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구원론

구원론(SOTERIOLOGY)_벌콥

 

 

 

서 론 (Introduction)

 

구원론(Soteriology)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서론(Introduction), 신론(Theology), 인죄론(Anthropology, Hamaltology), 그리스도론(Christology) 다음에 다루는 부분이다. 본래 조직신학은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과 쌍벽을 이루는 신학의 중요한 분야로, 인체로 비유하자면, 조직신학은 인체의 골격(skeleton)과 같고, 성서신학은 인체의 살과 혈관과 신경 등 생명의 매체가 되는 것으로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조직신학은 하드웨어(hard ware)이고 성서신학을 소프트웨어(soft ware)에 해당되는 것이다.

 

(1) 신론(the Doctrine of God)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만유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의 작정(decree)과 예정(predestination)을 다루고,

 

(2) 인죄론(Anthropology and Hamaltiology)에서는 인간의 본질과 타락으로 인한 죄에 관하여 다루며,

 

(3) 그리스도론(Chritology)에서는 타락으로 죽게 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존위와 그의 사역을 다루게 되고, 본 장인

 

(4) 구원론(Soteriology)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구속의 계획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구원을 성취하신 것을,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인간에게 적용하시는 사역을 다루게 된다.

 

(5) 교회론(Ecclesiology)에서는 주님의 몸 된 생명의 공동체로서 주님 오실 때까지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며,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 주님의 지상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관해 다룬다.

 

(6) 성령론(Pneumatology)은 과거에는 구원론의 일부로 다루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이 분야를 따로 취급하여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7) 종말론(Eschatology)에서는 주님의 재림에서부터 지상의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주님 재림 시에 최후의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따위에 이루어지는 재림왕국과 인간의 중간상태, 인간의 사후의 문제, 즉 악인의 영벌과 성도의 영생, 그리고 천국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8) 구원론은 죄인에 대한 구원의 축복들의 전달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으로 신적 은총과 생명의 회복에 관하여 다룬다.

 

(9) 구원론은 인간의 생명과 능력과 행복의 충분한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지식과, 현세와 내세를 위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전제로 한다.

 

(10) 구원은 회복, 구속, 갱신들을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원상태와, 죄가 세상에 유입됨으로 인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관계에 대한 연속적인 장에 비추어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11) 더욱이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죄인의 구원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들을, 본래 타락된 인간들의 구원을 계획한 영원한 평화의 협의와 은혜의 언약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것은 구속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전제로 하므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밀착관계를 보여준다.

 

 

1. 명 칭 (Name)

 

(1)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명칭은 헬라어 소테리오스(σωτήριος) 에서 유래된 용어로 구원”(salvation)이라는 의미이다.

 

(2)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은 성령론과 동시에 취급하는데, 그 이유는 삼위 중 구원을 인간에게 직접 적용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3) 물론, 창조 시와 마찬가지로 구원사역에 있어서도 삼위하나님께서 별개로 역사 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의논하시고(Divine council) 함께 사역하셨다(co-worked).

 

 

2. 정 의 (Definition)

 

(1) 구원의 내용에 대하여 정의하자면,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가 정의한대로 그것은 구원의 적응을 취급한다고 말하기보다는 구원의 사역의 적용을 취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더 낫다

(It is better to say that it deals with the application of the work of redemption than to say that it treats of the appropriation of salvation).

 

(2) 이 용어(application)는 펠라기우스의 지론, 즉 구속의 적용 (application)이 아니라 구속의 집행(the administration of redemption) 이라고 정의한 것에 반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을 전제하여 구속의 적용까지도 인간의 자유의지(will of man)에 맡길 수 없다는 칼빈주의자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I.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

 

 

(1)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Heilsaneignung"이고 화란어로는 "Heilsweg"이며 영어로는 "the Way of Salvation"으로 구원의 길구원의 서정”(the order of salvation)이라는 뜻이다.

 

(2) "The ordo salutis describes the process by which the work of salvation, wrought in Christ, is subjectively realized in the hearts and lives of sinners.

 

(3) It aims at describing in their logical order, and also in their interrelations, the various movements of the Holy Spirit in the application of the work of redemption.

 

(4) The emphasis is not on what man does in appropriating the grace of God, but on what man does in applying it. It is but natural that Pelagians should object to this view" (L. Berkhof).

 

 

1. 구원의 서정의 역사적 소고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의 서정이 체계화되지 못했다.

 

구원의 서정의 교리는 종교개혁에서 결과 되었다.

 

최초로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후기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수정, 보완되었다.

(Kuyper는 칼빈의 보다 주관적 견해를 지적했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모든 교회가 동의하지 않는다.

 

 

2. 구원의 서정에 대한 견해

 

성경에 구원의 서정에 관한 분명한 체계(clear-cut ordo salutis)가 제시되지 않고 있는 반면에, 그 내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취할 수 있도록 관설되어 있다.

 

첫째로, 성령(the Holy spirit)께서 죄인 개개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 구원의 축복을 그들에게 적용하시는 충분한 역사들을 하신다는 사실과, 둘째로, 성경(Scriptures)의 여러 구절과 여러 방식으로 구속사역의 상호작용 관계와 선후순서를 가르치고 있다.

 

 

(1) 개혁파의 견해 (The Reformed View)

 

개혁파에서는 칭의(justification)의 순서에 있어서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개혁파 학자들은 칭의가 회개와 신앙 뒤에 오는 것으로 주장하나, 어떤 학자들은 칭의를 구원의 서정 첫 머리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칭의의 위치 (ordo salutis locus)

 

개혁파(Reformed)의 입장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율법에 관계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음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전제하고(presupposed), 구속의 언약(pactum salutis)에 의하여 성립되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따라서 율법적 요소가 도덕적 요소보다 선행한다고 보아 칭의를 구원의 서정의 출발점으로 보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개혁파 학자들은 구속의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를 염두에 두고, 구원의 서정(救援序程)에서는 신앙에 의한 의()를 강조함으로 칭의를 신앙의 뒤에 놓는다.

 

 

칭의의 바른 순서 (right order of justification)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최우선으로 적용함으로서 구원의 서정을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calling), 혹은 중생(regeneration)으로 부터 시작하여 회심(悔心, repentance), 신앙(信仰, faith), 칭의(稱義, justification), 성화(聖化, sanctification), 견인(堅忍, perseverance), 영화(榮化, glorification) 등의 순서로 진행시킨다. 이것이 구원의 서정의 일반적 순서이다.

 

 

바빙크(Herman Bavinck)의 구원의 서정

 

(1) 1그룹: 칭의(justification)....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허락된 축복으로, 양심이 자유로운 가운데 믿음으로 수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칭의의 순서와 내용(the order contents of justification)은 아래와 같다.

 

죄 사함 (the forgiveness of sins)

 

양자됨 (the adoption of children)

 

하나님과 화해 (the peace with God)

 

영광스러운 자유 (the glorious liberty)

 

 

(2) 2그룹: 중생 (regeneration)....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이것은 성령의 중생의 사역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속죄로 죄에서의 자유함을 준다. 그 중생의 단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소 (internal calling)

 

회심 (conversion)

 

갱신 (renewal)

 

성화 (sanctification)

 

(3) 3그룹: 영화 (glorification)....성령에 의하여 현세에서의 인간의 행복한 보존을 위한 사역과 영원한 나라에로의 인도하심을 보장해주신다. 영화의 단계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보존: preservation, 견인: perseverance)

 

영원한 기업 (eternal inheritance)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 (deliver from suffering & death)

 

영원한 구원의 소유 (possession of eternal salvation)

 

 

명심할 사항들 (some things to be borne in mind)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에서 그 나타나는 양상에 따라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구원의 서정 가운데 용어의 다양한 의미들이라든가 영적 행위들의 구별, 그리고 그것들의 순서들이다.

 

 

 

 

(1) 용어의 다양한 사용 (Diverse Use of the Term)

 

칭의 (justification)

 

신앙에 의한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택한 자의 객관적 칭의(objective justification in resurrect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전가 적 칭의(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n pactum salutis)

 

중생 (regeneration)

 

새 생명의 원리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신생의 원리 (the designation of the new birth)

새 생명의 초현 (first manifestation of the new life)

회심(悔心, conversion), 성화(聖化, sanctification)와 동의어(17C 신학에서는 종종 성화나 회심과 동의어로, 칼빈까지도 중생을 연속적 성화로 이해했다).

 

 

(2) 몇 가지 다른 구별들

 

1) 법적 행위 (judical acts)....칭의(稱義, justification)로서 죄인의 신분(身分을 변경시키는 행위.

 

2) 재창조행위 (recreative acts of God)....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으로 죄인의 상태를 개선.

 

3) 적용의 동작의 관계 (in connection with the various movements in the work of application)

 

 

(2) 루터 파의 견해 (The Lutheran View)

 

루터 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행위보다도 인간의 신앙에 초점을 맞춤으로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중생보다 회개를 앞세운다. 회개함으로 그 후에 중생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들은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칭의 등의 교리를 부인하지 않으나, 이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지는 않는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적 사역을 인정하나 동시에 신적인 면(a patre Dei) 보다 인간적인 면(patre homonis)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믿음을 강조한다.

1) 신앙을 강조 (emphasis on faith)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루터파는 오직 믿음” (sola fide)라는 루터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인 칭의의 교리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의하여 믿음 (fide), 즉 인간의 능동적인 원리(an active principle)로서의 믿음이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한다. 카프탄(Kaftan)은 믿음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전부로 간주했다 (Dogmatics, p. 656).

 

 

2) 영적인 축복의 순서 (The ordor of Spiritual Blessing)

 

루터파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세계에 대한 화해(reconciliation)에 둔다(Pieper). 그리고 루터 파의 영적 축복의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영적 축복 이전 준비단계

 

소명은 항상 어느 정도, 조명, 소생(certain measure of illumination and quickening)을 동반한다.

 

성령의 구원사역을 저항할 수 없게 된다.

빈번히 회개를 유발시킨다.

성령의 구원의 은혜로 중생에 이르게 한다.

 

 

(B) 영적 축복의 단계

 

구원하는 믿음(신앙)을 받게 된다. (saving faith).

객관적 사죄, 칭의를 사유한다(appropriation).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다. (adoption)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다 (mystical union)

성화생활로 들어간다. (life of sanctification)

 

 

결론 이 모든 축복들의 영원한 소유는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인 신앙, 지속적인 신앙에 달려있다. 이는 신앙이 지속될 때에는 이러한 축복들이 유지되지만, 신앙이 없어지면 이러한 축복들은 회의적이고, 불확실하며 그르치게 된다.

 

(3) 로마 가톨릭의 견해 (The Roman Catholic view)

 

(1)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개인에게 성령이 직접 역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구원의 서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가견 교회(visible church)와 교황(Pope)의 권위를 구원교리에 까지 절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성례들을 구원의 방편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 구원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성령의 직접사역으로서의 구원의 서정은 없으나, 교회 성례들을 통하여 받게 되는 특수한 구원의 서정을 갖고 있다. 유아는 세례로 거듭나고, 그의 성장 후 복음에 친숙해질 때, 마음의 조명과 의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충분한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하거나 따를 수도 있다. 사람이 이 은혜를 따를 때, 칭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데 협력하는 협력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된다.

 

 

1) 칭의의 정의 (definition of justification)

 

(1)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인간의 칭의가 아니라 은혜의 사역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성화에 의한 것으로 본다. 신앙은 칭의(稱義)의 중심요소가 아니라 단지 칭의(righteousness)를 준비하는 단계적 요소(段階的 要素)들과 대등한 것에 불과하다.

 

(2) 그것은 단순히 교회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fides informis)에 불과하며, 그것은 오로지 주입은혜(gratia infusa, fides caritate' formata)로서의 사랑을 통해서 칭의의 능력을 얻게 되는 바, 첫 번째 준비요소로서 칭의의 기초와 뿌리라는 의미에서 칭의의 능력 (justifying power)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칭의는 신앙의 상태 여하에 따라 잃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칭의는 단회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2) 가톨릭의 구원의 서정 (Catholic ordo salutis)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의 구원의 서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칭의를 위한 준비단계로서 교회의 교리에 의존하여 충족한 은혜(gratia suffiens), 협력은혜(gratia cooperans), 성례(baptism)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충족한 은혜 (gratia suffiens)

 

충족한 은혜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필요한 단계로서 이 은혜는 성령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조명과 의지력에 의한 것으로 인간의 마음에 주입되는 은혜(gratia infusa)로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는 바, 이 은혜에 동의하게 되면 둘째 단계인 협력은혜(gratia cooperans)로 바뀌게 된다

 

협력은혜 (gratia cooperans)

 

협력은혜는 충족 은혜를 받아서 칭의 받기 위하여 그 은혜에 동의하고(assent), 협력하는 은혜를 말한다. 이 은혜는 처음에 충족 은혜가 인간의 동의로 인하여 변환된 은혜로서 이 준비로서는 7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신앙적 수납 (信仰的 收納, believing acceptance of the Word of God)

 

(2) 인간의 죄의 상태로의 통찰 (狀態로서의 洞察, insight into one's sinful condition)

 

(3) 하나님의 자비로서의 희망 (hope in the mercy of God)

 

(4)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 (beginning of love to God)

 

(5) 죄에 대한 증오심 (an abhorrence of sin)

 

(6)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는 결심 (a resolve to obey the commandments to God

 

(7) 세례에 대한 욕망 (a desire for baptism)

 

 

세례로 칭의 (justification by baptism)

 

칭의는 충족은혜의 주입은혜(gratia infusa)로 따라오는 사죄로 인하여 성립되는 바, 이 칭의는 세례라는 방편으로 즉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인간이 계명을 순종함과 선을 행함으로 보존되는 것이다. 주입은혜를 통하여 인간은 선행과 은혜와 영생에 이르기까지 얻을 수 있는 공로의 능력을 받게 되는데, 이 칭의의 은혜는 불신앙뿐만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죄(mortal sin)를 통해서도 상실될 수 있는 것으로, 면제(absolution)와 보속의 행위(works of satisfaction)를 동반하는 통회(contrition)와 고해성사(penance)의 성례(sacrament)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 정죄와 영벌은 면제에 의해서 사라지나, 임시적 형벌(penalty)은 온전히 보속행위에 의해서 취하된다.

(4) 알미니안파의 견해 (The Arminian View)

 

알미니안 파는 구원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적용 적 사역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에 치중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인간의 구원의 길은 열어 놓았으나, 그것을 소유하는 데는 인간의 자유의지 적 결단과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객관적인 사역(objective work)으로 부터 인간의 구원에 대한 주관적인 사역(subjective work)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이미 성취된 구원(accomplished salvation)에 대한 그리스도의 공로(the accomplished merit of Christ)와 앞으로 수납(收納)해야 할 인간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man to be accepted in the future)이 공조(共調)하여(to co-operate) 인간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소위 신-인 협력설(神人協力說, a theory of God-man co-operation)을 제시한다.

 

 

1) 알미니안파의 구원관 요약

 

인간의 全的墮落(全的 無能力)을 부인한다.

아담의 원죄의 유전(原罪遺傳)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사역보다 인간의 의지, 노력에 치중한다.

구원에 있어서 신-인 협력설(神人協力說)을 주장한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다(칼빈의 制限續罪背置).

 

 

2) 영적 축복의 순서 (order of spiritual blessings)

 

복음은 차별 없이 받으나 그 복음은 인간에게 영적 감화를 끼칠 뿐이다 (有效恩惠背置).

 

복음을 받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어 구원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게 된다.

 

회개와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온다(칼빈주의의 불가항력의 은혜에 배치).

 

신앙 후에 칭의와 중생이 따른다(칼빈주의의 이런 동작들이 중생의 결과라 하는 것과 배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의의 전가가 아니라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이다.

신앙은 칭의에 소용(serve)될 뿐 아니라 중생에도 소용되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복음적인 순종의 은혜(the grace of evangelical obedience)를 보증해준다.

 

신앙은 생애를 통하여 작용하도록 허용된다면, 견인의 은혜(the grace of perseverance)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거부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resistible and amissible).

 

 

3) 칭의관의 요의 (the key view of justification)

 

그리스도 의의 직접 전가로서의 칭의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단순히 의의 사인일 뿐이다.

칭의의 실제적(實際的) 내용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순종의 원리(順從原理, principle of obedience)와 마음의 정직성(正直性, honesty of heart)과 선량한 성품(善良性稟, good dispositions) 들을 포함하고 있는 신앙이 완전한 순종(完全順從, perfect obedience)을 대신하여 수납되고, 그들의 의로 인정된다고 한다. (reckoned for righteousness).

 

칭의는 객관적, 법적 행위(objective, judical work) 가 아니라 주관적 행위(subjective work)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납하는 것이(acceptance) 아니라 사죄 받는(to be pardon) 것이다.

 

사죄(forgiveness of sins)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하고 있으나, 하나님에게서의 수납은 율법에 대한 순종과 복음적인 순종에 의존한다.

 

 

웨슬레-알미니안 파의 구원관

 

웨슬레-알미니안(Wesleyan Arminian) 파는 17세기의 원조의 알미니안 주의(original Arminianism)와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웨슬레-알미니안 주의는 본래의 알미니안 보다 칼빈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웨슬레-알미니안은 인간의 전전타락(全的墮落)을 믿고 구원에 있어서 알미니안의 신-인 협동설을 거부한다.

 

(1) 아담의 원죄의 유전을 인정한다(칼빈주의와 같이).

(2) 만인 칭의(만인구원)를 믿는다.

(3) 인간은 출생 시에 정죄(guilt)가 면제된다.

(4)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의 전적 타락을 인정한다.

(5) 인간은 아무도 이 자연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그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으므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보편적 적용 때문이다).

 

(6) 죄인의 갱신(罪人更新, renovation)과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효과 있게 하는(to effect) 은혜의 초자연적인 사역(超自然的 使役, supernatural: hyper-physical work)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7) 현 생애(現生涯) 중의 그리스도인의 완전(完全, perfection)과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말한다.

 

(8)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능력(ability to co-operate with God)을 순수한 은혜의 문제로 간주한다(알미니우스주의는 정의의 문제로 간주한다)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와의 비교 (구원관)

 

알미니안 주의(Arminianism) 중 원조(元祖)의 알미니안 파(original Alminanism), 항론파(Remonstrance), 웨슬레이안-알미니안(Wesleyan Arminian) 파는 차이가 있어서 웨슬레이안-알미니안 파는 칼빈주의(Calvinism)에 가까우나, 레몽스트랑 파는 과격파 알미니안으로서 칼빈주의와 극대 극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칼비주의의 5대교리(five points of Calvinism)가 바로 레몽스트랑 파(Remonstrance)와의 교리논쟁의 핵심이다(Dort 會議).

 

칼빈주의 5대교리 (Five points of Calvinism)

 

인간의 전적 타락(全的墮落, total depravity),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total inability of man).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제(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불가항력적, irresistible) 혹은 효력 적 은혜(效力的 恩惠, effective grace).

 

성도의 견인(聖徒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알미니안 주의의 5대 신조 (five points of Arminianism)

 

인간의 부분타락(部分墮落, partial depravity)...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손상을 받지 않았다(道德的 能力).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신의 은총의 선택을 말하나, 그 결과적 책임은 인간의 도덕적 요청(道德的 要請)에 의존한다(하나님의 豫知에 의한 신앙적 선택).

 

만인 속죄(萬人贖罪, universal atonement)...복음의 속죄능력은 무제한성이어서 어떤 사람에게 제한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구속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시행되지만, 인간이 믿음으로 그 은혜를 수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인간의 구속적 은총의 보존을 위한 견인은 불가능하다고 한다(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상실가능)

 

 

알미니안 주의 구원관의 요약

 

조건선택....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지된 인간의 신앙과 순종, 즉 인간의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보편구원....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속죄의 효력이 인간이 출생 시에 이미 발생되었다.

 

협력은혜....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는 회복의 재능을 이미 타고났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로 구원 얻게 된다.

 

은혜저항....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 사랑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저항(無抵抗)에 의한 협력으로 성취된다.

 

 

 

 

 

 

 

 

 

 

 

 

II. 특별은혜

(SPECIAL GRACE)

 

 

하나님께서 인간을 섭리하시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식으로 섭리하신다. 즉 특별섭리와 일반섭리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일반섭리를 통하여 일반 은총을, 특별섭리를 통하여 특별은총을 베푸신다. 일반은총은 선악간이나 신. 불신을 막론하고 인간 누구에게나 주시는 은총이다. 마치 태양 빛이나 비와 공기 등을 선악 간 누구에게나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5:45; 14:17).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은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택한 자에게 내리시는 은총으로 구원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일반은혜로는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섭리를 통한 특별 은혜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 은혜가 곧 구속의 은혜이다.

 

이 구속의 은혜의 일차적 중보자(the first mediator, the Helper)로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해놓으신 후, 이차적으로 적용자, 즉 다른 보혜사(another Helper)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께서 오셔서 그 성취된 구원을 인간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 다음으로 구원론에서 성령의 특별은혜를 다루게 된다.

 

 

1. 성령의 은혜 (Grace of the Holy Spirit)

 

인간이 범죄 하기 전 성부 하나님은 창조적 사랑으로 인간을 축복하시고 섭리하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일단 공의의 하나님으로 비쳤으며, 다시 구속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특별은혜로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스도는 인간구원에 충분하도록 은혜가 충만하셨고(1:14), 그 은혜를 적용하시는 분 역시 은혜의 성령으로(10:29)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의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온 우주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깊은 감화로 역사 하신다.

 

(1) 은혜의 어원적 의미 (Etymological Meaning of Grace)

 

어원적(語原的)으로 볼 때 은혜”(恩惠)라는 용어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특수한 의미로서 성경적 의미를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약의 은혜(Grace in the OT)

 

구약에서 은혜라는 용어는 ”(כ󰕵)으로 아름다움을 지칭하기도 하나 (22:11; 31:30), 일반적으로 호의”(好意)은총”(恩寵)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6:8; 19:19; 33:15; 33:12; 34:9; 삼상 1:18; 27:5; 2:7).

 

 

신약의 은혜(Grace in the NT)

 

(1) 신약에서 은혜라는 용어는 카리스”(Χάρις)로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외적(外的)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스러움,” “아름다움그리고받을 만한”(loveliness, agreeableness, acceptableness)등을 표현하는 것이다(4:22; 4:6).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은총이 바로 그것이다(1:30; 2:40-52; 2:47; 24:27; 25:9).

 

(2) 이 말의 뜻은 주님의 친절(kindness)이나 자선(charity)을 가리키며(r고후 8:9) 하나님의 은총(벧전 5:10)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 은총을 받는 자의 정서의 표현으로 감사의 의미를 가진다(4:32; 고전 10:30, 15:57; 고후 2:14; 8:16; 딤전 1:12). 이어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결과 되는 하나님의 무상은총을 뜻한다(4:4-8; 3:25; 5:2, 15, 17, 20; 6:1; 고전 1:4; 6:1; 고후 9:8; 1:7; 2:5, 8; 벧전 3:7; 5:12).

 

 

(2) 성령의 2중 은혜 (Double Grace of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가 그렇듯 성령의 사역도 자연계와 인간세계, 구속의 세계와 타락의 세속세계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자연과 세속세계에 역사 하는 성령의 은혜를 보통은혜 혹은 일반은혜라 하고, 구속세계에 역사 하는 성령의 은혜를 특별은혜라 한다.

 

 

(1) 보통 은혜 (자연, 세속세계에 적용)

 

1) 생명의 은혜....성령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생성과 유지를 주관하시는 생명의 능력으로 관여하신다(32:8; 33:4; 34:14, 15; 104:29; 42:5). 특히 구약성경에는 생명의 기원, 유지, 발전 등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으로 되어있다.

 

2) 지능 재능의 은혜....인간의 지식과(知識, knowledge), 능력(能力, power), 재능과(才能, ability), 기술(技術, skill)등이 성령에 의해서 부여 된다 (정치, 예술, 문화, 과학 등).

3) 도덕. 질서....성령은 피조계의 모든 능력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위해서도 관여하시고 사역하신다.

 

 

(2) 특별 은혜 (피조물의 구속에 적용)

 

피조 , 특히 인간의 구속을 위한 특별하신 성령의 사역으로, 구속적 진리의 계시(redemptive truth), 성경영감과 같은 특별계시의 영감(inspiration of special revelation), 구속사역을 위한 각종의 은사들(all kinds of the gifts for the works of redemption)을 부여하신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성도들의 모든 생활(lives of the saints on earth)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심판하신다(14:26; 16:8-11; 16:13).

 

 

(3) 성령의 특별 은혜 (구속은혜 중)

 

(1) 하나님의 속성 적 은혜

 

첫째로,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God's attribute), 하나님의 완전성 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것은 죄와 형벌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과 과분한 은총이나 사랑으로서, 그 자체가 사죄와 형벌에서의 구원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사랑(mercy)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로서 구속적 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의도와 죄인의 칭의, 영적 갱신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모든 영적, 영원 적 축복의 생산적 원천이다.

 

 

(2) 객관적 준비의 구상적 은혜

 

둘째로, “은혜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객관적 준비의 구상으로(as a designation of the objective provision) 사용되었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체(living embodiment)이시다(1:14; 2:11). 이 용어는 단지 그리스도가 무엇이냐 뿐만 아니라,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1:17; cf. 2:7).

 

(3) 하나님의 은총의 구상적 은혜

 

(1) “은혜라는 용어는 성령에 의한 구속사역의 적용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상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칭의나 용서로 받은 사죄에 대하여 적용된다(3:24; 5:2, 21; 3:15).

 

(2) 그것은 또한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의 마음이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 구원의 축복들과 영적인 은혜들을 포괄하고 있다(11:23; 18:27; 5:17; 고전 15:10; 고후 9:14; 4:7; 4:5,6; 벧전 3:7).

 

(3) 더욱이 그것은 단지 피동적인 성질(passive quality)이 아니라 능동적인 세력과 능력(active force and power), 일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고전 15:10; 고후 12:9; 딤후 2:1). 이 용어의 의미에서 성령의 동의어와 같은 것으로, “성령의 충만은혜와 능력의 충만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6:5,8).

 

(4) 이 성령을 은혜의 성령이라 부른다(10:29). 이것은 특히 성령에 의하여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적용에 관한 성경의 교훈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 은혜의 교리는 교회에서 발전되었다.

 

 

(4) 교회사상의 은혜의 교리 (The Doctrine of Grace in Church History)

 

1)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들을 어떠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무상으로 그리고 주권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4,5).

 

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8,9).

 

4) 이러한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3:20-28; 4:16; 2:16).

 

 

(1) 초대교회 교부 (Some of the Early Church Fathers)

 

도덕주의 (Moralism)

 

동방교회 교부들 (the Fathers of the Eastern church)

 

바울서신과 불일치 (not harmonized with Pauline)

 

펠라기우스 주의에서 절정 (Pelagianism: Wiggers)

 

이들은 보다 급진적인 은혜 관을 가지고 있는 바, 은혜의 개념을 (a) 선행의 능력(possibilitas boni)과 자유의지, (b) 인간을 위한 덕행의 연습으로 달성될 수 있는 계시와 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 (c)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과 계명들을 주시고 그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의 전행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들을 죄로부터 끊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한다.

 

 

어거스틴의 은혜관 (Concept of grace of Augustine)

 

펠라기우스가 도덕주의의 은혜 관을 제창한데 반하여 어거스틴은 계시 의존적 은혜 관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으로 일반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구속계시)를 말함과 같이 은혜 관에 있어서도 일반은혜(자연은혜)와 특별은혜를 말함으로서 계시 의존적 은혜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보다 넓은 의미로 자연적 은혜를 사용한다.

(아담의 원상태에서의 정직과 선행성등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특별은혜에 국한시킨다.

(속죄와 갱신, 성화 등은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속한다)

 

이러한 행위는 성령에 의해서 성취된다.

 

은혜의 이중성(duality of grace)을 말하고 있다.

 

(a) 효력적, 예정적 은혜(operating, prevenient grace)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미리 보장하신 은혜: 예정된 은혜)

 

(b) 협력적, 후속적 은혜(co-operating, subsequent grace) 이미 주신 효력적, 예정적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은혜이다.

 

이 은혜는 전혀 무상으로 주어진다(freely given)

 

이 은혜는 인간에게 전혀 불가항력적이다(irresistible)

 

 

 

 

(2) 중세 스콜라 신학 (Scholastics during the Middle Age)

 

(1) 중세의 스콜라 신학은 은혜의 주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은혜의 교리에 관해서는 항상 일치하지는 아니했다. 어떤 사람은 은혜의 개념에 관해 어거스틴에 또 어떤 사람은 반펠라기안 주의(Semi-Pelagianism)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2) 그들을 대체로 은혜가 성례들(sacraments)을 통하여 매개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은혜의 교리(a doctrine of grace)를 은혜의 교리와 절충한 공로의 교리(a doctrine of merit)와 결합시키기를 추구하였.

 

(3) 죄인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영혼의 성품으로서의 은혜를 강조했던 바, 이 은혜는 성령의 창조가 아니거나 혹은 성령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

 

(4) 이 주입은혜(infused grace)는 기독교 덕성(virtue)의 발전의 기초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불어 공은 세워 더 나은 은혜로 나가게 하지만, 견인의 은혜(the grace of perseverance)에 기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견인의 은혜는 오로지 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어거스틴과 같이 은혜의 교리와 예정의 교리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사이에 논리적인 연결을 우지하지 못하였.

 

 

(3) 종교개혁자들 (Reformers)

 

(1) 종교개혁자들을 어거스틴의 은혜의 개념으로 돌아갔으나, 어거스틴의 성례주의(sacramentarianism)는 피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죄인들에게 보여주신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은혜를 한 번 더 강조하고, 인간 편에서의 모든 공로를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2) 스미톤(Smeaton)어거스틴에 있어서 신앙의 내적 연습과 성령의 사역으로 일깨워지고(5:5),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영혼의 성품으로 표현되거나 내적 재능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주입시키는 은혜라는 용어는 신의 의지 속에 있는, 자유에 대한 좀더 성경적이고 넓은 의미로서 효과적인 은총(efficacious favour)이라고 말했.

 

(3) 개혁자들이 은혜를 칭의와 결부시켜서 사용했던 반면에 그들은 또한 다른 관련에서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성령의 사역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였다. 개혁자들이 성령의 내적인 구원하는 역사의 의미에서 은혜를 강조하는 반면에, 칼빈은 특별히 보통은혜의 개념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인 반면에, 구원의 효력이 없는보통은혜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4) 카이퍼(H. Kuiper) 박사에 의하면, 죤 칼빈은(John Calvin) “보편적 보통은혜(universal common grace), 일반적 보통은혜(general common grace), 언약적 보통은혜(covenant common grace)등 세 가지 은혜로 구분하고 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교리로부터 이탈하였다.

 

(5)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보통) 은혜를 주셨으며, 그것에 의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믿은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성령과 타협하며 협동하고, 실제로 인간이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적 순종과 견인의 은혜를 더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6)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은 인간의 의지의 승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스미톤은 모든 사람이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고, 회심의 원인이 성령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의지의 협력에 있으며, 이것이 회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했다.

 

(7) 그리고 소우물 학파의 아미랄더스(Amyaldus of the School of Saumur)는 그의 알미니안 입장을 개선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반적 작정에 관련하여, 죄인이 도덕적 능력은 결여되었으나 믿을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불행한 구별을 추정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에드워드(Edwards), 벨라미(Bellamy) 그리고 훌러(Fuller)등에 의하여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8) 그리고 아미랄더스(Amyraldus)의 제자 패전(Pajon)은 죄인들의 구원의 회심을 위한 내적 조명(internal illumination)으로서의 성령의 사역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9) 영국에서의 감리교(Methodists)의 부흥운동과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大覺醒運動, the Great Awakening)은 구원의 은혜교리를 회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편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다소간 알니미안의 색채가 보였다.

 

(10) 슐라이엘마허(Schleiermacher)는 죄책의 객관적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죄책의 문제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11) 알브레흐트 리츌(Albrecht Ritschl)의 신학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는 모호하게 되었다.

 

(12)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전체적인 특징인 인간의 선에 대한 강조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필연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말이 많은 신학자들의 글이나 말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13) 그러나 위기신학(The Theology of Crisis)은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그 용어가 다시 한 번 더 사용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2. 특별 은혜의 사역 (The Work of Grace)

 

보통은혜의 사역의 영역이 일반, 자연계라면, 특별은혜의 사역은 구원론 전반에 걸친 영역에 속한 것이다. 특별히 이 특별은혜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보내신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의 공작이다.

 

(1) 성령의 세례 (聖靈洗禮)

 

세례에는 물세례와 함께 성령의 세례로 분류되는바, 이 성령의 사역은 몇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1) 정화성 (淨化性)

 

물세례와 함께 이 성령의 세례(불세례)도 죄악과 부정에 대한 정화작용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과 불은 신. 구약 모두에서 부정에 대한 정화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51:7; 36:25; 3:25, 26). 이 세례는 영적으로 씻어 깨끗게 함을 의미한다(2:38; 22:16; 고전 6:11; 3:5; 20:22; 벧전 3:21). (침례파의 침례와 세례와 비교)

 

2) 최초성 (最初性)

 

성령의 세례는 신자의 영적 생활 변화의 최초의 경험이 된다. 성령의 세례는 은사와 함께 신자들의 최초의 체험이 된다(2: 8: 19: 3:11; 1:8; 3:16; 1:33; 1:5; 11:16; 고전 12:13).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상징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최초의 의식이다.

 

3) 보편성 (普遍性)

 

성령의 세례는 최초의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다”(고전 12:13)고 해서 성령세례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2) 성령의 충만 (聖靈充滿)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세례와 상이하다.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아 거듭나는 것(重生: regeneration)으로 단회 적이나, 성령 충만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거룩한 생활로 성화되고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거듭거듭 반복적으로 받는 다회성의 은혜를 말한다. 이 성령충만에는 이중목적이 있다.

 

1) 성화를 위한 목적으로서의 성령충만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에, 먼저 자신의 성령에 이끌리는 영적 상태를 말하며, 이 영적 상태에 의하여 발생되는 인격적 결과를 보고 성화를 위한 성령충만의 증거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중생한 사람이 생활의 변화를 위하여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의미한.

 

6:57:55의 스데반의 경우, 성령이 충만하여(πλθείς)라는 말은 첫째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커밍(Cumming)은 이 상태를 영혼의 습성”(habit of the soul)이라고 불렀다(Cumming, Through the Eternal Spirit, p. 230). 이와 같이 성화를 위한 성령충만은 크리스천의 생활을 거룩하게 유도한다.

 

2) 사역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성령충만

 

이는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한 봉사를 목적으로 주시는 성령충만을 의미한다. 이는 역시 스데반의 경우에 복음을 담대하게 그리고 능력 있게 증거 하도록 주신 성령충만으로 그는 성화의 성령충만과 동시에 사역을 위한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다(7:55).

 

또 베드로의 경우에 주의 복음사역을 위한 성령충만의 능력을 생각할 수 있다. 마이는 네가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새롭게 성령을 받음으로 특별히 무장하는 것을 확실히 하라고 말함으로써, 사역을 위한 성령 충만의 특별은사를 말했다 (F. B. Meyer, A Castaway, p. 100).

 

[정 리]

 

(1) 성령세례....단회적이며 중생의 역사를 의미한다.

 

(2) 성령충만....다회적이며 2중적 사역을 한다.

 

자신의 성화를 위한 성령충만

복음의 사역을 위한 성령충만

 

 

 

III. 보통은혜

(COMMON GRACE)

 

 

구원론(Soteriology)에 있어서 보통은혜는 개혁주의(Reformed)와 알미니안주의 (Arminianism)의 격차는 매우 크다. 개혁주의에서는 창조시의 성령의 사역과 구속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 두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동작(動作)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A. 보통은혜 교리의 기원 (Origin of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1. 보통은혜 교리 취급의 문제

 

(1) 보통은혜의 교리의 기원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축복된 생활과 구속적은 아니로되 진선미(眞善美)의 많은 자취를 보여주는 자연적인 생활코스를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는 온 세상이 죄의 저주아래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세상에서 비교적 질서 있는 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야기된다.

 

(2) 또 어떻게 단순히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실과를 풍부하게 내는가? 죄인들이 하나님이나 자연 만물에 관한 지식과, 선악간의 분별을 하며, 덕이나 외적행동에 관한 어떤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연인에게 부여되는 특별은사와 재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사람들에 의한 과학과 예술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가지고 있는사람들의 종교적 동경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중생인들이 진리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외적으로 덕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보통은혜의 교리에서 찾아야 할 대답들이.

 

 

2. 고대의 보통은혜관 (어거스틴의 입장)

 

(1) 어거스틴은 구원하는 은혜의 계획으로서 은혜라는 용어를 유독 사용하지는 아니했지만, 보통은혜의 교리를 가르치지도 아니했다. 그는 아담이 타락 이전에 누렸던 은혜를 말하였고, 심지어 사람의 생 적(living), 감정적(sentient), 이성적(rational)존재로서의 인간존재 (man's existing)가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허용했다.

 

(2)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강조하고, 인간의 자연재능과 율법과 복음, 그리스도의 모범,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으로 인한 이해의 조명으로 구성되는 것 이상의 다른 어떤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펠라기우스(Pelagius)에 대항하여, 그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내적 갱신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 의존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마음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 동작이나 협동의 은혜로서 인간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갱신력을 강조했다.

 

 

3. 중세에 전개된 견해

 

(1) 중세에 들어와서 어거스틴의 죄(sin)와 은혜(grace)에 대한 반정립(反定立, antithesis)은 자연과 은혜의 반정립의 방편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부분, 즉 자연과 초자연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또 다른 반정립에 기초하고 있다. 총체적인 상태로 볼 때, 인간은 저질성품을 제어하는데 기여하는 원래적 의의 초자연적 선물을 부여받았다.

 

(2) 자연과 초자연의 대비와 관련해서 로마 교회는 도덕적 덕목들과 신앙적 덕목들을 구분하여, 도덕적 덕목이란 겸손, 순종, 온유, 관용, 절제, 순결, 근면 등과 같이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때에 적절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덕목들이며, 신학적 덕목들이란 믿음, 소망, 상 등 성화적 은혜에 의해 인간에게 주입되는 덕목들이다. 재세례파나 소시니파는 자연과 은총의 문제로 고심하여 재세례파는 자연을 희생하고 은혜를 고취시켰다면 후자는 은혜를 희생하고 자연을 고취시켰다.

 

 

4.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

 

(1) 루터는 가톨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죄와 은혜라는 어거스틴적인 대비를 재차 강조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하위의 영역과 상위의 영역, 즉 지상적 영역과 천상적 영역을 예리하게 구분하였다. 루터파의 아우스브르그 신앙고백에는 인간의 의지는 시민적 의를 행하고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했다. (어거스틴)

 

(2) 즈빙글리는 죄를 죄책보다는 타락(오염)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용서하는 은혜보다는 성화시키는 은혜고 이해했.

 

(3) 칼빈은 루터나 즈빙글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아, 자연인은 스스로는 어떤 선한 일도 행할 수 없으며 구원의 은혜의 특수성을 주장했다.

 

(4) 칼빈은 특별은혜의 개념과 병행해서 보통은혜론을 개진했다. 보통 은혜란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는 은혜이지만 인간 본성을 용서하지도 정화시킬 수도 죄인을 구원할 수도 없다고 했다. 보통은혜는 파괴적인 죄의 세력을 억제하며,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얼마간 유지하여 질서 있는 삶이 가능하도록 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은사들과 재능들을 부여하며, 과학과 예술의 발전을 증진시키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막대한 복들을 부어준다고 했다. (교리의 발전공헌에는 카이퍼와 바빙)

 

 

B. 보통은혜의 명칭과 개념 (Name and Concept of Common Grace)

 

 

1. 보통은혜의 명칭

 

(1) 보통은혜의 교리의 명칭은 본래 칼빈에게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후에 개혁신학에서 특별은혜와 대비해서 보통은혜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명칭은 화란신학에서 사용하는 일반은혜라는 의미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공유될 수 있는 은혜라는 의미에서 보통은혜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2) 이 보통은혜에는 칼빈이 언급한 대로 세 가지 구분에 따라 분류된다.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보통은혜, 모든 인간과 인류 각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보통은혜, 선택된 자든 아니든 계약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언약 적 보통은혜 등으로 구분된다.

 

 

2. 보통은혜의 개념

 

(1) 보통은혜와 특별은혜의 구분은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서의 은혜개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두 종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종류의 은혜만 있다. 이 한 가지 은혜가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이 보통은혜는 인류전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 보편적인 은혜인 반면에, 선택받은 자든 선택받지 못한 자든 복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공통적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보통은혜의 개념에 관련해서, 심령을 갱신하지 않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죄를 억제하고, 사회생활에서 질서가 유지되며, 시민적 의가 증진되도록 하는 성령의 일반 사역과, 햇빛과 비, 먹을 것과 마실 것, 주거와 의복 등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분여하는 일반적인 복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별은혜와 보통은혜와의 차이점

 

(1) 특별은혜의 범위는 선택의 결정에 의하여 결정된다. 특별은혜는 선택된 자들에게 한정되며, 보통은혜는 차별 없이 적용된다.

 

(2) 특별은혜는 죄책과 죄의 형벌을 제거하고, 인간의 내면적 삶을 변화시키며,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을 통해 죄의 부패로부터 점차로 그를 정화시키며 구원을 야기한다. 반면에 보통은혜는 죄책을 제거하지 못하고, 인간 본성을 갱신할 수 없으며, 단지 죄의 부패력을 규제하며 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데 그친다.

 

(3) 특별은혜는 불가항력적인데,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억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켜, 자의적으로 주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보통은혜는 저항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항상 저항을 받고 있다. 보통 은혜는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구원을 일으킬 수 없다.

 

(4) 특별은혜는 영적이고 재창조적 방식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본성 전체를 갱신하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며,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보통은혜는 일반적이 방식으로 인간이 진리를 보다 용하도록 하며, 의지에게 동기를 제공하고, 인간의 자연적 열망들에 호소하는 등 단지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만 역사한다.

 

 

C. 보통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Common Grace and the Atoning Work of Christ)

 

보통은혜가 어떤 방식이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연관되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1. 카이퍼(Kuyper)에 의하면 보통은혜의 근원은 창조의 중보자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리스도시다.

 

2. 보통은혜의 복들은 창조사역에 기원한 것이 사실이지만, 선택받은 자들에 관련해서는 십자가로 답할 수 있지만, 유기된 자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1) 보통은혜는 죄책을 제거하지 못하고 용서의 은총도 없다.

 

(2) 보통은혜는 정죄 선고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집행을 연기할 뿐, 속죄와 구원이라는 특별은혜와는 현저히 구별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의 계시를 연기하면서 멸망 받게 될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기를 원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3. 보통은혜에 대한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

(1) 유기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보통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한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주요한 자연적 혜택들이 인류 전체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불신자나 심지어 유기된 자들도 보통은혜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본다.

 

(3) 성경의 언약의 시행의 결과로 은혜언약이 영적인 복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복도 가져오고 이 복이 불신자들에게도 된다고 본다.

 

(4) 하지(Hodge) 박사는 인류와 같이 출생에 의해서 번식되고 서로 연합하여 생활하고 있는 종족 중 일부를 구원하려는 어떠한 계획이 그 목적을 성취하려면 구원받지 못한 여타의 모든 구성원들의 신분과 운명에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된다.”라고 했다.

 

(5) 그는 타락 후 최후의 심판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유기된 자들에 대한 인내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서는 항구적으로 그들의 신분과 운명에 영향을 주는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많은 복들이 심지어 이방인에게도 베풀어지며,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의 유식하고 품위 있는 시민들에게 보다 많이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지금도 베풀어지고 있는 이러한 복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위해 제정되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4. 보통은혜에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따른

(1) 간접적으로 유래하는 인류의 일반적 복이다.

(2) 하나님께서 예견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다.

(3) 선택받은 자의 구속과 우선적이며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4) 부차적, 간접적으로 인류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지는 자연적 복이다.

(5) 자연인이 저주와 죽음 이외에 받은 다른 복들이다.

(6)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간접적인 결과들이다.

 

D. 특별은혜와 보통은혜와의 관계 (The Relation Between Special and Common Grace

 

1. 특별은혜와 보통은혜는 본질적으로 다른가, 아니면 양적으로 다른가?

(1) 알미니안들은 충분한 (보통)은혜 외에 복음적 순종의 은혜를 인정하지만, 이 두 가지 은혜는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구원론 적으로 볼 때에 이 두 가지가 부분적으로나마 효력이 있다고 본다. 보통은혜는 인간이 회개하고 신앙할 수 있게 하지만, 특별은혜는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신앙할 수 있게 한다.

(2)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보통은혜와 특별은혜의 본질적인 차이를 주장한다. 특별은혜는 초자연적이며 영적이다. 즉 죄책과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 선언을 해제한다.

 

(3) 보통은혜는 자연적인 것으로, 일부는 구원의 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다만 죄의 외면적인 발현을 억제하고 외면적인 도덕과 예의 사회 안의 선한 질서와 시민적인 의,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시킨다.

 

2. 특별은혜와 보통은혜 중에 어느 것이 우선적인가?

(1) 양자는 어느 것이든 시간적으로 우선하지 않는다.

(2) 3장은 양자는 모두 타락 이후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3) 보통은혜가 이 세상에서 작용할 때 특별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특별은혜가 우선적이다.

 

3. 보통은혜는 독립적인 목적이 있는가?

(1) 보통은혜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 구속사역에 목적이 있다.

(2) 보통은혜는 선택받은 자의 삶과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하도록 보조한다.

 

(3) 이러한 목적 외에도 보통은혜는 인류를 위한 자연의 숨은 힘을 발견하고 개발하며, 인류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재능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하위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증대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독립적인 목적이 있다.

 

4. 특별은혜와 보통은혜는 각각 서로 구별된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1) 조직된 교회 안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2) 그러나 조직된 교회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3) 보통은혜도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역사한다.

(4) 양자 모두가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5) 보통은혜는 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자연계와 현세에 관련된다.

(6) 특별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에 관련된다.

(7) 이 둘을 서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8) 보통은혜는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9) 보통은혜의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아래 둠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

 

 

E. 보통은혜가 역사하는 수단들 (The Means by which Common Grace Operates)

 

보통은혜가 역사하는 몇 가지 수단들이 구분될 수 있다. (칼빈)

수치심 때문에

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들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1. 하나님의 계시의 빛

(1) 근본적인 수단으로 이것 없이는 다른 수단도 불가능함

(2) 자연과 사람을 비추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임

(3) 자체로서 보통은혜의 열매로 자연인의 양심을 인도함

(4) 본성으로서의 이방인의 양심으로 율법을 행함 (2:14-15)

(5) 보통은혜는 특별은혜의 열매인 특별계시 안에서도 역사함

 

2. 정부

(1) 정부도 보통은혜의 열매인 동시에 수단임 (13:1-4)

(2)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자가되어 선을 이룸 (13:4)

(3) 통치자는 인간의 양심에 의해 지지됨 (13:5)

(4) 선한 질서와 예의를 수행 (벨기에신앙고백서)

 

3. 여론

(1) 본성의 빛으로 여론을 형성함 (민심천심?)

(2) 이 여론은 하나님의 계시 영향 하에서 형성될 때 한함

(3)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오히려 강력한 악의 수단이 됨

 

4. 하나님의 징벌과 보상

(1) 징벌을 통하여 악을 억제하며 벌함

(2) 보상을 통하여 선을 장려하고 보상함

(3) 이 세상에서 도덕적 선이 상당히 장려됨

(4)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5) 선의 보상과 자신들의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임

 

 

F. 보통은혜의 열매 (The Fruits of Common Grace)

본성의 빛 중 우리에게 의탁된 것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통해서만 계속 역사하심

이것 없이 다른 수단들은 효력이 없음

가장 중요한 보통은혜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1. 선고집행이 유예됨

(1) 죄인에게 완전한 사형선고의 집행이 유예됨

(2) 보통은혜로 인해 자연적 생명의 연장으로 회개를 촉구함

(3) 회개의 기회를 주어 변명의 구실을 제거, 저주를 정당화 함

(4) 성경 (48:9; 7:23-25; 13:6-9; 2:4; 9:22; 벧후 3:9)

 

2. 죄의 억제

(1) 개인과 사회생활에서 죄가 억제됨 (법의 집행으로)

(2) 규제()들은 내적일 수도 외적일 수도 양면적일 수도 있음

(3) 규제들은 어느 정도 죄를 억제할 수 있지만 변화시키지 못함

(4)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억제하심

회개치 않는 자와 다투심 (6:3; 7:51)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의 중단 (삼상 16:14; 6:4-6)

자신의 정욕에 내버려두심 (81:12; 1:24, 26, 28)

그 외 (20:6; 31:7; 1:12; 2:6; 왕하 19:27; 13:1-4)

 

3. 진리, 도덕, 종교의 보존

(1) . . 미에 대한 분별력을 보존함

(2) 진리, 도덕, 심지어 종교적 열망을 보여줌 (2:15)

(3) 심지어 사악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까지 (1:18-25)

(4) 인간 속에는 종교성이 있음 (17:22, 돌트신조)

 

4. 외면적 선과 시민적 의의 수행

(1) 보통은혜는 인간의 시민적 의의 수행을 가능케 함

(2)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일치함 (벨기에신앙고백 14)

(3) 돌트신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8문답

(4) 성경은 중생하지 못한 자의 선행에 관해서 언급함 (황하 10:29, 30; 12:2; 14:3, 14-16, 20, 27; 6:33; 2:14, 15)

 

5. 자연적인 복들

(1) 현세에서 받은 모든 복들은 보통은혜에 기인함

(2) 인간은 모든 복들은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선의 징표들을 받고 있음

(3)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은 보통은혜를 통하여 주심

선인이나 악인이나 차별 없이 주심 (햇빛, 비 등)

선택된 자나 유기된 자 모두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심

성경 (17:20; 39:5; 145:9, 15, 16; 5:44, 45; 6:35, 46; 14:16, 17; 딤전 4:10; 39:5)

 

G. 개혁파 신학의 보통은혜 (Objections to the Reformed Doctrine of Common Grace)

 

 

본서의 빛 중 우리에게 의탁된 것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통해서만 계속 역사하심

 

1.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보통은혜에 만족하지 못한다.

(1) 이들은 보통은혜를 구원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이해함

(2) 이 보통은혜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함

(3) 실제로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은혜는 용어상의 모순임

(4) 시혜자와 구원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은혜가 아님 (Pope)

(5) 성경은 은혜라는 용어를 이와 같이 제한하고 있지 않음 (6:8; 19:19; 33:11, 16; 32:5; 2:40)

 

2. 때로는 보통은혜에 관한 개혁주의 신학적 교리가 보편 속죄 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알미니우스 진영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 그러나 개혁파 신학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그런 것을 암시하지도 않음

 

(2) 복음의 보편적 선포는 보편속죄론에 기초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고 함

 

(3) 그러나 개혁파 신학은 제한속죄를 가르치지만 동시에 복음의 보편적 선표를 요구하고 있다 (Synod of Dort; 10:15; 20:28; 8:32, 33; 17:9)

 

(4) 성경은 또한 복음적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확장되어 있다고 가르침 (22:2-14; 28:19; 16:15, 16)

 

(5) 이 두 가지 종류의 교리의 모순의 조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짐

 

3. 보통은혜 론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하나님께서 유기된 죄인들에게도 호의적인 선행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1) 이 비난은 선택과 유기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출발점을 두고 있음.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를 침해할 권리가 없음)

 

(2) 선택된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랑, 은혜 자비, 견인을 계시하심, 그러나 하나님은 유기를 역사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혐오와 냉대와 진노만 표현하신다는 것이라고 함

 

(3) 이는 하나님의 내적 생명에 대한 과도한 합리주의적 단순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음

 

(4) 선택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오직 사랑의 대상이면서도 어떠한 의미에서 저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 (이스라엘과 기독교의 역사에서 보여주듯 일시적인 진노의 대상, 90:7)

 

(5) 반대로 유기된 자라도 이 세상에서는 일시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나, 죄를 용서하고 선고를 해제시켜 구원을 허락하시는 적극적인 의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 (1:24; 1:18; 18:23, 32; 33:11; 5:43-45; 23:37; 10:21; 6:35; 2:4; 딤전 2:4)

 

4. 재세례파는 보통은혜를 반대한다.

(1) 이 교리는 자연계에서의 선한 요소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들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임.

 

(2) 이들은 자연적 피조물은 경멸하고, 아담이 흙으로 만든 존재라는 것은 강조하고 질서에서 불순한 것만 보기 때문임 (물질개악?)

 

(3) 그리스도께서 초자연적으로 완전히 모든 것을 새롭게 했기 때문에 중생인은 절대로 세상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함 (성속완전 분리: 공통점이 없음, 맹세, 전쟁참여, 세속권위 참여, 세상의복까지도 따를지 말아야 함)

 

(4) 보통은혜를 반대하여 구원의 은혜 외에 다른 은혜는 없다고 함 (Labadism, Pietism, Moravian Brethren, 다른 소 종파들)

 

(5) Barth는 보통은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재세례파와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피조성과 죄성이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6) Brunner는 바르트의 주장을 설명하기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창조적이며 보전적인 보통은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이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모순되며, 새 창조는 기존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완전 폐지이며 교체이고, 새사람으로 완전 대체하는 것이라고 함으로, 은혜란 자연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며 이러한 견해를 부인하여 이 점에서는 개혁파 신학의 입장에 선다.

 

 

 

 

 

 

 

 

IV. 신비적 연합

(THE MYSTICAL UNION)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구속사역의 구원의 혜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담이 옛 인간의 대표자라면 그리스도는 새 인간의 대표자이다. 은혜언약에 속한 모든 복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다. 심지어 보통은혜의 복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까지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특별은혜의 복은 오직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자의 연합은 신비적이며 초자연적 방식으로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신비적 연합이라고 불린다.

 

 

A. 신비적 연합의 본질 (Nature of the Mystical Union)

(1) 루터교인들은 신비적 연합의 교리를 인간론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따라서 신비적 연합이 신앙에 의해 확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2)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이중요한 주제를 보다 공정하게 취급한다.

 

 

1. 구속의 경륜에서 그리스도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과의 언약적인 연합.

화평의 회의(counsel of peace)에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를 구성하며 그들의 죄에 대한 속전을 지불하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며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확보케 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 의를 확립하고자 자발적으로 선택받은 자의 머리와 보증이 되셨다.

 

 

2. 구속의 경륜에서 관념적으로 확립된 생명의 연합.

첫 아담의 경우에 있어서 아담과 그의 후손 간에는 언약적 연합뿐만 아니라 자연적. 생물학적 연합이 존재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

구원의 언약에서 확립된 법적 혹은 대표적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대리자로서 성육신하여 그의 백성을 위한 모든 복을 베풀 수 있는 공로를 세우셨다.

 

4.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해 구원의 공로를 세워서 구원의 복들을 실제적으로 소유했을 때 종결되지 않았다.

 

[CON]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명과 힘, 복과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간의 친밀하고 생동적이며 영적인 연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B. 신비적 연합의 성격 (Characteristics of the Mystical Union)

앞에서 우리는 신비적 연합이란 용어가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다양한 측면들 법적. 객관적. 주관적)을 포함하는 광범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비적 연합은 그 연합의 정수, 즉 성령의 사역에 의한 주관적 실현만을 의미한다.

 

1. 유기적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한 몸을 형성한다. 이 연합의 유기적 성격은 요 15:5; 고전 6:15-19; 1:22, 23; 4:15, 16; 5:29, 30과 같은 구절들에 잘 나타나 있다.

 

2. 생동적 연합이다

이 연합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몸 전체에 생명을 부여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리가 된다.

 

3. 성령의 의해 중재되는 연합이다

성령은 특별한 자격으로 주어졌으며, 중보자의 보상의 일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형성하기 위해 오순절 날 부어졌다.

 

4. 상호작용을 내포하는 연합이다

가장 최초의 행동은 신자들을 중생시키며 신앙을 일으킴으로써 자신과 연합시키는 그리스도의 행동이다.

 

5. 개인적인 연합이다

모든 신자는 개인적으로 직접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 각자에게 부어진다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6. 변혁적 연합이다

이 연합에 의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라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된다.

 

 

C. 신비적 연합에 대한 오류 (Erroneous Conceptions of the Mystical Union)

우리는 신비적 연합에 대한 다음 몇 가지 오류들에 유의해야 한다. 신비적 연합에 대한 오류들이 비합리적이며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 오류들은 기독교적 삶의 올바른 이해를 위협할 수 있다.

 

 

1. 합리주의적 오류

우리는 신비적 연합을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와 모든 피조물의 연합이나 혹은 모든 인간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와 동일시하려는 합리주의자들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2. 신비적 오류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시로 이해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오류에 빠져서도 아니 된다.

 

 

3. 소시니안, 알미니안의 오류

소시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극단을 발견한다. 이들은 신비적 연합을 스승과 제자 간, 친구들 간에 존재하는 단순한 도덕적 연합, 사랑과 공감의 연합이라고 규정한다.

 

 

4. 성례주의적 오류

로마가톨릭교회나 일부 루터파, 그리고 성공회 고교회파에 의해 대표되는 성례주의 적 오류는 회피해야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체적으로 규정하고 교회는 그 저장소이며, 성례들 안에서 이전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D. 신비적 연합의 중요성 (The Significance of the Mystical Union)

 

1. 우리는 신비적 연합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것들의 참여자가 되기 위한 법적인 근거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없다.

2. 하지만 죄인은 자신이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값없이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3.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은 영혼뿐만 아니라 몸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보증해준다.

 

4. 이 연합으로 인해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5.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은 모든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 즉 성도의 교제의 기초를 제공해준다.

 

 

 

 

 

 

 

 

 

 

 

 

 

 

 

 

 

 

 

 

 

 

 

 

 

 

 

 

V. 부르심 일반과 외적 부르심

(CALLING IN GENERAL AND EXTERNAL CALLING)

 

 

 

A. 부르심을 처음에 논의하는 이유 (Reasons for Discussing Calling First)

 

부르심과 중생의 순서에 대한 문제는 자주 논의되고 있으며 때로 이러한 논의는 분별없이 전개되어 많은 오해를 받아 왔다. ‘부르심중생이라는 용어는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편으로는 부르심이 중생에 선행되며, 한편으로는 중생이 부르심에 우선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1) 성경과 표준적 신앙고백서에서 발견되는 진술들

(2)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추종된 순서들

(3) 말씀을 통한 외적 부르심에 선행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들대해 간략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성경의 진술들

성경적 순서는 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몇몇 구절들에서 제시되고 있다 (37:1-14; 16:14; 4:17; 1:18; 벧전 1:23)

 

 

2. 표준적 신앙과 고백서에 나타난 견해

우리의 표준적 신앙고백서들도 역시 성인의 경우 말씀의 설교가 중생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제한된 의미에서의 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벨기에신앙고백서 24; 돌트 신조 3장과 4, 11조와 12)

 

 

3. 개혁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한 순서

개혁파 신학자들 중에는 비록 극소수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부르심을 중생 이전에 배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부르심을 중생 이전에 배치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

 

 

(1) 은혜언약의 교리

그들은 은혜언약을 하나님께서 무한한 자비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위대하고 포괄적인 선, 즉 모든 구원의 복을 포괄하는 선과 중생으로 이해한다.

 

(2)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관계에 대한 개념

재세례파는 이 관계를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3) 재세례파의 신비주의에 대한 반론

재세례파들은 중생이 인간 본성의 갱신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성취시킨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4) 성인(成人)의 영적인 갱신과 관련된 경험

유아기에 사망한 언약의 어린이들이 중생되었고 다라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굳어진 견해이지만, 성인들이 중생의 은혜의 참여자가 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4. 외적 부르심이 중생에 선행한다는 주장의 근거들

 

 

(1) 진술의 명료성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의 깊게 구분될 수 있으며, 구분되어야 한다. 복음을 통한 외적 부르심이 성인의 경우 논리적으로 중생보다 선행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지만, 내적 부르심과 중생의 순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먼저 다루고 내적 부르심을 중생과 연관해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외적 부르심의 예비적 성격

외적 부르심에 성령의 사역이 동반되어 내적이고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전이되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선행적 . 예비적 의미만 지니게 된다. 일부 개혁파 신학들은 외적 부르심은 영원한 택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유래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통 선에서 유래하며 때로 인간의 심령을 조명하기도 하지만 심령을 하나님의 구원 은혜로 충만하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를 보통은혜로 언급하고 있다.

 

(3) 외적 부르심의 일반적 성격

구원의 순서 안의 성령의 다른 모든 사역이 선택된 자에게만 한정 되지만 복음에 의한 외적 부르심은 보다 광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복음이 설교되는 어느 곳이든 부르심은 선택받은 자나 유기된 자 모두에게 임한다. 이 선택된 자들을 신앙과 회개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죄인 일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목적을 성취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이성적 피조물의 순종을 요구하시고 죄의 발현을 억제하며 시민적 의, 외면적 도덕성, 심지어 종교적인 행사까지도 장려한다.

 

 

B. 부르심 일반 (Calling in General)

외적 부르심이 일반적인 부르심의 한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적 부르심을 논의하기 전에 이를 간략하게 고려해야 한다.

 

1. 부르심의 주체

부르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는 우선 아버지의 사역이다(고전 1:9; 살전 2:12; 벧전 5:10).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아들에게도 속하기도 한다(11:28; 5:32; 7:37; 1:6).그리고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으로 부르신다(10:30; 15:26; 5:31, 32).

 

2. 사물을 통한 부르심과 말씀을 통한 부르심

개혁파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말씀을 통한 부르심(vocatio verbalis)을 구분하고 있다. 이들은 사물을 통한 부르심을, 하나님의 일반계시 즉 복음의 계시가 아닌 율법의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임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인정하고 경회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외적 부르심이라고 규정한다.

 

3. 말씀을 통한 부르심의 여러 개념들

말씀을 통한 부르심은 이 용어 자체에서 나타나듯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통해 인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1) 로마가톨릭교회: 설교보다도 성례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복음 설교는 부차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2) 루터: 율법은 회개를 일으키지만 복음적 부르심은 성령의 선물을 가져온다는 사상을 전개했다.

(3) 칼빈: 외적, 내적 부르심은 어거스틴에서 발견되고 칼빈에 의해 차용되었으며,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칼빈에 의하면, 복음적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효과적이 아니며 성령이 말씀을 인간의 심령에 구원적으로 적용시킬 때 성령의 사역에 의해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선택받은 자의 심령과 삶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C. 외적 부르심 (External Calling)

성경은 외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효과적이 아닌 부르심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16:15, 16; 22:2-14; 14:16-24)

 

 

 

1. 외적 부르심의 구성요소

 

 

(1) 복음의 사실과 구속의 교리의 제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의 방법들이 상호관련 하에 명백히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성령의 갱신과 변혁적 역사들, 이모든 것이 상호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2) 회개와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초청

구원의 방법의 진술 다음에는 회개하고 믿으라는 즉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간절한 초청(고후 5:11, 20), 심지어는 엄중한 명령(6:28; 19:4)이 뒤따라야 한다.

 

 

(3) 용서와 구원의 약속

외적 부르심은 자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그들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 그 조건들에 동의하는 모든 자들을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2. 외적 부르심의 특징

 

 

(1) 일반적 또는 보편적이다.

이는 구루터파 신학자들 중 일부가 주장하듯이, 부르심은 예를 들면 아담의 시대, 노아의 시대, 사도들의 시대들과 같이 과거에 한 번 이상 만인에게 실제로 임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2) 진실한(bona fide) 부르심이다.

외적 부르심은 진실한 부르심 즉 진지하게 의도된 부르심이다. 이는 부르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제시되는 초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불러 신앙으로 영접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이를 간절하게 소망하시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실 때, 그의 약속은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 즉 하나님의 성실함에서 비롯된다.

 

어떤 반론은 하나님의 정직함에서 출발한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의 용서와 영생을 하나님께서 이러한 선물들을 주기로 의도하지 않은 자들에게 제의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에 난점이 있다.

 

두 번째 반론은 인간의 영적 무능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본성상 신앙할 수도 회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를 인간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인간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3. 외적 부르심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유기된 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제의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외적 부르심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은 외적 부르심을 통해 죄인에 대한 권리를 보유하신다.

우주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이는 절대 권리의 문제이다). 그리고 인간이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일탈하고 이제는 자신의 정당한 주권자에게 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의도적인 범죄가, 이성적 피조물에게 섬김을 받으실 하나님의 권한을 폐지시키지는 못한다.

 

 

(2) 외적 부르심은 죄인을 회심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제정한 방법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을 모으시는 방법이다. 어느 누구도 선택된 자를 가려낼 수 없으므로, 외적 부르심은 보편적. 일반적이어야 한다.

 

 

(3) 외적 부르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 긍휼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으로 어디서나 죄인들을 설득하여 죄를 단념시키고, 선함과 자비를 통해 파멸을 경고하고 , 사형 집행을 연기하며, 구원의 제의로 그들을 복 주신다. 이 은혜로운 제의가 그 자체로 죄인에 대한 복이요, 일부 신학자들이 생각하듯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분명히 이렇게 제시되고 있다(81:13; 1:24; 18:23, 32; 33:11; 8:11; 11:20-24; 23:37)

 

 

(4) 마지막으로, 외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의를 두드러지게 한다.

자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죄인들의 변명을 봉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1:20), 구원의 방법에 대한 계시에 있어서는 더욱더 타당하게 된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경멸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그들의 타락과 죄는 심히 막중해지며, 이들을 정죄하는 하나님께서 의롭다는 사실이 가장 단적으로 표현되게 된다.

 

 

 

 

 

 

 

 

 

 

 

 

 

 

 

 

 

 

 

 

 

 

 

 

 

VI.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REGENERATION AND EFFECTUAL CALLING)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The Scriptural Terms for Regeneration and their Implications)

 

 

1. 고려되어야 할 용어

중생’(팔링게네시아)이라는 헬라어는 오직 마 19:28과 딛 3:5에서만 발견되며, 3:5은 기독교인 개개인에 있어서 신생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겐나오 (3:3에서는 아노덴과 함께 사용) 혹은 합성어인 아나겐나오로서 표현된 이용어의 뜻은 시작의 개념으로 낳다. 다시 낳다, 출생하다라는 뜻(1:13; 3:3, 4, 5, 5, 7, 8; 벧전 1:23; 요일 2:29; 3:9; 4:7; 5:1, 4, 8).

 

(2) 아포퀴에오 (1:18) 이 용어는 낳다, 생산하다라는 뜻.

 

(3) 크티조 (2:10) 이는 창조하다로 이 창조의 산물은 카이네 크티시스(새 피조물; 고후 5:17; 6:15) 혹은 카이노스 안트로포스 (4:24)로 새사람으로 표현된다.

 

(4) 수조오포이에오 (2:5; 2:13) 이 용어는 함께 살리다., 소생시키다라는 뜻이다.

 

 

2. 이 용어들의 의미

이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며 따라서 이 사역에서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이며 인간의 협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새로운 생명을 생성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릴 수 있다.

 

(3) 중생에서는 두 가지 요소, 새 생명의 발생(generation),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영혼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principle)를 주입되는 것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B. 신학에서의 중생이라는 용어의 용법 (The Use of the Term "Regeneration" in Theology)

 

 

1. 초대교회와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1) 초대교회에서는 중생이라는 용어가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이는 죄를 씻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변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중생과 칭의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2) 어거스틴에 있어서 중생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심령의 변화의 발단을 포함하며, 중생 후에는 회심이 뒤따른다. 중생은 인간의 협력과 저항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3)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중생은 새로운 본질의 출생이 아니라 세례 시 죄의 용서와 진리에 의한 마음의 조명,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의지에의 자극만을 의미한다.

 

(4) 스콜라주의에 있어서는 중생보다 칭의가 보다 우월한 개념이 되었고, 칭의는 중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할 수 있는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은혜의 주입이 우선적이며, 죄의 용서는 여기에 기초한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죄의 용서가 우선적이며, 이것이 은혜의 주입에 근거가 된다. 이 양자는 의식을 통해서 성취된다.

 

 

2. 종교개혁 자들과 개신교

(1)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한 의미로 언급했다.

 

(2) 칼빈도 역시 이런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3) 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부르심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4) 돌트 신조는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

 

(5) 현대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6) 종교 심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않는 자. 이들은 중생을, 인생에 대한 태도가 자아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C. 중생의 본질 (The Essential Nature of Regeneration)

 

 

1. 그릇된 견해들

 

(1) 중생은, 원죄를 실체로 이해하여 중생 시 다른 실체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개혁 시대의 플라키우스(Flacius Illyricus)나 고대 마니교도들이 주장하듯 인간 본성의 실체의 변화가 아니다.

 

(2) 중생은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영혼의 기능의 변화가 아니다.

 

(3) 중생은 재세례파나 다른 열광적인 종파들이 주장하듯, 인간의 본성 전체나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가 아니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중생이란 인간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소(principle)를 주입하고 성령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변화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3. 중생의 정의

 

현재 사용되는 중생에 관한 상기 진술로부터 중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1)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을 새 생명의 원소가 인간에게 심겨지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행위.

 

(2) “재 발생의 개념뿐 아니라 새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본 정의 에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최초의 거룩한 활동이 확보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D. 외적 부르심에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Effectual Calling in Relation to External Calling and Regeneration)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이며, 따라서 외적 부르심과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의 구분은 이러한 하나의 부르심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에 불과하다.

 

 

2. 내적 부르심의 특징

 

 

(1) 도덕적 설득과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내적 부르심에 있어서 (중생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적 방식으로 역사하느냐 혹은 도덕적 설득으로 역사하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2)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한다.

이 점은 앞서 말한 것과 긴밀히 연관된다. 설교의 말씀이 창조적으로 역사하지 않고 오직 도덕적이며 설득적 방식으로만 역사한다면 그것은 오직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만 역사할 수 있다. 이는 오성에게 말하며, 성령은 진리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오성에게 부여하고 오성을 통해 의지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주어, 죄인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 내적 부르심은 필연적으로 회심을 일으킨다. 즉 자각적으로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방향으로 낳아가게 한다.

 

(3) 목적론 적이다.

내적 부르심은 목적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적 부르심은 일정한 목적, 즉 성령께서 선택된 자를 인도하고 있는 위대한 목표로, 그리고 이 최종적 목작지로 가는 도상에 있는 중간 단계들로 인간을 부른다.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1) 17세기 신학에서의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이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

 

 

(2)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엄격한 의미에서 즉 발생으로서의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이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태도와 독립되어 있다. 반면에 부르심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의식생활의 일정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3) 부르심과 중생의 관련 순서.

논리적 순서로 볼 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적 경우는 예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 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시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시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심어지게 된다. 이것이엄격한 의미에서의 중생이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된다. 이것이 설교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응되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야기한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E. 중생의 필요성 (The Necessity of Regeneration)

 

 

1. 현대 신학자들은 그 필요성을 부인한다.

현대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에서 이해된 중생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루소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개악이라고 한다. 구원을 인격(품성)의 관점에서 언급하여 중생이란 영적인 생활의 자연적 발전에서 중요한 단계 혹은 도덕적 과정으로서의 급진적 재조정으로 이해되는 중생이다.

 

2. 이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거룩함, 하나님의 법에의 일치는 하나님의 호의를 보증하고 양심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12:14). 성경에 의하면 지금 인간은 성향과 행동에 있어서 이렇게 필수 불가결한 거룩함과는 정반대이다. 이러한 상황으로인해 생명의 회복이 그에게 가장 긴요한 것으로 급진적 내적 변화,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전환되는 변화가 필수적이.

 

3. 이는 성경에서 명백히 천명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하지 않도록 명백한 진술로 이를 천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라고 말씀하신다(9:5-7절 참조)

 

 

F. 중생의 효과적 원인 (The Efficient Cause of Regeneration)

 

 

1. 인간의 의지 (Will of Man)

펠라기우스적 개념에 의하면 중생을 오직 인간 의지의 행위요, 자기 개혁과 실제적으로 동일시된다. 반펠라기안이나 알미니안들은 중생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라고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고 인간이 진리를 통해 적용되는 신적 감화력과 협력하는 신인협동설을 주장한다.

2. 진리 (Truth)

동기들의 체계로서 성령에 의해 인간의지에 제시된 진리는 불결함으로부터 거룩함으로의 직접적 변화의 요인이다 (Lyman Beecher, Charles Finney), 이는 성령의 사역과 설교자의 사역은 오직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양자의 설득을 통해서만 역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진리는 이를 사랑할 때에만 거룩함의 동기가 될 수 있지만 자연인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1:18, 25). 따라서 외부적으로 제시된 진리는 중생의 효과적 원인이 될 수 없다.

 

3. 성령 (Holy Spirit)

가장 적합한 견해는 모든 시대의 교회의 견해로서, 성령이 중생의 효과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인간의 심령에 직접 역사하며 영적인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이 사역에서는 여하한 죄인의 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단독적인 사역이다(11:19; 1:13; 16:14; 9:16; 2:13).

 

 

G. 중생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용 (The Use of the Word as an Instrument in Regeneration)

 

 

1. 질문의 취지

 

(1) 옛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의 직접적 성격을 주장했을 때 이들은 직접적이라는 용어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2) 우리는 먼저 질문의 정확한 형태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적 말씀으로 인해 중생을 일으키느냐는 질문이 아니다.

 

2. 부정적인 답변을 지지하는 이유.

 

(1) 중생은 영적으로 죽은 죄인이 생명으로 복귀되는 창조적 행위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는 오직 도덕적. 설득적 방식으로만 역사할 수 있.

 

(2) 중생은 잠재의식적 영역 즉 의식적 영역 외부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진리는 인간의 의식을 대상으로 한다.

 

(3)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을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력과 구분하며, 그러한 영향력이 진리를 적절히 수용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선언 한다. (6:64, 65; 16:14; 고전 2:12-15; 1:17-21)

 

3. 이와 모순되는 듯한 성경구절

 

(1) 1;18에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새 발생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2)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3)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때때로 중생이 말씀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4. 우리의 표준적 신앙고백서들의 가르침

(1) 신앙고백서들이 중생을 새 생명의 기원과 회심에서의 발현을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의 사역에 도구적이라고 말하는 듯한 구절들도 있지만 이들 신앙고백서들은 이들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하여 새 생명의 원조가 주입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모호하다고 느낀다.

 

(3)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인의 경우에는 성령의 중생 사역이 복음 설교에 동반된다는 것은 분명하나, 사망한 유아의 구원에 관해서는 모호하다.

 

 

H. 중생에 관한 다양한 견해 (Divergent Views of Regeneration)

 

 

1. 펠라기우스의 견해

인간의 자유와 인격적 책임이란 인간이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죄를 자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의도적인 범죄만이 죄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은 도덕적 갱신에 불과하다. 이는 이전에 율법을 범했던 사람이 이제 이에 순종하며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세례적 중생

이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주장되지는 않는다.

 

(1) 로마교회

중생은 영적인 갱신뿐만 아니라 칭의 즉 죄의 용서를 포함하며, 세례를 수단으로 일어난다. 유아의 경우 중생의 사역은 항상 유효하지만 성인의 경우는 중생의 은혜를 감사하게 받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도 있고 이를 무효하게 할 수도 있고, 상실할 가능성도 있다.

 

(2) 성공회

로마가톨릭교회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 퓨지파(Puseyites)는 로마교회와 본질적인 면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중생을 두 종류, 즉 단순히 사람의 교회와 은혜의 수단에 대한 관계의 변화와 인간본성의 근본적 변화로 구분하는 유력한 집단도 존재한다. 이들에 의하여 세례 때에는 첫 번째 의미의 중생만이 일어난다. 이 중생은 영적 갱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신자는 교회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유대인이 할례의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동일 한 의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3) 루터교회

(1) 로마가톨릭의 사상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2) 대체로 루터파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신인협동설은 반대하고, 중생은 오직 하나님 편에 달렸다고 주장한다(monergism).

 

(3) 어른은 오랫동안 저항할 수도 있지만, 중생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것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동시에 어떤 이들은 세례는 그 의식을 통해서(ex opere operato) 역사함으로 하나님께서 중생을 일으키는 일상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친다.

 

(4) 두 가지 종류의 중생으로 언급한다.

1중생(regeneratio prima): 새 생명이 발생되는 중생으로 유아들은 세례를 통해서 어른들은 말씀을 통해서 받는다.

 

2중생(regeneratio secunda, regeneratio renovatio): 새 생명이 하나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생으로 어른들은 세례를 통해서 이 중생에 참여한다.

 

(5) 중생은 상실될 수도 있지만 재 세례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회개하는 죄인의 심령에 다시 회복될 수 있다.

3. 알미니우스파의 견해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도 인간의 단독사역도 아니며 진리의 수단으로 역사하는 신적인 영향력에 대해 인간이 협력하는 인간의 선택의 결실이다. (신인협력설)

 

4. 중도파 신학자들의 견해

(1) 범신론적 모형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성이 아니라 오직 인간과 하나님의 생명이 결합된 신인 적 본성만이 존재한다.

 

(2) 중생에서 신인 적 생명의 일부가 인간에 전이되며, 죄인이 중생할 대마다 매번 성령의 사역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5. 삼분적 견해

(1) 중생의 이론을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법을 통해 전개하는데, 이 견해는 인간은 세 가지 요소 즉 몸, , 영으로 구성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2) 이들은 죄가 오직 혼에만 좌정하며 영에는 좌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죄가 영에 침투한다면 인간은 영적인 조재인 귀신들처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3) 영은 인간 내부에서 하위의 삶을 통제하게 되어있는 고차적 신적 생명이다. 죄가 세계에 들어옴에 따라 하위 세계에 대한 영의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4) 그러나 중생에 의해 영은 다시 강화되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조화가 다시 회복된다. 이는 순전히 합리적 이론이다.

 

 

6. 현대 자유주의의 견해

(1)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모두 중생에 대한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슈라이엘마허 스타일의 견해가 있는가 하면,

 

(2) 자연주의적 견해가 있는데, 중생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재창조적 사역이라는 사상을 혐오한다.

 

(3) 신의 내재로 인해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 신적 원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4)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신적 잠재성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고차적인 원리의 지도는 받는 것이다. 중생은 인격(성품)의 윤리적 변화에 불과하다.

 

 

 

VII. 회 심

(CONVERSION)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논의로부터 회심의 논의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령의 특별사역에 의해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은 회심을 일으킨다. 회심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현저한 위기가 될 수 있지만, 점진적인 과정으로 임할 수도 있다. 종교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양자가 동일시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양자 간에 매우 긴밀한 관계기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

 

 

 

A. 회심에 대한 성경의 용어 (The Scriptural Terms for Conversion)

 

 

1. 구약성경의 단어

 

 

(1) 나함

나함은 슬픔(나팔 형태)이나 위로(피엘 형태)의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나팔 형태에서 이는 회개를 의미하며 이 회개에는 종종 계획과 행동의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피엘 형태에서는 위로하다, 자위하다를 의미한다.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회개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사용되고 있다(6:6,7; 32:14; 2:18; 삼상 15:11)

 

(2) 슈브

이는 회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돌이키다, 돌아서다, 돌아오다등을 의미한다. 이는 종종 하나님과 인간 양자에게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곧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신약성경의 단어

 

(1) 메타노이나(동사는 메타노에오)

이는 신약성경에서 회심을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로 사용된 단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단어이다. (메타와 누스의 합성어)

 

(2) 에피스트로페 (동사는 에피스트레포)

이 단어는 메타노이아 다음으로 중요하다. 70인 역에서는 메타노이아가 나함의 번역이지만, 에피스트로페, 에피스트레포는 테슈바’ ‘슈브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들은 다시 돌아가다, 돌아오다라는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된다.

 

(3) 메타멜레이아 (동사는 메타멜로마이)

오직 동사형 형태만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며, 문자적으로는 후에 어떤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70인 역에서는 나함이라는 단어의 번역어들 중 하나였다.

 

 

B. 회심에 대한 성경적 개념과 정의 (The Scriptural Idea of Conversion. Definition)

 

1. 민족적 회심

모세,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여호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회심을 민족적 회심이라고 한다.

 

2. 일실적인 회심

성경은 심령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고 따라서 오직 과도적 중요성만을 지닌 개인들의 회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로 돌밭에 씨를 뿌리운 자들의 마음과 같은 것으로 일시적 회심이다.

 

3. 진정한 회심 (CONVERSIS ACTUALIS PRIMA)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오며, 하나님에게로의 헌신의 삶을 유발한다(고후 7:10). 이는 중생의 사역에 기초한 변화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죄인의 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요 이전의 삶의 방향이 현명치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자책을 포함하며, 생의 전 과정을 수정하는 생각과 의견, 욕망과 의지의 변화이다.

 

4. 반복적 회심

성경은 회심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죄의 길에 빠진 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반복적 회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악의 유혹에 끌려 죄에 빠진 후 다시 진정으로 회심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C. 회심의 성격 (The Characteristics of Conversion)

 

1, 회심은 하나님의 법적인 행동보다는 재창조적 행동에 속한다.

 

2. 메타노이아라는 말이 의미하듯 회심은 잠재의식이 아니라 죄인의 의식영약에서 발생한다.

 

3. 회심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죄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새사람을 입고 거룩함을 위해 노력하는 의식적 출발점을 표시한다.

 

4. 우리가 회심이라는 용어를 가장 엄밀한 의미로 이해할 때 이는 순간적인 변화요, 성화와 같이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5. 회심은 단지 생애의 위기로 이해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회심이 현저한 위기로 경험되기도 하지만 이는 점진적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6. 마지막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이 회심을 청년기의 일반적이며 자연적인 현상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 우리는 회심이란 종교적 변화를 야기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D. 회심의 요소 (The Different Elements in Conversion)

회심에는 회개와 신앙 등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두 요소 중 회개는 과거와 관련되어 있고, 신앙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회개는 직접 성화와 관련되며, 신앙은 칭의와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회개는 죄로부터 멀어지는, 죄인의 의식 영역에서 야기되는 변화라고 정의 될 수 있다.

 

 

1. 회개의 요소 : 우리는 회개에서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하려고 한다.

 

 

(1) 지성적 요소

회개에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다. 즉 개인의 죄책과 오욕, 무력감을 포함하는 것으로, 죄를 인정하게 된다.

 

(2) 정서적 요소

회개에는 감정의 변화가 있다. 즉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애통하게 된다.

 

(3) 의지적 요소

회개에는 의지적 요소가 있다. 이는 목적의 변화, 죄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짐, 용서와 정결을 구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2. 로마교회의 고해성사

로마교회는 회개의 개념을 전적으로 외재화했다.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참회(contrition), 고백(confession), 보속(satisfaction), 사죄선언(absolution)이다. 4가지 요소 중 참회만이 회개에 포함될 수 있는데,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여기서 타고난 죄(원죄)에 대한 애통을 제외시키고 오직 개인적 범죄에 대한 애통으로 한정시킨다.

 

 

3. 회개에 대한 성경적 견해

(1) 회개에 대한 피상적 견해에 대해 성경적 개념이 주장되어야 하는데, 회개란 전적으로 내면적 행동으로서, 이로부터 야기되는 생활의 변화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2) 죄의 고백과 잘못에 대한 보상은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단지 구원의 소극적 조건이며, 적극적 수단은 아니다. 회개가 죄인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이는 과거의 범죄로 인해 율법의 요구를 말소시키지는 않는다.

 

(3) 진정한 회개는 신앙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반면에 진정한 신앙이 있는 곳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존재한다. 이양자는 동일한 전환즉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전환의 상이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양자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E. 회심의 심리학 (The Psychology of Conversion)

 

1. 연구의 본질

이 연구의 본질은 코우의 [영적 생활](Coe, The Spiritual Life)를 위시한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잘 나타나 있다.

 

 

2. 이러한 연구들에 대한 평가

이들이 초자연적 차원을 무시한다고 해도 이 심리학적 연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인간의 심리적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들과 인간의 의식에서 영적인 위기를 수반하는 일부 현상과 다양한 회심의 형태들과 이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훌륭하게 조명해준.

F. 회심의 조성자 (The Author of Conversion)

 

1. 회심의 조성자인 하나님

회심의 주체로서 조성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이는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85:4; 5:21; 11:8; 19:7; 3:20; 10:17). 그러나 양자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다. 율법은 복음의 제시를 포함하며, 복음은 율법을 확증하고 율법의 공포로써 위협한다(고후 5:11). 그러나 하나님은 회심에 있어서 직접적, 초자연적, 독자적 방식으로 역사하시기도 한다.

 

 

2. 인간은 회심에서 협력한다.

하나님께서 회심의 조성자이시지만, 거짓된 수동성에 반대하기 위해 회심에 인간이 어느 정도 협력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G. 회심의 필요성 (The Necessity of Conversion)

성경은 절대적인 용어로 중생뿐만 아니라 회심에 있어서도 언급한다. 성경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명백히 말하고 있으나, 예외를 허용치 않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회심의 필요성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복을 향유하도록 회심으로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다(33:11; 55:7).

 

 

H. 구원의 과정의 다른 단계들과 회심과의 관계 (Relation of Conversion to other Stages of the Saving Process)

 

1. 중생과의 관계

중생과 회심이라는 두 용어는 일부 학자들에 있어서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오늘날 신학에 있어서는 이들은 서로 구분되지만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 효과적 부르심과의 관계

회심은 내적 부르심의 직접적 결과이다. 인간에게 주는 영향으로서 내적 부르심과 회심의 발단은 실제로는 동시에 일어난다.

 

3. 신앙과의 관계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신앙은 회심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에는 고유한 목적을 가진 두 신앙이 있다.

 

 

 

 

VIII. 신 앙

(FAITH)

 

 

앞장에서는 일반적인 회심을 언급했으며, 회심의 소극적 요소 즉 회개에 대해 간략히 서술했다. 본장에서는 회심의 적극적 요소즉 신앙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신앙은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항목이므로 별도로 다루어져야 한다. 신앙이 회심의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칭의와 수단으로 연관된다는 점에서 신앙을 본장에서 다루는 것이 가장 좋다. 신앙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로 넘어가게 된.

 

 

A. 신앙에 대한 성경의 용어들 (Scriptural Terms of Faith)

 

 

1. 구약성경의 용어들과 그 의미

구약성경에서는 신앙의 명사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2:4의 에무나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신실함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어들과 그 의미

신약성경에서는 두 단어, 즉 피스티스와 이와 동일어족의 동사인 피스유에인이 사용되고 있다.

 

 

(1) 피스티스의 상이한 의미들

 

고전 헬라어에서

피스티스란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개인적 탐구에 기초한 지식과는 구분되는 어떤 사람이나 그의 증언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확신과 (b) 그러한 확신이 근거하고 있는 신뢰 자체를 의미했다.

 

70인역에서

피스티스라는 단어가 고전 헬라어 용법에서 확신혹은 신뢰라는 의미가 중요시되는 신약성경의 용법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70인 역에서 피스티스라는 명사보다는 피스튜에인이라는 동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수동적 의미 즉 구약성경에서의 통상적인 의미인 충성’ ‘신실함을 나타내는 경우는 드물다(3:3; 5:22; 2:10).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a) 다른 사람의 증언에 기초한, 개인적 탐사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지적 신앙 혹은 확신(1:27; 고후 4:13; 살후 2:13, 특히 요한문서)

 

(b) 하나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로부터의 구속과 미래의 복을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뢰 혹은 확신(특히 바울서신; 즉 롬 3:22, 25; 5:1, 2; 9:30)

 

(c)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를 의지하는 것. 세 번째 단계를 특히 구원적 신앙이라고 부른다.

 

 

(2) 피스튜에인의 의미

 

피스튜에인이 여격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

피스튜에인이 호티와 결합하는 경우

피스튜에인이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

 

(a) 엔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

(b) 에피 + 여격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

(c) 에피 + 목적격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

(d) 에이스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

 

 

B. 신앙의 활동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적 표현들 (Figurative Expressions Used to Describe the Activity of Faith)

 

1. 신앙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언급 된다 (3:14, 15; 비교 민 21:9)

 

2. 신앙은 배고픔, 목마름, 먹고 마심으로 표현 된다 (5:6; 6:50-58; 4:14)

 

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에게 가고 그를 영접한다는 비유들이 있다 (5:40; 7:37,8, 참조: 6:44, 65; 1:2)

 

 

C. 신앙 론의 역사 (The Doctrine of Faith in History)

 

 

1. 종교개혁 이전

 

(1) 기독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은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구원의 위대한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얼마 후 신앙과 병행되어 회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2) 그러나 초기에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신앙과 구원의 순서의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는 거의 이해되지 못했다.

 

(3) 어거스틴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앙을 다양한 의미로 이해했다. 신앙을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 정도로 이해하지만, 그는 복음적 혹은 칭의적 신앙이 자아 양도와 사랑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이해했다.

 

(4) 스콜라주의자들은 무지의 신앙 즉 교회가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와 즉 사랑에 의해 불어넣어진(주입된) 신앙을 구분하고 후자가 은혜의 주입을 포함하므로 유일한 의롭게 하는 신앙이라고 이해했다.

 

 

2. 종교개혁 이후

 

(1) 로마가톨릭이 칭의적 신앙이 단순히 지적 동의에 불과하며 오성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종교 개혁자들은 신앙을 신뢰로 이해하고 의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2) 그러나 신앙의 제 요소들의 상대적 중요성들에 대해서는 개신교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이견이 존재해 왔다.

 

(3) 칼빈: “우리가 신앙을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상의 약속의 진리를 기초로 하며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 심정에 인 쳐진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신앙을 완전하게 정의하게 된다.”

 

(4) 하이델베르그: “신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간주하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나의 심령 속에 복음으로 역사하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죄의 용서,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통로로 값없이 주어진다는 확고한 신뢰이다.”

D. 성경에서의 신앙의 개념 (The Idea of Faith in Scripture)

 

 

1. 구약 성경 (Old Testament)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신앙을 종교적 생활의 근본적 원리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기초를 변화시키거나 구약성경 적 표현에서 일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1) 족장시대

구약성경의 앞부분에서는 구원의 방식에 대한 추상적 진술의 윤곽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족장들의 종교의 특징은 행동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이 전면에 부각되고 그 약속에 대한 응답이 신앙의 응답이라는 개념을 제시해준다.

 

(2) 율법시대

율법의 수여는 이스라엘 종교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 시키지 않았고 다만 외면적 형태에서 변화를 유도했다. 율법은 약속의 대체물이 아니다. 또 신앙은 선행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다수는 율법을 순전히 법적으로 이해했고, 구원 받을 것의 기초를 외면적 규정들의 집합체로서 율법의 온전한 성취에서 찾았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고 율법의 내면성과 영적인 성격을 감지한 자들의 경우에는 율법은 조 의식을 심화시키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기대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첨예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2. 신약성경 (New Testament)

메시아가 예언의 성취로 오셔서 소망되었던 모든 구원을 가져왔을 때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구속자의 인격을 주목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1) 복음서 (The Gospels)

약속되고 소망된 구속주로서 예수님을 신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새 시대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 짓는 것이다.

 

 

(3) 사도행전 (The Acts)

복음서와 동일한 개념이다. 사도들의 설교에 의해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순종에 이르게 된다. 이 신앙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원리가 된다. 다른 경향들이 교회 안에서 발전되었으며,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듯 신앙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가 발생했다.

 

(4) 야고보서

야고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을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 간주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으로 전락시키는 유대주의 적 경양을 비난한다.

 

(5) 바울서신

바울은 특별히 유대교의 철저한 율법주의 적 사상을 논박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를 자랑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오직 신앙만이 구원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변호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역설하게 되었다.

 

(6) 히브리서

그리스도를 구원적 신앙의 적절한 대상으로 이해했으며, 신앙을 통한 의 이외에는 어떠한 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10:38; 11:7).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경계하는 위험은 신앙에서 행위로 전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에서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7) 베드로서

베드로 역시 고난 가운데 용기를 상실했지만 유대로 복귀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들이 처한 환경으로 인해 베드로는 신앙과 구원의 완성과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들의 심령 속에 현재의 고난에서 그들을 감내하게 하는 소망 즉 보이지 않고 영원한 영광에의 소망을 고취시킨다.

 

(8) 요한의 문서들

요한은 지식(그노시스)을 강조하고 단순한 신앙을 무시하는 초기 영지주의를 논박해야 했다. 영지주의에서는 지식이 신앙보다 더 많은 양의 복을 제공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요한은 신앙의 복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신앙이 보증하는 장래 기업의 확실성과 영광보다는 신앙이 가져오는 구원의 현재적 향유를 역설했.

 

E. 일반적 의미의 신앙 (Faith in General)

 

신앙이란 용어는 종교적, 신학적 용어로 배타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신앙은 일반적. 비종교적 의미로 종종 사용되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용법이 특별한 주목대상이다.

 

1. 단순한 의견과 별다를 바 없는 신앙

신앙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다소 막연하고 통속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단순한 의견보다는 강하지만 지식보다는 약한 진리에 대한 설득을 의미하기도 한다.

 

2. 직접적 확실성으로서의 신앙

학문과 관련할 때 신앙은 직접적확실성이라고 종종 언급된다. 인간이 지각, 경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이 있지만 직관적 확실성도 있다. 모든 학문에는 증명될 수 없는 공리나, 지각이나, 논리적 추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직관적 확신이 존재한다.

 

3. 증언에 기초한 확신으로서 신뢰를 포함하는 신앙

통상적인 어법에서 신앙이라는 단어는 때로 다른 사람의 증언이 진리이며 그가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즉 오직 그의 신실성과 성실성에 기초한 확신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F. 종교적 의미의 신앙, 특별히 구원 적 신앙 (Faith in the Religious Sense and Particularly Saving Faith)

 

신학적 의미에서의 신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되지는 않았다. 이는 우리가 신앙의 개념, 요소, 대상, 근거를 이해할 때 명백하게 될 것이다.

 

1. 신앙의 개념: 신앙의 네 가지 종류

종교적 의미에서의 심리적 현상으로서 신앙은 일반적인 신앙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일반적인 신앙이 우리가 신뢰하고 의존하는 자의 증언, 따라서 권위에 기초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항상 종교적 신앙을 동일한 의미로 언급하지는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역사적 신앙

이는 도덕적. 영적 목적이 없이 진리를 순전히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명칭에서 나타나듯 단지 도덕적이며 영적인 진리를 제외한 역사적 사실들이나 사건들만을 포괄한다거나 이 신앙이 오직 역사적 증거에 의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신앙은 인격적으로는 관여하지 않고 어떤 역사를 받아들이듯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2) 이적적 신앙

이적적 신앙은 이적이 어떤 사람에 의해 혹은 그를 위해 행사될 때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확신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사역을 행하도록 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을 수행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앙을 요구한다. 즉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신앙을 말한다.

 

(3) 일시적 신앙

이는 양심의 자극이나 감정적인 감동을 일으키지만 중생한 심령에 뿌리박지 못한 종교적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다. 이 명칭은 막 13:20, 21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고 환난이나 핍박의 시대에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시적 신앙이라고 일컬어진다.

 

(4) 진정한 구원적 신앙

진정한 구원적 신앙이란 심령 안에 자리 잡고, 중생한 생명에 뿌리박은 신앙이다. 종종 신앙의 성향과 신앙의 행동이 구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신앙의 배후에는 신앙의 씨앗(semen fidei)이 있다. 이 신앙은 우선 인간의 행위가 아니며, 죄인의 심령 속에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잠재성이다.

 

2. 신앙의 요소

신앙의 요소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신앙이 전인적 인간의 행위요, 부분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신앙은 인간의 정상적인 기능을 통해 활동하며 어떤 특별한 기능으로 활동하지 않는.

 

(1) 지적 요소 (nototia, 지식)

신앙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지식의 성격

신앙의 지식이란 인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진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의 확실성

신앙의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확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확실한(논박될 수 없는) 지식임을 천명한다. 신앙의 지식은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매개되고 분여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을 근거로 우리는 이를 확실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보증함을 어떤 것보다도 확실하다.

 

이 지식의 분량

구원 적 신앙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지를 정확하게 규명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만약 구원 적 신앙이 복음에서 제시된 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의 복음을 알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진정한 구원 적 신앙은 일반적으로 신적 계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중보자와 그의 은혜로운 사역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포함해야 한다.

 

(2) 감정적 요소 (asensus, 동의)

바르트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그의 생애 중 실존적 순간이며, 여기서 인간은 신앙의 대상을 분리되고 비참여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기를 중단하고 이에 대해 생동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영접할 때, 그는 진리와 신앙의 대상의 실재를 깊이 확신하고, 이것이 자신의 생활에서 주요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깨닫고, 신앙에 열렬한 관심을 자각하는데 바로 이것이 동의이다.

 

(3) 의지적 요소 (fiducia, 신뢰)

이는 신앙의 요소 중 정수이다. 신앙은 지성의 문제 혹은 지성과 감정의 복합적 문제라기보다는 오리혀 영혼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지의 문제요 대상으로 다가가서 이를 획득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3. 신앙의 대상

진정한 구원 적 신앙의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이 신앙을 일반적인 의미와 특별한 의미로 구분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1) 일반적 신앙 (fides generalis)

이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원 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신적인 계시 전체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 혹은 성경에서 정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의 신앙의 대상에 속한다.

 

(2) 특별한 신앙 (fides specialis)

이는 보다 제한적 의미에서의 구원 적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진정한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것은 의롭다 하며, 따라서 직접적으로 구원하는 신앙의 특별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보다 특별한 신앙으로 인도받아야 하며 또 사실상 이 신앙으로 인도한다. 이 특별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다.

 

4. 신앙의 근거

신앙이 의존하는 궁극적 근거는 복음의 약속과 연관된 하나님의 진실성과 신실성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궁극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자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와 구분해서 이는 가장 가까운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G. 신앙과 확신 (Faith and Assurance)

 

여기서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가 아니면 신앙에는 포함되지 않는 부차적인 것인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신앙의 확신이라는 표현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 객관적 신앙의 확신

 

그리스도가 그가 천명한 모든 것이 되시며, 그가 약속한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의심 없는 확신이 있다. 이러한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2) 주관적 신앙의 확신

즉 안정과 평안을 느끼게 하며, 많은 경우 개별적 신자가 자신의 죄가 용서되고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함에 때라 일어나는 은혜와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과 신앙의 본질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들이 있다.

 

 

1. 로마교회의 견해

 

(1) 로마교회는 개인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할 뿐만 아니라 반성된 행동(actus reflesxus) 혹은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2) 신자에게 특별계시에 의해 확신이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는 절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3) 이는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로마교회의 신앙고백적 체계의 소산이다. 로마교회의 반펠라기우스주의적 입장을 지지한 초기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은 매우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돌트회에서 정죄됨)

 

 

2.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

 

(1)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회에 대한 항거에 있어서 때때로 확신을 신앙의 가장 주요한 요소로 편협하게 강조하기도 했다.

 

(2) 때때로 구원의 확신 즉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긍정적 확신을 결여한 사람은 구원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 신앙의 신뢰의 요소는 때로, 그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았다는 죄인 편에서의 확고한 신뢰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작들을 검토해볼 때,

 

1) 이들은 이 신뢰가 다른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으며,

 

2) 이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종종 모든 종류의 의심과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려하지는 않았다.

 

3. 개혁파의 표준적 신앙고백서들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로마에 대항하여 신앙의 신뢰가 죄의 용서의 확신에 기인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으로 구원의 확신을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2) 돌트 신조

선택된 자의 확신은 특별계시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과 성령의 증거 그리고 선한 양심과 선행에서 발원하며,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향유한다. 이는 분명히 이 요소가 신앙의 본질에 어느 정도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육적인 의심과 종종 투쟁해야 하며 항상 신앙의 확신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신앙의 완전한 확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진정한 신자가 오랫동안 이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부 장로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개인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부인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는 이같이 말하거나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4. 신앙고백의 시기 이후 (이러한 입장에서 일탈하는 견해들이 출현했다)

 

(1) 율법 폐기론자들

이러한 확신이 신앙의 본질의 전체라고 이해했다. 이들은 신앙의 다른 모든 활동을 무시하고 신앙을 단순히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명제에 대한 지적 수용이라고 이해했다.

 

(2) 경건주의적 율법준수론자

확신은 신앙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좋은 상태에 속하며, 특별계시 외에는 확신은 지속적이며 자각적 자기 성찰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류의 영적 생활의 표지들은 성경보다는 인정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는 자기 검증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법은 확신을 획득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회의 혼동과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3) 감리교인들

즉각적인 확신을 수반하는 조직적인 회심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인간을 율법 아래 두며, 자신들의 철저한 죄악성과 무서운 원죄를 인지하게 하고 주님을 두려워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을 율법의 공포아래 서게 한 후 완전하고 값없는 구속의 복음을 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기꺼이 인정하기만을 요구한다. 단 순간에 죄인들은 감격의 파도에 실려, 슬픔의 심연에서 환희에 이른다. 이러한 돌발적인 변화는 즉각적인 구속의 확신을 수반하여 그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가 궁극적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철저한 감리교인은 이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도의 타락을 믿기 때문이다.

 

(4) 개혁파 신학자들

개혁파 신학자들 중에도 의견들이 상이하다. 다수의 장로교 인들은 신앙 자체가 확신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은 진정한 신앙은 신뢰를 포함하고,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상이하지만 안전감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성찰의 열매로서 주어지는 신앙의 확신도 있다. 신앙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주관적 확신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의 사역의 현존을 경험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요일 2:9-11; 3:9, 10, 18, 19; 4:7, 20)

 

 

H. 로마교회의 싱안의 개념 (The Roman Catholic Conception of Faith)

 

1. 로마교회는 신앙이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단순한 지적 승인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역사적 신앙과 구원 적 신앙의 구분을 폐기한다. 신앙은 세례 시 주어지는 칭의의 7개의 예비과정 중 하나이며, 다라서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지적 활동으로서의 신앙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 진정한 성경적 신앙을 가진 자도 이를 상실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더구나 로마교회는 구체화의 원리를 신앙에도 적용시키고 있다.

 

2. 따라서 로마교회는 지적 요소를 신앙에서 제거한다. 실제로 그 내용을 알지 못해도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기만 하면 진정한 신자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을 지식을 포함하는 명시적 신앙(fides explicita)과 구분하여 맹목적 신앙(fides implicita)이라고 명명된다. ‘가르치는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침으로써 로마교회는 성직권위주의(clericalism)의 원리를 적용한다.

 

3. 로마교회의 신앙론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구분이 있다. 즉 무지의 신앙(fides infomis)과 주입된 신앙(fides formata)로 전자는 교회의 교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에 불과한 반면, 후자는 형성적 원리인 사랑을 포함하고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신앙이다. 이는 실제로 의롭게 하는 신앙이다.

 

 

 

 

 

 

 

 

 

 

 

IX. 칭 의

(RIGHTEOUSNESS)

 

 

A. 칭의에 대한 성경의 용어들과 그 의미 (The Scriptural Terms for Justification and their Meaning)

 

 

1. 구약성경

의롭다고 하다’(justify)의 구약성경의 용어는 히트디크로서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람의 지위가 율법의 요구와 일치한다고 법적으로 선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23:7; 25:1; 17:15; 5:23). 피엘형 치데크도 통상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3:11; 16:50, 51). 그러므로 이 용어들은 법정용어로 법적이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에는 몇 가지 단어들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단어들은 같은 용어로 품사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1) 동사 디카이오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 한다는 의미로 종종 그 사람의 도덕이 율법과 일치한다는 개인적 선언을 나타내기도 한다(12:27; 7;29; 3:4)

 

(2) 형용사 디카이오스

이 단어는 사물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혹은 외부에 있는 어떤 기준과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명사 디카이오시스’ (칭의)

이는 신약성경에서 두 구절에만 나온다(4:25; 5:18). 이는 인간이 죄책에서 자유롭고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야기되는 신분을 디가이오수네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3. 칭의의 결과적 개념

(1) 칭의라는 단어는 라틴어로는 ‘justus’(의로운)‘facere'(만들다)의 합성어인 ’justificare'에서 유래한 단어로, 화란어 ‘rechtvaardigmaing'처럼 인간 안에서 야기되는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2)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 단어의 어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은 그리 심하지 않다.

 

(3) 화란어를 사용할 때에는 ‘rechtvaardigen'이나 ’‘rechtvaardiging'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위험을 피할 수 있다.

 

(4) 성경적 의미에서 의롭다고 하다라는 단어는 법적인 선언에 의한 객관적 관계, 의의 부분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방식,

 

(1) 어떤 사람의 실제적 인 주관적 상태를 고려함으로써(의인을 의롭다 하는 경우, 2:21),

 

(2) 다른 사람의 의를 그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즉 그가 내적으로는 의롭지 못하지만 그를 의롭다고 간주함으로써 행해질 수 있는데, 이것이 통상적인 신약성경의 의미이다.

 

 

B. 칭의론의 역사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History)

 

이신칭의론(以信稱義論)은 항상 명확하게 이해된 것은 아니다. 사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전형적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를 간략하게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종교개혁 이전의 교리

(1) 일부 초대교부들은 이미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언급하지만, 이들의 그 내용이나 신앙과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2) 어거스틴조차도 칭의가 법적인 행동으로서 성화의 도덕적 과정과는 명백히 구분된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3) 칭의와 성화의 혼동은 중세에까지 지속되었고, 점차로 보다 적극적이며 교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4) 스콜라주의자들의 일반적인 교훈에 따르면, 칭의는 두 가지 요소 즉 인간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과 그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논리적 순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개중에는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2.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

(1)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리였다. 칭의의 본질과 관련해서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오류를 바로 잡았다.

 

(2)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의 법적 성격을 강조하고 칭의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 제시하여,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그 면전에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행위로,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3) 소시니주의자들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자신의 회개와 갱신을 근거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에게 열납된다고 주장했다.

 

(4)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주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칭의의 영역을 협소화시켜 그리스도에 대한 수동적 복종을 기초로 받는 죄의 용서만을 포함시키고, 죄인이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 된다는 요소를 제외시키고 있다. 죄인은 자신의 신앙, 즉 순종의 삶에 의해서만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5) 슈라이엘마허와 리츨에 있어서 칭의란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인식이 잘못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6)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죄인의 삶의 도덕적인 개선을 통해 죄인을 의롭다고 하신다는 사상과 대면하게 된다.

 

 

C. 칭의의 본질과 성격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Justification)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죄인에 대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이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

 

1.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고 영원한 기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내포된 모든 권리를 죄인에게 회복시킨다. 성화는 죄의 부패를 제거하며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새롭게 한다.

 

2.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의 판결이 주관적으로 적용되지만 내적인 생활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반면에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 삶에서 일어나고 점차 전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3. 칭의는 한 번 일어난다. 칭의는 반복될 수 없으며, 과정일 수도 없다. 이는 단번에 완성된다. 칭의에는 정도 차이라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히 칭의 되든지 전혀 칭의 받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화는 지속적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

 

4. 양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를 공로적 요인으로 가지지만, 그 동인에 있어서는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성부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성령하나님은 그를 성화시킨다.

 

 

D. 칭의의 요소 (The Elements of Justification)

 

 

1. 소극적 요소

(1) 칭의의 소극적 요소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인한 죄의 용서이다. 이 요소는 보다 구체적으로는(배타적인 것은 아님) 구세주의 수동적 순종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 옛 개혁파 신학자들).

 

(2) 이는 부분적으로는 칭의의 이러한 측면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구약성경 적 표현에 기인하며(32:1; 43:25; 44:22; 31;34), 부분적으로는 은혜의 요소나 값없는 용서를 공정하게 다루지 못하는 로마교회에 대한 반동에 기인한다.

 

(3)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해서 개혁파 신학은 칭의가 용서 이상이라는 것을 항상 주장해 왔다. 죄의 용서가 칭의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4:5-8; 5:18, 19; 2:17).

 

(4) 칭의시 부여된 용서는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하며, 따라서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의 제거를 포함한다. 이는 칭의가 반복을 허용치 않는다는 사실과, 5:21; 8:1, 32-34; 10:14; 103:12; 44:22 등의 우리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칭의 된 자를 송사하지 못하며 그가 정죄를 면제받고 영생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구적에 연유된 것이다.

 

(5) 개혁파 신학의 입장은, 하나님은 칭의시 죄책을 제거하시지만 죄의 유죄성(culpability)은 제거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형벌의 가능성은 제거하지만 그가 범할 수 있는 여하한 죄의 내재적 죄책성(inherent guiltiness)은 제거하지 않는다.

 

1) 이것 때문에, 항상 신자에게 죄책감, 하나님으로부터의 거리감, 슬픔, 회개 등의 감정을 야기시킨다.

 

2) 따라서 그들은 죄를 고백할 필요를 느끼며, 심지어 어린 시절의 죄까지도 고백하려 한다(25:7; 51:5-9)

 

(6) 칭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죄인에 대한 객관적 선언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2. 적극적 요소

칭의에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근거한 적극적 요소가 있다. 물론 피스카토(Piscator)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가 죄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칭의의 적극적 요소도 부인하게 된다.

 

(1) 양자 됨

(1) 신자는 우선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 물론 이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 신자들이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내포한다. 자기 자식을 양자로 택할 사람은 없다. 양자됨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녀의 지위로 택하는 것이다.

 

(2) 마치 부모가 양자된 아이의 내면적 생활을 양자로 택하는 행위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양자됨이 죄인의 내면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3) 칭의를 통한 변화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양자됨을 통하여 신자들은 하나님의 권속이 되고, 자녀의 순종의 법아래 두어지며, 동시에 자녀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2) 영생의 권리

이 요소는 실제로 상기 요소에 포함되어 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된다면 이들은 모든 법적인 자녀의 권리를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된다(8:17).

 

1) 이 세상에서 구원의 모든 복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중 가장 근본적인 복은 성령의 약속즉 성령의 상태로 약속된 복(3:14)그의 아들의 영”(4:6)으로 표현된다.

 

2) 그리고 롬 8:29, 30의 구원의 순서에서는 영화가 칭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받은 신자는 영생의 상속자가 된다.

E. 칭의가 일어나는 영역 (The Sphere in which Justification Occurs)

 

칭의가 일어나는 영역에 대한 질문은 매우 조심스럽게 답변되어야 한다.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 혹은 객관적 칭의와 주관적 칭의를 구분하는 것이 관례적이다. 양자는 모두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1. 능동적 혹은 객관적 칭의

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칭의의 개념이다. 이는 주관적 칭의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행해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공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죄인을 사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죄인의 경우를 참작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다.

 

2.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란 죄인의 심령 혹은 양심에서 발생한다. 죄인에게 전달될 수 없는 순전히 객관적인 칭의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죄인 자신에게 그 기쁜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감옥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사면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바로 다른 어떠한 요소보다도 이 주관적 칭의에서 죄인은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부터 온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객관적 칭의와 주관적 칭의를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

 

 

F. 칭의의 시기 (The Time of Justification)

 

어떤 신학자들은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를 시간적으로 구분한다. 능동적 칭의는 영원 전에 혹은 그리스도의 부활시 발생한 것이며, 수동적 칭의는 신앙에 의해 발생하며, 따라서 전자는 후자에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 전의 칭의와 부활시 칭의, 신앙에 의한 칭의를 차례로 논의할 것이다.

 

 

1. 영원 전의 칭의

 

 

(1) 영원전의 칭의 교리의 근거

 

성경은 영원 전의 하나님의 은혜 혹은 자비에 대해 언급한다. (25:6; 103:17)

 

구원의 언약에서 선택된 자의 죄책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에게 전가된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중생이라는 최초의 은혜를 받는다.

 

유아들은 구원받기 위해 칭의를 필요로 하는데, 이들이 이신칭의를 경험하기란 불가능 하나, 비록 성숙하지 않은 유아들이 수동적 칭의는 경험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능동적으로 칭의 받을 수 있으며, 이들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칭의를 소유할 수 있다.

 

칭의는 하나님의(of) 내재적 행위이며 따라서 영원 전부터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칭의를 하나님 안의(in) 내재적 행위(actus immanens)라고 언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칭의는 창조 및 성육신처럼 초월적 행위(actus transiens)이다. 영원전의 칭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선택된 자가 영원 전부터 실제로 칭의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즉 신적 작정에 있어서 칭의 받았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경륜)과 그 수행의 통상적인 구분으로 인도한다.

 

(2) 영원전의 칭의에 대한 반론

 

성경은 칭의는 신앙에 의해 혹은 신앙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한 결 같이 가르친다.

 

8:29, 30에 나오는 구원의 순서의 단계에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시간적인 두 행동, 즉 부르심과 영화 사이에 위치한다.

 

영원 전의 칭의의 가르침에서 죄인의 칭의에 대한 내재적 행위로서의 하나님의 결정은 초월적 행위인 칭의 자체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모순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시의 칭의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시 칭의 된다는 사상은, 일부 율법폐기론 자가 강조하고 영원 전의 칭의를 신봉하는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가르치며 또 일부 다른 개혁파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에 기초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속죄 사역으로 인해 백성을 위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2) 4:25에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회심을 위하여(디아- 때문에) 살라나셨느니라”, 즉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3) 고후 5:19에는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했다.

 

 

3. 신앙에 의한 칭의

 

(1) 신앙과 칭의의 관계

(1) 성경은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디아 피스튜오스, 에크 피스튜오스, 혹은 피스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3:25, 28, 30; 5:1; 2:16; 3:9).

 

(2) 그러나 종종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며, 2:14-26은 행위에 의한 칭의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3) 양자를 조화시키기 위한 많은 시도가 행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야고보가 죄인의 칭의를 언급했지만, 야고보는 선행으로 발현되지 않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며, 따라서 칭의 받는 신앙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가정에서 이를 논의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4) 바울과 야고보의 차이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대면했던 대적자들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울은 칭의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행위의 업에 기초되어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과 대적했다. 반면에 야고보는 율법폐기론 자들에 대항하여 이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신앙은 단순한 지적 동의(2:19)에 불과하고 이들은 또한 선행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야고보는 행위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전혀 칭의 받는 신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 신앙과 칭의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들

여기에서 세 가지 용어가 다루어 질 것이다.

 

도구적 원인 (Instrumental cause)

(1) 이러한 명칭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후에 상당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신앙은 하나님의 도구인가, 인간의 도구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언급된 신앙은 하나님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우리는

 

(a) 성경이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믿음으로’(디아 피스튜오스) 칭의 받고. 여기서 디아는 도구적 의미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점(3:28; 3:8),

 

(b) 성경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며 따라서 믿음을 하나님의 도구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3:30),

 

(c) 믿음은 인간이 칭의를 받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도구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2:16)을 명심해야 한다.

 

(3) 신앙은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a) 믿음은 죄인 안에서 칭의로 역사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b) 하나님은 죄인에게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용서의 선언을 그의 심령과 마음속에 전달한다.

 

(4)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와 모든 값진 선물을 획득하는 인간의 수단이 된다(4:5; 2:16). (하이델베르그, 벨직)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은 칭의가 어떤 의미로든 인간의 행위로서 신앙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용어를 기피한다.

 

획득 기관 (Appropriating organ)

(1) 이 명칭은 믿음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획득하며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의식적 연합을 확립한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2) 그리스도의 공로는 디카이오마즉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이 공식적 선언이 근거하는 법적인 기초를 구성한다.

 

(3) 믿음에 의해 죄인은 이미 구원의 언약에 있어서 관념적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획득한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4) 획득기관이라는 명칭은 도구적 개념을 지니며, 따라서 우리 표준적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진술들과 일치하고 있다. 믿음은 두 가지 의미에서 획득기관으로 명명될 수 있다:

 

(a)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포착하고 획득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칭의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b) 믿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칭의를 이해하게 하여 주관적 칭의를 획득하게 하는 기관이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논리적으로 믿음보다 앞선다.

 

필수 조건 (Conditio sine qua non)

이 명칭은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인간이 믿음 없이는 칭의 받지 못하며 믿음이 칭의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개념을 표현한다. 이 명칭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해되기도 쉽다.

 

 

G. 칭의의 근거 (The Ground of Justification)

칭의의 근거는 로마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개혁파 신학과 알미니우스파 간의 가장 주요한 논쟁점들 중의 하나였다. 여기에 대해 종교 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1. 부정적으로, 칭의의 근거는 인간의 어떤 덕목이나 선행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견해.

 

이러한 입장은 현재에 있어서도 로마교회 및 다양한 교회들에서의 펠라기우스적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고수되어야 한다.

 

(1) 로마교회는 죄인은 인간의 의지가 심령 안에 주입된 선행적 은혜와 협력하여 맺어지는 고유한 의에 의해 칭의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는 소위 첫 번째 칭의에 적용된다.

 

(2) 이 후의 모든 칭의에서 인간의 선행은 칭의의 공식적 원인 혹은 근거로 간주된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고유한 의와 선행이 칭의의 근거를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a) 이 의()는 현세에 있어 매우 불완전한 의()이며 또한 불완전한 의()로 남아 있고,

 

(b) 이는 이미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이며,

 

(c) 신자의 최고의 선도 죄로 인해 부패되기 때문이다.

 

(3)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값없이 칭의 받고(3:24) 율법의 행위로는 칭의 받지 못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3:28; 2:16; 3:11)

 

2. 긍정적으로, 칭의(稱義)의 근거는 오직 칭의(稱義) 시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된다.

 

(1) 이는 롬 3:24; 5:9, 19; 8:1; 10:4; 고전 1:30; 6:11; 고후 5:21; 3:9 등과 같은 구절에서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다.

 

(2)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3:13)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3) 그리고 영생을 포함하는 모든 은혜의 선물을 받게 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서 죄인이 영생의 상속자가 되는 양자됨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4) 알미니우스 파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 즉 복음적 순종을 근거로 해서만 하나님에게 열납(說納)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과 배치되는 것이다.

 

 

H. 칭의론에 대한 반론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칭의론 자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은혜에 의한 구원을 신봉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다는 관점에서 표면적으로 칭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2. 칭의는 종종 죄인들을 사실과는 다르게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불경한 처사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3. 이 교리는 방종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파괴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I. 칭의의 다양한 견해

 

 

1. 로마가톨릭의 견해

(1) 로마가톨릭의 견해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 이는 칭의에 있어서 다음 요소들 즉 (a) 내주하는 죄의 추방, (b) 하나님 은혜의 주입, (c) 죄의 용서를 포함한다.

 

(2) 죄인은 자기편에서의 어떠한 공로 없이 선행적 은혜에 의해 칭의를 예비한다.

(3) 이러한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지적 승인, 죄 의식, 회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고한 신뢰, 새로운 생활의 시작, 세례를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도한다.

 

(4) 칭의는 죄의 부패가 세례 시 제거된 후 새로운 덕목들의 주입에 있다. 내주하는 죄가 축출된 이후 죄의 용서 혹은 죄책의 제거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그 이후 기독교인은 덕에서 덕으로 나아가 공로적인 행위를 수행할 수 있고, 그 보상으로 보다 많은 양의 은혜와 보다 완전한 칭의를 받는다. 칭의의 은혜는 상실될 수 있지만 고해성사에 의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2. 피스카토의 견해

(1) 피스카토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칭의 시(稱義 時)에 죄인에게 전가되어 죄의 용서로 이끈다고 가르쳤다.

 

(2) 또 그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죄인에게 전가될 수 없으므로 죄인은 양자됨과 영원한 기업에 이르지 못하는데, 이는 인간 그리스도 예수가 이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3) 더욱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셨다면 우리는 율법을 준수할 책임을 가지지 않는다.

 

(4) 피스카토는 죄의 형벌과 율법의 준수가 서로 배제하는 양자택일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죄인 자신의 개인적 순종이 장래의 희망에 대한 유일한 근거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 견해는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의 견해와 유사하고, 중세시대의 안셀름의 견해와 동일 선상에 있다.

 

 

3. 오시안더의 견해

(1) 오시안더는 루터교회 안에 비록 현저한 차이가 있지만 로마가톨릭의 칭의 개념의 본질들이 부흥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2) 그는 칭의란 그리스도의 대리적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새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 그에 의하면, 우리가 칭의 받는 의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의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이식되거나 주입된다.

 

 

4. 알미니우스주의의 견해

(1)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를 엄격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죄에 대한 실제적인 화목제물(propitiation)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이를 은혜롭게 받아들이고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칭의 하는 데 있어서 만족할 만한 것으로 판결하셨다.

 

(2) 이는 단지 과거를 청산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또한 장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은 신자의 신앙, 즉 신자의 모든 종교적 신앙을 포괄하는 신앙, 복음적 순종을 그의 의로 간주하신다.

 

(3) 이러한 견해에서는 신앙은 칭의의 적극적인 요소에 대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칭의가 기초된 은혜롭게 인정된 근거이다. 따라서 칭의란 하나님의 법적인 행동이 아니라 주권적 행동이다.

 

 

5. 바르트의 견해

(1) 바르트는 칭의를, 순간적인 행위 혹은 단번에 성취되어 그 이후에는 성화가 수반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는다.

 

(2) 그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동행한다. 파욱(Pauck)은 바르트에 의하면 칭의는 성장 혹은 윤리적인 발전이 아니라고 말한다.

 

(3) 칭의는 항상 인간이 자신의 삶을 건설했던 신념과 가치에 대해 전적으로 절망하는 시점에 이를 때만다 새롭게 일어난다.

 

(4) 투르나이젠 역시 칭의가 단번에 일어난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이러한 견해를 경건주의적 견해라고 부르며, 이는 종교개혁의 교리에 치명적인 해를 준다고 주장한다.

 

 

 

 

 

 

 

 

 

 

 

 

 

 

.

X. 성 화

(SANCTIFICATION)

 

 

 

A. 성화와 거룩함에 대한 성경적 용어 (The Scriptural Terms for Sanctification and Holiness)

 

 

1. 구약 성경 (Old Testament)

거룩하게 하다라는 구약성경의 용어는 카다쉬로 나팔, 피엘, 히피리 힛파엘의 형태로 사용된 동사이다. 명사형은 코데쉬이며 형용사형은 카도쉬이다. 동사 형태는 명사형과 형용사형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단어들의 원래 의미는 확실하지 않아 여러 견해가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카다쉬비춘자는 의미의 차다쉬와 관견된 것으로 주장하여 성경적인 거룩함의 개념의 특질, 즉 순결의 개념과 조화되고 있다.

 

(2)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자르다란 의미의 카드란 어근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떠 높은 개연성이 있다. 이는 분리의 개념이 원래의 의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초연 분리, 장엄을 나타낸다. ‘성화거룩함이라는 단어들의 이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개념이었음에는 틀림없다.

 

(3) 거들스톤(Girdlestone)성화’ ‘거룩함이라는 용어는 지금은 도덕적. 영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빈번히 사용되어, 하나님과 그에게 봉헌된 어떤 사람이나 물건과 위치 혹은 관계라는 개념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이 단어의 실제의 의미이다.”

 

(4) 이와 유사하게 크레머-쾨겔은 거룩함의 개념에는 분리의 개념이 가장 근본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거룩함은 관계적 개념이다.” 동시에 거룩함과 분리의 두 개념은 혼합되지도 않고 어느 하나에 흡수되는 개념도 아니며, 거룩함은 분리의 개념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2. 신약 성경 (New Testament)

 

(1) 동사 하기아조와 다양한 의미들

하기아조라는 동사는 히브리어 카도쉬와 같이 먼저 분리의 개념을 표현하는 하기오스의 파생어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몇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간이나 사물의 정신적 의미로 (6:9; 11:2; 벧전 3:15)

예식적인 의미로 (23:17,19; 10:36; 딤후 2:21)

성령의 주관적 속성을 야기 (17:17; 20:32; 고전 1:2)

히브리서에서 속죄의 의미로 (9:13; 10:10, 29; 13:12)

 

(2) 거룩함을 나타내는 형용사들

히에로스: 사물에 사용 (고전 9:13; 딤후 3:15)

호시오스: 모든 것에 사용 (2:27; 13:34; 딤전 2:8; 15:4)

히그노스: 윤리적 순결 (고후 7:11; 11:2; 4:8; 딤전 5:22)

하기오스: 성별 의미로 봉헌 (1:70; 3:5; 1:4; 1:22)

 

(3) 성화와 거룩함을 나타내는 명사들

하기아스모스: 윤리적 순결과 분리 개념 (6:16, 22; 고전 1:30)

하기에토스 (고전 1:30; 12:10)과 하기오수네 (1:4; 고후 7:1; 살전 13:13): 하나님의 본질적 거룩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분여된 것.

 

 

B. 성화론의 역사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in History)

 

 

1. 종교개혁 이전 (세 가지 관심 있는 문제들)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와의 관계

성화와 칭의의 관계

현세에서의성화의 정도

 

(1) 초대 교부들의 문헌들은 성화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 니케아 신학은 성화의 영역을 그리스도의 구속과 간접적으로만 연결시키게 했다 (스코트)

 

(3) 어거스틴은 성화에 대한 다소 명확한 개념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로 그의 견해는 중세 교회에 결정적인영향을 주었다.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성화가 칭의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화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예치물로 이해했다.

 

(4)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칭의와 성화는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칭의는 인간 영혼에 있어 본질적인 신적 은혜의 주입을 포함시켰다. 선행은 중죄에 의해 무효화되거나 파괴될 수 있지만, 세례 이후 범한 허물은 가벼운 죄일 경우는 성체성사(성찬)에 의해서 제거되지만, 중죄의 경우에는 고해성사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고 했다.

 

 

2. 종교개혁 이후

(1) 종교 개혁자들은 성화를 언급함에 있어서 자연과 초자연의 대립보다는 죄와 구속의 대립을 강조한다.

 

(2)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고 칭의는 신적 은혜의 법적 행위로서 인간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성화는 도덕적 재창조적 사역으로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을 이해했다.

 

(3) 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신중해야 하며, 이 둘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성화의 영을 보내주심으로, 시간적 문제는 있지만 결국은 칭의의 종국에는 성화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4) 칭의의 역사는 단회적이지만, 성화의 역사는 계속적이며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자제와 자기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5)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시키지 않으면서도, 행위의 이 의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고 용서하는 은혜가 강하게 강조되는 칭의와 인간의 협력을 요청하는 성화 간에 가능한 한 밀접한 관련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6) 경건주의와 감리교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가 성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크게 강조된다. 따라서 칭의에 훼손의 위험이 있다.

 

(7) 웨슬레는 칭의와 성화를 완전 분리, 성화 전체를 첫 번째 은혜인 이신칭의 이후 조만간 오게 되는 두 번째 은혜라고 언급했다.

 

(8) 합리주의와 칸트의 도덕주의적 영향으로 성화는 죄인을 갱신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의한 도덕적 개선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9) 슈라엘마허에 있어서의 성화는 우리 안에 단순히 감각적이고 도덕적으로 결여된 세계의 의식에 대한 신의식의 점진적인 지배에 불과하.

 

(10) 리츨에게 있어서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성취할 때 획득되는 기독교적 삶의 도덕적 완성이다.

 

(11)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화란 일반적으로 고차적 자아의 지배에 의한 인간의 하위적 자아의 점진적인 구속에 불과하다. 성품에 의한 회복이 오늘날의 표어이며, ‘성화라는 용어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을 의미하게 되었다.

 

 

C. 거룩함과 성화에 대한 성경적 개념 (The Biblical Idea of Holiness and Sanctification)

 

1. 구약 성경 (Old Testament)

(1) 성경에서는 거룩함의 특징이 우선 하나님에게 적용되며,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접근할 수 없음이다.

 

(2) 이것은 조물주와 피조물 간의 구분에 기초한 것으로, 하나님 안에 있단 다른 속성들과 연관된 속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의 속성으로 단정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인간은 자신이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불결하고 죄 많으며 하나님의 진노 대상임을 느끼게 된다.

 

(4)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거룩함에 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셨다.

 

1) 그는 이스라엘의 적들에 대해 무서운 심판으로 거룩함을 나타내셨다(15:11).

 

2) 또 세상에서 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함으로써 이를 나타내셨다(19:4-6; 20:29-44).

 

3) 불결하고 무신 적 세계에서 백성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의 죄에 대해 대항하셨고, 더욱이 그는 불충성한 백성들을 용서하심으로써 속화된 세상이 하나님의 사역의 실패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셔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11:9).

 

(5) 파생적 의미에서의 거룩함의 개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물과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2. 신약성경 (New Testament)

(1)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함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떠한 속성도 존재하지 않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인용구와 요 17:11; 요일 2:20; 6:10에만)

 

(2) 신약성경에는 거룩함이 하나님의 영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신자들은 성화되고 봉사할 권능을 받고 영원한 목표로 인도된다(살후 2:13).

 

(3)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룩과 성화의 개념은 파생적 의미로 인간에게 적용되며, 윤리적 거룩함은 도덕적 정직 이상이며, 성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 이상을 의미한다.

 

(4) 성경은 순수하고 단순한 도덕적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고 하나님을 위하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덕적 개선을 요구한다.

 

(5) 성화는 칭의 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로부터 해방하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며 그가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자비롭고 지속적인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D. 성화의 본질 (The Nature of Sanctification)

 

1.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1) 성화는 어떤 이들이 말하듯 의지에게 동기를 설득력 있게 부여함으로써 중생에 의해 영혼 안에 주입된 새로운 생명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중생 시 출생한 거룩한 성향이 강화괴고 거룩한 수행이 증대되게 하는 영혼 안에서의 신적 작용이다.

 

(2) 하나님이 수단을 사용하시는 한 인간이 이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할 것이 기대되지만 성화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살전 5:23; 13:20, 21; 15:4; 2:20; 4:19; 4:16; 1:11; 2:22).

 

2.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옛 사람, 죄의 몸의 극복

이러한 성경의 용어는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와 타락이 점진적으로 제거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1)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과 연관된다.

 

2) 옛 사람을 죄로 인해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본성이다(6:6; 5:24)

 

3) 육신(옛 사람)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를 대조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을 위해 창조된 새사람의 소생

1) 성화의 전반부가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 부분은 적극적이다. (영혼의 거룩한 성향과 실천이 강화됨)

 

2) 죄의 옛 구조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새로운 구조가 건설된다. 옛것이 점진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새것이 모습을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3) 이러한 성화의 적극적인 측면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음이라고 표현된다(6:4, 5; 2:12; 3:1,2; 6:11; 2:19)

 

3. 인간 전체 즉 몸과 영혼, 지성과 감성과 의지 전체에 영향을 준다.

(1) 이 성화는 본질에서 유래하는데 왜냐하면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인 삶에서 심령에서 일어나는데,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2) 내면적 인간의 변화에 따라 주변에서도 일어나며 더욱이 성경은 성화가 몸과 영혼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실잔 5:23; 고후 5:17; 6:12; 조전 6:15, 20).

 

(3) 몸의 성화는 특별히 죽음의 위기와 죽은 자의 부활에서 나타난다.

 

(4) 성경에서는 성화가 영혼의 모든 능력 혹은 모든 기능 즉 오성(31:24; 6:45)과 의지(36:25-27; 2:13), 감정(5:24), 양심(q:15; 9:14)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4. 신자가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1) 이것은 인간의 독립적 행위로 성화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이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이라는 뜻이 아니다.

(2)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령에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화의 사역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영과의 협력의미는,

 

1) 인간이 인생의 함정을 회피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암시하고 있는 유혹과 사악한 행동에 대한 반복된 경고(12:9, 16, 17; 고전 6:9, 10; 5:16-23),

 

2) 거룩한 삶에 대한 계속적인 권면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신자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개선을 위한 수단들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 근면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6:5; 15:2, 8, 16; 8:12, 13; 12:1, 2, 17; 6:7, 8, 15).

 

 

E. 성화의 특성 (The Characteristics of Sanctification)

1. 성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2. 성화는 부분적으로는 잠재의식에서 일어나고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다.

 

3. 성화는 통상적으로 장구한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4. 신자의 성화는 영혼에 있어서는 사망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사망 직후에 완성되며 몸에 있어서는 부활 시에 완성된다.

 

 

1. 성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1) 소위 자유 의지의 대변자만이 성화가 인간의 사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의 통제 하에 두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성화를 증대시키도록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성화는 중생과 구분된다(고후 7:1; 3:5-14; 벧전 1:22).

 

(3) 철저한 율법폐기론자(Antinomian)들은 이 중요한 진리를 망각하고, 조심스럽게 죄를 회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는 사형선고를 받은 옛사람에게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된 새사람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 성화는 부분적으로는 잠재의식에서 일어나고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직접적 사역이다.

 

성화는 부분적으로는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고 신앙의 지속적 실천,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 기도, 다른 신자들과의 연합 등과 같은 일정한 수단의 활용에 의존하게 된다.

 

3. 성화는 통상적으로 장구한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

동시에 매우 짧은 순간 혹은 순간적으로 환성되는 사례들, 예를 들면 일시적인 죽음 이후 곧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신자의 성화가 사망 직후에 완성된다는 가정을 발전시킨다면 (성경은 영혼에 관련되는 한 이를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사례들에 있어서는 영혼의 성화가 거의 즉시 완성된다.

 

4. 신자의 성화는 영혼에 있어서는 사망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사망 직후에 완성되며, 몸에 있어서는 부활 시에 완성된다.

 

(1) 이생에서는 아무도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왕상 8:46; 20:9; 3:10, 12; 3:2; 요일 1:8)

 

(2) 오래전에 죽은 자가 전적으로 성화되었다고 가르치는 사실에 기인한다. 성경은 이들을 온전케 된 영들”(12:23), “흠이 없는 자들(14:5)이라고 말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천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도 들어오지 못 하리다‘(21:27)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4)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21)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F. 성화의 조성자와 수단 (The Author and Means of Sanctification)

 

(1) 성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8:11; 15:16; 벧전 1:2)

 

(2) 신학연구를 인간학적으로 접근하는 현대주의나 특히 미국 종교생활의 특징인 행동주의에 대해서 성화는 칭의의 열매요 성화는 칭의 없이는 불가능하며 양자는 죄인의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열매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3) 성화가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한 이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일어나지만, 신자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할 때 성화는 성령이 사용하는 몇 가지 수단에 의해서 일어난다.

 

(4) 성화의 조성자로서 하나님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성령께서 인간의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성화를 이루어나가신다.

 

1. 하나님의 말씀 (The Word of God)

(1) 로마교회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그 자체는 신자를 성화시킬 적절한 효과를 야기 시킬 수 없지만, 성령에 의해 사용될 때 성화의 수단이 된다.

 

(2) 성경은 거룩한 실천과 행위들에 대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제시하고, 동기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영적인 활동을 자극하고, 금지와 권면과 사례들을 통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한다(벧전 1:22; 2:2; 벧후 1:4)

 

2. 성례 (Sacraments)

(1) 이것은 로마교회에 의하면 최고의 수단이다. 로마교회에서는 성례 즉 칠 성례를 통하여 구원과 성화 등을 효과 있게 한다고 믿는다.

 

(2) 개신교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하며, 때로는 이들을 보이는 말씀이라고 언급하기조차 한다.

 

(3)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언어의 표현으로 상징하며 이를 우리에게 보증한다.

 

(4) 이는 진리를 생동적으로 제시하고 성령께서 거룩한 활동을 위한 기회를 만드시는 행동화된 말씀으로 이해한다.

 

(5)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말씀이 수반된다(6:3; 고전 12:13; 3:5; 벧전 3:21).

 

3. 섭리적 인도 (Providential Guidance)

(1) 호의든 적대적이든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성화의 강력한 수단이 된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연적 감정에서 역사하며, 따라서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인상을 심화키고 감화시킨다.

(2) 그의 섭리적인 인도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19:71; 2:4; 12:10).

 

 

G. 성화와, 구원의 순서의 다른 단계들과의 관계 (Relation of Sanctification to Other Stages in the Ordo Salutis)

 

성화와 구속사역의 다른 단계들과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다.

 

 

1. 성화와 중생의 관계

(1) 중생은 단번에 완성된다. 이는 인간의 일부만 중생할 수 없고, 영적으로 죽은 자거나 산 자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2) 성화는 과정으로서의 점진적인 변화를 창출하며 그 거룩함의 결과에 있어서 많은 단계들이 구분될 수 있다.

 

2. 성화와 칭의의 관계

(1) 칭의는 은혜의 언약에서 성화에 선행하며 성화의 기초가 된다. 행위의 언약에서 의와 거룩함의 순서는 정반대이다.

 

(2) 칭의는 성화의 법적인 기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신다.

 

(3) 성화가 칭의 즉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칭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성화에서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개념을 배제한다.

 

(4) 바르트는 인간의 자기 의를 경계하기 위해 칭의와 성화가 항상 결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McConnachie)

 

3. 성화와 신앙의 관계

(1) 신앙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매개적 혹은 도구적 원인이다. 신앙이 성화를 위한 공로가 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칭의를 위한 공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2)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새 인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항상 접촉하게 한다.

 

(3) 가장 약한 신앙도 완전한 칭의를 중개할 수 있지만 성화의 정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강도와 그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인내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H. 이생에 있어서 불완전한 성화 (The Imperfect Character of Sanctification in this Life)

 

1. 정도에서 불환전한 성화

(1) 완전히 성장해야 하는 것은 새사람 전체이지만 아직 그는 완전히 계발의 의지가 있다.

 

(2)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3) 그러므로 신자들은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왕상 8:46; 20:9; 7:20; 3:2; 요일 1:8).

 

2. 불완전한 성화에 대한 완전주의자들의 반론

 

(1) 완전주의의 교리

일반적으로 이 교리의 요지는 종교적 완전이 이생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펠라기우스, 로마교회, 반펠라기우스주의자, 알미니우스주의자, 웨슬리주의자, 그리고 라바다에주의자, 정적주의자, 퀘이커 교도 등과 같은 신비주의자들, 또 마한, 피니 등과 같은 오벌린(Ohio) 신학자들, 리츨 등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었다.

 

죄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펠라기우즈주의자들은 다른 모든 자들과는 달리 인간 본성의 타락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죄를 구체화하는 데는 일치한다.

 

신자들이 성취해야 하는 율법 개념에 있어서, 웨슬레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는 원래 도적법이 아니라 복음적 요구 혹은 새로운 신앙의 율법과 복음의 순종이라고 주장한다.

 

조인이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갱신적 은혜에 어느 정도 의존하느냐에 있어서도 상이하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지도적 완전주의자들의 이론이 완성의 기준을 격하시키며, 원래의 도덕법이 요구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둔화시키고 있다. 또한 죄의 개념을 구체화할 당위성을 느껴 의식적 악행만을 죄로 간주한다.

(2) 완전주의의 교리를 위해 인용된 성경적 근거들

 

성경은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심지어 완전할 것을 명령 한다 (벧전 1:16; 5:48; 1:4)

 

거룩함과 완전은 종종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적용 된다 (4:7; 고전 2:6; 고후 5:17; 5:27; 5:14; 4:13; 2:10)

 

완전한 삶을 영위한 성경적 사례들, 즉 노아, , 아사(6:9; 1:1; 왕상 15:14)이 있다.

 

사도 요한은 명백하게 하나님에게서 난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요일 3:6, 9, 9; 5:18).

 

(3) 완전주의에 대한 반론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완전주의는 절대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지상에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하고 명백한 확신을 지니도록 한다(왕상 8:46; 20:9; 7:20; 3:10; 3:2; 요일 1:8)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에서는 육신과 성령 간에 계속적인 투쟁이 있을 것이며, 최고의 자녀들도 아직 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7:7-26; 5:16-24)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예외 없이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도록 가르치셨다 (6:12, 13)

 

 

I. 성화와 선행 (Sanctification and Good Works)

 

성화와 선행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옛 생활이 사악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나타내듯, 중생 안에 발원하고 성화에서 촉진되고 강화되는 새 생명은 선행에서 나타난다. 선행은 성화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으며 여기서 다루고저 한.

 

1. 선행의 본질

 

(1) 특별히 신학적 의미에서의 선행

(1) 우리는 신적인 도덕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부응하며 행위언약의 상태에서도 영생의 보답을 획득할 수 있는 본래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2) 우리가 언급하는 행위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행동과는 도덕적인 성격상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 행위가 발원하는 원리처럼 새롭고 거룩한 본성의 표현들로서의 행위들이다.

 

이들은 중생한 심령의 열매들이다(12:33; 7:17, 18)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외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대한 자각적인 순종 안에서, 즉 이들을 하나님께서 요구한다는 이유로 행해진다.(6:2; 삼상 15:22; 1:12; 29:13; 15:9).

 

이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의 복락이 아니라, 인생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이다(고전 10:31; 12:1; 3:17, 23).

 

(2)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선행

(1) 선행이라는 용어는 위와 같이 엄격한 의미로 신학에서 사용되지만,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피상적인 의미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2) 이들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의 외면적으로 일치되며, 율법의 악명 높은 범죄와는 구분되는,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한다. 이것들도 하나님께서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3) 그러나 이러한 선행들을 타락한 인간의 심령의 열매로 간주해서는 아니 된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보통은혜로 설명될 수 있다.

 

(4) 이러한 행위들이 어떤 의미에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6:33), 이들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영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중생하지 못한 자가 어떤 의미에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종종 부인되어왔다. 바르트는 더나가서 신자들도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신자들의 모든 행위가 죄라고 주장한다.

 

2. 선행의 공로적 성격

초대교회에서도 선행의 일정한 공로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공로의 교리는 중세 시대에 실질적으로 전개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 교리가 로마가톨릭 신학에 있어서 매우 현저하였으며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우스꽝스러운 극단에까지 추진되었다.

(1) 이점에 대한 로마교회의 입장

(1) 로마교회는 지당한 공로(meritum de condigno)와 적합한 공로(meritum de congruo)로 구분하고, 전자는 본래적인 존귀와 가치를 지니는 반면, 후자는 일종의 유사 공로로서 보상받기에 적합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2) 전자는 중생 이후에 신적 은혜의 조력에 의해 행해진 행위들에만 적용되며, 하나님께 보상받기에 본질적으로 합당한 공로이나, 후자는 중생이전에 선행적 은혜만으로도 인간이 발전시키거나 행할 수 있는 성향들이나 행위들에 적용되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그의 심령에 주입함으로써 행위자에게 보상하는 것을 적합하게 하는 공로이다.

 

(2) 이점에 관한 성경적 입장

 

성경은 신자의 선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로적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공로라는 단어가 이중의 의미로 즉 엄밀하고 본래적 의미와 보다 자유로운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따라서 마땅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드린다고 해서 어떠한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7:9, 10)

 

이들은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날마다 부여하는 힘으로써만 선행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사실로 인해 이러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칭찬도 기대할 수 없다 (고전 15:10; 2:13)

 

신자들의 최선의 행위조차도이 생에서는 불완전하며, 모든 선행을 합하더라도 단지 부분적인 순종만을 나타내는 반면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도 율법의 요구는 만족될 수 없다 (64:6; 3:2)

 

더욱이 신자의 선행은 영광의 영원한 보상과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순종은 영원하고 완전한 보상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 없다.

 

3. 선행의 필요성

(1) 선행은 구원의 공로를 위해 필수적이거나 구원을 붙잡는 수단으로 혹은 영원한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이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원하게 되는 것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15:5; 7:4).

 

 

 

XI.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A. 성도의 견인론의 역사 (The Doctrine of the Perseveranceof the Saints in History)

 

(1)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에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

 

(2) 이 교리는 어거스틴에게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는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반대급부로 일부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궁극적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3) 로마교회는 자유의지를 포함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로 인해 성도의 견인론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견인을 인간의 불확실한 순종에 의존하게 했다.

 

(4)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교리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루터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인간의 신앙의 지속적 활동에 의존하게 하고, 진정한 신자들도 완전히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 칼빈주의적 교회만이 이 교리를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할 수 있는 형태로 주장한다.

 

(6) 돌트신조는 하나님의 자녀의 약점과 실패를 다수 열거한 후 그러나 풍성한 자비를 지닌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불변의 목적에 따라 중죄에 있어서도 자신의 백성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며 양자됨의 은혜를 상실하고 칭의의 신분을 상실하며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이들이 완전히 유기되거나 영원한 파멸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고 했다.

 

(7)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신자의 견인을 신앙하고자 하는 의지와 선행에 의존하도록 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이러한 극단을 회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인협동설을 그 모든 결과들과 함께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B. 견인의 교리의 진술 (The Statement of the Doctrine of Perseverance)

 

(1) 견인교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진술되어야 한다.

 

(2) 어거스틴과 같이 택자들의 구원이 한편으로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의 진술은 회피해야 한다.

 

(3) 스트롱과 같이 보는 측면에 따라 이해하자는 식의 진술도 불식시켜야 한다. 즉 인간 편과 신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자는 식을 불식시켜야 한다.

 

(4) 개혁파의 견해와 같이 성화에서와 같이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도 인간이 협력한다고 믿고 있지만, 성도의 견인을 우선적으로 신자의 활동이나 성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신자 홀로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5) 엄격히 말해서 견인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견인은 심령 안에 시작된 신적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C. 견인의 교리에 대한 증명 (The Proof for the Doctrine of Perseverance)

 

1. 성경의 직접적 진술

(1) 10:27-29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2) 11:2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3) 1:6에서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

 

(4) 살후 3:3에서 바울은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5) 딤후 1:12과 딤후 4:18에서도 바울을 주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신자들을 버리지 않고 능히 지켜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2. 추론적 증명

 

(1) 선택의 교리로부터

(1) 선택은 어떤 사람들이 일정한 이적인 특권으로 호의를 입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될 것이며 필히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2) 선택은 궁극으로의, 즉 구원으로의 선택이다. 이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력을 주셔서 이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구원되도록 인도한다.

 

(2) 구속언약의 교리로부터

(1) 구속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수종과 고난의 보상으로 자기 백성을 아들에게 주었다. 이 보상은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으로, 인간의 여하한 불확실한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약속을 위반하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간주되고 하나님의 보상의 일부가 된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거나, 생명의 연합으로써 언약에 들어간 자들이 타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8:38, 39)

 

(3)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기도의 효력으로부터

(1)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 사역에서 죄인의 용서와 열납을 획득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셨다.

 

(2) 그의 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완전한 근거를 구성하며, 그렇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칭의 받은 자들이 다시 정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더욱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기도를 드리며,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기도는 항상 효과적이다(11:42; 7:25).

 

(4)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부터

(1)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의 영의 참여자가 되고 그와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생명으로 약동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가 살아 있듯이 그들도 살아 있다.

(2) 그들은 그 몸으로부터 다시 절단되어 신적 이상(idea)을 무효케 할 수는 없다. 연합은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원인,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값없는 사랑에서 발원하므로 항구적이다.

 

(5)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1) 댑니(Dabney)성령이 지금 역사하기 시작하지만 곧 그를 포기할 것이며, 천상적 출생의 생동적 불꽃이 일시적으로 불붙다가 완전한 흑암 속으로 스러지게 되며, 새로운 출생에서 중개된 영적인 생명은 돌발적이며 발작적이어서 죽은 영혼에 외면적으로 생명이 발현하는 듯 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령의 지혜와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 성경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이생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3:36; 5:24; 6:54). 우리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행동할 이유가 무엇인가?

 

(6)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1) 성경에 보면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3:14; 6:11; 벧후 1:10), 신자들이 어느 순간에 은혜로부터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2) 이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서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D. 견인의 교리에 대한 반론 (The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Perseverance)

 

1.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1)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진정한 자유는 무관심의 자유나 혹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일들에서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2)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 때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2. 태만과 부도덕으로 인도한다.

(1) 견인의 교리가 태만, 방종, 심지어 부도덕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 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2) 신자에게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3. 성경에 위배된다.

 

(1) 배교에 대한 경고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가 타락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 (24:12; 1:23; 2:1; 3:14; 6:11; 요일 2:6)

 

(2) 성경에는 신자들이 성화의 길에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끝가지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3) 또 성경은 실제적으로 배교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 1:19, 20; 딤후 2:17, 18; 4:10; 벧후 2:1, 2; 4:6).

 

 

E. 이 교리를 부정한다면 구원은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The Denial of this Doctrine Makes Solution Dependent on Man's Will)

 

(1)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실제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펠라기우스적 자력구원관을 지닌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2) 그러나 이 생각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3) 이러한 견해의 요점은 인간이 성령만의 사역에 의해서든 혹은 성령과 인간의 의지와의 협력사역에 의해서든 은혜의 상태로 옮겨진 이후에는 신앙을 지속하느냐 신앙을 포기하느냐의 여부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어 인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4) 이는 인간의 동기를 매우 불확실하게 하며, 인간이 신앙의 복된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5) 호비(Hovey)이 교리는 큰 위로와 능력의 근원, 즉 감사에 대한 자극, 자기 헌신의 동기, 위험시에는 불기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