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무능력과 중생
노승수 목사
전적 무능력은 '선을 행할 능력이 아무 것도 없다' 가 아니라 '구원에 이를 공로를 행할 능력이 없다'입니다. 전적 부패 역시 '다 썩었다' 나 부패의 '심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부패가 '전영역에 퍼졌다' 즉, 부패의 '범위'를 말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선을 조금도 행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구원에 합당하도록 선을 행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건 우리의 일상적 관찰에서도 얼마든지 관찰되는 바 입니다. 예수 안 믿는다고 다 악하고 무슨 싸이코 패스처럼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저마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그러면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는 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아무 것도 안한다. 전혀 애쓰지도 않고 중생의 씨가 심기면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성장한다 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면 안됩니다.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다만 중생을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노파심에 드린 말씀입니다. 인간의 무능력은 구원에 이르기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말이지 인간이 아무것도 안한다. 할 수 없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생 역시 하나님의 작정의 일부분이고, 그 작정의 시행은 '섭리적'으로 이뤄집니다. 섭리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제 1 원인이 되시고 인간이 제 2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정의한대로 인간의 행위는, 그가 아직 중생한 상태가 아니므로, 무능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심기우면 마음이 찔리고(행 2:37), 죄를 깨닫기도하고(롬 3:20) 회개를 하기도(행 2:38)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임으로 이런 행위들은 구원에 이르기에 무효하고 다만 하나님의 작정의 시행의 원리를 따라 제 2 원인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중생의 씨가 비유컨대, 움트고 싹이 날 때, 인간 편에서 당연히 반응이 있습니다. 게다가 '씨'가 효력있게 일함으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원에 효력이 있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능력을 말하는 거지 인간이 도무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이런 찔리고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무슨 구원에 협력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중생에는 아무런 협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거야 말로 '하이퍼 칼빈주의'입니다. 물론 중생 후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와 성령의 내주로 인해서 '인간의 무능력'이 해제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화에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협력으로 선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중생과 성화의 구분은 '구원'으로 말미암은 '무능력' 상태에서 '능력' 상태로 변화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중생 과정에서 인간이 '애쓰고' '노력하고' '울고' '통곡하며' '절망하고' '바참해하고''주께 메달리며''영혼이 고통 가운데 있으며' '죄의 각성으로 찔리며' 기타등등의 모든 구원을 예비하는 과정이 섭리적으로 일어납니다.
중생론을 다루면서, 인간의 애씀과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을 인간이 구원에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알미니안 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전형적 '하이퍼 칼빈주의' 이지요. 중생 전엔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에 협력이 될 수 없는 상태임을 간과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 과정에 인간의 참여가 전혀 없는가? '네' 논리적으론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임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달리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 과정에서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경험하는 '인식론적 과정'이 전혀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선 '아니오' 입니다. 반드시 경험하고 또 경험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는데 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인식론적으로 모른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인식하는 모종의 경험과 인간 편에서 애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애씀은 결코 누가 말하는 것처럼 '구원 사역에 참여' 가 아니며, 이런 식의 주장이 도리어 '하이퍼 칼빈주의'라는 사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건 우리의 현재의 경험과 역사적 부흥 과정에서 교회가 경험한 역사적 경험에 전혀 반하는 주장입니다.
교의 신학 전체의 정교한 건축학적 구조를 생각지 않고 지엽적 사고로 논리적 비약을 하는 걸 보면 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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