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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독론

기독론1

기독론1
I. 과목 설명
본 과목은 조직신학 기독론을 다룬다. 
II. 강의 목표
기독론의 기본내용을 숙지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리스도의 사역 교리들의 목회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III. 강의 계획표
1. 기독론의 역사 (벌코프 533-540, 맥클라우드 145-205)
2. 그리스도의 명칭과 성질 (벌코프 541-549, 거스리 15-205, 맥클라우드 91-144, 305-318)
3. 그리스도의 일위성 (벌코프 550-561, 맥클라우드 281-304)
4. 비하의 신분 (벌코프 565-577, 맥클라우드 19-52, 209-246)
5. 승귀의 신분 (벌코프 578-589)
6. 그리스도의 삼중직: 선지자직 (벌코프 593-598, 리탐 89-103)
7. 그리스도의 삼중직: 제사장직 (벌코프 599-605, 리탐 107-126)
8. 속죄의 원인과 필요성 (벌코프 606-612)
9. 속죄의 성질 (벌코프 613-624, 리탐 127-162)
10. 속죄의 제반 이론들 (벌코프 625-633, 리탐 163-180)
11. 속죄의 목적과 범위 (벌코프 634-642, 리탐 231-255)
12.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벌코프 643-649, 리탐 201-216)
13.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직 (벌코프 650-656, 리탐 217-230)
14. 현대 신학과 그리스도의 유일성 (맥클라우드 319-364) 
IV. 성적 평가 방법
1. 출석: 20% 
2. 과제물 30% (독후감 2매, 줄간격 150% 10pt, 2-5pages, 각각 15%)
3. 시험 50% (중간 및 기말 시험 각각 25%)
V. 주교재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서울: 기독학생회, 1988.
*로버트 리탐, 그리스도의 사역, 서울: 기독학생회, 2000.
VI. 참고도서
도날드 거스리, 신약신학(2):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사역, 서울: 성서유니온, 1988.
도날드 맥클라우드, 그리스도의 위격, 서울: 기독학생회, 2001.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서울: 지평서원, 2000.
J. I.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서울: 기독학생회, 1999.
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스텐리 그렌츠,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고양: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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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 십자가로 돌아가라,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_______________,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서울: 규장문화사, 2004.
_______________, 루터의 십자가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2001.
조지 앨던 래드, 나는 부활을 믿는다,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5.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서울: 엠마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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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 1. 기독론의 역사 
(벌코프 533-540, 맥클라우드 145-205)
1. 인간론과 기독론의 관계.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참된 지식, 의, 거룩성을 부여받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로 범함으로써 그 참된 인성을 상실하고 죄인으로 변모해버린 인간을 다루고 있다. 인간론은 인간을 그 본래적 영광의 흔적의 일부가 여전히 있는, 하나님의 지극히 특권적인 피조물로서, 그러나 그 창조시의 권리, 참된 자유, 원의와 거룩성을 상실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론은 부분적으로 그 같은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간격을 메우고 거리감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객관적 사역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제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신인 간의 장벽을 타파하고 인간을 당신과의 복된 교제의 신분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로 나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2. 종교 개혁 이전의 기독론
2.1. 칼케돈 회의까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으로,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무죄하신 성품이 단언되었으며, 그는 예배의 합당한 대상으로 존중을 받았다. 당연히, 동시에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상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이나 그 속에 내포된 난점들이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고, 단지 논쟁 과정 중에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에비온파는 유대교의 영향력 아래 유일신론을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로고스 교리가 신약의 다른 내용들과 상반된다는 이유에서 요한의 글을 거부했던 알로기파(Alogi)도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았고(비록 기적적인 동정녀 탄생은 인정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세례시에 그의 위에 강림하여 초자연적인 권능을 부여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대체로 역동적 단일신론자들(Dynamic Monarchians)의 입장과 일치했다. 이 같은 신성의 부인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는 것은 초기 변증가들의 과업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수하기 위해 신성을 희생시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물질적 현현인 성육신 사건을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이는 영과 물질의 직접적인 접촉을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Modalistic Monarchians)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는데, 일부는 그 신성을 위해서였고, 일부는 신 존재의 단일성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단지 한 하나님의 양태 내지는 현현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위격의 구별을 인정치 않았다.
반영지주의자들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변호 과정에서 그를 성부에게 종속된 존재로 묘사하는 오류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터툴리안도 일종의 종속설을 설파했는데, 본체의 종속을 주저없이 주장했던 오리겐이 특히 그러했다. 이런 오리겐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성부와 동질이고 동일 본체라는 입장을 강력하게 변호했는데, 이 입장이 321년 니케아 회의에게 공식 채택되었다.
성자의 신성 교리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자, 자연히 그리스도 안에 병존하는 양성 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아폴리나리스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 인격의 단일성을 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의 인성을 포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했고, 그 결과 그의 견해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게 명백히 정죄되었다.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내주로만 이해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를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서 시릴을 인용하였다. 451년의 칼케돈 회의는 이들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과 양성을 함께 주장하였다.
2.2. 칼케돈 회의 이후. 유티케스파의 오류는 얼마 동안 단성론자들(Monophysites)과 단의론자들(Monothelites)에 의해 지속되었지만, 결국 교회는 이를 극복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혀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보다 큰 위험성은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그는 이를 비인격적(impersonal)이 아니라 인격 내적(in-personal)인 것 즉 그 인격적 실존의 성자의 인격 내에 거한다고 설명하였다. 동방 교회 기독론의 최고봉이었던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침투 즉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되어 인성이 신화(神化)하는 일이 발생하므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고난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상을 추가하였다.
중세에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에 추가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한 강조, 각종 속죄론, 미사 교리의 발달 등의 다양한 영향으로 인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굳게 고수했다. 매킨토쉬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간적 행위와 수난을 무한적 가치의 수준으로 고양시킨 무한한 공동 행위로 나타났다”고 평한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 중에는 기독론에 있어서 가현설적 그리스도관을 개진한 자들이 있었다. 피터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는 그 인성적 측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로고스의 위격은 성육신에서 합성(composite) 되었으며, 인성과의 연합은 인성이 독립적인 인격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3. 종교 개혁 이후의 기독론
3.1. 19세기까지.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하등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는 모두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된 기독론에 동의하였다. 그들의 중대하고 뿌리 깊은 견해차는 다른 점에 있었다. 루터파의 기독론에는 특별히 언급할만한 특징이 하나 있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관한 루터의 교리는 루터파 특유의 속성간의 교류를 도출해 내었는데, 그 요지는 “그리스도의 양성은 제각기 상대편으로 침투하며(perichoresis), 그의 인성은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전능, 진지, 편재의 속성들이 성육신 당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전달되었다고 주장되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같은 루터파 교리에서 일종의 유티케스주의 내지는 그리스도의 양성의 혼합을 간파하였다. 개혁파 신학에서도 속성 간의 교류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 인식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개혁파 신학은 성육신 후에 양성의 제특성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전지하지만 동시에 단지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고, 편재하지만 또한 일정한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이 고난을 당했다거나 그리스도께서 그 인성으로 아직 세상에 계시며 또한 모든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스위스 일치 신조)
3.2. 19세기. 18세기말이 되면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론의 제2기”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새로운 관점은 인간학적이었고, 결과는 인간 중심적인 기독론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신앙에 파괴적인 것이었다.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양성교리는 신적 인간(divine man) 교리로 대체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새로운 발전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인성이 이상적 완성의 단계에까지 승화된 새로운 피조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존재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지고한 위엄은 그 속에 나타난 특별한 신적 임재, 즉 그의 독특한 신 의식(God-consciousness)으로 설명된다.
리츨의 기독론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위격보다는 사역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 위격의 존엄성을 결정짓는다. 그는 일개 인간이었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과 행한 봉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그에게 정당하게 신적 속성을 돌리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창시자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제는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도하고 오직 사랑을 동기로 하는 생활을 영위하도록 이끄신다.
현대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신인간의 범신론적 동일시가 자리잡았다.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신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속에 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와 정도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현대의 기독론은 한결같이 이같은 신인간의 연속성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와 그의 동조자들은 바로 이 원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계의 일단에서는 양성 교리로 복귀하려는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4. 역사적 예수 논쟁 
도날드 거스리는 “신약 신학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평가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먼저 믿음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와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에 대한 현대의 논쟁에 관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p. 15)라고 말하고 있다.
레싱이 말했던 ‘역사의 넓고 추한 간격’을 넘어서서, 우리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칭호들(하나님의 아들, 인자, 주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다. 이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이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 교회에서 이 이슈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는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칭의의 성격,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율법의 위치 등 많은 문제에 대한 맹렬한 논의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해서 교회와 바깥 세상 사이에 맹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논쟁이 전혀 없었다.
둘째는 예수님이 자신을 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료(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수는 자신을 신으로 보았으며, 신으로 투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정확하게 오늘날 기독론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역사적 회의주의의 문제이다. ‘역사상의 그리스도’는 대체로 전형적이고 수수한 랍비였으며, 교회가 ‘신앙의 그리스도’를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회의주의는 그 뿌리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트만을 어쩔 수 없는 환원주의자로 보았다.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에 대한 불트만의 변명은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학」 및 그의 글 “신약 성경과 신화학”에 등장하고 있다. 불트만은 자기가 요청하고 있는 것이 신화를 제거하자는 말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신화를 제거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방법이었다. 불트만은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트만이 자기의 프로그램을 철저히 시행하고 난 후 신약 성경에서 남아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의 명언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전깃불과 무선 통신을 사용하며 현대 의술의 혜택을 받으면서 동시에 귀신과 기적으로 가득찬 신약성경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사실상 복음서에 있는 모든 전기적 자료들은 다 폐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료는 엄밀한 학문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예수의 삶과 인격에 관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자료는 예수의 삶과 인격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으며, 게다가 단편적이며 흔히는 전설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다른 자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챠드 헤이스는 「신약의 윤리적 비젼」에서 자신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것을 덜 강조하고 대신 각 복음서 기자의 윤리적 관점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위 ‘역사적’인 것에 호소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겉으로는 객관적인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약 연구의 역사는 실제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주관성과 문화적 편견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고전적인 연구,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는 19세기의 ‘예수전’ 연구에 있었던 어려움을 방대한 분량으로 잘 정리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현재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예수님의 인물상에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종교적 인물을 투사하려는 유혹은 거의 저항 불가능하다. 마르틴 켈러(Martin Kähler)가 거의 백년 전에 현명하게 관찰했듯이,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비평가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시대를 위하여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상술하느라 전승을 자르고 붙이는 ‘다섯 번째 복음서 기자’가 되고 만다. 역사적 재구성이란 행위는 알고 보면 필연적으로 해석의 작업이다. 우리의 추정에 근거한 재구성이 주관성의 변동에 면역성을 가진 예수님상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지성의 오만일 뿐이다.
5. 판넨베르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판넨베르그 신학 비판」
“이(this) 사람, 이 특수하고 유일한 상황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사명과 이러한 특수한 운명을 지닌-이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단지 사람이 아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의 전망으로부터...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하나님 그리고 사람』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이러한 말이 표현하는 판넨베르그의 기독론을 “아래로부터의” (from below) 기독론이라 한다. 이 기독론은 사람으로서의 예수의 역사적 실체와 더불어 시작한다. 판넨베르그는 “위로부터의” (from above) 기독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여 인성을 취하신 로고스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예수의 역사와 운명의 빛 안에서 물어진다. 판넨베르그는 성육신 교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 개념을 단지 예수의 부활로부터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수의 십자가도 또한 부활이라는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으심은 예수의 부활의 빛 안에서 그 형벌이 불경한 인간 존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으로 드러난다.” 
“어떻게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하나님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판넨베르그는 현대의 신학적 인간론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론을 통해 판넨베르그는 예수가 “이러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인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과 사람의 일치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완전한 모양(likeness)을 향한 운동”이다. 판넨베르그는 “사람은 그 자신을 넘어섬을 통해,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손에 따르면, “‘자기 초월’의 개념은 어떻게 예수가 ‘이러한 사람으로’ 하나님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넨베르그의 설명의 한 측면을 형성한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의 전진하는 기독론”이라는 논문에서 엘리자베스 존슨은 판넨베르그의 기독론에서의 발전을 언급하고 있다: “판넨베르그가 그때 이후로 작업하고 있는 것은 인간론과 보다 강하게 연결되어 있고 진정한 위로부터의 기독론, 즉 하나님의 자기 실현의 기독론으로 제시되는 보다 폭 넓고 심도 깊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다. 분명히 기독론에서의 이러한 발전은 인간론과 신론에서의 병행하는 발전을 수반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 예수가 없이는 접근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 예수는 그의 하나님 없이는 접근할 수 없다. 올손도 또한 어떻게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하나님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넨베르그의 설명의 두 번째 측면이 인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올손은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신성을 하나님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자기 실현으로 이해하고 있다...인간 예수와 그안에 그를 통해 계신 하나님은 서로 간에 상대방을 조건지운다. 그래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신성에 몸소 속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판넨베르그는 예수가 인간의 소망을 성취하는 종말론적인 인간, 즉 제 2의 아담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아담과 달리 예수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심을 통해 이러한 소망을 성취하셨다: “첫 번째 아담과 구별되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기 위해(창 3:5 참조) 하나의 희생으로 신적인 모양을 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 대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롬 5:19 참조; 또한 히5:8).”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인간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목표는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다. 반면에 예수는 인간 존재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문을 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 존재의 한 전형(archetype)이다. 그러므로 판넨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는 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부로부터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자신을 구별하셨다. 그렇게 예수는 자신의 말을 듣는 청중들에게 하라고 요구했던 것 같이 오는 하나님의 나라 주장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올손은 판넨베르그 기독론의 한가지 약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올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록 판넨베르그 자신은 이 질문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지 않지만 판넨베르그의 그리스도는 비록 역사적으로 유일하지만 다른 인류 “위에”(above) 있는 존재론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모든 인류의 진정한 운명인 하나님과의 일치를 성취한 것에 있다. 이 연구에서 살펴본 것처럼 판넨베르그에게는 인간과 하나님을 구분해주는 어떠한 절대적인 제한이나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판넨베르그의 예수와 다른 인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올손의 해석은 정확해 보인다. 판넨베르그에게 있어 예수는 위로부터의 “새로운 인간”이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인류다. 그는 두 번째 아담이다. 예수의 아들됨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자기 구별에 의해 성취되었다. 판넨베르그는 또한 “아들됨의 신분과 성부에의 순종은 함께 간다. 성부에 대한 순전한 복종이 성자로서의 예수를 특징지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인류는 성자(the Son)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유일성은 흐려지고 만다. 물론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유일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판넨베르그는 “인성이라는 개념에 반대되는 예수의 특수성은 새로운 인간의 형상의 근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그가 종말론적인 새로운 인류라는 점에서만 유일하다. 그러나 예수는 존재론적으로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후기 사상에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보완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는 더 이상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거부하지 않는다. 『조직신학』에서 판넨베르그는 자신을 알렉산드리아의 로고스 기독론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여전히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조직신학』1권의 어느 각주에서 판넨베르그는 성육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성육신은 어떠한 것도 하나님에게 첨가할 수 없었다. 하나님에게 되어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한 것처럼 보였다. 성자의 육체적인 나타남에서마저도 성자는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다.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판넨베르그에게 있어 성육신은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실현”(God's self-actualization in the world)이다. 판넨베르그는 성육신을 신적인 본질에 부차적인 현상이나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원한 아들의 관점에서 예수라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성육신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는 성육신이 성자의 영원한 본질에 외래적인 우연적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성육신은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삼위일체적인 자기 구별과 논리적으로 관계 있다. 성부로부터 성자의 자유로운 자기 구분이 하나님과 구별되는 모든 피조적 실체의 가능성의 기초이듯이 이것은 또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자가 성육신하는 것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은 삼위일체론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성육신은 논리적으로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자기 구분과 관계가 있다. 창조와 성육신의 기초로서의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자기 구별은 신적인 본질에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판넨베르그는 성육신은 외부적인 전유(external appropriation)에 의해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들과는 구별되어 단지 성자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에게도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성육신을 창조론과 관계시키려 한다. 판넨베르그는 “성자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언약과 그리고 요한 복음의 서문에서와 같이 창조에 대한 성실함을 드러내주며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렌츠는 “판넨베르그가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듯이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자기 구별은 아버지로부터 로고스 (즉, 아들)의 자기 구별과 같이 삼위일체 서로 간의 생명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금 창조를 위한 기초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론 2. 그리스도의 명칭과 성질 
(벌코프 541-549, 참조 거스리 15-205)
1. 그리스도의 명칭
1.1. 예수.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hua, Joshua, 수 1:1; 슥 3:1), 또는 예수아(Jeshua, 스 2:2; 포로기 이후의 역사서에서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형태)의 헬라어 형이다. 구세주를 의미하는 이 일상적 이름의 유래는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어근 야샤(yasha', 히필형은 hoshia', 구원하다)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지만, 여호수아가 예수아로 바뀐 경위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단순히 구속을 의미하는 부정사에서 파생된 호세아가 원형이었을 수 있다(참조. 민 13:8, 16; 신 32:44).
1.2. 그리스도. 예수가 메시야의 사적인 명칭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적 명칭에 해당된다. 이는 구약 성경의 마쉬아흐(‘기름붓다’의 의미인 마샤흐에서 바생)와 동격어이며, 따라서 “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한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들이 정규적으로 기름 부음받았다 (출 29:7; 레 4:3; 삿 9:8; 삼상 9:16; 10:1; 삼하 19:10). 왕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로 호칭되었(삼상 24:10). 선지자에게 기름 붓는 경우가 오직 한 군데(왕상 19:16) 기록되어 있지만, 시 105:15과 사 61:1도 필시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 직분자들에게 부은 기름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했고(사 61:1; 슥 4:1-6), 기름 부음은 성별된 인물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의미했다(삼상 10:1, 6, 10; 16:13, 14).
기름 부음은 (1) 직분에 임명함, (2) 기름 부은 바 된 자의 신성한 관계 및 결과적인 신성 불가침성의 확립(삼상24:6; 26:9; 삼하 1:14), (3) 성령을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전달함(삼상 16:13; 참조. 고후 1:21, 22)의 가시적 상징이었다. 구약은 시 2:2; 45:7에서, 신약은 행 4:27; 10:38에서 주님의 기름 부음받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그의 직분에 임명되셨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의 기름부음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눅 1:35)와 그가 특히 수세시 성령을 받으셨을 때(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2; 3:34)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관사가 딸린 보통 명사로서 주(the Lord)께 적용되었지만, 점차 고유 명사화하여 관사없이 사용되었다.
1.3. 인자. 구약 성경에서 이 명칭은 시 8:4; 단 7:13 및 에스겔서에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외경인 에녹서 46장; 64장과 에스드라스 2서 13장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이 명칭의 신약적 용법을 다니엘서의 구절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경우는 아직 명칭은 아니고 단지 묘사어일 뿐이다. 후대에야 묘사어에서 명칭으로의 변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에녹서의 저작 당시에는 이미 확정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예수님의 가장 일상적인 자기 칭호였다. 그는 이 명칭을 40회 이상 자신에게 적용시켰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이를 삼갔다. 복음서에서 유일한 예외는 요 12:34이지만,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오직 스데반과 요한이 이를 사용했다 (행 7:56; 계 1:13; 14:14).
전에는 이 이름을 예수께서 그의 메시야직을 드러내기보다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비밀 칭호로 간주되었다. 이같은 설명은 복음서의 종말론적 요소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 속에서의 명칭의 사용례를 좀 더 세밀히 고찰하면서 폐기되었다. 보스(Vos) 박사는 예수께서 이 명칭을 선호하신 것은 아마도 그것이 메시야직에 대한 일체의 가능한 유대교적 악용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용어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을 인자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메시야직에 그 자신의 천국 중심적(heaven-centered) 정신을 불어넣으셨다.
Cf.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인자)-하나님의 아들, 서울: 엠마오, 1996. 
1.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 성경에서 다양한 경우에 사용되었다. ① 이스라엘 민족(출 4:22; 렘 31:9; 호 11;1), ② 이스라엘의 직분자들, 특히 다윗 가문의 약속된 왕(삼하 7:14; 시 89:27), ③ 천사들(욥 1:6; 2:1; 38:7; 시 29:1; 89:6), ④ 일반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창 6:2; 시 73:15; 잠 14:26). 이 명칭이 예수께 적용될 경우 네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성경에서 항상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간혹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1) 직분적 또는 메시야적 의미. 그리스도의 성질보다는 직위를 묘사하는 경우, 메시야는 하나님의 후사와 대표자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될 수 있었다.
(2) 삼위일체적 의미. 이 명칭은 때때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그 자체로는 선재적 아들됨(sonship)을 가리키며, 이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과 메시야로서의 공식적 소명을 완전히 초월하는 개념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관례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 아들됨을 부인하고 있다.
(3) 출생적 의미.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초자연적 출생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된다. 이같은 적용례는 그의 인성의 기원을 하나님의 직접적․초자연적 부성에서 찾는 누가복음의 유명한 구절(1:35)에 나타나고 있다.
(4) 윤리-종교적 의미. 신약에서는 이같은 의미에서 믿는 자들에게 ‘아들됨’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마 17:24-27의 ‘하나님의 아들’은 윤리-종교적 의미로 예수께 적용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별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이같은 의미에서 이 명칭을 예수께 적용한다. 이 신학은 예수님의 아들됨은 오직 윤리-종교적인 것이며, 그 제자들보다 다소 높은 지위를 점하고 있다 해도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1.5. 주(Kurios). 이 명칭이 예수께 사용된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상당한 견해차가 있다. 모든 반론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적용된 본 명칭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 명칭의 개념 역사에서 불변적인 한 가지 요소는 권위있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이다. 바울 서신은 추가적으로 그 권위와 소유권이 이전에 획득한 권리들에 의거한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요소가 이렇게 일찍 복음서에 나타나는지는 의심스럽다.
이것은 상전에 대한 존경의 칭호였으며 로마 황제나 이방신을 부를 때에도(예컨대, Sarapis 혹은 Isis) 연장해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이방 세계에서 널리 쓰는 일상어였다. 한편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함축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야훼(Yahweh)의 대체어로서 사용되었던 아도나이(Adonai)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어로 자주 쓰여졌다. 이 70인역의 용법에 따르면 본 칭호가 예수님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는, 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연히 신성의 뉘앙스가 섞인 경우가 많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진술의 하나는 베드로의 첫 설교에 담겨 있다. 이 진술의 절정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2:36의 선언이다. 여기서 주되심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확연히 대조되는 주권의 서술이다. 사울이 하늘 음성을 듣고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5)라는 첫 질문을 던진 것은 퍽 중요하다. 환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계시의 상황을 주됨과 연결짓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후에 주로서 이해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환상 때의 체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마라나 다’라는 형식은 아람어인데, 보통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이 어구의 해석을 놓고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우선 마라나 다(marana tha)가 아람어 상 정확한 분리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마란 아다(maran atha)로도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번역은 ‘우리 주께서 오신다’(미래) 혹은 ‘우리 주께서 여기 계신다’(완료)가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2:20(‘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유사한 형식을 고린도전서 16:22을 푸는 열쇠로 보면 전자의 해석이 더 낫다. 즉, 하나의 선포라기보다는 기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고린도 교회와 같은 곳에 헬라어 번역이 없이 아람어 형식을 그대로 사용한 점이다. 이 형식은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말로서 이미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굳어진 상투어였기 때문이다.
1.6. 다윗의 자손. 메시야의 칭호와 밀착된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다. 이 칭호는 신약에서 여러 번 나온다. 또한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의 다윗 혈통을 중시했다는 추가적인 제시들도 있다. 메시야가 다윗 계통의 왕이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내용이 실린 사무엘하 7:16의 진술로 소급될 수 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 약속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적 예고들의 바탕이다. 회복된 왕국에 대한 메시야적 소망이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까닭은 곧 이 구절의 적용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천상적 존재가 아닌 다윗의 한 후손을 고대하였다. 이 후손은 흔히 ‘다윗’이라고 불려졌었다(렘 30:9; 겔 34:23f; 37:24; 호 3:5).
신구약 중간기에는 오실 자가 다윗 계통이라는 것이 집회서 47:11, 22와 마카베오상 2:57에서처럼 자주 나온다. 쿰란 공동체에서처럼 제사장적 메시야의 사상이 발전되었을 때에도 다윗의 근원은 두 개의 메시야를 가정함으로써 계속 보존되었다. 즉 이스라엘의 메시야는 다윗 계통의 인물이고, 아론의 메시야는 제사장의 계보를 따른 것으로 이해되고 기대되었다. 다윗 계통의 메시야가 제사장적 운동이 압도적이었던 때에도 탈락되지 않고 공고한 위치를 점유한 사실은 주목할만한 의의가 있다.
예수님의 근원을 다윗으로 소급시킨 것은 마태와 누가의 족보들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가 더 유명하다. 사실상 다윗은 마태의 3등분 족보에서 중심 인물의 하나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주로 마태복음에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 번의 독립된 경우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중적인 칭호로 불려졌다. 여리고 맹인(마 9:27; 비교. 막 10:47, 눅 18:38), 두로와 시돈 근처의 가나안 여인(마 15:22), 눈 멀고 벙어리된 자의 치유 사건 이후에 의아해 하던 무리들(마 12:23)이 모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본 논의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마가는 이 질문을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라고 표현하였는데, 누가복음의 해당절과 평행된다. 한편 마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진술을 그의 청중들로부터 유도해 내었다고 말한다(막 12:35-37; 마 22:41-46; 눅 20:41-44). 예수님이 던진 난처한 질문은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시편 110편에 기반된 것이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시며, 또한 메시야에 대한 시라고 인정되었으므로 다윗이 메시야를 주라고 칭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말씀이 시사하는 것은 메시야를 주라고 했으므로 그의 위치는 다윗보다 월등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그와 정반대의 경우가 되는 셈이었다. 이 시편 110편은 메시야의 주제에 대한 후기 기독교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특히 히브리서에서).
1.7. 종.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사용한 적도 없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를 그렇게 부른 적도 없다. 그래도 이 개념은 초대 교인들의 확신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기독론의 한 기여 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아이디어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들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본 용어의 신약적 사용에 대한 배경으로서 우리들이 관심을 두게 되는 한 인물이 있다. 그는 종의 노래들(사 42:1-4; 49:1-6; 50:4-9; 52:13-53:12)로 알려진 찬송에서 구약의 한 특이한 인물로 지칭된 자이다. 그런데 이 노래들 속의 종이 개인인지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대표하는 자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우리는 후기의 유대인들이 오실 주의 종이 지니는 중요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 종을 고난의 종으로 보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그러나, 고난의 메시야를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더 강하다. 한편 이 고난은 만일 하나님이 보냈다면 속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탈무드에서 인정되어 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그 종으로 간주했다는 증거 구절들이 있다(참조. 행 3:13, 26; 4:27-30). 그런데 먼저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은 예수님이 과연 자신을 종의 개념으로 생각했으며, 또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것을 인정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 10:45, 마태복음 20:28을 내세워 종의 개념을 크게 지지하는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강하게 논박되었다. 섬김의 아이디어는 자연히 이사야의 종의 모습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이사야의 종은 하나님의 종이고 마가복음의 인자는 사람들을 향한 봉사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막 10:45은 구태여 종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이 있다고 보면 의미가 잘 통한다고 안전하게 결론 지을 수 있다. 이사야 53장에는 대속물(몸값, 속전)에 대한 언급이 물론 없다. 그러나 대속물과 대속적 고난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사야서의 종이 자신을 속죄 제물(사 53:10)로 드리는 것과 인자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것은 별로 차이가 없다. 또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한 화살표로서 이사야 53:12과 막 10:45에는 ‘많은’이라는 말이 동일한 문맥에서 다같이 사용되었다.
이제 성찬식 제정 때의 말씀에서 종의 개념이 암시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막 14:24). 이 본문의 주된 배경은 분명히 출 24장과 렘 31장이다. 그러나 사 53장의 기여도 가능하다. 다가오는 수난이 사 53장에서 예고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의식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이사야의 종에 대한 이와 유사한 배경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들렸던 하늘 음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3:17; 막 1:11; 눅 3:22). 특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 42:1의 반향일 것이다.
1.8. 로고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특징적인 용어 중 하나는 보통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로고스(Logos)라는 헬라어이다. 로고스를 하나의 원리로 표현한 최초의 헬라 저술가는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c.500 BC)이다. 그는 항구적으로 변천하는 세상에 어떤 영구적인 원리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사실상 이것은 신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설명이었다. 이 로고스에는 초월의 개념이 없었다. 로고스는 만물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고스․불․신은 동일한 것이었다. 로고스는 아낙사고라스의 경우에는 중재적인 기능이 더 강하다. 신을 내재적으로 보기보다는 초월적인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물의 원초적 근원을 신령한 불이라고 본 점에서 헤라클리투스의 후계자들이었다. 이 불은 창조적인 것으로서 로고스 스페르마티코스(logos spermatikos), 즉 종자적 이성이라고 불렸다. 헬라클리투스의 철학 체계에서는 로고스가 이같은 배태성(胚胎性) 생산력에 의해 만물에 스며들어 있다. 이 사상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이론적 범신론’ (theoretical pantheism)을 낳게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이었던 필로(Philo)는 예수님이 팔레스타인에서 가르치던 동시대에 헬라 사상의 영향을 크게 끼친 자로서 로고스의 교리를 광범위하게 발전시켰다. 로고스는 그의 사상 체계에 중요한 열쇠이다. 필로의 로고스 교리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 요점을 들 수 있다. (1) 로고스는 전혀 뚜렷한 인격성이 없다. (2) 필로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첫아들(protogonos huios)로 간주했다. (3) 로고스 아이디어는 필로의 교리에서는 요한의 경우와는 달리 빛과 생명에 연결되지 않았다. (4) 로고스가 성육될 수 있다는 제시가 없다. 헬라 사상은 물질을 악하다고 보았으므로 이것은 이질적인 개념이었다. (5) 로고스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의 간격을 잇는 확실한 중개 기능이 있었다.
이 로고스의 출처에 대하여 헬라 자료에서 히브리 자료들로 방향 전환을 해 온 경향이 역력하다. 이것은 특별히 요한복음 서언에 적용된다. 히브리 사상들이 요한의 로고스 용법에 조명이 된다고 주장되는 출처들은 네 갈래이다. 가장 당연한 고찰 대상은 구약 배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력을 부여한 구절들은 특히 창세기 1장과 시편 33:6, 9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명시되었다. 시편 147:15-18; 148:8과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피조물들을 보살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고스 아이디어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구약 개념은 지혜이다. 우리들의 주제에 가장 중요한 구약 본문은 잠언 8장이다. 여기서 지혜는 세상 창조 때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었다(8:27 이하). 그렇지만 잠언 8:22은 지혜 자체도 피조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아이디어들이 다른 지혜 문학서에서도 나온다. 묵시적인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는 로고스(‘당신의 전능한 말씀’)는 하늘에서 전사로 내려왔다(18:15-16). 이것은 요한계시록 19:13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의 서언에 나오는 로고스의 도래와 밀착시킬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로고스가 지혜 자체와 경우처럼 의인화되긴 하였지만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세 번째 유대 출처로서 호소되어 온 것은 토라(Torah)에 대한 랍비사상이다. 토라는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의 중개자로 간주되었다. 이 사상과 요한의 서문에 나오는 로고스 사이에는 여러 개의 평행점이 있다. 네 번째 유대적 증거는 쿰란 문서이다.이것은 본 논의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는 않지만, 헬레니즘의 주장들로 인한 영향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 준다. 그 중에서 우리들의 현안 목적과 중요하게 관련되는 것은 쿰란의 근저에 흐르는 이원론이다. 요한의 로고스 교리의 배경은 불트만이 그처럼 강조하는 영지주의적 이원론보다는 쿰란의 이원론에 더 가깝다. 사실 쿰란의 이원론은 요한의 경우처럼 일신교적이고, 윤리적이며, 종말론적이다.
우리는 로고스의 역할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특성들을 다음 세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첫째, 요한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들의 창조 이전 상태로 올라간다. 곧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이 서두는 창 1:1의 형식과 꼭 같기 때문에 이 말씀(the Word)의 선재를 확연히 지적한다. 둘째로 요한은 로고스와 이 세상의 관계를 다소 지적한다. 창조 때에 로고스가 맡은 역할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로고스는 창조물과 전연 판이한 존재이다. 세 번째 특징은 로고스와 인간과의 관계이다. 이 측면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로고스의 성육신 구절에서 집약되었다(요 1:14). 요한에게 있어서 ‘육신’은 로고스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했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은 메시야를 처음에는 로고스와 연결시키고 끝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결탁시킨다(요 20:31).
참된 인성과 신성을 결합시킨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은 인성은 무시한 채 신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현론적 경향을 교정하기 위한 배려에서 십중팔구 당시의 용어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가현론적 강조는 초대교회의 기독론 정착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로고스 교리는 그 자체로서는 가현론의 경향을 지지한다고 간주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은 예수님의 인간적 특징을 공관복음서보다 더 확연하게 강조해 준다. 환언하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가현론을 정면에서 반대하는 진술이다. 요한일서 1:1이하의 진술은 로고스를 목격자들의 증언 하에 역사 속에 굳게 세웠다는 사실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로고스는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이다.
1.9. 마지막 아담. 아담 주제는 바울신학의 중심 과제가 아니라고 볼지도 모르지만 그의 기독론에서 조심스럽게 증거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충분히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울 서신들에 나오는 아담 본문들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바울이 헬레니즘 사상과 유대 사상 중에서 어떤 쪽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판정하는 범위에 따라 달라질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는 이 양편 사이를 구분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그러나 바울의 유대적인 양육 배경에 비추어 그가 헬레니즘보다는 유대교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헬레니즘편에서는 주로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e school)의 해석가들에 의해서 바울이 영지주의의 원초 인간(Urmensch)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창된다. 이 영광스런 원초 인간은 자신 속에 모든 영혼들을 품고 있는, 일종의 이상적인 아담으로 가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아이디어가 유대교의 아담 교훈의 배후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이들에 의하면 유대교에서는 아담에게 구원의 기능들을 지워 주기 때문에 아담이 장차 오실 구원의 메시야를 예견하게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아담을 메시야와 연결시킬 수 있는 증거는 희박하다. 메시야는 한 구절에서 인간이 상실한 영광을 회복시킬 둘째 아담으로 묘사하였다.
아담 신학의 해석에 있어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로 한다. ① 아담의 죄는 토라에 대한 불순종이다. ② 아담은 죄의 결과로 자기의 영광, 불멸, 신장, 땅의 소산, 광채를 잃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아담의 원상태가 현재의 인간 상태와 비교해서 신체적으로 영광스러웠다는 견해이다. ③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인류 전체에 죽음을 가져 왔다. ④ 땅은 아담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았다. ⑤ 죄는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에 균열을 초래했다. 아담이 랍비 신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중요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담에 대한 유대교의 가르침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아담의 타락 이후보다 타락 이전의 상태에 더 골몰해 있는 것이다. 유대교의 소망은 인간이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된다는 신앙에 집착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의 접근법은 이와는 전혀 판이하였다. 그는 아담을 단지 타락한 인간의 모형으로만 간주하고 그의 이전 영광에 대해서는 전혀 추측하지 않았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확신에 동의했지만, 인간 회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독특한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5:12이하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 주제를 소개하였다. 이외에도 바울의 아담 기독론(Adam Christology)으로 알려진 것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몇 구절이 있다. (1) 로마서 5:12 이하. 이 항목의 목적은 아담의 주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 주제는 인간의 구원을 해설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제시하려는 주된 목적에 부수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여기서 아담의 죄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인정되었고, 죄와 사망의 보편성도 함께 수락되었다.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고, 그를 통해서 만인에게 죄가 옮겨진 후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따르게 되었다는 순차(順次)는 유대교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아담과 비교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비와 대조의 영역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원죄의 교리를 어떻게 보든지 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가 관련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담과 인류 사이에 연대성이 있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도 유사한 결속성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상실한 것을 그리스도가 회복시켰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2) 고린도전서 15장. 바울은 본 장에서 주로 부활을 다루면서 마지막 아담 주제를 부수적으로 언급한다. 고린도전서 15:22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이렇게 대조시켰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같은 정반대는 그리스도가 아담에 비해서 우월하다는 것을 완연히 드러낸다. 아담은 사망의 인간이고 그리스도는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5:45에서는 좀 다르게 표현되었는데,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구체적으로 불렀다. 여기서의 구분점은 첫 사람인 아담은 ‘산 영(혼)’(psychikon)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pneumatikon)이라는 차이다.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우월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아담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참된 인간성을 위한 중재자’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를 조명시켜 주는 또 하나의 대조는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차이이다(고전 15:47). 그리스도에 대한 이같은 기술은 마지막 아담을 즉시 참다운 위치에 설정시켜 준다. 그는 아담과는 종류가 다른 인성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참된 인간이다. 바울이 마지막 아담을, 첫 아담이 타락한 인류의 출발자였듯이, 하나의 새 인종의 시발자로 생각했다는 주장은 틀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타락된 인간과 구속된 인간 사이의 필수적인 연관성을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마지막 아담을 원래부터 마땅히 되었어야 할 인간상과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될 수 있는 참된 인간의 완전한 대표자로서 생각해야 한다.
아담 기독론이 빌립보서 2:6-11의 배후에 있다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몇몇 학자들이 아담에 관한 창세기 본문과 이 빌립보서 구절 사이에 뚜렷한 평행선을 그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견지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헤링(J. Hering)이다. 아담이 붙잡은 것을 예수님은 거절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선택한 것은 아담이 얻고 싶어했던 것과 정반대가 된다. 이러한 주장을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기독론의 중요한 모티프로 채택한다. 예수님의 자기 구별(self-distinction 또는 self-differentiation).
1.10. 하나님.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괄목할 만하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서 볼 때 이 사실은 더 한층 놀라운 일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명확한 증언으로 시작된다. 요한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한 제자에 의해 같은 진리가 고백되는 것으로 끝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고 한 말은 거의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보고 한 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 바울 서신의 증거는 두 갈래로서 로마서 9:5과 디도서 2:13이다. 살후 1:12과 골 2:2도 비슷한 문맥에서 거론되지만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두 찬송 구절을 추가시킬 수 있다(5:13; 7:10). 여기서 예배는 모두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상호간의 아무런 구별이 없이 올려졌다. 더구나 같은 책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된 알파-오메가의 서술이 그리스도에게도 쓰여졌다(22:13). 
우리는 신약에서 한두 기도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 올려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더 지적할 수 있다(행 7:59-60; 고전 16:22, 혹 고후 12:8). 요한복음 14: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권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은 축도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밀착된 경우도 있다(살전 3:11, 12; 살후 3:5, 16).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직접 예수님에게 기술된 적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못하게 여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언급할 때에는 독자들이 불가피한 결론을 내리도록 간접적이고 함축적으로 시사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사람의 죄들을 용서했을 때와(마 9:2-6=막 2:5-11=눅 5:20-24)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했을 때(마 12:8=막 2:28=눅 6:5) 그는 신성모독자로서가 아니면 하나님으로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잔잔하게 했을 때(마 8:26=막 4:39=눅 8:24) 제자들은 경외심으로 가득 찼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광풍을 평정히’ 하는 분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시 107:29; 비교. 시 65:7; 89:9).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칭호를 서슴지 않고 사용한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1.11. ‘나는... 이다’(I AM) 말씀들. 기독론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 있는 한 그룹의 말씀들이 요한복음에 특이하게 실려 있다. 이 진술들의 주격은 일인칭인데, 예수님의 어떤 속성들을 알려 준다. 그래서 이 본문들이 진정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자의식에 대한 매우 귀중한 계시가 된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와 비교하여서 인칭대명사가 훨씬 많이 나온다. ‘나’의 사용은 예수님의 진술에 특별한 권위를 부가한다. 이 ‘나’의 빈번한 사용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에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독자들로 하여금 ‘나는 ...이다’(I am; ego eimi)라는 보다 구체적인 말씀으로 소개되는 길을 터놓는다. ‘나는 ...이다’ 말씀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서술할 때 사용된 어구(출 3:14-‘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니라)이기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나는 ...이다’ 형식을 자신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7개의 구절들이 있다. 이것들은 떡(6:35); 빛(8:12); 문(10:7); 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포도나무(15:1)로서 광범위한 은유로 표현되었다. 각 경우마다 ‘나는 ...이다’의 어구가 예수님의 기능들을 예시한다. 즉, 보전하고, 조명하며, 영접하고, 돌보며, 생명을 주고, 안내하며, 생산하게 한다. 예수님은 ‘나는 ...이다’ 말씀들을 통해서 서문에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실렸던 것들을 실체화시키고 자신의 인격에다 적용시켰다. 한편 이같은 진술들의 중요성에는 충분한 비중을 두어야 하지만 그것들이 예수님을 구약의 야훼(Yahweh) 이름과 일치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진술들은 만일 요한복음 8:58의 괄목할만한 특수용법이 없었다면 자기 신분에 대한 강조형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여기서 사용된 ‘I am'의 절대 용법은 요한복음 8:24과 13:19의 절대 어구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용된 ‘에고 에이미’는 출애굽기 3장에서 계시된 야훼(Yahweh)의 이름과 이사야 46:4의 절대 용법인 ‘I am’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말씀들이 시사하는 내용을 신적 속성에 대한 주장이었다고 보아야만 이 진술 직후에 따른 불같은 격분과 반발을 해명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성질
2.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를 고려할 때 이를 입증하는 성경적 증거를 철저히 아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그 증거는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점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 없다.
(1) 구약 성경. 혹자는 구약에 신적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이는 다음의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시 2:6-12(히 1:5); 45:6, 7(히 1:8, 9); 110:1(히 1:13); 사 9:6; 렘 23:6; 단 7:13; 미 5:2; 슥 13:7; 말 3:1.
(2) 요한과 바울 문서에서. 요한과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전혀 불가능함이 판명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가장 승화된 견해는 요한복음에서 발견된다(요 1:1-3, 14, 18; 2:24, 25; 3:16-18, 35, 36; 4:14, 15; 5:18, 20, 21, 22, 25-27; 11:41-44; 20:28; 요일 1:3; 2:23; 4:14, 15; 5:5, 10-13, 20). 비슷한 견해를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롬 1:17; 9:5; 고전 1:1-3; 2:8; 고후 5:10; 갈 2:20; 4:4; 빌 2:6; 골 2:9; 딤전 3:16; 히 1:1-3, 5, 8; 4:14; 5:8 등).
(3) 공관복음서. 혹자는 오직 공관 복음만이 참된 그리스도 상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제4복음서의 이상화된 그리스도 상과 대립되는 참된 인간적․역사적 예수상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참된 신적 존재임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특별히 다음의 구절들에 유의하라. 마 5:17; 9:6; 11:1-6, 27; 14:33; 16:16, 17; 28:18 25:31 이하; 막 8:38 및 유사한 병행 구절들.
(4) 예수의 자의식. 최근 들어 예수의 자의식으로 돌아가서, 그가 자신의 메시야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신학사조가 일어났다. 당연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으면 그의 의식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데, 그 말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다. 복음서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참 아들되심을 의식하고 계셨음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마 11:27(눅 10:22); 21:37(막 12:6; 눅 20:13); 22:41-46(막 13:35-37; 눅 20: 41-44); 24:36(막 13:32); 28:19.
2.2.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재성(영지주의)과 자연적 완전성(가현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을 부인하던 시대가 한때 존재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러한 현대의 추세 중 일부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사람들은 때로 신적 그리스도를 경외하느라고 인간적 그리스도를 망각한다. 예수님의 인간적 성장과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완전성을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의 참된 인성을 가리울 정도로 신성의 광채를 부각시키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칭하셨고, 다른 사람들도 그같이 부르고 있다(요 8:40; 행 2:22; 롬 5:15; 고전 15:21).
2.3. 그리스도의 무죄한 인성에 관한 성경의 증거. 우리는 그리스도께 자연적 완전성뿐 아니라 도덕적 완전성 즉 무죄성도 돌린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범죄를 피하실 수 있었고(potuit non peccare), 실제로 피하셨을 뿐 아니라, 인성과 신성의 근본적 결속으로 인해 범죄하실 수 없었음(non potuit peccare)을 의미한다. 눅 1:35; 요 8:46; 14:30; 고후 5:21; 히 4:15; 9:14; 벧전 2:22; 요일 3:5 등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명확히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사법적으로 죄로 삼은 바 되셨지만, 윤리적으로는 유전적 부패와 자범죄로부터 자유로우셨다. 그는 도덕적 과오를 범하신 적이 없다.
2.4. 그리스도의 양성의 필요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을 상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양성의 필요성은 성경의 속죄론에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 그의 인성의 필요성. 인간이 범죄 하였으므로 형벌도 인간이 당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더욱이 형벌의 감내에는 육신과 영혼의 고통이 포함되는데,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요 12:27; 행 3:18; 히 2:14; 9:22).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시되 그 모든 본질적 속성뿐 아니라 타락 후 인성이 처했던 일체의 연약성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겪은 타락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히 2:17, 18). 동시에 그는 무죄한 인간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인이고 자기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속죄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히 7:26).
(2) 그의 신성의 필요성.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중보자가 또한 참 하나님이어야 함은 절대 필수적이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① 그가 무한히 값진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②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적으로 감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③ 이미 성취된 사역의 성과를,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실 수 있기 위해서였다. 파산된 삶에 짓눌린 인간은 죄의 삯을 지불할 힘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능력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구속의 은혜가 아니라면 영원히 진노 아래 있어야 하겠지만, 이로부터 탈출구를 스스로 개척하기까지 인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이다 (시 49:7-10, 130:3).
성육신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취한 그 어떠한 독립적인 인격적 실체 또는 인간적인 hypostasis도 없다. 인간 예수는 성육신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모든 형태의 양자설을 배격한다.
enhypostasis-성육신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격적인 연합에 있어 실재적이고 완전한 인간 예수가 있다. 어떤 독립적인 인간 hypostasis는 없지만 “성자의 신적인 위격과 완벽하게 하나가 됨 가운데는 완벽한 인간의 인격”이 있다. 사실 성육신에는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인간 예수가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단성론을 배격한다.
기독론 3. 그리스도의 일위성 
(벌코프 550-561, 맥클라우드 281-304)
주후 451년 칼케돈 회의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회의 신앙을 공식화하면서, 그에 관해 “양성을 인정하되 두 본성을 혼동되거나 변화하거나 구분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며(inconfusedly, unchangeably, indivisibly, inseparably), 양성의 구별은 연합으로 인해 결코 말소되지 않고 오히려 각각의 성의 특징이 보존되고, 두 위격으로 분할되거나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위격과 실체로 합치된다”라고 선언했다. 이 공식적 진술은 대체로 소극적이며, 많은 이단 사설들에 대항하여 단지 진리의 보수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앙을 명확히 진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 포함된 신비 곧 자연적 설명이 불가능한 비밀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다. 역사의 중심되는 위대한 기적은, 바르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 인격 안에 신인(God and man)이라는 최고 역설의 형태로 그 모든 위엄 가운데 나타났다.
1.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회의 입장
1.1. 성질(Nature)과 위격(Person)의 용어 정의. ‘성질’은 어떤 사물로 그같이 되게끔 하는 본질적 속성들의 총합을 의미한다. 성질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실체와, 그에 딸린 일체의 근본적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위격(인격)’은 이성을 부여받은 완전한 실체이며, 따라서 그 자신의 행위를 책임 질 수 있는 주체이다. 인격성(personality)은 성질의 근본적․필수적 부분이 아니라, 요컨대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위격은 성질에 무엇을 부가한 것 즉 독립적 실존, 개체이다. 그런데 로고스가 인격화되지 않았던, 즉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1.2. 교회적 견해의 명제적 진술
(1) 중보자 속에는 오직 한 인격, 곧 불변하시는 로고스가 존재한다.
(2)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하나의 인간 인격(human person)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3)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인격적(비위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4) 그리스도의 인성을 미완성 내지는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5) 이 위격적 실존(subsistence)은 의식 및 자유 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6) 영원 전부터 신성을 소유하신 한 신적 인격께서 인성을 취하셨으며, 지금은 양성을 모두 소유하고 계신다. 이 사실은, 신적 인격이 인성을 취하신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양성이 일종의 신인성인 제3의 무엇(tertium quid)으로 융해 내지 혼합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양성의 완전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자들에 맞서 주장되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일위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 일위 이성의 교리는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2.1. 성경에는 이위성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만일 예수님 안에 이중적 인격이 존재했다면, 당연히 성경에서 그에 관한 모종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단 한 가지 증거도 없다. 예수님은 창 1:26; 3:22; 11:7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듯 자기를 칭하실 때 복수형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2.2. 성경에서 이성은 일위에 연합되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두 성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그 구절들에서 오직 한 인격만을 뜻하고 있음이 극히 분명하다(롬 1:3, 4; 갈 4:4, 5: 빌 2:6-11).
2.3. 한 위격이 양성의 어느 한 쪽에 관련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 성의 속성들이 위격에 귀속되는 것으로 서술하면서도 그 위격을 다른 성에서 유래된 칭호로 부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적 속성과 행동이 위격에 귀속된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 위격을 신적 칭호로 부르고 있다(행 20:28; 고전 2:8; 골 1:13, 14). 다른 한편으로는 신적 속성과 행동이 위격에 귀속된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 위격을 인간적 칭호로 부르고 있다(요 3:13; 6:62; 롬 9:5).
3. 일위에 이성이 연합된 결과
3.1. 신성에는 근본적 변화가 없다. 창조와 성육신 교리는 항상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문제를 야기했다. 이 점은 불변성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지적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이든지간에, 신성은 성육신에서 하등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았음이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신성은 손상받지 않음, 곧 고난과 죽음에 처할 수 없고 무지에서 자유롭고 연약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성이 육신을 취했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이 성육신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성육신의 결과로 신적 구세주가 무지․연약․시험․고난․죽음을 당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신성 안에서가 아니라 인성을 갖추심으로써 파생적으로 그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3.2. 성육신의 결과인 삼중 교류
(1)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이 말은 신인 양성의 제속성들이 이제는 위격의 속성이 되었고, 따라서 위격에 귀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위격은 전능․전지․편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비애와 제한된 지식과 능력의 소유자요, 인간적 결핍과 비참에 얽매여 있다고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 신성의 고유한 무언가가 인성으로 전달되었다거나 또는 그 역의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또한 양성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서 신성이 인성화되고 인성이 신성화되는(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신은 인간의 연약에 참여하실 수 없고, 인간은 신의 본질적 속성의 어느 부분에도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2) 업적 또는 사역의 교류(communicatio apotelesmatum or operationum).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특히 그 사역의 최종 결과(apotelesma)가 신인적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다.
(3) 은사 또는 은혜의 교류(communicatio charismatum or gratiarum). 이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처음 존재할 때부터 모든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각종 은사로 치장하였음을 의미한다.
3.3. 신인은 기도의 대상이다. 연합의 또 다른 결과는 양성으로 현존하시는 중보자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예배의 영예는 인성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단지 본질상 경배받을 만한 신적 로고스와의 연합 때문에 인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4. 그리스도의 일위성의 신비. 이성의 일위 속의 연합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며, 바로 그 때문에 종종 부정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인간 내부에 영육이 결합되어 있음과 비교된다. 인간의 경우, 결합의 원리인 인격은 육체가 아닌 영혼 속에 자리잡고 있다. 중보자의 경우에는 인성이 아닌 신성 속에 자리잡고 있다. 영과 육의 상호 영향력 행사가 하나의 신비이듯이 그리스도 안의 양성의 관계와 그 상호 영향력의 구조도 그러하다.
5. 루터파의 속성간의 교류론
5.1. 루터파의 입장. 루터파는 실제적 이전(transference)에 기초하여 한 성의 속성이 다른 성에게 귀속된다고 가르치며, 오직 그 같은 이전에 의해서만 위격의 참된 단일성을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와 몇몇 초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종종 신성에서 인성으로, 인성에서 신성으로의 쌍방적 교류를 말하였다. 그러나 본 교리의 후속적 발전 과정에서 인성에서 신성으로의 전달은 이내 무시되었고, 오직 신성에서 인성으로의 방향만이 강조되었다. 곧 더욱 큰 제한이 뒤따랐다.
루터파 정통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적 속성(operative attributes, 전능, 편재, 전지)과 정적 속성(quiescent attributes, 무한, 영원 등)을 구별하면서, 오로지 전자만이 인성으로 이전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모두 성육신 당시에 전달이 일어났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이 전지․편재한 인간이 아닌 복음서의 그리스도상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에 관해 자연히 의문이 제기되었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겸비의 기간 중에도 이들 속성을 반드시 행사하셨지만 은밀하게 하셨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같은 사용은 신적 위격의 의지에 달려 있었는데, 그는 겸비의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그 속성들을 정지시켰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속성간의 교류론에 집착한 이유는 일부는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또한 일부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제시되고 있다.
5.2. 루터파의 교리에 대한 반론
(1) 성경적 근거가 없다. 만일 이것이 요3:13과 같은 진술에서 유추된 것이라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연히 고전 2:8로부터 고난받는 능력이 신성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터파는 그 같은 결론 직전에서 후퇴하였다.
(2)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융합을 함축하고 있다.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될 경우, 인성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3) 현재 루터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교리 형태로는, 본 교리가 모순에 떨어지게 된다. 만일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된다면, 인적 속성도 신성에 전달되어야 한다.
(4)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겸비 기간 동안의 성육신한 그리스도상과 일치되지 않는다. 복음서가 그리는 상은 편재․전지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5) 사실상 성육신 교리를 파괴한다. 루터파는 성육신(incarnatio)과 자기 비움(exinanitio)을 구별한다. 로고스는 오직 전자의 주체이다. 
(6) 또한 사실상 겸비의 신분과 승귀의 신분의 구별을 철폐시키고 있다. 루터파는 자기 비움의 교리를 그가 사실상 자신을 비우셨거나 또는 신적 속성들을 중지시키셨다는 의미로 도입했다(비움의 주체는 로고스가 아니라 신인이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속성들을 부단히 그러나 은밀히 사용하신 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사용하신 것으로 주장했다.
6. 여러 형태의 겸허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겸허설 중에서 새로운 형태의 기독론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특히 루터파의 호응을 얻었으며, 또한 몇몇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환영받았다. 그것은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의 일단을 보여 준다. 이 새로운 견해의 옹호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사실성과 진정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의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의 위대함을 강조하려 하였다.
6.1. 교리의 내용. 신학에서 케노시스(kenosis)라는 용어는 이중적 의미로 쓰인다. 원래 그것은 루터파 신학자들이 로고스가 아닌 신인의 자기 제한(self-limitation: 자신을 낮추기 위해 그의 신적 속성의 실제적 활용을 제한하는 것)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겸허설자들의 교설에서 그것은, 로고스가 성육신 당시 그의 이행적 속성 또는 모든 속성들을 박탈당하시고 단순한 잠재성의 상태로 위축되었다가 인성과 연합하면서 신인적 인격으로 다시 발전하였음을 의미했다.
(1) 토마시우스, 델리취, 크로스비(Crosby)의 이론
(2) 게스(Gess)와 비처(H. W. Beecher)의 이론
(3) 에브라르드의 이론
(4) 마르텐센과 고어(Gore)의 이론
6.2. 본 교리에 관해 추정되는 성경적 근거. 겸허설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성구로서 특히 빌 2:6-8을 들고 있으며, 또한 고후 8:9; 요 17:5도 인용하고 있다. ‘케노시스’라는 용어는 빌 2:7에 나오는 주동사 에케노센에서 유래되었다. 이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네 번(롬 4:14; 고전 1:17; 9:15; 고후 9:3) 나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포기하신 것을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데우)로 보고 본체(모르페)를 엄밀하게 신격의 본질적 또는 특수적 속성으로 간주한다면, 겸허설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모르페는 그같이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동사 에케노센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데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동등됨(에이나이 이사 데오이)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등됨이란 어떤 존재 방식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의 신분(state)으로서, 그리스도는 이를 다른 신분으로 바꾸신 것이다.
6.3. 겸허설에 대한 반론
(1) 본 이론은 하나님과 인간이 절대적으로 차이 나지 않고 한쪽이 다른 쪽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범신론적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헤겔의 생성(becoming)의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었고, 절대적 구분선이 말소되었다.
(2) 그것은 말 3:6; 약 1:17에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고 또한 신 개념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불변성 교리에 정면 배치된다. 절대성과 가변성은 상호 배타적이며, 성경의 하나님은 분명히 가변적인 신이 아니다.
(3) 그것은 삼위일체의 사실상의 파괴를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가 믿는 참 하나님을 제거해 버린다. 자기의 신적 속성들을 비우신, 인간화된 성자는 더 이상 삼위일체적 생활 안에 거하는 신적 존재일 수 없다.
(4) 그것은 신적 존재 방식, 신적 속성과 신적 본질의 관계를 너무 느슨한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전자에 관해 논할 때 마치 그것이 후자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듯이 말한다. 이것은 가톨릭의 화체설이 정죄 받은 바로 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5) 그것은 본래 해결하고자 의도했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본 이론은 위격의 단일성과 주님의 인성의 실재성을 보전하려 했다. 그러나 위격의 단일성이 인간 영혼과 공존하는 인적 로고스를 가정함으로써 확보되지 않음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을 무력화된 로고스로 대치시킴으로써 인성의 실재성이 보전되는 것도 아니다. 케노시스론자들이 제시한 그리스도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이다. 그의 인성은 “단지 위축된 신성”인 것이다(워필드).
7. 점진적 성육신론
도르너는 케노시스론을 논박한 최초, 최대의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케노시스론의 오류를 피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별도의 이론을 제안하기 위한 과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 해답으로서 점진적 성육신론을 제안하였다. 성육신은 예수님의 잉태 순간에 완성된 행위가 아니라, 로고스가 궁극적으로 완전한 연합이 실현되는 부활의 시기까지 자신을 독특하고 대표적인 (사실상 새로운 피조물)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가는 점진적 합일 과정이었다. 연합의 결과는 단일 의식과 단일 의지를 갖춘 신인이었다. 이 이론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데, 성경은 항상 성육신을 과정이 아닌 순간적 사실로 묘사하고 있다. 본 이론은 논리적으로 네스토리우스주의나 중보자 안의 두 위격론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인격의 참된 좌소를 인간 예수 안에서 찾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참된 선재성과 정면 배치된다.
8. 참된 ‘케노시스’
도널드 맥클라우드는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다섯 가지 비판들을 제기한 다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케노시스 사상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어떠한 기독론도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으며’(빌 2:7), 부요하신 분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성육신의 신비를 가장 깊은 의미에서 지적해주는 개념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케노시스’ 개념이다”(도널드 멕키넌). 하지만 ‘각별히 빌립보서 2:6이하에서 정의하는 ’케노시스‘ 사상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첫째, 그 사상에는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이 포함된다. 바울이 사용한 말로 하지만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로 계셨다. 라이트푸트는 ‘모르페’와 ‘스케마’(외모, 외양, 형태)를 뚜렷하게 대조시키고 있는데, ‘스케마’는 우연적이며 외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반하여, ‘모르페’는 본질적이며 실질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케노시스’ 사상에 포함된 두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리들을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빌립보에 세워진 교회는 지식 수준이 낮아서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않아서 위협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하르파그모스’(harpagmos, ‘취할 것’)로 여기지 않았다. 자기의 권리들을 포기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 모습이다. ‘케노시스’의 세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다는 사실이다. ‘케노시스’의 최저점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헛됨과 허망함의 절정이다. 거기에서 그 생명은 죽고, 그 영원한 말씀이 침묵에 떨어지게 된다. 그가 취하신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겸비하게 또 가난하게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성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는 어거스틴의 언급은 정당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위대한 태도의 배후에는 훨씬 더 심오한 원칙들이 있음을 맥크라우드는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크립시스’(은닉 혹은 비밀)의 원칙이 있다. ‘케노시스’에는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감추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진실로 그리스도는 자신에게서 신성을 벗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신성을 한동안 감춘 채 유지하여 육체의 연약함 아래서 비추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광을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그 영광을 감추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영광을 떼어 버리셨다”라고 썼다. 둘째, 우리는 또한 ‘케노시스’가 기꺼이 더 낮아지려는 마음을 포함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배후에는 두 가지 위대한 결심이 있다. 첫째로는 종의 형체와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겠다는 영원한 아들의 시간 이전의 결정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그가 일단 성육하신 다음에 훨씬 더 자신을 낮추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한 점이 아니라 긴 선이었다. 
마지막으로 ‘케노시스’는 실질적인 포기를 포함한다. 이점에서는 바울의 말이 “예수의 신성에 단순히 인성을 부가한 것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고어의 말이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케노시스 이론에 반대해서, ‘케노시스’를 신성에 대한 포기로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이 완벽하게 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기독론 4. 비하의 신분 
(벌코프 565-577, 맥클라우드 19-52, 209-246)
1. 서론: 그리스도의 신분 교리 개요
1.1. 신분과 상태의 의미 구분. “신분”(state)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상태”(condition)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킬 경우에는 상태보다는 관계를 의미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분은 어떤 사람의 생활의 지위이며, 특히 법적인 관계를 가리키지만, 상태는 그의 존재 양식 특히 생활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양식을 의미한다.
사실상 비하와 승귀의 상이한 단계들을 논할 때, 일반적으로 신분보다 상태를 더욱 부각시키는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신분은 둘 중에 더욱 근본적이며, 또한 그같이 간주되어야 한다. 비하 신분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는 생활 규범으로서만 아니라 행위 언약의 조건인 율법 및 심지어 그 저주 아래 처해 계셨다. 그러나 승귀 신분의 기간 동안에, 그는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신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신분 교리 변천사. 그리스도의 신분 교리는 이미 개혁자들의 글과 심지어 초기 교부들의 저작 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17세기에 시작되었다. 신분의 참된 주체(subject)에 대해 루터파는 이를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보았지만, 개혁파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보았다. 중보자의 신분 개념은 슐라어마허의 영향으로 점차 신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범신론적 성향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선을 사실상 철폐해 버렸다. 사실상 객관적 의의 개념은 신학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이같은 상황하에서 중보자의 신분과 같은 법적 지위 개념을 주장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더나아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척하기까지 인성만을 강조하고 그의 선재와 부활을 부정하는데 이르자,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무의미해졌다.
1.3. 중보자의 신분의 수효.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적 신분에서 그의 비하와 승귀의 미리 나타남을 발견하고 있다: 비하는 그가 구원의 언약(pactum salutis)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공로를 세우시고 그 일을 집행하실 것을 자원해서 담당하신 점에서, 승귀는 장래 우리의 중보자되실 그가 성육신 이전에 누리셨던 영광(참조. 요 17:5)에서 미리 나타나는 것이다. 두 신분은 고후 8:9; 갈 4:4, 5; 빌 2:6-11; 히 2:9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2. 비하의 신분
개혁 신학에서는 빌 2:7, 8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비하를 두 요소로 구분한다. (1) 케노시스(exinanitio, 비움)는 그가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신적 위엄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신 사실을 의미한다. (2) 타페이노시스(tapeinosis〈humiliation〉, 비하)는 그가 율법의 요구와 저주에 굴복하시고 수치스럽게 죽기까지 일생을 행동과 고난으로 순종하신 것을 의미한다. 갈 4:4에 “율법 아래 나시고”라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된 구세주의 신분은 비하의 제 단계에 상응하는 상태 속에 반영되어 있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비하를 5단계로 말한다: (1) 성육신, (2) 고난, (3) 죽음, (4) 장사 지냄, (5) 음부에 내려가심.
2.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탄생
(1) 성육신의 주체. 인성을 입으신 분은 삼위일체 신이 아니라 제2위 신이었다. 그같은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표현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 동시에 삼위 각자가 성육신 때에 능동적으로 일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마 1:20; 눅 1:35; 요 1:14; 행 2:30; 롬 8:3; 갈 4:4; 빌 2:7). 성육신을 로고스의 탄생과 구별하여 논할 경우,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의 능동적 참여가 강조되고 또한 그의 선재성이 전재된다. 이 선재 사실은 성경이 밝히 가르치고 있다 (요 1:1; 6:38; 고후 8:9; 빌 2:6-7; 갈 4:4).
(2) 성육신의 필연성. 스콜라 신학 시대 이래로 성육신을 구속 개념 속에 포함시킬지 아니면 이미 창조 개념 안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할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통속적 표현으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타락이 없었음에도 육체로 오실 것인가의 문제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육신의 이유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데에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했으며, 개신교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성육신이 불가피해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 오시안더, 로테, 도르너, 마르텐센 등의 몇몇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성육신같이 엄청난 사실은 우연적일 수 없으며, 사람의 우발적이고 독단적인 행위의 결과인 범죄가 그 원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초적 계획 속에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타락 전 종교와 타락 후 종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 없다. 만일 중보자가 현재 필요하다면, 타락 전에도 또한 필요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속죄와 구원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중보자이신 동시에 머리되신다. 그는 창조의 처음(아르케)이자 마침(텔로스)이다(고전 15:45-47; 엡 1:10, 21-23; 5:31, 32; 골 1:15-17).
그러나 성경이 변함없이 성육신을 인간의 죄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눅 19:10; 요 3:16; 갈 4:4; 요일 3:8; 빌 2:5-11과 같은 구절들의 설득력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종종 주장되는 성육신이 본유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하고 필요하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내적 자기 계시라는 범신론적 관념에 떨어지기 쉽다. 하나님께는 오직 하나의 계획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초부터 죄와 성육신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결국 성육신은 구원의 전 사역과 마찬가지로, 죄로 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쁜 뜻대로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주적 의의를 가지신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지만, 이 역시 엡 1:10, 20-23; 골 1:14-20에 기록된 그의 구속적 의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3) 성육신으로 초래된 변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로고스가 전에 향유했던 지위를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본질적인 존재 면에서 로고스는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에 완전히 동일했다. 요 1:14에 나오는 동사 에게네토(“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로고스가 육체로 변화했고 따라서 그 본성을 변질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가 특수한 성격을 취하셨다는 것 곧 원래적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고 추가적 형식을 획득하셨음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4) 성육신으로 그리스도는 인류의 일원이 되셨다. 재세례파의 교설에 반대하여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을 모친의 실체로부터 취하셨다고 확언한다. 재세례파의 지배적 견해는 주께서 그의 인성을 하늘로부터 가져오셨고, 마리아는 단지 그것이 통과한 도관(導管)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견해대로라면 그의 인성은 진실로 새로운 피조물이어서 우리의 인성과 비슷하지만 유기적 관련성은 갖지 않는다.
(5) 초자연적 잉태와 동정녀 탄생으로 실현된 성육신.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었음”을 확언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결코 평범한 출생이 아닌 초자연적 탄생이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으셨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였다. 왜냐하면 오직 이로써만 동정녀 탄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간혹 동정녀 탄생이 교리상으로 중요한 주제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브루너는 자신이 이 문제 전혀 관심이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의 기적성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새로운 출발점을 창조적으로 선정하신 증거를 발견한다. 그는 또한 이에서 교리적 의의를 찾아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죄의 유전’은 부계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심으로써 ‘피조성’을 취하셨고, 동시에 인간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죄의 유전’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6) 성육신 자체가 그리스도의 비하의 일부분이다. 성육신 자체는 그리스도의 비하의 일부인가, 아닌가? 루터파에서는 성육신과 비움을 구별함으로써 이를 부정하고, 그들의 부정의 근거를 비하는 지상 생애에만 국한되지만 그의 인성은 천국에서도 계속된다는 사실에 두고 있다. 그는 지금도 인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더 이상 비하의 신분에 처해 계시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심지어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도 다소 견해차가 있었다. 이 문제는 잘 분별해서 답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추상적 의미로서의 성육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을 입으신 단순한 사실은 비록 겸비의 행동(act of condescension)이었지만, 그 자체가 비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로고스가 ‘육’을 취하신 것, 즉 죄의 오염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타락 이래로 연약․고난․죽음 아래 매인 인성을 입으신 것은 분명히 비하였다.
2.1.1. 동정녀 탄생에 대한 현대적인 토론.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사야 7:14의 성취로 보고 있다. “보라 처녀(알마, ‘alma)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전 편집자들에 따르면, ‘알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엄밀하게 숫처녀를 의미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적은 너무 이론적이다. 만약 그들이 숫처녀가 아니라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할 것이다(신 22:13이하).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알마’가 확실하게 ‘숫처녀’(헬라어로는 parthenos)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였다. 아퀼라(Aquila, 대략 주후 130년경) 이전에 유대인들이 번역한 모든 헬라어 역본은 ‘알마’를 ‘파르테노스’로 번역하였다. 아퀼라는 그 대신에 ‘네아니스’(neanis, 젊은 여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점은 그렇게 함으로써, 아퀼라가 그 구절을 그리스도인들이 증빙 구절로 삼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수백 년 동안 이 교리를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이 교리는 초대교회의 신조들에 그리고 동방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개신교회의 교리적 표준 문서들 속에 두드러지게 등장했다. 그러나 1892년 슈렘프(Schrempf)라는 이름의 한 독일인 목사는 사도신경에 이 항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세례를 줄 때 사도신경을 사용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비교적 보수적인 신학자들조차도 그 교리를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다. 예를 들어 한스 큉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의 주해자들조차도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불확실하며, 상호 모순되며, 상당히 전설적이며, 궁극적으로 말해서 신학적인 동기에서 기록된 기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에밀 브루너는 동정녀 탄생을 구원의 기적을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바꾸려는 일종의 시도로 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은 ‘어떻게 그 일이 발생했는가?’라는 알고 싶어하는 캐물음으로 바뀌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은 그 출발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판넨베르그는 그 교리를 헬라파 유대인 집단에서 부상한 전설로 보고 있으며, 그 내용에 관해서는 “바울과 요한의 글에서 발견되는 모순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은 하나의 징조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것은 그 아들의 성육신을 다른 인간 존재의 모든 출발과 구별시켜 주는 신비로서, 성육신의 신비와 수반되며 그 신비를 시사하는 징조다.” 적어도 성경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이 가르침을 존중할 것이며 최소한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가르침에 대하여 말할 때 드러내는 경멸적인 어투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정녀 탄생의 징조는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가? 첫째, 그것은 예수님과 복음의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은 크리스마스의 신비라는 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이며 따라서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문을 성급하게 지나가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복음의 시작에서 동정녀 탄생은 믿음의 행위는 합법적인 ‘사크리피기움 인텔렉투스’(sacrificium intellectus, 지성의 희생)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이다. 둘째, 동정녀 탄생은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징조이다. 인류는 구속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류는 그 구속자를 자체적으로 낳을 수 없다. 구속자는 밖에서 와야 한다. 하나님이 어린 양을 제공하신다(창 22:8). “인간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될 능력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바르트). 셋째, 동정녀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징조이다. 그리스도는 이전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의 발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개입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인간의 곤경 속으로 들어온 최후의, 위대한, 최종적 분출이다.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무죄성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빛을 비추어 준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렇다. “그리스도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출생이 아담의 타락 이전에 그랬을 것처럼 순전하고 오염되지 않도록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었기 때문에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유케 된다” (칼빈).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무죄성과의 두 번째 연관성은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책 밖에 서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아담의 원초적인 죄책이 그 사람 그리스도 예수에게도 전가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이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되듯이(창 2:1), 그리스도의 수태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서 피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님의 아버지였다거나 그의 탄생은 마리아와 신의 성적인 결합의 결과였다는 식의 제시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낳게 된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실체(substance)에서 창조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좀더 조심스럽게 나간다고 한다면, “보통의 방식으로 생성된 보통의 난자가 성령의 권능과 축복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수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옳았다. 별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그는 마리아의 귀(그녀의 믿음의 응답)를 기적적 수태의 신체 기관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버지로 말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인성의 아버지는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 인성의 창조주시다. 마리아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ex Maria) 즉 마리아의 실체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전적으로 적절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의 태의 열매’(눅 1:47)였다. 마리아의 기여는 출산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장하신 가정과 환경과 양육을 제공하셨다. 마리아가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우리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2.1.2. 성육신 교리에 대한 도전. 성육신 교리에 대한 공격은 두 방향에서 왔다. 첫 번째 공격은 가현론자들로부터 왔다. 이 가현론자라는 명칭은, 하나님은 어떠한 실질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때때로 기이한 사변을 하는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현설(docetism)은 물질은 악하다는 것과 신은 결코 변화나 고통을 경험할 수 없다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칙에 기초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내용들을 부인할 것을 명백하게 요구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날 수 없고, 탯줄을 통해서 그 어머니와 연결될 수 없으며, 고난당하고 죽을 수도 없었다. 마르시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허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저 가면으로서 실체가 없는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앙을 무효화한다.
성육신 교리에 대한 두 번째 위협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에서 왔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니케아 신학의 뛰어난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뚜렷한 신념은 아리우스주의와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즉 성육하신 ‘로고스’는 사람의 지성(mind)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술은 오로지 그가 사람의 몸을 취하셨음을 의미할 뿐이다. 말씀은 인간의 ‘프뉴마’(영)나 ‘누스’(‘지성’ 혹은 ‘마음’)를 취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로고스’는 친히 생명의 원리와 이성의 원리를 공급하셨다. 그러므로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지성이나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취하면서, 아폴리나리우스는 성육하신 주님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의 이중적 기독론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항해서, 아폴리나리우스는 인간 존재 안에는 몸과 영혼이 한 본성을 구성하듯이, ‘로고스’와 인간의 몸의 하나됨은 한 본성(‘퓌시스’, physis)을 구성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진실로 그리스도는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테르티움 쿠이드’(tertium quid, 제3의 종류), “전적으로 사람도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도 아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매개, 하나님과 사람의 조합”이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성육신도, 사람됨을 취함도, 사람이 됨도 전혀 없다. 인간 현존의 조건들을 취하신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그 현존 안에서 인간의 몸과 신적 ‘로고스’는 하나의 ‘우시아’(존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적인 심리에 대한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것이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구원론에 치명적이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했다. 
성육신 교리는 두 가지 기본적인 강조점을 포함했다. 첫째, 그리스도는 진짜 육체를 취하셨으며, 둘째, 그리스도는 이성 있는 인간 영혼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2.2. 구세주의 고난
(1) 그는 전생애 동안 고난받으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별된 고난으로서,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가혹해졌다. 성육신에서 시작된 고난은 그의 생애 끝의 대수난(passio magna)에서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일체가 그의 일신에 지워졌던 것이다.
(2) 그는 육신과 영혼으로 고난받으셨다. 오직 구세주의 육체적 고난만이 주목 대상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의 고난의 정수를 이루었던 것은 맹목적인 육체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영혼의 고뇌와, 그가 짊어지신 인류의 죄악에 대한 중보자적 의식에 수반된 고통이었다. 후에는 육체적 고난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죄란 본질상 영적인 것이므로 순전히 영적 고난으로만 속죄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영육간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밝히 가르친다.
(3) 그의 고난의 원인은 다양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그가 죄인들을 대신하셨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근접한 원인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그의 생애의 시초부터 마지막에 그에게 엄습할 극한적 고난을 완전히 알았고 명확히 기대하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장차 당할 일을 정확히 아셨는데, 전망은 지극히 어두운 것이었다. 
(4) 그의 고난은 독특했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능력은 그의 이상적 인간성, 윤리적 완전성, 공의, 거룩, 진실에 대한 판단력에 비례하였다. 그 누구도 예수님만큼 고통, 비애, 도덕적 사악의 통렬한 아픔을 절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교적 일반적인 고난 외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로 홍수처럼 그를 뒤덮게 하심으로써 일어난 고난도 있었다. 구세주의 고난은 순수 자연적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 행위의 결과이기도 했다(사 53:6, 10).
(5) 시험 중에 당하신 고난. 그리스도께서 당한 시험들은 그의 고난의 필수적인 일부였다. 그것들은 고난으로의 도상에서 만난 시험들이었다(마 4:1-11과 병행 구절; 눅 22:28; 요 12:27; 히 4:15; 5:7, 8). 예수님의 인성에는 첫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범죄의 순수 추상적인 가능성이 있었다거나(카이퍼), 예수님의 거룩성은 시험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유지되는 도덕적인 거룩성이었다거나(바빙크),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내용 자체는 전적으로 합법적이며 온전히 자연적인 본능과 욕구에 호소하는 부류의 것이었다(보스)는 등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해명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in concreto) 범죄하거나 심지어 죄지을 충동조차 가질 수 없는 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짜 시험에 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3. 구세주의 죽음
(1) 그의 죽음의 범위. 그리스도의 죽음을 논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당연히 육체적 죽음 곧 영육의 분리를 염두에 두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죽음의 개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 종합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육체적 죽음은 단지 그 나타남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죽음은 단지 죄의 자연적 귀결에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사법적으로 부과된 형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까지 당하신 것이다(비록 이는 내포적 측면에서였지 외연적 측면은 아니었지만). 짧은 기간에 그는 죄에 대한 무한한 진노를 담당하시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이것은 오직 그의 승귀된 본성 덕택에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우 영원한 죽음은 로고스와 인성 사이의 연합의 와해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천부의 신적 사랑이나 기쁨을 중보자의 위격으로부터 거두어 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육신이 무덤 속에 있는 동안에도 인성과 여전히 연합되어 있었고, 신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없었으며, 중보자의 인격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2) 그의 죽음의 사법적 성격. 그리스도께서 자연적이거나 우발적인 죽음을 맞지 않고, 자객의 손에 살해당하지도 않고, 법정의 판결에 의해 돌아가시는 것이 절대 필수적이었다. 빌라도의 판결은 비록 근거는 전혀 달랐지만 또한 하나님의 판결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참수되거나 돌에 맞아 돌아가시지 않은 것도 의미 심장한 일이다. 십자가형은 유대의 형벌이 아닌 로마의 형벌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그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는 사실을 실증하신 것이다(신 21:23; 갈 3:13).
2.4. 구세주의 장사.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비하의 마지막 단계로 보일지 모른다(특히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들 중 하나인 “다 이루었다”를 볼 때). 그러나 그 말씀은 필시 그의 능동적 고난 즉 그 자신이 능동적 역할을 담당하신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그의 죽으심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의 장사도 그의 비하의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옛사람을 벗는 것이지, 새사람을 입는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참조. 롬 6:1-6). 따라서 예수님의 매장도 그의 비하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다.
2.5. 구세주께서 음부로 내려가심 
(1) 사도신경(Apostolic Confession)에 나타난 본 교리. 사도신경은 주님의 고난, 죽음, 장사 지냄을 고백한 후 뒤이어 ‘옥(음부)에 내리우사’라고 진술한다. 이 문구는 다른 구절들만큼 초기부터 보편적으로 신경 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것은 아퀼레이아 양식의 신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descendit in inferna, 주후 390년경). 칼빈은 ‘장사되고’ 다음에 이를 삽입한 사람들은 뭔가 추가적인 내용을 뜻하였으리라고 정확하게 논급하고 있다. 명심할 것은 이 구절들이 성경 속에는 나오지 않으며, 따라서 사도신경의 다른 조항들만큼 성경의 직접적 진술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2) 이 표현의 성경적 근거.
① 엡 4:9. 이 구절에서 근거를 구하는 사람들은 “땅 아랫 곳”을 음부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는 미심쩍은 해석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올라가심은 내려가심을 전제로 한다고 변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올라가심의 반대는 성육신이다(참조. 요 3:13).
② 벧전 3:18, 19. 이 말은 음부로 내려가신 사실과 그 목적을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본문에 기록된 영은 그리스도의 영혼으로 이해되며, 전파하심은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해석은 앞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영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며, 그리스도는 바로 이 영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 본문에 대한 개신교의 일반적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를 통해 홍수 전에 살았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그들은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음부에 갇힌 상태였고 따라서 이와 같이 불릴 수 있었다)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같은 해석은 지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본문은 승천을 가리키며, 승천 자체가 옥에 갇힌 영들을 향해 행한 풍부하고 개선적이며 힘 있는 복음 전파였다고 주장했다.
③ 벧전 4:4-6.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남은 일생을 육적으로 인간의 정욕을 좇아 살지 말고, 비록 이전 친구들을 불쾌하게 하고 그들의 비방을 받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행위를 직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④ 시 16:8-10(비교 행 2:25-27, 30, 31). 여기서 특히 고려 대상이 되는 것은 10절이다. 피어슨은 이 구절로부터 그리스도의 영혼이 부활 전에 지옥(하데스)에 계셨다고 결론 짓는데, 왜냐하면 본문이 그것(영혼)이 그곳(스올)에 남겨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 2:30, 31에 기록된 베드로의 해석과 행 13:34, 35에 기록된 바울의 해석 양자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본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3) 사도신경 구절의 상이한 해석들
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를 그리스도께서 사후에 구약의 성도들이 그의 구속의 계시와 적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장소인 선조 림보(Limbus Patrum)로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② 루터파는 음부로 내려가심을 그리스도의 승귀의 첫 단계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사 완성시키시며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시기 위해 하계로 내려가셨다.
③ 성공회는 그리스도의 육체는 무덤 속에 있었지만, 영혼은 음부에, 좀더 구체적으로는 의인들의 영혼의 거처인 낙원에 내려가사 진리를 보다 완전히 설명해 주셨다고 주장한다.
④ 칼빈은 이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실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도 이와 유사하다.
⑤ 성경이 문자적인 그리스도의 지옥행을 가르치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대체로 다음의 두 사상을 결합시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a) 그리스도는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와 십자가 상에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셨다. (b) 그는 죽음이라는 가장 낮은 비하의 상태에 들어가셨다.
기독론 5. 승귀의 신분 
(벌코프 578-589)
1. 승귀의 신분에 관한 일반적 고찰
1.1. 승귀의 주체와 성질. 루터파는 비하와 승귀 신분의 주체는 로고스가 아닌 그리스도의 인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제일 먼저 음부에 내가셨을 때 승귀의 신분이 하계에 나타났고, 더 나아가 부활과 승천에서 현세에 드러났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귀는 성육신 당시 자기에게 전달되었지만 인성이 오직 가끔 은밀하게 사용했던 신적 속성들을 완전히 발휘하신 사실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개혁파 신학은 신인인 중보자의 위격을 승귀의 주체로 간주하면서도, 승귀가 일어난 것은 인성이었다고 강조한다. 신성은 비하나 승귀가 불가능하다.
1.2.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그리스도의 승귀. 그리스도의 승귀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풍부하다. 복음서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비하 다음에 승귀가 뒤따랐음을 밝히 보여 주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고전적 성구가 빌 2:9-11이다. 이외에도 막 16:19; 눅 24:26; 요 7:39; 행 2:33; 5:31; 롬 8:17, 34; 엡 1:20; 4:10; 딤전 3:16; 히 1:3; 2:9; 10:12 등의 구절을 들 수 있다.
1.3.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승귀 신분. 물론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승귀의 신분이 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법적 개념을 포기하였을뿐 아니라, 구세주의 일생에서 일체의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였다.
2. 승귀 신분의 제 단계. 개혁신학은 그리스도의 승귀를 4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2.1. 부활
(1) 부활의 성격.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다시 사셨고 영육이 재결합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다시 살아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부활은 영육이 생명 있는 유기체로 재결합하면서 인성이 영육 면에서 공히 그 원초적인 능력과 완전성을 회복했고, 심지어 더욱 높이 승화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 15:42-44에서 신자들의 장래의 몸은 썩지 않고(부패가 불가능함), 영광스러우며(천상의 광채로 빛남), 강하고(능력과 아마도 새로운 기능으로 충만), 신령할 것이라고(비물질적이거나 영체적〈ethereal〉인 것이 아니라 영에 합당한, 성령의 완벽한 도구가 됨)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사에서 예수님의 몸이 현저하게 변화되었고, 그 결과 쉽게 인식되지 않았으며 놀랍게도 갑작스럽게 출현하실 수 있었음과(눅 24:31, 36; 요 20:13, 19; 21:17) 그럼에도 그것은 물질적이고 지극히 실제적인 몸이었음(눅 24:39)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고전 15:50과 모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혈과 육’은 인성의 현재적인 물질성과 필멸성과 부패성을 묘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중적 의미를 가진다. ① 그것은 최후의 대적이 정복되고 죄값이 지불되었으며 생명의 약속된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천부의 선언이었다. ②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지체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 곧 칭의, 신생, 미래의 복된 부활을 상징했다(롬 6:4, 5, 9; 8:11; 고전 6:14; 15:20-22; 고후 4:10, 11, 14; 골 2:12; 살전 4:14). ③ 그것은 또한 그들의 칭의, 중생, 최후의 부활과 도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롬 4:25; 5:10; 엡 1:20; 빌 3:10; 벧전 1:3).
(2) 부활 사건의 주체.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다. 그는 스스로 부활이자 생명이라고 칭하셨으며(요 11:25), 생명을 버리고 다시 취할 권세를 자신이 가졌다고 선언하셨으며(요 10:18), 심지어 그의 몸된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예언하셨다(요 2:19-21). 그러나 부활은 그리스도만의 단독 사역이 아니었다. 모든 외향적 사역(opera ad extra)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종종 일반적으로 성부의 소관으로 돌려지고 있다(롬 6:14; 갈 1:1; 벧전 1:3). 부활은 또한 당연히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롬 8:11).
(3) 부활 교리에 대한 반론들-조지 래드, 「나는 부활을 믿는다」
(4) 부활 사실을 달리 설명하려는 시도들
① 허위설
② 기절설
③ 환상설
④ 신화설
(5) 부활의 교리적 의미. 부활 신앙은 분명히 교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면 성경 저자들의 진실성도 공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을 분명히 사실로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활이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미치게 됨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거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요나의 표적)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이셨음(롬 1:4)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속 사역의 핵심, 따라서 복음의 핵심에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효력을 가지려면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종결되어야 했다. 또한 부활은 다시 사시고 승귀하신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와 우주적 주님으로서 새로운 삶에 들어가심이었다.
2.2. 승천
(1)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경에서 부활만큼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지 않다. 이는 필시 승천보다는 부활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승천은 부활의 필수적 보충이며 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승천의 성질. 승천은 중보자의 위격이 그 인성을 좇아 지상에서 하늘로 가시적으로 올라가신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에는 천국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단순한 장소 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좀 더 진전된 변화도 포함했다. 이제 인성이 천국적 영광의 충만함으로 진입했고, 천상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 것이다.
① 성경에서 천국은 피조물(천사, 성도, 그리스도의 인성)들의 처소로 묘사된다. 이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② 하늘과 땅은 성경에서 거듭 병렬적으로 쓰인다.
③ 성경은 우리가 천국을 하나의 장소로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신 30:12; 수 2:11; 시 139:8; 롬 10:6, 7).
④ 구세주께서 천국에 들어가심이 승천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자들은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보았다. 이와 동일한 지역 개념적 색체는 히브리서 기자의 심중에도 있었다(히 4:14).
(3) 루터파의 승천관. 루터파는 승천을 지역 이동이 아닌 상태 변화,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당시에 전수받은 신적 속성(divine perfections)을 완전히 향유하고 활용하심으로써 영원히 편재하시게 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개념에 대해 그들은 이 우편(단지 권능을 상징하는)이란 도처에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4) 승천의 교리적 의미. 바르트는 승천이 언급된 빈도나 강조된 정도에 있어 부활보다 훨씬 미달하며 오직 부활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까지의 자연적 이동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승천이 기독교 신조의 주요 조항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한 사실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바르트에게는 동정녀 탄생과 부활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계시의 표지로 생각되었듯이, 표적과 기사로서의 승천도 단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소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나타난 계시의 표지(pointer)인 것이다.”
승천은 삼중적 의미를 갖는다.
①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으로서 지성소에서 그에게 통째로 드려져야 했음과, 천부께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충분하다고 인정하사 천국적 영광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음과, 중보자의 나라는 유대인의 나라가 아닌 보편적 국가였다는 선언을 명확히 구체화했다.
②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고(엡 2:6), 그와 같이 영원히 거하도록 예정된(요 17:24) 모든 신자들의 승천을 예고하며, 또한 인간의 원래적 지배권(Kingship)의 첫 회복을 계시했다는(히 2:7, 9) 점에서 역시 예시적인 사건이었다.
③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는 일에도 또한 기구적이었다. 주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아버지께 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신 바 있다(요 14:2, 3).
2.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1) 성경적 증거.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당하실 때 그는 자신이 장차 권능의 우편에 앉으리라고 예언하셨다(마 26:64).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이 사실을 언급했다(행 2:33, 36; 5:31). 
(2) 우편에 앉으심의 의미.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표현은 당연히 신인 동형론적이며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시 110:1,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왕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단순히 명예의 표시이지만(왕상 2:19) 또한 통치에의 참여, 그리고 결과적으로 명예와 영광에의 참여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경우,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중보자가 교회와 우주에 대한 지배권을 받으신 것과 그에 합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셨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 성경의 표현으로부터 승천하신 부활주의 생활은 휴식의 생활일 것으로 유추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생활인 것이다. 성경의 진술은 다양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또한 단순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으로(롬 8:34; 벧전 3:22), 또는 서 계신 것으로 (행 7:56), 심지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그의 왕적 위엄과 통치에 대한 강조로 인해, 그가 하늘에 계시는 동안 수행하시는 사역은 오직 통치적인 것이요 따라서 예언적이거나 제사장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3) 앉으신 동안의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동안 단지 피동적으로 신적 주권, 능력, 위엄, 영광을 받아 누리는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의 중보 사역을 계속 수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마땅히 강조되어야 한다.
2.4.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1) 승귀의 한 단계로서의 재림. 때때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최후의 정점이기나 하듯이 그의 승귀 단계에서 생략된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정점은 인간의 손에 수난당하신 그분이 심판주의 자격으로 재림하실 때 도달하는 것이다.
(2) 재림을 가리키는 성경적 용어. 예수 그리스도의 장래 재림을 가리키는 몇 가지 용어가 있다. 파루시아는 이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그 원래 의미는 단순히 ‘임재’(presence)이지만, 또한 ‘임재에 앞선 강림’(a coming preceding a presence)을 뜻하기도 한다. 두 번째 용어가 아포칼립시스인데, 이는 재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이 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 용어는 에피파네이아로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출현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의 재림 방식. 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과거의 사건으로 보고, 그의 재림 약속을 그가 성령으로 강림하셨을 때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정말 재림하셨으며, 오늘날 성령으로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영적 재림이었고, 이에 반해 성경은 그리스도의 육체적․가시적 재림을 대망하도록 가르치고 있다(행 1:11).
(4) 그의 재림의 목적.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고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 생사간에 인간과 천사들이 그 앞에서 그들의 행위에 관한 기록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다(마 24:30, 31; 25:31, 32). 재림은 악인에게는 무서운 심판으로, 그러나 성도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복으로 임할 것이다(마 25:33-46).
(5) 재림 교리에 대한 반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유력한 반론은 그의 육체 부활 교리에 대한 반론과 궤를 같이 한다. 만일 육체 부활과 승천이 없다면, 하늘로부터의 육체적 재림도 있을 수 없다. 양자는 똑같이 불가능해지며, 이와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지 미개한 시대의 생경한 표현에 불과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당시의 세속적 견해를 취하셨고, 이는 미래에 관한 그의 예언적 말씀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진술하고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재림은 권능으로 지상에 윤리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시는 재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