나 장로가 단독으로 할 수 없고 항상 어떤 모임에서 의결을 모아 처리한다는 그런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권징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지 않고 수치와 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고 어느 한 교회에서 치리를 받았는데, 다른 교회에서는 아예 아무 일 없던 것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들을 말씀하셨고, 교회도 어떤 의미에서 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한국 교회라는 틀의 전체 상황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누적되어온 여러가지 어떤 폐습들에 우리가 피해를 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 일이 교회의 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교회 교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만의 책임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여튼 한국 교회 전체적인 책임이든 간에, 아니면 그 개개 목회자의 책임이든 간에 교회가 잘못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을 엄격히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교인등록을 할 때, 두 가지를 묻습니다. 당신이 이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진다고 확신하는가? 그 확신이 설 때 교인 등록을 하라 그러고, 그 다음에 이 교회에서 치리하는 것에 복종하겠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질문이 아니고 상당히 이와같이 엄격한 권징이 시행된다는 것을 분명히 미리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이제 교인등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는 결국 권징을 받지 않고 나가버리면 권징의 궁극적 목적이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데 오히려 그 사람이 나가버리면 쫓아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일리 있는 말이지만 권징의 목적이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목적이 권징의 목적이라면 권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보내면 되니까. 그러므로 권징의 목적의 제일 첫째가 뭐냐하면, '죄를 놓아두면 온 교회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어떤 죄가 있는 것을 다 아는데, 쉬쉬하고 피하는데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 교회도 이런 곳이구나, 당연히 교회도 이렇게 이렇게 넘어가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요즘 나타나는 병폐가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것이 얼마나 묵인이 되고, 다 이렇게 하고 지나가는구나 하는 이것이 오랫동안 고정관념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 어떤 별난 목사가 와서 치리를 하니까 다 부당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왜 다른 교회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만 엄격하게 하는가? 하는 불만이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의 교회가 전통적으로 오랜 기간을 통해서 교회가 잘못 가르친 탓도 있고, 그리고 또 권징의 목적이 그런 궁극적인 기대 속에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 오염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목회자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제일 힘든 일입니다. 목회자 자신도 죄짓고 하는 사람인데 불러다 놓고, 말한다는 것은 제일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생기는 폐단, 심각한 부작용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여기서 권징을 명하는 근본 이유가 교회의 성결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이렇게 계속되면 권징이라는 것이 유명무실한 것이되고, 점점 권징을 시행하기 어려워져가고, 그런 권징을 없애면 생기는 심각한 폐단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교회의 성결을 위하여 엄격하게 권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가 혼자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이것이 그렇지 않아서 옆의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권징의 일차적인 목적은 본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죄를 지적해 주고 그것을 고치도록 해주는 그 유익이 가장 일차적인 유익이겠고, 보인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인데 그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가르침이 없느니까, 이때까지의 관행이 그러하니까 권징을 실행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징 문제를 보면 교회의 성결을 위해서, 바로 범죄한 사람 자신을 위해서 치리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 사람을 사단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셨는데, 말하자면 이렇게 치리를 하시기로 결단하셨는데, 그것이 혹은 거기서 의도된 목적이 결국 그 사람의 영혼을 마지막날 구원케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치리가 출교의 성격에 거의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6장에 보면 결국 교회내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부도덕한 일에, 비슷한 것에 본질에서는 동일한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음행에 대한 부도덕한 것을 다루고 있다면 뒤에서는 어떤 성도간의 재산상의 시비가 붙은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그럴 경우에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서는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든지 이것을 결국 불의한 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그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불의한 자들 앞에서의 불의한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가는 문맥을 보면 세상 법정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반문을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줄을 모르느냐 세상이 바로 너희로써 심판, 판단을 받는다고 한다면 너희 가운데 이런 사소한 일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조차도 없느냐라는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 법정을 가리켜 불의한 자들, 또는 교회에서 가볍게 여긴다는 표현을 쓴 것을 잘못 이해하면 로마서에 나오는 일반 정부 질서를 존중하라는 말과 상치가 되는 듯 합니다만 여기서 바울 사도께서 이런 세상 법정을 불의한 자들, 교회에서 경홀히 여김을 당하는 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로마서의 그런 말씀과 대조되는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는 세상이 너희로 판단을 받는다는 말은 교회의 성결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면 스스로 정죄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 송사가 붙어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너희 가운데서 이런 시비거리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이미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신자간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해 지고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허물이 된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 교회의 성결의 모습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보는 눈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이미 그런 허물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수치인데, 거기다가 손해를 조금 당한 사람은 자기의 조그만 손해를 입지 않겠다고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형제의 손을 잡고 법정에까지 가서 내 이익을 지키려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도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형제에 대하여 그럴 경우에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형제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는 자에게 불의를 행하고 손해를 끼친다고 하는 이런 일이 교회에서 있을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교회의 성결의 수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암시하는 말씀이고, 더우기 그 다음에 무서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불의한 자는 결코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여러가지 스스로 속이지 말라 우상숭배자나 음란한 자나 등등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우리 모두가 다 거룩하게 살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11절에 보면 밝히 드러나는데, 너희가 이전에는 이런 자들이었다, 이런 악한 자들이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에서 다 씻음받아 거룩하게 된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하여진, 의로와진 자라 그의(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거룩하여 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의로와지고 거룩해진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권징 문제가 여기서 연결이 됩니다만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말입니다. 여기서 묘한 자기 기만이 나오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을 대개 어떤 식으로 보느냐 하면 죄짓는 면허장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어떤 그런 식의 생각, 심리가 그 속에 스며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하여지고 의로와졌다는 것입니다.
전혀 어떤 새 존재됨입니다. 이전에 너희가 이런 자들이었는데,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해지고,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본질입니다. 이것의 상실은 신지됨의 상실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이것이 우리의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이것이 신자의 새로운 신분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음행과 관련해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새로운 순전한 순결을 파괴하는 어떤 행위, 이런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특히 6장 초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성결의 수준이 세상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좀 심각하게 생각하고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해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저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늘 죄 가운데 살면서 계속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로와지고 거룩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를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 축복이 바로 이것이니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범죄한 자에게 이것이 죄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분됨을 저버리는 일이요, 그 축복에서 떠나는 일이요 라고 지적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만이 권징이 교회 전체로서나 그 범죄 당사자에게서나 유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하에는 대개 육신을 입고 사는 현 창조질서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거룩하며 의로운 존재로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요 이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된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적 본능은 어떻게 처리하며 살아야 하는가? 결혼제도는 이와같은 삶의 질서 속에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 것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가면 대개 교회생활, 공동체의 생활, 하나님께서 교회에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말씀, 기도, 성만찬 등을 언급해 가면서 그와같은 논의가 성령님 안에서만 제 기능을 행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하는 논의로 발전하게 되고, 이것이 이제 교회 공동체 예배 즉, 공예배에 상관으로 연결이 되어서 이런 은혜의 수단들이 공예배에서 어떻게 사용이 되고,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은혜들을 받게되는가에 대해서 있어야 할 사랑과 질서 등의 원리들을 쭉 말씀한 다음에 15장에서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떤한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이런 교회적 삶, 여러가지로 아주 부족한 것들, 여러가지 현상들과 질서들 속에서 악이 존재하는, 상존하는 이런 세상 가운데서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거룩해져 가는 삶을 사는데 이와같은 삶의 종국이 무엇인가? 좀더 크게 이야기를 하면 역사의 종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15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고린도전서는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며, 그 본질은 무엇이며, 이 세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종국을 기대하면서,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두 가지 다른 마음자세, ①학적인 문제, 학적인 노력이 논리적으로 체계를 이루어 보겠다는 생각, ②참으로 내 마음에서 심령에서 그 말씀이 역사하는 뜻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실 학문성(여기의 학문성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 이것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깨닫고 하는 그런 노력의 포기는 아니어야 합니다.
이성과 정신에 대하여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할까? 우리가 인간 정신 기능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말들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마치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다는 대개 이런 것으로 인간의 정신을 삼분화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대개 이런 식으로 많이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오도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 정신의 기능이 3개로 딱 나누어져서 느낄 때는 감정이 움직이고, 뭐 할 때는 이성이 움직이고 하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들은 인간 정신의 다양한 면들을 나타내는 양상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할 뿐이지 우리에게 감정과 의지와 이성이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여러가지 단어를 씁니다만은 이것도 동일한 한 영적 실체를 두고 다양한 면 또는 기능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이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성을 포괄적으로 이야기 할 때,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포괄하는 의미로 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즘 와서 한국의 교회가 너무 과장이 심하다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런 주관적 해석의 문제나 어떤 역사적 상황과의 관련성, 흔히 역사성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가 되고 너무 포장이 된다는 것이, 그런 역사적 차이를 우리가 무시할 수는 없으나, 역사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어느 시대에나 근본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있다는 것도 우리가, 그것이 더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시대적인 차이를 지금 현대에 와서 사회과학이나 정신과학에서 이야기 하는 그런 역사적 차이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분명히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에서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 하더라도 반드시 사례에 국한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원리, 원칙을 축출해 내서 그것이 어느 시대에나 매우 광범한 적응성을 갖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여기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른 보면 고린도전서가 구체적인 사례 모음집, 고린도교회에서 생긴 이런 저런 일들을 나열해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께서 이렇게 대처하라, 저렇게 대처하라는 식의 케이스별로 적절한 권면을 행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줍니다만은 그러나 자세히 보게 되면 고린도전서는 전체적으로 구조가 꽉 짜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적으로는 구약의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를 거의 압축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쟁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계기로 삼아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 음행이라고 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예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의 성결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나가서 우상 제물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참된 은혜의 수단이 무엇인가 하는 성만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생겨난 어떤 그런 은사의 남용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실제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령님의 은사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마지막 부활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관성 있는 흐름과 어떤 꽉 짜인 구조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이 그저 일시적 어떤 역사적 상황에 적용성이 제한된, 또 많이 제한된 그런 것이라고 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을 훨씬 더 뛰어넘은 보편적인 원칙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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