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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고쳐 주시는 하나님(시 30:1-12)

나를 고쳐 주시는 하나님(시 30:1-12)


노승수 목사


1. 서론
오늘 함께 하실 시편의 표제를 보면,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낙성이란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봉헌이란 뜻입니다.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앞에 드리는 요즘으로 치면 헌당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 표제에 보면 성전 낙성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 같은 경우, e dedication of the house of David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다윗 시대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던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다윗의 집을 헌당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바로 오늘 30장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본론
1)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1절)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다윗의 성을 낙성하는 다윗이 얼마나 감개가 무량했겠습니까? 이 다윗 성은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내셔서 그의 대적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한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일생의 상당한 기간을 사울에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사실상 왕으로서 제대로 된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 후였습니다. 그 구원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노래는 어쩌면 다윗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높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간섭하시는 손길을 경험할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대전에 강의를 갔다가 받은 강사료를 남아공에서 공부하시는 동기 목사님께 부쳐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돈을 송금한 그 시각에 공교롭게도 둘째 아들을 출산 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도 병원비가 필요하셨는데 저를 통해 적절히 공급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대적의 손에서 일평생 구함을 받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추적을 받던 중 동굴 안에 다윗 일행이 있는데, 사울일행이 그 동굴에 들어온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하나님은 미물인 거미를 사용하셔서 다윗이 있는 안쪽 동굴에 거미줄을 치게 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끌어 내신 것입니다. 성전을 낙성하던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비일비재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순간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개 시편의 경우 1절이나 1-2절이 그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 시편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윗 성의 낙성은 단순히 성의 낙성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일생에 구원자 되셨음을 노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구원의 노래(2-3절)
Psalm 30:2-3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 때마다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다윗 역시 내 하나님이라 친밀히 부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를 고치시는 의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소리쳤다는 말입니다. 마치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가 고통에 소리를 지르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런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3절은 일종의 병행법입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그 영혼이 음부에 들어가는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질병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유가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끓습니다. 물론 아픈 사람들에게 병고침은 소망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 역시 부차적인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의 고침을 받고 영혼이 멸망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다윗은 자신의 영혼의 죽음과 같은 자신의 영적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고치셨음을 노래합니다. 
3) 낙성식 참석자들을 향한 찬양의 요구와 교훈(4-5절)
Psalm 30:4-5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해 성전을 향해 고백하고 이제 돌아서서 백성들에게 권면의 말을 합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생각하며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 해야 하는 이유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5월 연휴 때에 오랜만에 가족 휴가를 가졌습니다. 여동생내외와 함께 콘도에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놀다가 그만 팔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밤에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괴로워 하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침에 다시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가려는데 아이는 가지 않으려고 보챕니다. 이유가 뭘까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가기 싫은 것이지요? 그럼 부모인 저는 왜 그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할까요? 
잠간의 고통 후에 안아프게 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주 자주, 우리 집 작은 아이처럼 되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은 분명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이 진노를 피하는 길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길 원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아들은 그 잠깐의 노염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염의 순간이 지나면, 은총이 평생토록 지속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아니는 치료를 안받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울고 불고 난리입니다. 의사선생님이 팔을 비트니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깜쪽같이 안아프게 되었습니다. 팔을 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을 들어보라니 울면서 듭니다. 아프냐고 물으니 울면서 안아프다고 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것입니다. 영적 어둔 밤에는 회개의 애통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는 회개와 죄 사함의 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날 밤을 잠을 못자고 울음으로 보냈습니다. 아니는 밤새 아프다고 보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그 울음은 금새 기쁨의 휴가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영혼의 질병을 이렇게 고치시길 기뻐하십니다. 
4) 환난의 때를 추억함(6-11절)
Psalm 30:6-11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6-11절은 다윗이 이제 형통날 낙성식 날에 서서 하나님을 인해 요동치 않을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의 환난의 때를 추억합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참 중생한 신자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경험이 있다면,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경험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흔적이 사라질 때 신자는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다윗 또한 이를 인해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근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합니다. 신자는 낙심하지 않는 자입니다. 낙심을 흔히 시험이라 하는데 사실 낙심은 아주 큰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심한 낙심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어거스틴 수도회의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루터는 원장님의 한 마디를 듣고 낙심을 털고 일어섰다고 합니다. "낙심도 죄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자의 삶에 환난이 왔다고 낙심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은 뭐라고 기도합니까?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께 무익함을 말하며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면, 주를 찬송하고 주의 진리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돕는 자가 되어 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를 도우셨고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 큰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5월 31일까지 기한을 두고 전에 섬기던 교회가 하루 속히 정상화 될 것을 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6월 1일 아침에 네이트 메신저로 그 교회의 집사님을 통해서 교회의 일을 순조롭게 잘 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확신합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기도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목사님께 "기도 그거 다 우연 아닌가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토레이 목사님은 한 참을 생각하시더니, "그렇습니다. 우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 우연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6월 1일의 소식을 응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까닭은 5월 31일까지 기한을 두고 기도한 까닭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와 같은 소식을 들여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인지요! 할렐루야 11절은 다윗이 환란 중에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기뻐하는 장면을 노래 한 것입니다. 
5)영원한 찬양의 약속(12절)
Psalm 30:12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그러니 다윗이 잠잠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낙성식이 바로 그 증거인 셈입니다. 주님을 인하여 영영히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여러 환란들을 어떻게 삼사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운 일만 감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결코 그에게 즐거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인도하시고 환란 가운데도 신실하게 응답하셨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3. 결론
다윗은 환란 가운데 만난 하나님을 인하여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신앙고백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 잊어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옛말도 있지만 우리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앙심은 돌에 새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환난 가운데 그를 고쳐주시고, 낙심이 찾아 올때도 낙심치 않고 주를 바라 보는 다윗을 긍휼히 여기셔서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우리도 영원토록 찬양하며 감사할 것을 다짐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9. 6. 9. PM 5 :00 설교 원고 준비를 시작하다. 작은 아이가 자꾸 놀아달라고 보챈다
PM 7 : 00 큰아이가 태권도 다녀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원고 작성을 잠시 멈추다. 
PM 7 : 20 다시 설교 준비를 시작하다. 
PM 8 : 11 1차 원고를 완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