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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을_부정하는_신학_뽀개기

#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을_부정하는_신학_뽀개기

#역사신학적관점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중세 신학의 오염을 치료하는 키워드로 썼습니다.

 

5:12-21에 제시된 칭의의 교리는 아담이 그리스도와 같은 언약의 머리라는 가정 위에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벌코프 425-426). 언약의 대표자라는 이야기죠. 그럼 아담은 어떤 점에서 실패해서 사망의 왔을까요? 종교개혁 이전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죄책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죄의 책임(reatus culpae)과 형별적 책임(reatus poenae)입니다(벌코프 464). 전자는 영어로 옮기면 liability to guilt, 또는 guilty of responsibility로 제가 여러 글에서 범책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후자는 영어로 옮길 때는 liability to punishment, 또는 guilty of punishment로서 제 글들에서 벌책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이 우리 원죄의 시원이 되는 아담의 최초의 죄를 재구성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는 행위가 전자에 해당하며 그로 인해 정녕 죽게 되는 형벌이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성경을 복잡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창세기 2:16-17을 석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독교 2000년 역사의 해석의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이 이렇게 해석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대죄에 있어서 죄책(culpae)은 모두 사하지만 형벌(poena)은 영원한 것이 일시적인 것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20세기 후반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 입장이 바뀌기는 하지만 오랜 기간 이런 입장이었던 것이죠. 여기에 해석적 논점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벌코프는 투레틴을 인용해서 가톨릭이 말하는 이 범책이 결코 칭의에 의해서도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벌코프 464). 입장 차이가 느껴지시는지요. 이 지점이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게 된 신학적인 변곡점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가 함의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저의 3번째 책이 나오면 그것을 참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면 한 가지 질문의 생기죠. 왜 투레틴은 이 범책이 칭의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죠. 당연히 이 의문에는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화의 맥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화가 무엇인가 했을 때,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만이 전가된다고 하거나 심지어 칼뱅 시대 오시안더처럼 본질적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이런 이단적인 주장을 따르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발생합니다. 바로 우리가 전해 받은 원죄의 죄책은 바로 이 두 가지 범책과 벌책을 포함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해 중세 후기 신학이 설명하지 않았던 오염의 전달도 더해져 있는데 사실 이 오염의 전달 때문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범책의 제거의 문제입니다. 범책과 오염은 조금 다르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 범책의 개념을 확장에서 오염, 곧 부패를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어찌되었든지 범책은 로마 교회와는 달리 투레틴이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칭의로도 제거되지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옮겨보면, "인간의 죄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 뒤에도 생득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으로 남는다"(벌코프 464). 이 주장은 두 가지 사실을 함의합니다. 1. 범책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에 의해서 선언되는 칭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2. 그것은 성화를 통해서 해결된다. 사실 이 두 가지 함의 때문에 헷갈리는 지점이 발생하는데요. 종교개혁 신학 전체의 구조를 모르면 헷갈리게 됩니다. 1에 대한 답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칭의를 하늘의 법정적 영역에 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해결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2에 대한 답은 성화에서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원죄적인 범책은 바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고 아담이 적어도 구원을 얻으려면 아담의 이 실패를 해결해야 합니다.

 

다섯째 물론 투레틴은 이 범책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도 새로 나올 제 책을 참고해보시길 권합니다. 간단히 업급하자면 "전가""전달"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고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전가받는 것은 행위언약에 의해 직접적으로 벌책을 전가받습니다. 그러므로 원죄적으로는 범책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범죄를 지을 때, 이 자범죄 역시 범책과 벌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투레틴에 따르면 이 범책은 칭의로도 제거되지 않는 우리가 오롯이 져야 할 짐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될 때에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로 간주한다면 아담의 범책과 우리 자신의 범책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 해결책이 칭의에서 보이지 않고 성화를 통해서 보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은혜외에는 이것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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