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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다

#수정증보_2_2_오후_5_12

 

3번째 책에서 이 문제를 사실 직접적으로는 안 다루었는데요. 그러나 맥락은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어거스틴 이후로 아담의 최초의 죄는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범책과 정녕 죽으리라는 벌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뭉둥그려서 후손에서 이것이 유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문서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구요.

 

근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해석하면서 벌책, 다시 말해서 사망의 형벌은 그리스도가 대속하셨는데 아담의 범책 곧 행위로 지어진 죄들은 속죄되지 않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원의의 주입"은 이런 맥락이죠. , 주입된 의는 바로 사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이 지은 자범죄의 범책과 벌책, 그리고 조상이 물려준 원죄의 범책을 순종의 공로로 갚아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어거스틴 후기에 공교회적으로 정죄되었던 페라기우스의 망령이 부활한 것이죠. 그것을 세미-펠라기즘이라고 합니다. 이 원죄의 문제는 결국 그것을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범책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으로 벌책은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으로 속죄하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중세 후기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의화라는 개념을 썼습니다. 이것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구분한 것이 바로 칭의와 성화라는 해석입니다.

 

이 때 칭의란 바로 그리스도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 공로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 중교개혁의 신학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부인하면 이런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북미의 페더럴 비전은 북미 개혁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들은 행위언약을 부정하고 능동적 순종을 최소화하며 어떤 신학자들은 아예 부정해버립니다. 그 결과 칭의 유보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죠. 이는 NPP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를 유보적으로 만든다는 말은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흐리는 신학적 경향이며 이런 경향은 다시 우리 신앙에 행위가 공로로 개입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22항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모든 거룩한 행위들과 그분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십니다."라고 고백했고 고재수(N. H. Gootjes) 교수는 벨직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하는데 있어서 모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1607년 라 로쉘(La Rochelle) 총회에서는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한 피스카토가 개혁주의 고백서 밖에 떨어진다고 결론내렸고 5년 후 총회는 모든 프랑스 개혁주의 목사들이 다음의 성명서에 서명하도록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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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서, 도덕법과 의식법에 순종하셨으며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순종이 따라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우리의 칭의는 죄 사함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로움의 전가로도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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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라는 종교개혁 공통의 신학적 구조가 이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기본 합의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확인되냐면, 루터파의 신앙고백서인 Augsburg ConfessionFormula of Concord는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이 구분의 핵심적 장치가 무엇이었냐면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전가된다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짓게 하는 핵심적인 해석의 키워드였습니다. 왜 그러냐면, 중세 후기 신학은 이 순종을 개념은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주입된 의에는 이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그 범책과 자범죄에서 비롯되는 벌책과 범책은 주입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를 근거로 순종해서 얻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이죠. 이 지점을 생각하면 종교개혁 신학이 그 출발선상에서부터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할 경우, 결국 이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되냐면 우리의 행위가 대신하게 됩니다. 이는 패더럴 비전이나 새관점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 칭의를 유보하고 거기에 우리의 순종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종말에 행위 심판대에 설 때까지 우리 칭의를 유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신학적 구조물이 바로 능동적 순종의 부정입니다.

 

결국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그들이 가진 신학적 위치가 바로 종교개혁 이전의 세미-펠라기안들의 위치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 인정하든 안하든 행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학적 결과물이며 바로 갈라디아주의의 망령입니다. 그것은 결코 종교개혁의 산물이 아니며 더더욱 장로교회나 칼뱅의 후예의 신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능동적인 순종은 어느 신학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공교회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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