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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 

노승수 목사 

한국교회의 특색 중의 하나는 복음전도에서 즉각적 회심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통적 장로교 신학에서는 매우 생경한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은 부흥주의의 찰스 피니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복음을 들고 즉각적 회심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구원의 확신까지 종용한다는 점이다. 나 역시 학생선교단체에서 복음전도를 이렇게 배웠다...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할까?
흔히 구원의 확신의 세 가지 준거는 1. 외적 증거, 2. 성령의 내적 증거, 3. 그리고 성령의 열매이다. 사실  이 세가지 모두 성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외적 증거란 성경의 명시적 기록을 가리킨다. 믿는 자에게,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기록된 성경의 말씀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가리킨다.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 그 자체인 셈이다.
성령의 내적증거란 외적증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심으로 이 외적 증거인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이 직접 지금 내 앞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적 증거라고 한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도록 하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가리키며 성령의 사역의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이부분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신학적의미도 사실상 이 부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신자에게 이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다. 그럼 정말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는가? 흔히 개혁신학에서 하나님 주권 사상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Coram Deo 곧 하나님 면전에서의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수준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적증거가 가리키는 본질이다. 그럼 처음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자들이 이런 내적 확신을 가지는가? 사실 그런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다.(학생 선교단체 시절 1000명 이상에게 개인전도를 해본 경험으로 이런 케이스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세번째, 그러면 그 결과에 의해서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에 따른 인격적 변화가 대표적이다. 엡 5:22이하에 나오는 열매는 모두 인격적 변화를 가리킨다. 또한 눅 8:15의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처럼 인내로 결실하는 일이 일어난다. 열매란 씨가 뿌려짐으로 즉각 맺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절서이고 자연법칙이다. 영적 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예수를 믿자마자 인격적 변화의 열매를 거두는 법은 없다. 그것은 인내로 지키어서 변화를 얻는 성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구약 율법에도 심은지 3년 동안은 열매를 구하지 않는다. 결실할 정도로 자라기 까지는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3년간이나 양육하셨다... 이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열매가 점증함으로 인해서 점증하게 되는 내적 확신이지, 예수 믿는 날 가지게 되는 무슨 피상적 지식이 아닌 셈이다.
따라서 처음 복음을 접한 자가 그것도 인간적 강요(?)에 의해서 확신하는 것을 과연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예배에 나와 구도자로서 들으면서, 진리에 대해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늘 복음 설교가 주중에 있어왔다. 처음 그것도 간단한 성경 구절 몇개로... 물론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이지 인간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그것에 따라오시는가? 이거야 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처사가 아닌가?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세속화가 이런 신자들로 가득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교회는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곳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예복을 준비치 못한 자가 있었듯이 교회 안에 참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한 일반적 복음의 부르심만 있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진리의 복음을 참되게 전파함으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여야 한다. 자연계에서도 적당 정도의 오염은 자정 능력에 의해서 치유되고 회복되지만 오염의 지수가 일정비율을 넘으면 정화 쪽으로 변화가 진행되지 않고 오염쪽으로 변화가 진행되게 된다. 이처럼 교회가 중생하고 경건한 신자의 비중이 낮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로 가득차게 되면 필연 세속화 수순을 밟는 것은 교회사가 증거해 온 사실이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육은 이런 점에서 제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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