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통로 : 공감
노승수 목사.
공감한다는 것은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핵심감정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서는 왜 지금의 이 증상들을 나타내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공감만이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공감은 동정과 다르다. 동정은 내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불쌍해서 그를 불쌍하게 볼 수도 있고, 내가 외로워서 그를 감싸줄 수도 있다. 내가 슬퍼서 같이 슬퍼할 수 있다. 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해서 그에게 상처 준 사람을 같이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감은 나의 입장이 아니라 온전히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려면 내가 비워져야 한다. 동양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그런 무아지경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이다. 거울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가 뚱뚱하건 못났건 신분이 높건 낮건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거울과 같이 맑아진 상태가 온전한 자기비움이다. 자기 비움이 온전히 이루어져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현실이 눈에 들어와서 마치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듯이 상대방이 내는 파장에 내가 동조되어 같은 파장을 방출하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남의 입장에 서는 것,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진정한 공감만이 사랑을 부른다.
진정한 공감은 진정으로 자기를 비운 사람이 할 수 있다. 언어가 공감이라고 해서 공감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공감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므로 마음이 병이 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의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마음은 자기가 부인되고 비워진 마음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공감이 가능하다. 청결한 마음은 자기 의로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부인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더 이상의 조작이 없음으로 상대방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만나 줄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소통이 일어나며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치유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순결해지고 거룩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를 공감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세상과 소통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존재이다. 그가 삼위일체이신 까닭은 그가 소통하시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사랑은 흔히 관계적 속성이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 간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한 분이신 존재, 이렇게 소통하시는 분으로 우주 가운데 계시고 우주 너머에 계신다.
따라서 그분을 닮은 우리도 소통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자연과 소통하고 사람과 소통하고, 그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죄이고 병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며,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병은 공감되지 않으므로 생기고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공감은 상담의 이러저러한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의 참된 삶이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특별히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하나님과의 공감이 이루어진 사람은 사람과도 공감이 잘되게 되어 있다.
공감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각성되었다는 의미를 담는다. 각성되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기도를 장시간 하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짧은 기도 후에 깊은 영적 각성과 공감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공감이라는 것이 같이 느끼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끼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의 기도를 청구서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틈이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시며 그의 뜻에 우리가 공명되는 시간이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 그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 열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육안이란 상대방의 바디랭귀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보다 몸이 더 정직하다. 몸의 언어는 무의식의 발현이며, 이 깊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공감의 출발점이다. 심안이란 소위 정신역동에서 말하는 심리적 심성(psychological mind)이 발달해서 자신의 내면의 형편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음은 철저히 몸과 관계되어 있다. 몸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마음에 대한 자각도 없다. 영안이란 super self 곧 자기 초월적 안목이다. 흔히 영성(spirituality)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역동상담에서 Ego Split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와 그 경험을 관찰하는 자아로 분화하는 현상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영안이란 보는 자(Watcher)로 머무는 능력을 일컫는다. 이것이 열려야 진정한 기도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공감은 우리의 육안과 심안과 영안을 열어주는 혹은 그 반대로 그것이 열렸다는 표지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 긍휼에 공감하며, 사람의 마음과 그 아픔, 깊은 상처, 쓴 뿌리에 공감하며, 핵심감정 그 자체로 느껴는 일 그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자체로 느끼는 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나며 회복이 일어난다. 따라서 공감은 모든 상담의 기법을 뛰어넘는 삶의 자세이자 인격이어야 한다.
공감은 동정과 다르다. 동정은 내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불쌍해서 그를 불쌍하게 볼 수도 있고, 내가 외로워서 그를 감싸줄 수도 있다. 내가 슬퍼서 같이 슬퍼할 수 있다. 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해서 그에게 상처 준 사람을 같이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감은 나의 입장이 아니라 온전히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려면 내가 비워져야 한다. 동양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그런 무아지경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이다. 거울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가 뚱뚱하건 못났건 신분이 높건 낮건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거울과 같이 맑아진 상태가 온전한 자기비움이다. 자기 비움이 온전히 이루어져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현실이 눈에 들어와서 마치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듯이 상대방이 내는 파장에 내가 동조되어 같은 파장을 방출하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남의 입장에 서는 것,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진정한 공감만이 사랑을 부른다.
진정한 공감은 진정으로 자기를 비운 사람이 할 수 있다. 언어가 공감이라고 해서 공감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공감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므로 마음이 병이 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의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마음은 자기가 부인되고 비워진 마음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공감이 가능하다. 청결한 마음은 자기 의로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부인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더 이상의 조작이 없음으로 상대방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만나 줄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소통이 일어나며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치유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순결해지고 거룩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를 공감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세상과 소통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존재이다. 그가 삼위일체이신 까닭은 그가 소통하시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사랑은 흔히 관계적 속성이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 간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한 분이신 존재, 이렇게 소통하시는 분으로 우주 가운데 계시고 우주 너머에 계신다.
따라서 그분을 닮은 우리도 소통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자연과 소통하고 사람과 소통하고, 그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죄이고 병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며,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병은 공감되지 않으므로 생기고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공감은 상담의 이러저러한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의 참된 삶이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특별히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하나님과의 공감이 이루어진 사람은 사람과도 공감이 잘되게 되어 있다.
공감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각성되었다는 의미를 담는다. 각성되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기도를 장시간 하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짧은 기도 후에 깊은 영적 각성과 공감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공감이라는 것이 같이 느끼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끼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의 기도를 청구서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틈이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시며 그의 뜻에 우리가 공명되는 시간이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 그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 열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육안이란 상대방의 바디랭귀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보다 몸이 더 정직하다. 몸의 언어는 무의식의 발현이며, 이 깊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공감의 출발점이다. 심안이란 소위 정신역동에서 말하는 심리적 심성(psychological mind)이 발달해서 자신의 내면의 형편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음은 철저히 몸과 관계되어 있다. 몸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마음에 대한 자각도 없다. 영안이란 super self 곧 자기 초월적 안목이다. 흔히 영성(spirituality)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역동상담에서 Ego Split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와 그 경험을 관찰하는 자아로 분화하는 현상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영안이란 보는 자(Watcher)로 머무는 능력을 일컫는다. 이것이 열려야 진정한 기도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공감은 우리의 육안과 심안과 영안을 열어주는 혹은 그 반대로 그것이 열렸다는 표지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 긍휼에 공감하며, 사람의 마음과 그 아픔, 깊은 상처, 쓴 뿌리에 공감하며, 핵심감정 그 자체로 느껴는 일 그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자체로 느끼는 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나며 회복이 일어난다. 따라서 공감은 모든 상담의 기법을 뛰어넘는 삶의 자세이자 인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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