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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은 청지기(눅 16:1-13)

옳지 않은 청지기(눅 16:1-13)


노승수 목사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 서론. 
오늘 함께 읽은 이 본문은 성경 중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성격을 안다면 이 본문은 그렇게 힘들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저술의 목적에 대해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일정한 시간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에 따라 누가복음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1절과 이 단락이 끝난 다음 절인 14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1절을 보게되면 이 이야기의 청중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함으로서 이 이야기의 청중이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게 되면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정작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표현은 누가의 이 본문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비웃은 까닭이 바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들의 돈을 사랑함이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에대한 비웃음의 이유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돈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13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첫째 해석의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돈과 관계해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1절에서 또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표현을 통해서 앞부분에 어떤 가르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게 바로 15장입니다. 앞부분에 대한 이해는 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에 바리새인들이 반응을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15장 1-2절에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싫어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15장의 비유 세가지를 베풀어 가르치십니다. 3-7절은 잃은 양 한 마리 비유, 8-10절, 잃은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11-32절에 잃었다 찾은 둘째 아들 비유, 흔히 돌아온 탕자 비유라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설명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이 세번째 비유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문을 설명하면서 보다 자세히 다시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 세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다는 것이지요? 1-2절과 연관해서 생각해본다면, 세리와 죄인을 싫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16장 1절에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기 때문에,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이 본문은 분명 재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1차적인 이유이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의미는 9절에서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단순히 물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영적 처소"로 인도한다는 본문의 설명은 어불성설이겠지요? 그럼 이 두가지 의미 즉, 물질에 대한 관점과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적 관점에서 이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2. 본론
본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본문의 이상한 내용상의 구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떤 청지기가 나옵니다. 8절에 의하면 이 청지기는 "옳지 않은" 즉 의롭지 못한 청지기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한데요. 이 청지기의 직무가 단순히 금전적 의미만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옳지 않은 청지기란 구원에서 먼 청지기란 말이요, 그가 사무를 그만하는 것은 바로 구원에서 멀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까닭에 부자는 이 청지기가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정리해고]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청지기가 낸 꾀가 등장합니다. 정리해고에 임박한 청지기는 공문서 위조 및 공금횡령의 범죄에 가담합니다. 5절에 의하면,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 들여 기름 백말 빚진 자를 50으로 고쳐주고, 밀 백석을 빚진 자를 80으로 고쳐줍니다. 본문이 이해하기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런 범죄 곧 공문서 위조와 공금횡령을 보고 오히려 주인인 부자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음으로 이를 칭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해석의 첫번째 힌트는 앞서 말씀 드린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즉, 돈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요, 두 번째 해석의 힌트는 그가 청지기라는 점이지요? 즉 이 재물과 돈의 청지기라는 점입니다. 이 본문이 해석하기 힘든 까닭은 우리가 영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본문의 부자는 하나님이시겠지요? 그럼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실까요? 그가 돈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어떤 이유에서겠습니까? 둘째, 우리는 돈을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강하고 못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 찬찬히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부자라면 필요도 하나님께서 필요도 없는 돈을 왜 굳이 청지기인 우리에게 맡기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사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즉, 주변의 불쌍한 영혼들 즉, 세리와 죄인들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정리해고] 통보를 듣고서 사무를 바로 처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칭찬한 것이지요? 
우리는 돈을 너무 강력하게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못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십일조에 대한 논쟁들이 분분한데요, 참 보고 있자니 가소롭습니다. 뭐 논지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이면은 뭐냐면요? 내 마음대로 물질을 쓰겠다는 배금주의라는 우상에 물든 것입니다. 우선 십일조는 형식적 측면에서는 폐지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폐지가 주님의 목적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 주님의 목적임으로 내용상의 측면에는 더 강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즉, 내가 십의 일을 드리는 까닭은 십의 구를 내 마음대로 쓰기 위해서라면 물질을 잘못 이해 한 "옳지 않은" 청지기와 같습니다. 십의 일을 드리는 까닭은 십의 십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의 일을 드리는 까닭은 나머지 십의 구를 주의 뜻을 따라 쓰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담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당신이 십일조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내게 맡기신 주님의 물질을 주의 뜻을 따라 잃어버린 영혼을 구령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또 물질의 청지기로 살지 않는다면, 십일조는 의미가 없습니다. 현대는 배금사상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내가 여태껏 보건대, 십일조를 안하는 사람치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권할만한 신앙생활입니다.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더라도 내용상은 여전히 우리가 이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구약보다 더 그 정신의 계승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더 많은 요구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봅시다. 본문의 뜻이 보이십니까? 왜 부자인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나면, 원래 이 물질을 부자 주인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보다 많이 맡기실 때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그 사무를 안 보았고 그래서 [정리해고]를 통보했는데, 이 청지기가 그 사무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본문의 내용이 정확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어보아야 합니다. 
9절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멸망 때에 영원한 처소 곧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재물 자체에 대해서 가치 중립적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화에 불가합니다. 재물은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를 보십시오. 모든 범죄의 뒷면에 항상 돈이 있습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 불의합니다. 다만 이것을 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선용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일까요? 천국의 동반자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근본적으로 세리와 죄인들과 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죄가 밖에 있다고 믿었고 그런 죄를 짓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자신도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고로 세리와 죄인들이 나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이 바로 잃어버린 양이요 드라크마이며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가진 재물을 가지고 이들을 구제하되, 단순히 물질적 구제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제를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궁극적 이유임을 보여줍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재물로 그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들로 인해 천국이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성경이 이들을 언급할 때, 죄인이라 언급했던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 중에서 주님은 구하여 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이며 이것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는 논지가 바로 15장의 논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물질 사용에 대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그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실제 내가 쓸 수 있는 용도의 재물보다 많은 것을 주심은 나로 누리라 하심도 있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라고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지기의 사무를 잘 못하던 옳지 못한 청지기는 [정리해고]의 위기에 순간에 지혜를 내었고 그것은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사고에서 빚은 죄에 대한 구상어의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마태복음 18장의 만 달란트 빚진자와 주인의 관계로 죄문제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 본문의 영적인 의미는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이들의 죄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 곧 용서하고 그들을 첫째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너그러이 용납해주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재물은 바로 이것을 탕감하여 주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편만히 증거되도록 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십의 일을 교회에 드리는 이유는 이런 삶을 살겠다는 신앙고백이자 결의 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0절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불의 한 자는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사고에서 보면, 지극히 작은 것은 바로 돈입니다. 돈에 대해서 충성스럽지 못하다면 큰 것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충성스러울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가 돈에 대해서 깨끗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법이 없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재물에 충성스럽지 못하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충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을 십의 일을 드리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은 결코 충성스런 태도가 아닙니다. 재물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십의 일을 드리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내는 것이 아깝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큰 손해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옳지 않는 청지기의 처음의 태도도 바로 이와 같은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위기를 만나고 지혜를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 땅의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노마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재물에 대해 불의하다고 단언합니다. 돈이 머무는 곳에는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돈은 곰팡이와 세균과 같아서 한자리에 장기간 머물게 되면 거기엔 필연 부패가 생깁니다. 그런데 본문은 놀랍게도 그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고 권면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지 않고, 필요한 이웃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서울 모처에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시간마다 파이프 축복론을 이야기 한다고 하더군요. 그와 같지는 않겠지만 신자는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이유도 이웃에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순절로 말미암아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유무상통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들 무리에게 나타난 역사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강제하지 않았지만, 이런 놀라운 성도의 교통이 일어났습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되다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충성해야 무엇이 있느냐 참된 것 곧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맡겨진다는 것입니다. 
12절은 재물에 대해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무엇이라고요? 남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이것은 남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내가 벌었으니 내것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의 문맥을 보면 분명 이 남의 것은 재물이요 이 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것을 하나님이 내게 맡겨 놓으셨다는 의미에서 남의 것이라 해석 될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에서 남의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질은 근본적으로 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의 필요에 대해서 쓰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우리의 필요라는 것은 욕심으로 확대재생산되지 않습니까? 그게 부패한 우리의 본성입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신앙인들은 우리의 신앙을 헤치는 7가지 치명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탐욕입니다. 욕심은 사랑을 시들게 만들고, 물질이 흘러가서 평균케 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에 반하는 신앙의 표지는 바로 청빈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 마음이 청결한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의 적절한 필요를 제외하고 이웃에게 흘러가게 할 때, 너희의 것 곧 내 것으로 내게 주신다고 말합니다. 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이지요. 이런 영적 안목이 있어야 이 본문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13절은 결론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요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다스립니까? 흘러가게 함으로 다스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내게 머물게 되면 필연 불의한 부패의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앞 절에서 말한 참된 것과 너희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지 재물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적인 메시지 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3. 결론 
앞서 이 메시지는 단순히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뿐 아니라 영적의미 곧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잃어버린 아들에 비유와 관련이 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5장의 비유를 자세히 보시면, 첫째 아들은 이 둘째 아들의 회개와 돌이킴이 달갑지 않습니다. 15장 서두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같다고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첫째 아들 곧 장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돌이킴에 우리는 주목하지만 사실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긍휼함이지요. 장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 끝, 곧 16장 1절이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로 연결되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게 핵심인데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했더라도 사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누는 삶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은 것이지요? 왜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한 끝에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하셨겠습니까? 가산을 탕진한 아들이 못마땅한 장자나 죄인과 세리들이 나아오는 것이 못마땅한 바리새인 사이의 공통점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 마음을 아는 사람의 재물에 대한 생활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실 피를 나눈 형제간이라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어떻습니까? 부모의 형편이 너무 어렵더라도 돕게되지요. 우리는 물질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빚이란 죄에 대한 유대인의 구상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빚 탕감은 죄 많은 죄인과 세리에 대한 다소간의 용납도 없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의 사용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재물을 나누는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09. 6. 6. AM 12:40 1차 원고 작성 - 밤이 너무 깊었다. 연합구역 예배에 전한 말씀을 정리하다. 
AM 8:47 2차 원고 작성 - 7시 즘 일어나 다시 컴 앞에 앉아 일부를 작성하다. 
2009. 6. 7. AM 8;54 3차 원고 작성 - 밤새 토하고 제대로 묵상하고 설교 작성할 시간이 없었다. 주일 아침에 다시 교회 나와 예배 준비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다시 일부 원고를 작성하다. 
2009. 6. 8. AM 8:55 4차 원고 작성 완료 - 일단 퇴고하다. 수정이 필요하다. 
AM 9:05 빚 탕감이란 유대적 죄관념에 대한 구상어 아이디어에 대한 묵상을 첨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