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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주석

사도 바울은 승리자인가, 하나님의 포로인가?

사도 바울은 승리자인가, 하나님의 포로인가?
길성남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성경본문 바로읽기(15) - 선지동산 48호 게재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2장 14절의 전반절을 믿는 자의 승리를 말하는 본문으로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이기게 하실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본문 읽기는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성경이 모두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항상 승리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로 이 본문을 번역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번역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구절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이런 번역이 맞는다면 고린도후서 2장 14절 전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승리자(victor)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본문 이해는 옳을까요?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역성경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동사 "뜨리암뷰오"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후서 2:14와 골로새서 2:15 두 곳에만 나옵니다. 개역성경은 골로새서 본문에 나오는 "뜨리암뷰오"를 "승리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동사가 일부 고대 문헌에서 “승리를 거두다,” “이기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는 했지만, “이기게 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언어적으로 “뜨리암뷰오”는 “승리를 경축하다,”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뜨리움파레”(triumphare)에 상응하는 단어입니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대로, 이 단어의 배경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거행하던 승리의 개선행진(triumphal procession)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과 병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행렬을 지어 로마 거리를 행진하면서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승리한 장군과 병사들을 영예롭게 하고, 로마의 주신(主神) 주피터에게 감사하는 것이 개선행진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승리의 축제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기도 했는데, 로마 시민 전체가 몰려나와서 거창하고 화려한 승리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환호했습니다. 개선행진을 직접 목격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개선 축제의 수많은 장관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7.5.5.132). 개선 행렬에는 전투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 웅장한 이동무대들이 동원되기도 했고, 적에게서 노획한 온갖 전리품들과 보물들이 실려 나왔고, 그와 함께 적국의 왕이나 장군들과 지휘관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나왔습니다. 그 뒤에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이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를 타고 등장하였습니다. 전쟁포로들은 승리한 장군의 마차 앞에 끌려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선행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내가 개선행진을 할 때 내 마차 앞에 아홉 왕들과 그 왕들의 자식들이 끌려갔노라.“ 개선행진의 절정은 로마의 광장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포로들 중에 저명한 인물들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성경학자 스콧 해프만(Scott J. Hafemann)은 “뜨리암뷰오”가 바로 이런 로마의 개선행진과 관련된 전문용어라고 옳게 주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승리를 경축하다,”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다”가 이 동사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골로새서 2:15에서도 개선행진을 배경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승리하다"가 아니라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다"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합니다(개역성경 골로새서 2:15에서 "밝히 드러내시고"라는 구절은 "담대하게 구경거리로 삼으시고"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승리의 개선 행진에서 포로들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골로새서 2:15에서는 물론, 고린도후서 2:14에서도 "뜨리암뷰오"가 직접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동사가 목적어와 함께 나올 경우에 “승리의 개선행진에서 (포로가 된 적을) 끌고 가다”를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2:15에서 "뜨리암뷰오"의 목적어는 "정사들과 권세들"입니다(정사들과 권세들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적 존재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악한 영들을 무장해제하시고 그들을 승리의 개선행진 가운데 포로로 끌고 가시면서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고린도후서 2:14에서는 "우리"가 "뜨리암뷰오"의 목적어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문학적 복수형(literary plural)입니다. "뜨리암뷰오"의 용례를 이 본문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개선행렬에서 바울을 패배한 포로(defeated captive)로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맞는다면 바울은 승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포로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를 하나님의 포로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해석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고린도후서 2:14에서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로로 끌고 가시는 것에 대해 과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뜨리암뷰오”의 용례를 잘 알았던 칼빈도 사도를 하나님의 포로로 보는 해석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동사 "뜨리암뷰오"에 사역적(使役的, causative sense) 의미를 부여하고 “이기게 하다,” "승리하게 하다"(cause to triumph)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항상 승리하게 하심을 말하는 것으로 본문을 이해하였습니다. 칼빈이 볼 때 사도는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한 장수입니다. 이런 해석은 칼빈 이후 거의 3백년 동안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것은 언어적으로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뜨리암뷰오"의 용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린도후서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면, "뜨리암뷰오"가 목적어와 함께 등장하는 골로새서 2:15도 동일하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인 "정사들과 권세들"을 승리하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뜨리암뷰오"의 용례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고린도후서 2장 14절의 전반절을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항상 승리의 개선 행진 중에 끌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But thanks be to God, who in Christ is always leading us in his triumphal procession). 이제 남은 문제는 사도 바울이 개선행진의 언어로 전달하고자 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포로라는 것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대적자였음을 전제합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고(갈 1:13, 23; 빌 3:6),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였습니다(행 26:9).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공포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을 뿐 아니라, 고문을 가하여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였습니다(행 26:10-11).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은 하늘의 빛에 휩싸여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가 하나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바울은 이제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개선행렬 가운데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치스러운 포로가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포로입니다. 자신을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승리를 소리 높여 외치는 포로입니다. 고대 로마의 개선행진에서 전쟁 포로들은 자신들을 꺾은 로마 장군의 영예와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들의 세력이 강대할수록, 승리한 장군은 더 큰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자신을 포로로 잡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강력한 대적자를 굴복시켜 사도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얼마나 자비로우십니까!
고린도후서 2장 14절을 이런 식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개역한글성경의 번역에 마음이 끌립니다. 하지만 소위 “은혜로운” 본문 해석이나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본문 해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갈망을 충족시키고 합리화시키는 식으로 본문을 읽고 해석할 위험성이 있음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은혜롭게 느껴지지 않는 해석일지라도 그것이 역사적 상황과 단어들의 용례에 맞는 바른 해석이라면 겸손하게 수용하고, 그 해석에 맞게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을 하나님의 포로로 제시하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 전반절은, 바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의 포로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모두 마귀에게 종노릇하면서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롬 5:10; 골 1:21).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시고 포로로 잡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은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포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승리의 개선행렬 가운데 끌려가면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포로로서 사랑의 승리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