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찬가
노승수 목사
어느 폴더에 이 글을 올릴까? 조금 고민을 했다. 신학 쪽에 올리려니 내 학문적 깊이가 얕고 설교와 묵상 쪽에 올리려니 그렇게 잘 다듬어 진 글이 아니어서 망설여진다. 이럴 때 젤 만만한게 역시 '승수생각'이다. 요즘 새벽에 욥기를 묵상하고 있는데 28장의 '지혜찬가'를 보면서 성경 특별히 구약 지혜서들의 공통적 특징을 나름 발견한게 있는데, 그것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욥기 28장은 26장부터 시작된 욥의 최후 진술의 한 부분이다. 이 진술은 31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가 이 지혜찬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28장의 지혜찬가는 매우 뜬금이 없다. 여태껏 세 친구와 인간의 고통과 그 근원에 대한 열띤 논쟁 끝에 느닷없이 욥이 지혜를 노래하는데, 잠언이나 시편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략히 문단을 나누어 보면, 1-11절은 인간의 귀금속을 얻는 채광기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석을 찾듯이 지혜를 찾는 것에 대한 이를테면 비유인셈이다. 12-19절은 그 보석과 비견될 수 없는 지혜를 인간으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는 내용이다. 20-27절은 그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 만 아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지혜를 알길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28절에 인간의 지혜 곧 사람을 위한 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 28:28) 그런데 이 구절은 어디선가 낯이 익다.
욥기 28장은 26장부터 시작된 욥의 최후 진술의 한 부분이다. 이 진술은 31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가 이 지혜찬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28장의 지혜찬가는 매우 뜬금이 없다. 여태껏 세 친구와 인간의 고통과 그 근원에 대한 열띤 논쟁 끝에 느닷없이 욥이 지혜를 노래하는데, 잠언이나 시편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략히 문단을 나누어 보면, 1-11절은 인간의 귀금속을 얻는 채광기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석을 찾듯이 지혜를 찾는 것에 대한 이를테면 비유인셈이다. 12-19절은 그 보석과 비견될 수 없는 지혜를 인간으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는 내용이다. 20-27절은 그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 만 아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지혜를 알길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28절에 인간의 지혜 곧 사람을 위한 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 28:28) 그런데 이 구절은 어디선가 낯이 익다.
욥기 1-2장에 걸쳐서 세번이나 반복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먼저 1장 1절은 욥기의 저자의 나레이션이며, 8절과 2장 3절은 하나님의 욥에 대한 증언이시다. 욥은 이런 지혜의 사람이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욥기 전체의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특별히 욥기 28장의 문맥에서 보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척 하는 것에 대한 강한 경고를 담고 있다.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세가지 전제중의 하나인 "finitum non capax infiniti"(유한자는 무한자를 포괄할 수 없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인간의 경외란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앞에 그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하여 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악에서 떠남이란 도덕적 행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시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다.
욥의 27장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욥이 그의 세 친구들을 향해 한결같이 주장한 바는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으로 삼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부재하시는 듯한 고통의 순간에도 주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음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반복해서 이것은 너의 죄악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욥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 고난과 고통이 밀어닥칠 때, 우리 안의 죄의식들이 자신의 잘못과 죄를 검색하게 만들고 그것과 지금의 이 형편을 연결짓는 양심이 기능하기 때문에 사실 욥의 태도는 범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태도이기도 하다. 27장에 걸쳐 세친구들과 열띤 논쟁은 이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고 욥기의 결론부에 가면 실제 하나님이 욥의 이런 주장을 인정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삶에 고난은 항상 우리의 죄 때문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요한 복은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소경된 자의 소경됨의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조상의 죄 때문인지라고 묻는 장면은 사실 우리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물어 그 비밀한 경륜을 다 알겠는가? 다만 우리는 주님을 향한 마음의 순전을 지킬 뿐 아니겠는가? 이것이 지혜라고 욥은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지혜는 전도서의 전도자에 의해서도 들어난다.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Ecclesiastes 7:13-18)
전능자의 주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그를 신뢰하기를 멈추지 않는 순전함, 주를 경외함, 자신의 피조물 됨과 전능자의 주권을 인정해리는 것이 지혜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불신앙을 선택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뢰 곧 악에서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한다. 이런 자는 전도자가 말한 것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다. 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Ecclesiastes 12:12-14)
그래서 어느 수도자의 노래처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는 긴장을 풀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어리석게 살 것이며, 회전목마를 더 많이 탈 것이며, 데이지 꽃을 더 많이 딸 것입니다." 더 어리석고 긴장을 풀고 삶을 즐기며, 인생을 나그네의 길로 알아, 하나님의 날마다 인도하심에 경외함으로 따르며 인생에서 만날 여러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로움과 그의 전능자이심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하며 나의 심장을 그분께 드리는 삶을 산다. 이것이 욥기의 핵심적 주제인 거 같다. 그래서 욥기는 지혜서이며 그것이 인생의 참된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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