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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노승수 목사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는 너무 유명한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들에 핀 한 송이 이름 모를 들꽃에서 과연 무엇을 보아야 할까? 지난 학기 합신에서 집단 상담을 강의할 때 일이다. 학기말 즈음에 기말고사를 보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냥 시험 안보는 과목도 많은데 그냥 리포트로 대체하면 안 되겠냐고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그냥 배운 걸 쓰시오"라는 누구나 쉽게 적을 수 있는 쉬운 문제라고 문제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근데 그 중 어느 한 학생이 배운 걸 정리해서 쓰려면 그게 나한테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과목이 집단 상담인지라 실습이 꽤 많았다. 실습시간에 보니, 그 학생은 내가 미리 제시한 집단의 원칙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며, 늘 그것을 못 따라 갈까? 불안해했었다. 그 마음엔 늘 다른 사람의 기대 수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존재했다. 그런 부담감으로 공부를 하니, 제대로 그 내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글어 가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들에 핀 민들레가 자기키가 커 보이기 위해서 발돋움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느냐?" 고,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할애하며,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때문에 실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제자백가 중 노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번역하자면, 뒤꿈치를 들고 서 있을 수 없고, 큰 걸음으로는 오래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풀리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다. 물론 살다보면 잘 보이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할 수 있다. 말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뒤꿈치를 들도 발돋움 한 채 서기도 한다. 예컨대, 횡단보도를 건널 땐 잰걸음으로 빨리 걷지만 이내 제 걸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이렇게 일상적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풀려 보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게 바로 병리적 행동의 원인이 된다. 
나 같은 경우도 내 말이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말을 부풀리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내 말을 곧 잘 묵살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나도 모르는 반복적 강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아버지는 곧잘 내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식탁에서 풀어 놓을 때,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이 그것을 반박하고, 아버지라는 권위로 눌러버리셨다. 한 번은 구리와 철의 녹는점이 어느 게 더 높으냐? 는 문제로 논쟁이 붙었다. 철의 녹는점이 높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아버지에겐 통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틀린 게 되고 만다. 그런 일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때, 과장하고, 부풀리는 습관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찍어 누른 것처럼 나는 과장된 자료로 상대의 논리를 누르는 습관이 나도 모르게 몸에 베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첫째 문제는 타인들에게 발생하는데, 부풀려진 것은 언젠가 그 진면모가 들어나게 되고, 그럼 자연 상대의 신뢰를 잃는 방향으로 대인관계가 진전된다. 마치 우리가 지속적으로 잰걸음을 걸을 수 없는데, 나는 사람들에게 내 능력이나 인간적 자질의 잰걸음을 늘 보여주고 그 결과 그들은 그런 나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 짐이 되어 되돌아오고 결국 잰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오면 상대는 나에게서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둘째 문제는 이렇게 부풀리고 난 이후에 나의 심리 상태에 찾아온다. 나 자신이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결과, 찾아오는 심리적 비참한 심정이다. 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나는 부질없는 부풀림 이후에도 여전히 내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매우 비참한 느낌이다. 거절감, 박탈감, 열등감 어떤 것이 될지 모르겠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테니, 어쨌거나 나는 이미 이런 시도가 실패라는 것을 만남 이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부풀린 것이 사실이 아님을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아는 것이다. 결국 부풀리는 것은 전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다. 죄의 결과 우리는 타락했고, 타락은 우리에게 비참함과 참혹함을 가져다 줄 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길 원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담의 무화과나무잎 치마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노력이다. 그래서 명품을 탐한다. 명품의 재화적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차와 집, 학벌, 등을 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결코 대신할 수 없기에 결국 우리는 다시 자신의 비참함을 확인한다. 결국 이 존재의 가치 문제는 하나님의 의로만 해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문제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해결된다. 그것이 주님께서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고 말씀하실 때, 가지셨던 참된 메시지이다. 들꽃은 자신의 존재를 더 돋보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순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발돋움을 한다. 그게 문제의 원인이다. 백합화의 입은 옷의 영광은 솔로몬의 옷의 영광보다 더 하다고 하셨다. 왜? 그것이 그 생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진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은 "민들레가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발돋움하는 걸 본 적 있느냐?"는 되물음에 위로와 영적 평안을 얻었다. 자신의 부담감과 불안의 원천을 이 말 한마디로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을 덜기 위해 지금 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바로 이 수업을 자신의 그와 같은 과거의 습관과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니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 우리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길쌈과 수고"를 하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이 백합화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이 백합화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졌는가? 자신에게 되물어 보자.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실력이며, 타인의 신뢰를 얻는 첩경임을 명심하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거나 인정받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도 가능치 않았던 일이다. 내가 내 진면목을 보여주면, 어느 누군가는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무리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거기서 인맥이 나오고, 거기서 참된 실력 곧 백합화의 영광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