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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참된 믿음의 과정

참된 믿음의 과정

 

믿음의 주입-은혜의수단(소망)-(하늘)-은혜(임재)-믿음으로부터 시작된 덕의 완성으로서 사랑-그 사랑의 계명으로서 율법

 

개혁파의 칭의와 성화의 구조입니다. 왜 중세의 의화라는 개념을 회피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의화란 칭의와 성화가 혼합된 개념으로 주입된 의에 의해서 선행을 하고 그것을 공로로 구원을 받는 구조입니다. 공로가 개입된 여지를 막아야겠는데 그러려면 우리에게 돌려지는 것 혹은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모두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했습니다.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원죄에 있어서 벌책은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으나 범책은 우리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원죄에 있어서 범책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행위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 중세 교회의 보속의 신앙입니다.

 

아담과 대칭점에 있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로마서 5장이 설명하는데 이것을 대속적 순종에만 국한해서 이해한 것이죠. 이 석의가 불러온 참화가 세미-펠라기즘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나누고 칭의를 그리스도 안에만 둡니다. 범책의 죄를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해결하신 것으로 본문을 석의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입니다. 그 의는 이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의의 주입이라는 내재주의가 빚은 펠라기우스주의의 부활과 갈라디아주의의 거부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로서 의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국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법정적 칭의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정적 칭의에 가닿는 방식이 바로 맨 위줄의 테크로 이어진 구조물입니다. 성화는 이런 구조로 일어나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신앙 편람의 믿음(교리) 사랑(십계명) 소망(주기도)의 구조를 따라서 루터가 요리문답을 작성했습니다. 루터는 노예의지론과 함께 요리문답만 남으며 기독교 신앙이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역시 같은 구조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반복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들은 더 어거스틴의 구조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의 신앙은 어거스틴 주의의 부활입니다. 괜히 단순하게 하려고 그런데 구조가 믿음-소망-사랑의 구조가 아니라 믿음-사랑-소망의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개혁파 문서들이 이런 구조입니다. 칼뱅의 요리문답도 기독교 강요도 이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맨위의 테크로 연결된 구조를 보여줍니다.

 

칭의가 하늘에 영멱에 남고 의의 주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성화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습관을 주입하고 이 습관이 십계명(2용도)로 인도되어 죄를 깨닫고 은혜의 수단(소망)으로 나아가 의에 이르고 거기서 은헤가 임재함으로 그 은혜를 힘입어 다시 십계명(사랑, 율법의3용도)를 성화의 준거로 받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페더럴 비전이나 새관점 등은 이런 이해를 결핍하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우리 순종을 약화시킨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시도를 보이며 이에 따라 행위언약을 부정하는 구조를 갖는 것입니다. 의도를 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부인"은 같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것을 허무는 것은 종교개혁을 허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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