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건강한 의사소통
노승수 목사.
갓 태어난 아기는 무력하기 이를 때가 없다. 엄마의 돌봄이 거의 절대적이다. 자궁의 안전으로부터 분리라는 불안 상황을 만나게 된다. 아기는 아직 이 일에 충분한 준비가 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아기의 정신구조는 연약하다. 어른들처럼 합리적 대처가 불가능하고, 불안과 좌절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는 까닭에, 아기는 불안을 주로 울음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때 엄마는 아이와 거의 동일시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기의 감정을 그대로 받게 되는데, 이때 엄마가 아기의 불안을 공감해주고 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것으로 되돌려 주면 아이는 짜증 속에 있는 불안을 점진적으로 순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달래주지 못하면 아기는 불안이나 좌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정신병리적인 증상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집어넣거나 끌어당기는 원시적인 정신과정, 즉 침범 받고 침범하는 융합의 경험을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한다. 그러나 원시적이라고 해서 깔보면 큰 코를 다친다. 이와 같은 아동기적 의사소통방식이 불안에 대한 내성을 갖도록 적절하게 발달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도 너와 나, 현실과 비현실 등의, 경계가 모호하고 밀착된 관계를 자주 삶에서 재현하게 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전의 경험과 느낌들이 현재로 전이되어 마치 현재에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된다.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비슷한 상황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과거가 현재로 전이(轉移)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 쉽게 목격된다. 교회의 성도들은 각기 다른 성장과정을 가지고 교회에 온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두 건강한 어린시절은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정신적인 부분에 취약한 사람의 숫자가 일반적 사회 그룹들보다 어쩌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어떤 공동체보다 투사적 동일시 현상이 많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다.
성도 간에서만 아니라 교회의 핵심적인 리더십에 의해서도 병리적 현상은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매우 공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상대방의 마음을 투시한다든가 상대방의 아픈 부위에 자신의 몸도 동일시되어 몸의 같은 부위가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은사는 아직 유아적인 인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기도 하다. 동시에 교회라는 환경이 세상에선 기대하기 힘든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의존적 사랑의 환경이 되다보니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전에 내가 상담했던 OO 신학대학원 학생의 경우, 자신의 강박적 죄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문제를 일으켜 상담실을 찾은 경우가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쉽게 뒤섞인다. 자신의 몰카에 찍혔다고 생각하고, 길을 가던 여자들이 웃는 것은 자신의 몰카를 보고 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엄마에 대한 적개심의 여성에 대한 투영이다. 부모의 비협조로 결국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다 건강한 정서와 심리상태를 가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신의 불안을 성도와의 관계 상황으로 여기게 되고, 마치 과거가 현재에 흘러 들어온 것 같이 반응하게 된다. 이때 목사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어떤 경험들을 재연(再演)한다. 놀랍게도 두려움과 처벌에 관한 환상은 곧잘 하나님의 음성으로 둔갑한다.
이 관계 경험은 단순히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 경험에도 그대로 투영이 된다. 예컨대,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인정과 수용의 경험이 없었던 신자를 생각해보자, 그가 성경 중심적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하지만 그에게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메시지는 무기력한 메시지이거나 믿을 수 없는 메시지이다. 그에 반해, 성경에서 제대로 된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보여주지 못한 성도들을 향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가슴에 와 콕 박히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성경 중심적 신앙 생활을 하지만 그의 성경에 대한 인식과 수용은 언제나 편협하다. 그가 만나는 하나님은 언제나 만족이 없고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할 뿐 그에게 칭찬이나 위로를 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이런 경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한 청교도 윌리암 거널의 충고는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위선자는 태양 곧 성경으로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도시 광장에 있는 시계로 시간을 잰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에게는 대중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이다."
투사적 동일시의 핵심 역동은 유도성이다. 즉, 내가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반응을 상대로 하여금 하도록 유도, 조정하는 무의식적 기제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즉답하지 않는 중립성 내지 모호성을 가지심으로 인해 이와같은 투사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 투사에 의해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유도해낸다. 이런 일은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예컨대, 목사는 아버지와 엄마와 같은 권위자 개념으로 성도들에게 오버랩된다. 예컨대, 성도들은 무의식적으로 목사에게 엄마 혹은 아빠와 같은 권위자의 역할을 요구하며, 자신의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어려서 많은 학대를 경험한 한 여성도가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언어는 매우 거칠며, 주변 사람들은 그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는다.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한 성도들의 압력을 받게 되고, 이 여성도의 행동을 자제시키려는 권면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이 여성도는 어린시절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감정이 이 권면 속에서 오버랩이 된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어려서 억압적이며 경직된 부모의 양육아래서 자라, 야단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핵심감정을 가진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의 행동패턴이 어떻게 나타날까? 야단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의기소침해 있을 것이다. 직장 상사는 늘 그를 격려해보지만 그의 이 의기소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직장상사의 업무지시를 받았지만 그 자리에서 충분히 업무에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걸 수행하기 위해 자리로 가지고 오지만 다시 되돌아가 물어보길 두려워하게 되고, 그는 자기 방식대로 업무를 진행한다. 업무 중간에도 중간 보고는 일체 없고, 상사의 채근에도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놀랍게도 그를 야단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런 감정은 부하직원이 상사의 마음에 불어 넣은 마음이다.
교회에선 이런 일이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교역자들과의 관계,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에서 많이 일어난다. 문제는 이 감정과 대인관계가 현재 우리 삶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과거 감정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교회는 언어 외에 여러 가지 비언어적 요소들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의사소통의 과정은 그리 순조롭지 못한 게 우리의 형편이다. 우리는 합리적이며 언어적 메시지 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위기로부터 혹은 비 언어적 몸짓들로부터 많은 메시지를 수용하되 현실적으로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수용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시절의 반복강박을 원하지 않는 가운데 교회의 삶에서 반복한다.
그럼 교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학력에 관한 열등감이 강한 목회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교회의 사역 장면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까? 교회에서 학력이나 배경 등을 드러내는 일을 극도로 꺼리고 그렇게 가르치게 된다. 물론 학력이나 경제력이 교회가 성도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지만, 이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은 오히려 성도의 교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과정의 연속선상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이런 노출을 교회에서 극단적으로 틀어막는 것이다. 그것도 성경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성도들의 마음이 목사의 마음에 불어 넣어지는 경우, 예컨대, 금전 문제에 아주 민감한 성도들이 있다. 가까이는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원인이겠지만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일을 겪은 모든 성도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의 원인은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어린 시절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아픔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성도들의 생각은 목회자에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오히려 헌금생활에 대한 건강하고 성경적 가르침까지 외면하게 만들고, 극단적 형태로 교회에서 헌금에 대한 터부를 형성하기도 한다. 혹은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가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하게 되면, 목회자가 아무리 건강한 메시지를 전해도, 성도의 마음 속에 '역시 우리 목사님도 전에 목회자들이랑 다르지 않아'라는 자신 안에 신념을 확인하는 데이타들에만 집중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유아적 방식의 의사소통과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성숙하는 길 뿐이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현재를 충실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며, 다른 사람들의 조정의 압력에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사역자에게 요구가 된다. 성도들 또한 문제의 원인을 자꾸 타인과 목회자에게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조명하여 보는 일이 중요하다. 명심하라. 상대의 정서의 반응의 상당부분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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