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수가 유전인가? 성도가 꼭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인가?
노승수 목사
요즘 인터넷에 해괴한 글들이 떠돌고 있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략의 요지를 보면, 사도신경을 공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성도의 교통을 죽은 성인들과 공을 나누는 것이라면서, 사도신경도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교독문도 성경에 없는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더 악질적인 것은, 주일 성수가 성경에도 없는 유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글들이 공공연히 떠돈다는 점입니다. 악질적이라는 말이 걸리십니까? 저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헛된 말과 가르침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6-17) 제가 볼 때 이런 주장은 거의 이단에 가깝거나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무분별하게 인터넷에 이런 글이 마치 성경적인 주장인양 떠돈다는 점입니다.
먼저, 주일성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셔서, 지금은 모든 날이 안식일이라는 주장입니다. 언뜻 듣기에 매우 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했지 율법을 폐기하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일도 제대로 안식이 안되면서, 모든 날을 안식한다는 주장은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입니다. 주님도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주일도 제대로 성수하지 못하는데, 신앙의 기본기도 안되었는데, 다른 것을 생각해 볼 여지도 없습니다.
물론 골 2:16-17절을 들어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계명의 성격을 간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의 절기들 예컨대,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등과 제사법, 정결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의식법이고 예수님의 증거대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요 5:39)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폐기된 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신학도 구약의 이와 같은 의식법들이 그리스도께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복음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제사법을 비롯한 의식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그 성취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그 성격상 의식법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십계명은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도덕법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 한 복판에 가장 긴 설명을 드려서 안식일 계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3계명도 도덕법이요, 5-10계명도 도덕법인데 가운데 4계명만 의식법이라고 하겠습니까? 십계명은 도덕법이며, 이런 점에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성령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 가능하는가? 즉, 율법이 성도의 성화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율법의 세번째 용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성화의 준거와 같은 역할을 율법이 하고(자료실의 '율법의 세가지 용도'를 검색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도 십계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한 율법이라는 점입니다.
그럼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신앙의 선배들은 이것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차례로 알아봅시다.
먼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입니다.
제103문. 제 4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뜻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전체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안식하는 축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103문. 제 4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뜻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전체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안식하는 축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안식하는 축일에 예배와 성례에 참예할 것을 권합니다. 주일 성수는 유전이 아니라 성도의 마땅한 본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보겠습니다.
181문: 이제 이 계명의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답: 이 계명이 율법의 의식에 관한 한 이 계명의 의식들은 폐기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의 참된 의미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182문: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답: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박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새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83문: 이 계명의 내용 중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공중기도를 드리며 그리고 성례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회 내에서 제정된 규칙을 준수하고 성도들 사이에 세워진 영적 규칙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184문: 그러면 이런 형식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없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유익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진리의 본질에까지 몰고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이 된 이상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통치에 내어 맡기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답: 아닙니다. 유익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진리의 본질에까지 몰고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이 된 이상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통치에 내어 맡기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명시적으로 주일 성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설명드린 것처럼 의식법적 요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가 되었지만 여전히 도덕법적 요소로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켜져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식법적 요소가 폐지되었다는 소릴 어디서 듣기는 들어서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 이런 주장이 난무하는 걸보면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몇일 전에도 어떤 사람이 제 블로그에 와서 제 블로그에 유전이 난무한다는 식의 글을 도배해서 처음에는 뭔일인가?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행위를 하면서도 사생활 침해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반복적으로 경고를 주어도 소용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비회원 글쓰기에 제한을 두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를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21장 5-8절의 내용을 보면,
5.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흠 없는 설교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려 분별과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껏 듣는 것과, 마음에 은혜로 찬송 부르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성례를 합당하게 집행하고 값있게 받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종교적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다. 이것들 외에도, 종교적 맹세와, 서원과, 신성한 금식과,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감사 등은 몇 차례 적당한 시기에 거룩하고 종교적인 방식으로 실시할 것이다.
6. 지금 복음 시대에서, 기도나 기타의 다른 종교적인 예배 행위는 그것이 시행되는 장소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소를 향하여 드릴 필요가 없으며, 그 장소 여하에 따라서 기나 예배 행위가 더 잘 열납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한다. 각 가정에서, 매일, 그리고 은밀한 중에 개별적으로 드릴 수도 있고, 더욱 엄숙하게 공적인 모임들에서 드릴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이나 섭리에 의하여 기도나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하신 때에, 경솔하게 행하거나 고의적으로 소홀히 하거나 저버려서는 안 된다.
7.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七日) 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일들을 미리 정돈한 연후에, 그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을 중단하고 거룩하게 안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바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자연법을 들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는 6일 창조와 1일의 안식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약 즉 사도행전의 여러 증거를 들어 유대인들이 말하는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날의 일요일이 주일로 불리웠고 세상 끝날까지 지켜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주일 성수는 성도의 기본입니다. 십계명은 구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도 성령 안에서 거듭난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한 계명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문제는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것이지, 어떻게 주일 성수가 유전이어서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어 내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와 같은 사단의 사탕발림같은 속임수의 결과 한국교회가 신앙의 정절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주장은 더 가관입니다.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마치 사도신경이 무슨 사람이 만든 쓸데 없는 유전의 대표적 산물인 것처럼 여기는 데, 참으로 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소요리 문답을 작성한 루터, 제네바 교리문답을 작성한 칼빈,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귀도 드 브레 등의 신학자들이 모두 이런 사실을 모르고 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헛소리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신학자들이 모두 공히 사도신경을 신앙의 가장 표준적 문서로 여기서 이에 대해서 요리문답과 교리 문답을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로마라는 말을 붙여서 로마 카톨릭이라 칭합니까? 로마 교회가 있기 전부터 카톨릭 교회는 있어 왔습니다. 아시아의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로마 교회 등이 모여서 이룬 보편적 공의회를 일컬어서 공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유전이라고 다 말하면, 삼위일체 교리도 유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면, 니케아라는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교리임으로 성경에 삼위일체도 안나오고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451년 그리스도의 신,인성에 대한 교리를 확정한 칼케돈 공의회도 사람의 유전임으로 다 없이하고 성경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교회사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칼빈은 공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총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일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 공의회가 왜 존재합니까? 바로 믿음의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일치, 참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일치, 그럼 이런 것들이 다 유전이란 말입니까? 참 우습고 딱한 노릇입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선백들의 신앙고백이 뭐라 말하는지 살펴봅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자연법을 들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는 6일 창조와 1일의 안식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약 즉 사도행전의 여러 증거를 들어 유대인들이 말하는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날의 일요일이 주일로 불리웠고 세상 끝날까지 지켜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주일 성수는 성도의 기본입니다. 십계명은 구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도 성령 안에서 거듭난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한 계명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문제는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것이지, 어떻게 주일 성수가 유전이어서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어 내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와 같은 사단의 사탕발림같은 속임수의 결과 한국교회가 신앙의 정절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주장은 더 가관입니다.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마치 사도신경이 무슨 사람이 만든 쓸데 없는 유전의 대표적 산물인 것처럼 여기는 데, 참으로 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소요리 문답을 작성한 루터, 제네바 교리문답을 작성한 칼빈,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귀도 드 브레 등의 신학자들이 모두 이런 사실을 모르고 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헛소리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신학자들이 모두 공히 사도신경을 신앙의 가장 표준적 문서로 여기서 이에 대해서 요리문답과 교리 문답을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로마라는 말을 붙여서 로마 카톨릭이라 칭합니까? 로마 교회가 있기 전부터 카톨릭 교회는 있어 왔습니다. 아시아의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로마 교회 등이 모여서 이룬 보편적 공의회를 일컬어서 공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유전이라고 다 말하면, 삼위일체 교리도 유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면, 니케아라는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교리임으로 성경에 삼위일체도 안나오고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451년 그리스도의 신,인성에 대한 교리를 확정한 칼케돈 공의회도 사람의 유전임으로 다 없이하고 성경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교회사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칼빈은 공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총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일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 공의회가 왜 존재합니까? 바로 믿음의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일치, 참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일치, 그럼 이런 것들이 다 유전이란 말입니까? 참 우습고 딱한 노릇입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선백들의 신앙고백이 뭐라 말하는지 살펴봅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봅시다.
제54문. '거룩한 공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 가운데 영생을 얻도록 선택되어 참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를 모으시고 보호하시며 보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물론, 나도 이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 일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55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첫째, 신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들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 신자들은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55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첫째, 신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들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 신자들은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뭐라고 했을까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을 봅시다.
제 3항 거룩에 대하여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문 :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나는 자신의 이성이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을 수 있거나 그에게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혜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올바른 믿음 가운데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시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그가 땅 위에 있는 그의 모든 백성을 부르시고 모으시고 밝히시며 거룩케 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바르고 일치된 믿음 안에 있도록 붙들어 주심과 같은 것
입니다. 이같이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은 나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매일 모든 죄를 충분히 용서하시며 마지막 날에 나와 모든 죽은 자를 부활시키며 모든 믿는 자와 함께 나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제네바 요리 문답을 봅시다.
92문: 다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4번째 부분인데 여기서 우리는 보편적(공동적=우주적=전체적)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93문: 공동적 교회란 무엇입니까?
답: 공동적 교회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92문: 다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4번째 부분인데 여기서 우리는 보편적(공동적=우주적=전체적)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93문: 공동적 교회란 무엇입니까?
답: 공동적 교회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94문: 이 조항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답: 당연히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이미 언급된 모든 것들의 은혜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열매 없게 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당연히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기는 열매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95문: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구원의 원인과 근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를 자비와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 주신 것과, 이 은혜가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견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기에 대하여 한층 더 큰 확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 모든 것의 실현과 성취가 제시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96문: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합니까?
답: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이 빛나게 하기 위해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 정켤케 하시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교회를 구속하신 후 이를 거룩하게 만드셨는데 이는 당신의 교회가 영광스럽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엡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97문: ‘공동적’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성도들의 머리는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것과 모든 사람들은 이 한 몸 안에서 연합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답: 당연히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이미 언급된 모든 것들의 은혜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열매 없게 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당연히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기는 열매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95문: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구원의 원인과 근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를 자비와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 주신 것과, 이 은혜가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견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기에 대하여 한층 더 큰 확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 모든 것의 실현과 성취가 제시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96문: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합니까?
답: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이 빛나게 하기 위해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 정켤케 하시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교회를 구속하신 후 이를 거룩하게 만드셨는데 이는 당신의 교회가 영광스럽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엡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97문: ‘공동적’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성도들의 머리는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것과 모든 사람들은 이 한 몸 안에서 연합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98문: ‘성도의 교통’(사귐)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이것은 교회의 회원들 사이에 있는 일치를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선물들은 모든 성도의 각각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도록 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은 다 서로 사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99문: 그러면 당신이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이 거룩함은 현재 완전한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안에서 싸우고 있는 중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언제나 불안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되어 그분에 의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지기까지는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100문: 이런 공동적 교회는 이를 믿는 것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해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이를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외적인 표징에 따르면 보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에서는 본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동적 교회는 사람의 눈에는 충분하게 볼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오직 성경이라고 하니까 성경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이단이 발호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고백을 했는지 제대로 배우려들지 않으니 이런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성경의 원리를 따라 바른 교리를 선포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 곧 믿음의 일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칼빈이나 루터 그외 개혁자들의 신앙고백 속에서 이 교회에 관한 고백은 성령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은 바른 말씀이 시행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교회 안에서 말씀하시며, 성도의 구원은 성령의 사역의 터인 교회 안에서만 가능함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에 신실하게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일일이 설명하기도 입 아픕니다. 제 블로그의 신앙고백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 읽기 귀찮고 힘들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라도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교독문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요. 이건 저의 목회 철학의 예배론 중 예배의 다섯 가지 요소 중 "4) 예배는 신령한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를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이라고 하니까 성경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이단이 발호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고백을 했는지 제대로 배우려들지 않으니 이런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성경의 원리를 따라 바른 교리를 선포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 곧 믿음의 일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칼빈이나 루터 그외 개혁자들의 신앙고백 속에서 이 교회에 관한 고백은 성령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은 바른 말씀이 시행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교회 안에서 말씀하시며, 성도의 구원은 성령의 사역의 터인 교회 안에서만 가능함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에 신실하게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일일이 설명하기도 입 아픕니다. 제 블로그의 신앙고백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 읽기 귀찮고 힘들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라도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교독문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요. 이건 저의 목회 철학의 예배론 중 예배의 다섯 가지 요소 중 "4) 예배는 신령한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를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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