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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독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의 의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의 의미 
이승구 교수
그러나 가장 초자연적인 일은 그저 초자연적인 일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자연과의 밀접한 조화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즉,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수태될 때에라도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뼈로부터 인간성을 취하며, 그 아이가 태중에서 자라 갈 때에도 마리아의 모든 인성을 다 사용하면서 자라 가며,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써 초자연이 초자연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마리아가 감당한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 
이를 강조하면서 도날드 맥클라우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ex Maria), 즉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22] 더 나아가 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언급까지를 합니다: "마리아는 어떠한 인간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기여하는 바(난자, 유전자, 보통 수정체의 성장과 정상적인 분만)를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기여하였다."[23] 
이런 맥클라우드의 생각은 그 이전에 이미 "자기의 태의 열매와 관련하여 다른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것이라도 마리아에게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던 죤 피어슨(John Pearson)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인 것이다.[24] 가장 초자연적인 일의 성취가 이렇게 자연과의 묘한 조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면, 다른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자연과 초자연의 절묘한 조화는 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보도 이후에 그의 인성의 성장과(눅 2:40) 이 땅의 부모님들(복수!)에게 순종하신 일(눅 2:51) 등을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초자연의 독자적인 행사만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은 대부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요셉을 양부로 하여 나셨다는 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가 모두 다 다윗 왕가의 족보라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영원하신 왕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고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에 (예를 들자면, 삼하 7: 13-16) 따라서, 그 태어난 아이가 그 '다윗의 자손(씨)'임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이런 역할을 감당할 이들을 미리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인간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26] 
이 사실들의 우리에게 미치는 유익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줍니까? 이 질문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6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이에 대해서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 (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대답이요,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목회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성자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고, 그가 취하신 인간성은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것이기에 그로서 그가 이루신 구속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실 수 있다는 이 고백은 함께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확한 이해와 큰 위로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대한 장엄한 진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의 생각의 지침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어 구속을 이루시고 율법과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성취하셔서 (1) 이 세상에 본래 아담이 이르러 소유해야 했던 그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영생을 주심) 본래의 인간성의 본래적 구현을 이루도록 하시고, (2) 신약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세워지도록, 그리하여 (3)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워 발전시켜 결국 극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27] 이 고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시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와 기적을 놀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을 높이고 그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며, 그가 이루신 이 놀라운 일이 지향하는 바 구속과 우리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구속에 근거하여 살고,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여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註)------------------------------------------------------------- 
[1] 1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54), 졸역, {성경신학} (개정판;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0), 354. 
[2] 2 Emil Brunner, The Mediator (London: Lutterworth Press, 1934), 325. 
[3] 3 Emil Brunner, Hans Küng, W. Pannenberg, Edward Schillebeeckx, William Barclay, John Robinson 등을 포함한 현대 신학에서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서는 Donald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Leicester: IVP, 1998), 김재영 역, {그리스도의 위격} (서울: IVP, 2001), 28-29; David Wells, The Person of Christ (Illinois,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졸역,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울: 엠마오, 1994), 87을 보라.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은 마태의 족보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는 Proto-Luke 가정에 근거해서 누가 복음 1, 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그리고 케어드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희랍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도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유대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은 이를 다신론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에서의 신현과 성육신 이야기들은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4] 4 구속자에 대한 계시의 진전과 이런 대망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Anthone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9), 제 1 장과 Francis Nigel Lee, The Origin and Destiny of Man, 졸역, {성경에서 본 인간} (서울: 엠마오, 1983), 제 3 장을 보라. 
구속자에 대한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보스의 다음 지적을 유의하라: "구약 계시는 개인적 메시아 개념에로 점진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Vos, {성경신학}, 68). 
[5] 5 이 말로서 누가는 예수께서 그의 법적인 아버지가 되는 요셉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Cf. I Howard Marshall, Commentary on Luke, NIGTC (Exeter: Paternoster Press; Grand Rapids: Eerdmans, 1978), 64. 
[6] 6 대개 당시의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13세 정도의 소녀들이 정혼하여 그 때부터는 법적으로 혼인한 자로 여겨지고, 대개 1년 후에 신랑의 집으로 취하여 그 때부터 혼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신랑의 집으로 취하여 지기 전의 성적인 관계는 혼인 규례를 깨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나 John Nolland는 이에 대한 문헌적 정보를 잘 소개하고 있다. Cf. John Nolland, Luke 1- 9:20, Word Biblical Commentary 35A (Waco, Texas: Word Books, 1989), 49. 또한 Marshall, 64; Joachim 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London, 1969), 364-67의 정보도 보라. 그러나 Marshall이 잘 말하고 있듯이(64) 이 당시 마리아가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다. 
[7] 7 눅 1:27과 마 1:23의 강조를 보라. 
[8] 8 이에 대한 가장 높은 이해의 하나로 E. E. Ellis, Luke, New Century Bible (1968), 53을 보라: "이 칭호는 동정녀의 아이라는 것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독특하고 신비한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9] 9 "클레떼세타이"(***)라는 이 수동태는 소위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의 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f. Marshall, 67. 그리고 이는 단순히 수양론적인 표현으로 보기보다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선지자"임에 비해서, 나실바 거룩한 자의 독특하고 지고한 성격을 잘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도 Marshall, 67f.을 보라. 
[10] 10 이상 몇 문장에 대해서 Marshall, 70f.를 참조하라. 
[11] 11 Cf. Marshall, 65. 
[12] 12 이 점을 지적하는 같은 논의로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Leicester: IVP, 1981), 366을 보라. 그는 누가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라는 단순한 진술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주어진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도 참된 것으로 여겼다고 강조한다(366f.).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에 대한 강한 주장의 하나로 Marshall, 76f.도 보라. 이전의 J. Orr (The Virgin Birth of Christ [London, 1907])와 J. G. Machen (The Virgin Birth of Christ {London, 1930])의 고전적인 저술도 보라. 
[13] 13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 
[14] 14 Guthrie, 367. 
[15] 15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천사의 고지로 자신이 알게 된 이 사실을 마리아가 요셉에게 말하였으리라는 좋은 논의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서울: 성약, 19943), 119, 159f., 187-90 등을 보라. 
[16] 16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Nolland, 49. 
[17] 17 Pace 김홍전. Cf. Marshall, 65, 66: "강조점은 인간의 수용성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는 것이다". 
[18] 18 요셉의 양부 역할에 대해서는 졸고, "예수라고 불리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현대 종교} 325 (2001년 9월), 43과 그에 인용된 다른 문헌들을 보라. 또한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 n. 473도 보라. 
[19] 19 Cf. 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479. 
[20] 20 John Murray,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9), 280. 
[21] 21 Moo, 479f. 
[22] 22 MacLeod, 50. 
[23] 23 Ibid., 50. 
[24] 24 John Pearson, Exposition of the Creed (6th edition, Oxford: 1877), 297, cited in Macleod, 50. 
[25] 25 이 점에 대한 같은 관찰과 지적으로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을 보라. 
[26] 26 때로는 인간 요셉과 마리아의 숭고한 덕을 너무 높인다는 면에서 조금 지나치긴 하지만 주께서 이들을 잘 준비하셨음에 대한 논의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106f., 113, 123, 143, 150-53 등을 보라. 
[27] 27 이 점들에 대한 좋은 목회적 강설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제2강, 3강, 8강, 11강,, 12강을 보라. 특히 11강이 전체를 잘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kidok.net/column/content.php3?board=board51&uid=158&keyfield=&key=&bunho=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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