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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
조엘 비키
1. 구원의 확신에 대한 당대의 필요성
1) 참된 확신의 열매가 크게 부족하다.
현대의 교회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한 것 같다. 청교도들은 온전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확신은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믿음의 확신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있기 마련이고, 하나님과 교제가 삶에 나타난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이 중심된 교리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불붙게 된다. 요즘 성도들은 많이 부족하다. 교제, 그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들이 그렇다. 요즘은 세상적 기쁨, 즐거움, 나의 필요 충족 등이 나타나고 있다.
2) 확신은 신앙부흥 및 죄의 자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진정한 부흥을 위한 진정한 기도가 필요하다.
3) 성도들이 세속화의 시대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언덕위의 빛으로 부름 받았지만, 우리는 현재 전쟁 중에 있다. 감각중심, 눈에 보여지는 것, 예배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등,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 시청각이 특별히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말씀과 성례로 충분하다. 거기서 신적인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4) 건전한 교리를 사랑해야하는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왜 교리를 배워야 하는가?” 사람들은 묻는다. 교리는 무건조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은 마틴루터가 “교리는 천국이다.”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른 교리에 입각해서 생활해야함을 말한다. 바른 교리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바른 교리는 생각, 마음 속에 적용이 된다. 확신은 다른 많은 교리들 가운데 놓여져 있다. 구원에 관계된 교리와 통합되어 놓여져 있다. 죄, 구속,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혜의 열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예정, 하나님의 약속, 은혜의 언약, 설교, 기도, 성례 등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기에 믿음의 확신이라는 구조 안에서 모든 조직신학을 기록할만큼이나 중요한 교리다. 확신교리가 귀한 것은 능력 있고, 살아 있는 교리라는 것 때문이다. 다른 교리를 3차원의 세계에서 채색한 것이다.
5) 요즘 “느낌”을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는 “무엇을 느끼느냐?”가 “무엇을 믿느냐?”보다 더 중요시 여기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느끼는 것은...”이라는 문장을 자주 접한다. 이러한 시대적 정신이 교회 안에도 있다. 특별히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상을 자주 본다. 결국 느낌은 건조한 신학을 대신해서 취할 것이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무조건 비평하는 것보다 한번 이해해 보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좋은 방법을 제시했다. 성경의 지식, 마음의 지식을 잘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또한 경험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점검 받아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확신교리에서 잘 발견된다. 확신은 “확신 있는 믿음”과 “확신 있는 느낌”을 둘 다 포함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를 떠난 이유가 지식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 18장을 한 번 같이 공부해 보자.
2. 사례연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18장을 배경으로한 Anthony Burgess
1) 버제스의 삶과 저서
1640년대에 이루어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총대로 활동했다. 죽기 전 15년동안 50권의 책을 썼다. 그 책들은 탁월한 신학자의 입장과 경험을 중시하는 설교자의 입장의 조화가 있다. 법에 대한 기록, 칭의론에 대한 글, 원죄에 대한 글, 성경의 각 장에 대한 수많은 글을 남겼다. 요한복음 17장에 대한 150여권의 설교를 썼다. 고전 1장에 대해서는 700페이지에 해당하는 주해를 남겼다. 재밌는 점은 어떤 것도 반복되지 않고, 신선하고, 잘 수용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신학을 잘 표현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의 여러 책 중에 가장 대작은 경험적인 종교에 대한 좋은 책이 있다. 제일 첫 번째 것은 확신에 대한 글이다. 120개의 설교가 있다. 죄에 대하여는 42개의 설교가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볼륨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처음에 말하기를 반율법주의자가 말하는 오류가 있는데 내적인 증거가 확신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은혜의 표징을 말하기를 “어떻게 은혜를 얻고, 표현하는가.”가 나타나 있다. 바른 확신과 모방하는 확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2) WC 18.1: 확신의 가능성
거짓된 확신, 참된 확신, 약한 확신 세 가지를 다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기를 거짓된 확신은 거짓된 소망과 육체적 억측에 대해 말한다. 성경의 10처녀의 비유를 말하고 반석과 모래에 세우는 건축가의 비유를 말하기도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도 거짓확신이 많이 만연된 현상이다.
참된 확신과 거짓된 확신의 차이에 대해 말하기를
첫째, 원리가 다르다. 거짓된 확신은 자기 사랑을 근거로 한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외적인 믿음만 갖게 된다. 죄에 위험성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위험을 갖지 못한다. 일반은총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온전한 죄책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기 낮춤도 없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의 갈등도 없다. 자기 스스로의 확신에 대해 스스로 선을 넘기도 한다. 롬7장의 자아와의 싸움에 대한 관심이나, 사단에 대항하는 군사라는 관심도 없다. 은혜의 방편의 사용에 대한 관심도 없으며 예배나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도 없다. 거짓 확신은 내 죄에 대한 확신보다 외적인 요소에 더 크게 흔들린다.
이것에 반해 진정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있을 때 더 굳게 선다. 그러면 이렇게 거짓확신을 잘 치유할 수 있는가에 대해 증거한다. 가장 중요한 치료법은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법을 강력하게 적용할 수 있는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삶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기독론적인 설명을 많이 한다. 진정한 확신은 예수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믿는 것, 사랑하는 것, 그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살아가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로부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을 보면 7가지 정도의 온전한 확신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나 있는 믿음의 선배에 대한 기록이다. 욥은 “내 구세주가 살아계신다. 마지막 날에 만날 것이다.” 디모데후서의 바울도 “내가 누구를 믿는지 분명히 안다.”고 말했다. 둘째, 성경구절에서 나타난다. 또한 성경에서는 믿음의 확신을 가질 것을 명령하는 것을 본다. 벧후1:10 “부르심과 예정하심을 확신하라.” 성례에 대한 설명,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 하나님 중심된 삶의 모범, 다른 여러 방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할 수 있다. 요일에 보면 여러 하나님의 은혜의 표증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의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게 직접 증명하기 때문이다.
약한 확신도 있다.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믿음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평화를 누릴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확신을 가지지 않고도 천국은 갈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신은 중요하다. 굳윈이라는 청교도는 “성도가 온전한 확신이 있다면 10배 정도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살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많은 에너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3) WC 18.2 : 확신의 기초
1차적인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놓여져 있는 약속이다. 2차적 기초는 내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의 증거이다. 이 세 가지를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방법이다. 믿음을 얻는 기초이자 방법이다. 믿음과 확신은 같이 연결이 되어 있다. 확신은 믿음의 크림이라 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의 약속 안에서 그에게 보여주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섭취하게 되고 이러한 현상이 있을 때, 확신이 계속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인 약속이 기초가 되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혹자는 주관적 경험이야말로 객관적인 확신보다 더 많은 확신을 공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어느 상황이든지 언젠가 고난 속에 빠져있게 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시139편의 위로를 얻게 된다.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에게는 동일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루는 이것을 느끼고 다음 날에는 못느끼는 주관적 느낌으로는 절대로 자라날 수 없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잘 자라날 수 있다. 그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나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버제스가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멸망받을 자임을 확신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경험을 가질 때 최선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약속을 신뢰하는 것 외에 다른 요소가 있음을 증거한다. 진정한 성도의 삶은 믿고 있는 것을 삶에서 반영해야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만 그 믿음이 삶 속에 반영되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본다.
② 성령의 내적증거
성령께서 내주하심을 믿어야 한다. 내적인 증거를 통해 가능하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 속에 확신시켜주는 것은 3단논법 유형을 통해 증거한다. 대전제, 소전제, 결론이 있다. 요일3:14 말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소전제는 성령의 증거에 의해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유추되는 것은 결론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청교도는 두 종류의 3단논법을 발전시켰다. 하나는 실제적인 추론, 다른 것은 신비적인 유추법이다. 차이점은 전자는 밖으로 보여지는 외적인 요소이고 후자는 내적으로 우리 영혼 속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다룬다. 그래서 요일에 보면 실제적인 추론이 많이 발견된다. 벧후1:5-10, 산상수훈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증을 성도가 바라볼 때, 성령께서 과거의 삶을 잘 조명시켜주신다. 표증들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임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면 몇 가지 위험성이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확신한다면, 말씀이 근거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칼빈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를 진노에 놓으신 것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용하시는 것들은 금사실과 같다.” 청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는 “여성들의 목걸이와 유사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시는 것들이 쇠사슬에 우리를 연결시켜보면, 시작과 나무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바라볼 수 없고 인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내적인 증거를 성도를 낙담시키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격려하기 위해 사용했다. 성령의 열매가 삶 속에 현저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너희 것임을 믿어야 한다.
③ 성령의 직접 증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항상 신비한 일이 있을 경우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버제스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내적증거와 성령의 직접증거를 동일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적인 증거에 대한 확증이다. 사무엘 러더포드, 토마스 굳윈은 롬8장의 증거는 롬8:16의 증거와 다른 것이라 했다. 내적인 증거와 내 영혼을 향한 증거와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직접적 성령의 증거는 성령을 통해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능력을 통해 우리 가슴에 새겨질 수 있다. “내 아들아, 네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 “내가 너의 구원이다.”라는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바로 이럴 때, 성령께서 “맞어, 네가 하나님의 자녀다.”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제스가 우려한 것은 왜냐하면 혹시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반율법주의적 자세를 취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직접 말씀하셨다 하면서 삶을 통해 증거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적 증거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 비해 더 확실한 증거는 성령의 직접증거라 했다. 그래서 사무엘 러더포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한 직접 증거를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확신은 성령의 적용하심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성령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신을 주신다. 어떠하든지 다양한 확신을 얻는 것은 중요하다고 했다. 말씀은 믿지만 내적 증거를 받지 못하면 스스로 속이는 경우가 된다. 마음속에는 이것이 증거라는 생각은 갖고 있으되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내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성령의 증거에만 의지하게 된다면 이것을 통해 내적인 증거를 무시해버리면 신비주의나 감정주의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목적은 여러 종류의 확신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4) WC 18.3: 확신의 배양
사람마다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전생애를 걸쳐 점진적으로 확신을 취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믿음을 증진시키는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영적 전쟁가운데 확신이 더 확고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어린 아이들이 믿음의 확신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확신이 식어질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러한 확신을 얻게 되느냐?
은혜의 방편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통해서, 성례를 통해서 가능하다. 만일 성례를 잘 사용하면 성도들이 더 확신하면서 자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신 약속을 인증 받고 확신 받는 일이다. 성례를 통해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한 분이심을 확인받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고, 교제는 인증된 약속을 증거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신선한 용기를 주고, 믿음을 준다. 버제스는 하나님 말씀, 성례전 외에도 기도의 삶이 확신을 증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확증된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방적인 교제가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기도를 통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의 확신을 얻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도하며 주 앞에 갈 때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경험하게 되는데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의 자녀임을 확인하게 된다.
확신을 찾아야 한다. 확증할 때까지 게으름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 그러기에 더 큰 확신을 얻는 것은 모든 성도의 책임이다. 여기서 귀중한 것은 더 큰 확신을 얻기 위해 노력해 나갈 때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성숙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특정한 성도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규범적인 사실이다.
확신의 열매에 대한 언급이 있다. 확신은 열매 자체가 증거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확신은 미지근한 성도의 삶으로부터 지켜준다. 버제스는 “하나님과 습관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확신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가 가지는 자세처럼 말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진정한 사랑에 근거한 섬김을 가능하게 한다. 어려울 때, 고통이 있을 때 도움이 된다. 죄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그날을 사모하는 마음을 준다. 영적인 만족감도 준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응답하시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로 나가는 것은 나의 기쁨이라 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은혜라 했다. 확신은 그러기에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엡3장처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겸손하게, 거룩하게, 교만하지 않게 만든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는 것처럼 두려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5) WC 18.4: 확신의 상실과 회복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문제는 성도 자체에게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가? 죄에 빠졌을 경우, 은혜의 방편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경우, 미지근한 신앙, 하나님 앞에 형식적 자세를 가졌을 경우, 성도 자신을 바라볼 경우 등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잊을 때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보다 무엇인가 보복하시는 분으로 의식할 때에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게 될 때, 마음속의 확신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위선적 자세를 가질 때 잃어버릴 수 있다. 청교도가 말하려는 포인트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자세로 지속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면 절대로 지속적인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버제스는 “하나님 앞에 별로 준비가 되지 않은 게으른 자세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준 확신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 말했다. 만일 아내를 잘 섬기지 않고 유익을 얻으려고만 한다면, 아내를 위한 시간을 가지지 않으려 한다면, 유익만을 구하려 한다면 “내가 과연 내 아내를 사랑하는가?”하는 질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때 정신을 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정말 신앙인인가?”하는 질문은 중요하다. 이제 모든 잘못들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WC와 버제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확신을 덜 가지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광의 빛을 거두어 갈 수 있다고 신앙고백서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제스가 생각하기에는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는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을 잘 활용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확신이 퇴색해지는 느낌을 가질 때도 있다. 왜 이것을 허락하시는가? 버제스는 5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① 죄라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인가를 경험토록 도와준다.
② 흔들림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도록 도와준다.
③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해준다.
④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사는 것을 증거하게 하시도록 한다.
⑤ 더 경험적인 성도로 세우기 위함이다.
- 유사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 사람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목회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목회자에게 다양한 영적 경험을 허용하시는데 이러한 경험은 여러 혼합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더 위로할 수 있도록 하라는 바울의 경험과 유사하다. 이미 위로를 받은 자로 남을 위로하라는 것이다.
왜 신앙고백과 버제스가 이 주제를 깊게 다루고 있는가?
목회적 차원에서 그렇다. 간혹 성도들이 자기가 생각할 때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확신을 잃어 당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부연해서 말하기를 성도들이 업 앤 다운을 통해 점점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럼에도 믿음이 씨앗은 결코 말라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가장 어려운 환경을 만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져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다른 모든 절망 가운데서 성도들의 마음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다르게 다루는 것처럼 성도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신다.
계시록 2장을 보자.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전에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였는가를 기억하고,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빠져있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회개하고 지금의 상황을 고백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하나님 보좌 앞에 나와 자비를 구하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다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의 앞에 포기하고 맡기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한 번 회복에 대한 포인트는 회개하는 것과 은혜의 방편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3. 결론
복잡한 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른 관점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성경적, 교리적, 목회적으로 연구했기에 우리에게 혜택이 있다. 그들은 칼빈의 형태를 그대로 수용했고, 목회적 차원에서 좀 더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하나님과 나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가? 그 약속을 귀중히 여기는가? 신앙의 열매는 맺어지고 있는가? 성령께서 증거하고 있는가? 소금으로 살고 있는가? 매일매일 확신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좋은 소식을 얻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주관적, 객관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속한 것이다. 모든 날이 끝나면 우리를 완전한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라.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추천 -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 생명의말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