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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나누는 일도 듣는 일

핵심감정은 감정이 무작정 표현되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인격적인 소통의 주요한 수단입니다. 이 상식적인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찬양이나 기타 교회 안의 모든 교제와 소통에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 해소나 일방적인 소통인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어제도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한 분이 발표를 하셨습니다.그 내용은 외부에 비공개로 하고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나누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그 진솔한 나눔을 보고 해주고 싶은 말, 공감하는 바, 격려, 지지, 이런 것들을 표현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상대의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즉, 상대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끌어내는 소재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발표하신 분의 핵심감정이 숨어버린 존재로서 자기 인식과 관련이 있어서 미묘하게도 이런 공통적인 특징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우리가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을 보면 이런 경우가 일상다반사입니다. 상대의 말에서 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그렇게 떠올린 것으로 떠들다가 누군가가 또 그 이야기를 가로채고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듣는 사람이나 반응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죠.

예전에 유재석 씨와 김국진 씨가 예능을 잘하는 법을 "잘 듣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통 예능에 나오는 사람들은 뭔가 보여주려는 생각해 사로잡혀서 사람들의 관계와 맥락 대화를 놓치고 흐름을 깨기 일쑤라는 것이죠. 흐름에 맞게 자연스럽게 리액션하는 것, 그것이 예능의 신이 남긴 조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능뿐만 아니라 우리 신학과 삶 전반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찬양이 우리 성경읽기가 우리 기도가 일방적인 자기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거나 삼위일체께서 서로를 기뻐하시면서 교통하시는 특성이 결여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교회와 거기서 나누어지는 것들이 대부분 자기 해소와 배설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세미나에 오신 분들은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상처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못오신 분들도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자기 헌데를 핥으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자기 증식을 하는 존재인지를 현장에서 목격했거든요. 핵심감정 세미나는 이렇게 현장에서 그것을 두 눈으로 보게 해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보지 못하고는 고칠 수 없는 노릇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