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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중심적 섬김의 특징(막 10:32-45)

자기 중심적 섬김의 특징(막 10:32-45)
노승수 목사
1. 전문맥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서에서 특히 마가복음서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수난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 고난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로 이러한 수난을 향한 발걸음 중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32절을 보면, 저희 곧 제자들이 놀라고 또 따르는 무리가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17절 이하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왔다가, 재물을 인하여 물러가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움을 묘사하시는데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 놀라서, 그럼 누가 과연 들어가겠는가? 묻자 예수께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고, 이 가르침을 듣고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2. 본문 요약
A. 본문의 구조
구조 : 세 번째 수난 예언(10:32-45) 
1. 수난 예언(10:32-34)
2. 오해(10:35-41)
3.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종의 제자도(10:42-4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당할 일 곧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에 대한 고지를 하십니다. 그것이 33-34절의 내용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총 3회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 예언이 나오고 수난예언에 이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이 등장합니다. 먼저 8장에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에 따르는 내용은 십자가의 제자도(8:27-9:29)에 관한 것입니다. 두번째가 9:30-10:16까지의 내용인데, 섬김의 제자도를 담고 있습니다. 세번째가 오늘의 본문인데 종의 제자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의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은 10:17-52까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전문맥의 부자는 부와 권력에 대한 상징입니다. 주님은 그런 것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심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자마자, 야고보와 요한이 와서 주님께 주님 나라에서의 권력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인하여 제자들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제자들을 가르치시길, 주님이 가시는 길은 종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대강입니다.
3. 본문 이해
[메시지 1](32-34)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종의 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종으로 오셨으며 그가 올라가시는 예루살렘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주님만이 걸어가신 길이 아니며 우리도 따라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문명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로서 보수적 주류 정치학을 대표해온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Samual P. Huntington)의 저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를 내어서 세간에 화재가 되었습니다. 헌팅턴이 문명권을 구분하는 1차 기준은 종교이며, 이에 따라 기독교권, 정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 힌두권 등이 설정됩니다. 이외에 라틴아메리카권, 아프리카권(비이슬람), 일본권 등도 설정됩니다. 그는""이념은 가고 그 자리를 문명이 차지한다""면서""이념의 갈등이 문명의 갈등으로 부활되고 그 중심에 기독교 서구문명 對 이슬람 및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예수님이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문명과 제자들이 소유한 세상 나라의 문명의 문명충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문명과 세속 문명의 충돌이었습니다. 오늘 그 거대한 충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속에 지금도 얼마나 많은 세속적 사고가 스며 있는지 모릅니다. 

[메시지 2](35-41)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섬김은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면적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섬기기를 원치 않고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조차 권력다툼이 일었고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럼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 인간의 자아는 바위덩어리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길 때조차도 우리의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그런 섬김이 아무리 오랜 기간 동안 계속 되도 성품의 변화도 하나님의 상주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아를 극복하지 못할 때, 영적 충만, 기쁨, 내적으로 생기는 아름다운 품성들을 열매로 거둘 수 없습니다. 
자아 중심적인 섬김의 특징은 이렀습니다. 
첫째, 섬김이 매우 의도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섬김의 대상을 선별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혹은 인정을 받을 만한 자에게만 섬김의 모습을 보입니다. 
둘째, 양의 크고 작음에 영향을 심하게 받습니다. 예컨대,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와 적게 모였을 때에 보이는 섬김의 태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인기 있는 자리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를 꺼려합니다. 
셋째, 성과와 기여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여러 섬김들이 행사 위주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고 난 후에 외적 보상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넷째, 사람들의 칭찬 인정을 기대합니다. 결과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앞서 설명드린데로 섬길 사람을 선택하는데,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선별합니다.
다섯째, 이런 사람들은 충성스럽거나 한결같지 않고 분위기와 기분에 크게 좌우됩니다. 순간적, 특별한 기회에만 기능을 발휘하는 마스크를 씁니다. 
여섯째, 무감각, 열정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고 분파가 생깁니다.
[메시지 3] (41-45) 주님의 길은 종의 제자도 였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종의 제자도입니다. 섬기는 삶은 내가 죽어지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의 의는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10:3).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추구합니다. 종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종의 길은 공방의 삶입니다. 종의 길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한 길입니다. 종의 길은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님께 인정받기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2008년 12월 3일 현산교회 수요예배 말씀