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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독론

Kenosis theory의 비판

Kenosis theory의 비판 
G.Thomasius의 상대적 속성만 비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 질문을 할수 있다. 하나는 빌 2:5-8의 해석이 주석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이고(신약해석학적 문제), 다른 하나는 그리 스도의 양성론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Kenosis theory의 성서적 근거(라고 보는 구절들, 사실상 근거가 없음)
빌 2:5-8 “....오히려 자기를 비어....” 
“비어”(Έκένωσεν ← κενόω)라는 단어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신성에 속한 모든 속성을 부분적으로 또는 모두 비우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양성론의 교의학적인 문제 
첫째, 만약 3년기간동안 예수가 신성의 일부(상대적 속성)을 비웠다면 그는 3년동안만은 참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그러면 결국 영원히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 3:6(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약 1:7(변함도 없으시고-이것을 강조하기 위해-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때문이다.(신이 불변하다는 사상은 희랍철학파 주장) 
Thomasius과 열심히 싸웠던 희랍적인 개념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희랍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비웃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 지을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오히려 변화시는 분이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것 같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하나님의 불변성 에 문제를 가져오고 만다. 
둘째, 만약 예수의 3년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빠져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이것은 잘못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가 성육신 하셨을때에도 삼위일체는 여전히 삼위로 계신다. 예수는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가 지고 계시는 분이다. 오리겐은 최초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셧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영원한 출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은 영원전에 예수가 하나님. 여기서 생 물학적인 출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자가 신성 속성을 잠시 그만 둔다면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하신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 경에게로 나오시는데 (‘나오신다’는 표현은 성부가 또는 성자가 성령을 ‘보낸신다’는 성경 의 말을 신적작용어로 바꾼 것이다) 이 나오심은 한번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오 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성의 속성 3년동안 잠시 일부를 비우셨다면 성령의 나오심에 문제사 생기고 만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삼위일체, 성자, 성령 모두에게 문제를 가지고 오게 한다. 


2) 빌 2:5-8의 주석학적 문제 
빌 2:5-8중 7절의 “비워”(Έκένωσεν)이란 말이 무엇을 비웠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본체를 비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비웠다는 것으로 보인다(문맥상). 
칼빈은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버릴 수 없다. 만약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완성을 버린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감추어 두시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하나님이심 을 감춘것이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야 했다.(예, 기적앨 행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과의 독특한 과녜를 나타내셨다.=아버지여 하고 부르는 경우=기로운 자들에게 나타내 심을 감사하나이다 등).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인성이 신성을 가지고 있으나 완전히 없애버 린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예수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신성이 아니라 엄위와 영예같은 것이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사복경찰과 같고, 신적 용어도 표현한다면(예수의 은익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당을 못함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 록 은익하고 나타난 것이다. 
NIC 주석의 뮐러(빌립보서 주석)의 입장이다. 뮐러도 칼빈과 같은 입장이다. 여기서 “비웠다는 것은 은유적인 의미로서 예수가 종의 형체를 자신에게 취하심으로서 자신을 비우 신 것이다. 그가 성육신할때 하나님의 형체는(그에게) 그냥 남아 있고-그것을 비운것이 아 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주님이시요 세상의 통치자이시다. - 다만 인간성의 한 부분이 한 측면으로서 종의 형체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라이프마틴 이라는 사람도 ”카르멘 크리스 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빌 2:4-9을 주석하기를 ..........읽어보라.......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ICC주석에서조차도 이 본문을 하나님의 신성을 비우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빌 2:5-9 본문으로 Kenosis theory를 만들어 낼 수 없다. 


3) Extra Calministicum(개혁주의 신학의 독특한 주장) 
이 말의 뜻은 “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를 강조한다. 이것은 루터파신학에서 말하는 견해와 대조된다. 예수님의 몸이 위, 안에, 아래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개혁파에 서는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라면 인성을 말하는 것으로 떡 바같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진 분이시고 또 영 원히 가지신 분이다. 그가 인간의 몸으로 있을때에도 그의 밖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그는 이 우주를 붙들지 않고 계신적이 없었다.) 
어떤분의 문학적인 표현에 의하면 “보라,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자신의 발 걸음을 옮길때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질까 떨리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누구에 대해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땅에 살아계셨던 예수에 대해서 하고 있다. 
루터파와 칼빈파의 차이는 이것이다. 루터파에서는 예수의 몸안에만 로고스가 있 어야 된다고 본다. 칼빈파에서는 몸 안에뿐 아니라 예수의 몸 밖에서도 로고스 ( ㉠ 루터파에서는 성찬식의 떡이 있다면 위, 안에, 아래에 예수님의 몸이 있다고 본다 ㉡ 그렇기 때문에 성찬설이 공제설이 될수밖에 없다.) 가 계시고 성자가 사역(세상을 붙 드시고 계심)하고 있다고 본다. 칼빈주의자는 예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찬설로 영감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기간 중에도 그의 신성은 편재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가 영원히 하나님이시면서 영 원히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성부, 성자,성령의 순환 관계를 살펴보라. 우리는 이 관계를 절대로 알수 없다. 그러나 이 분들이 세상에 내주셨을때부터 그것이 있는 것이다.(이것이 우리 인 식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성육신이 중요 또는 능력을 주어서 사역을 감당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